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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고향 155
충 남 예 산 李 鍾 祥
글 : 金容三 記者, 사진 : 鄭禎賢 出版寫眞部 記者
충청의 산과 물이 굼실굼실 휘돌며 빚어놓은 기름진 예산 땅과 일랑(一浪) 李鍾祥 화백의 인생은 질긴 인연의 밧줄로 칭칭 묶여있다. 누에가 뽕잎 갉아먹는 소리, 대숲이 바람에 서걱이는 소리,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춘삼이의 삶이 어우러졌던 예산 바려니(발연리)의 환등 사진같은 추억들이 李화백의 화폭 속에서 새 생명을 점지받고 벌떡벌떡 일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 젖을 배불리 먹고 누에가 뽕잎 갉아먹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낮잠을 즐겼던 고향, 엿장사해서 번 돈으로 물감을 샀다가 피나도록 종아리를 맞았던 그 고향이기에 화가의 마음이 자석처럼 고향으로 끌리는 지도 모르겠다.
할아버지의 명으로 열심히 주워 모았던 쇠붙이가 대장간의 풀무질에 의해 농기구로 태어나는 것을 보며 그는 혁명적 예술세계에 대한 모티브를 운명처럼 점지받았는지도 모른다.
동서양의 벽화와 초상화, 진경산수를 비롯해 氣와 禪의 세계를 무르녹여 힘찬 필치로 화폭에 담아내는 그의 작품세계는 전통과 현대성마저 뛰어 넘는 독특한 일가를 이루게 된다. 4遠法이라든가, 칠보벽화기법, 우리의 古地圖에서 느낄 수 있는 상형이 어우러진 야심찬 원형상(源形象) 시리즈는 한국미의 세계화에 일대 전기를 마련했다는 평을 듣는다. 덕분에 李화백은 한국 화단의 거목에서 한 걸음 나아가 세계 화단의 주목받는 존재가 됐다.
그는 끊임없는 창작열로 大作을 발표하는 현역작가이자 동양의 氣사상에 대한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학자인 동시에 서울대 미대에서 후학을 지도하는 교수를 겸하고 있다. 李화백은 오늘도 고향 예산의 추억 속에서 명징한 작품소재를 두레박으로 퍼 올린다. 『예산이 있으므로 一浪이 있고, 一浪이 있으므로 예산이 빛난다』는 말은 그다지 과장이 아닌 듯하다.
사진1. 장향선이 지나가는 바려니(발연리) 마을 앞 기찻길에서.
李화백은 유년시절 이 고향에서「풍요」와「가난」의 추억들을 함께 체험했다.
사진2. 기름진 예산땅이 배출한 걸출한 예술가 완당 김정희 선생의 고택을 오랜만
에 찾아 보았다.
사진3. 누에가 뽕잎 갉아먹는 소리, 대숲에 바람이 스치는 소리가 들리던 生家 뒷산
은 세월따라 주름이 많이 잡혔다.
사진4. 완당 선생의 고택 마루에 앉으면 예술인과 애국지사를 많이 배출한 예산땅
의 짜릿한 氣가 느껴진다.
사진5. 李화백의 그림에 자주 등장했던 소년 춘삼이(왼쪽에서 두 번째)와 40년 만에
다시 만났다.
사진6. 가뭄때면 바닥을 드러내 개구쟁이들의 놀이터가 된곤 했던 원퉁이 방죽의
둑에 모인 고향주민들.
고향 젊은이들은 일랑미술관을 예산으로 유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인연으로 맞닿은 풍요의 들녘
一浪 李鍾祥 (서울大敎授/畵家)
자랑스런 예산 땅
‘고향땅’ , ‘어머니품’ 언제 들어도 콧마루가 시큰한 말들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 두 가지를 모두 잃고 출센지 성공인지 하는 허깨비 같은 신기루의 꿈을 쫓다가 어느덧 머리에 허연 서리가 앉고 회갑 논총 준비를 서두르고 있는 제자들이 바쁜 모습들이 허허로이 먼발치로 어른거려 보이게 되었다. 이레지레 자질구레한 세상일들을 잠시나마 떨쳐버리고 무인년, 유월 초엿샛날(양력 1938년 7월 20일), 어머니가 나를 낳으시던 그날도 그렇게 지켜보고 있었을 파아란 고향하늘을 쳐다보고 있노라니 불현듯 ‘어머니’와 ‘고향’이 하나로 포개지면서 괜시리 눈물이 핑그르르 돈다.
누구나 나이 들면서 고향에 대한 귀소본능이 발동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라 하겠으나, 나는 남달리 내 고향 ‘예산’에 대한 수구초심(首丘初心)이 강한 모양이다. 그것은 아마 갓 낳았을 때 귀가 열리면서부터 호랑이로 통했던 우리 할아버지와 유학자이신 원퉁(元洞)이 작은할아버지, 그리고 화가가 되길 원하셨던 아버지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 고장 내포의 인물자랑 풍물자랑으로 지독히 쇠뇌 당해왔던 탓이 아닌가 싶다.
내 사주에 예격(藝格)이 잇다하여 자원오행, 호성오행 다 맞추어 지어주신 ‘종상(鍾祥)’이란 지금의 내 이름이 바로 작은할아버지의 작품이고 보면 예술가의 인생을 기쁜 마음으로 살아 온 나에게 참으로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완고한 집안에서 환쟁이나 딴따라가 될 이름을 짓게 내버려 둘 리가 없었으니 아버지께서 당신이 못 이룬 꿈을 자식에게 기대하며 몰래 원동 작은할아버지에게 은밀하게 부탁하게 되었다는 얘기를 다 큰 다음에 어머니께 들었다.
아버지는 예산농업을 졸업후, 수원고농이 아니면 동경유학의 꿈을 키우며 준비중에 고향에서부터 잘 아시는 7~8세 연상의 이응로 화백과 서울을 오르내리며 교유하고 계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나는 어렸을 때도 고암 이응로 화백에 대한 이야기를 아버지로부터 자주 들을 수 있었다. 20살 때 무작정 상경하던 이화백이 온양(?)에서 부호의 초상화를 너무 닮게 잘 그려줌으로서 큰돈을 마련하여 서울 갔다느니, 일본 천단그림학교에서 그를 가르칠만한 선생이 없었다느니 하는 얘기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얘기는 “응로 형이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도화지가 없어서 흙삽에 논흙을 칠해 말린 다음 숯검뎅이로 그 위에 쥐를 몇 마리 그려 놓으면 영락없는 쥐새끼라, 장난 궂은 친구들이 그 삽을 우물길에 놓고 숨어서 보노라면 무심코 물동이를 이고 가던 동네 아낙들이 살아있는 쥐새끼로 오인하고 깜짝 놀라 물동이를 깨먹고 달아났다”는 일화였다. 아마 그때 모르긴 해도 흙삽 위에 개구리, 뱀 같은 파충류도 그렸음직 하다. 어쨌던 나는 1988년 7월에 세계 에스페란토 국제대회 참가차 자그레브에 갔다 오던 길에 동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파리에 칩거하고 계신 고암 이응로 화백의 작업실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옛날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이런 일화를 말씀 드렸더니 멋쩍게 웃으시며 “아버지도, 그런 일들도 다 기억이 난다”고 말씀하시며 “고향에 가고 싶다”고 눈시울을 붉히셨다. 나는 곧바로 귀국하여 당장 철거위기에 처해있던 이응로 화백의 덕산 수덕여관과 암각화 두 점을 지방 문화재로 만들어 보존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그 일을 착수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6개월 뒤, 그렇게도 원하시던 호암미술관 초대 귀국전에 오시지 못하고 1989년 1월 10일 파리 보인병원에서 심장마비로 끝내 돌아가심으로서 그때 파리에서 찍은 나와의 사진이 마지막 모습이 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7년여의 긴 세월동안 심대평 충남지사와 권오창 군수, 그리고 미망인 박인경 여사와 유족들 등 많은 분들의 수고로 수덕여관과 암각화가 지방문화재로 지정됨으로써 영구 보존이 가능하게 되었다.
‘예산 가서는 옷 잘 입는 체 하지 말고 홍성 가서는 말 잘 하는 체 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조선 말기에 예덕 상무사를 본거지로 한 보부상이 있으면서 내포지역의 충남 서부지역 상권을 장악했던 곳이 예산이다. 한국에서 두 번째로 민간은행인 호서은행이 예산 군청 앞에 세워져 어렸을 때 퍽이나 멋지고 엄청나게 컸던 건물로 기억 속에 남아있다. 그만큼 예산 땅은 기름지고 드넓은 소들광문 평야를 끼고 동쪽에는 차령, 서북에 가야산맥이 팔을 벌려 안아 주고 그 앞으로 금마천, 무한천의 젖줄이 삽교천으로 흘러들면서 풍요의 지평을 적셔준다. 문물이 풍부하니 삶의 질이 높고 풍수가 유순하니 인걸이 많은 터라 우선 나의 직계이신 선조때 8대 문장가인 아계 이산해를 비롯하여 <전원사시가>를 남긴 선석 신계영, <요로원야화기(要路阮夜話記)>의 동암 박두세를 비롯 <화전별곡>의 시가를 남기고 종횡의 서체를 배워 인수체(仁壽體)를 창시하여 예향의 서두를 장식한 자암 김구와 「세한도」를 남기고 전라도 남화의 시조인 허소치를 가르치며 예술의 최고경지에 이른 추사체를 완성한 완당 김정희, 나라를 위해 초개처럼 목숨을 던진 최익현, 윤봉길, 또 송만공 등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로 예술, 애국, 충효로 이름이 빛난 인걸이 많이 배출된 고장임을 어려서부터 어르신네들에게 익히 들어 은근히 자랑 삼아왔었다.
어쨌던 나는 내가 태어난 고향 땅 예산에 대한 남다른 애착과 사랑이 있다. 내 고향 예산은 나를 세상에 낳아 주었고, 6․25 전란 속에서 나를 보듬어 주었으며 이제 일랑(一浪) 벽화미술관(壁畵美術館) 유치 2만명 서명운동으로 나를 다시 불러주고 있지 않은가. 나는 그 동안 내 고향 예산을 짝사랑해왔다. 틈만 나면 글도 쓰고 그림도 그렸다.
<소들광문>, <소낙비>, <덕산장날>, <충청도 아줌마>, <어머니의 눈물>, <고향의 여름> 등 고향에 대한 적지 않은 글들을 써 왔다. 글뿐만이 아니다. 그림에서도 고향을 소재로 한 「춘삼이」시리즈, 「덕산장날」, 「독짓는 집」, 「속신」, 「원형상 90078-고향 땅」, 「원형상 89014-향리」, 「원형상 95094-근원의 땅」, 「원형상 91124-마상골」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작품들을 그려왔고 또 생명이 다 하는 날까지 이런 근원의 회귀에 대한 작업은 계속 될 것이다.
바려니(발연리:勃然里) 생가
“엄마 놀다 왔어. 젖 줘” 누에치기에 여념이 없는 엄마를 졸라 젖을 얻어먹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기만 하다. 그도 그럴 것이 막내 티를 내노라고 다섯 살이 넘도록 엄마 젖을 먹고 자랐으니 그때의 기억들이 생생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더구나 그 당시에 나는 모유를 늦도록 먹은 탓도 있겠으나 홍성에서 한의사 개업을 하고 계셨던 외조부의 사랑으로 온갖 보약을 혼자 다 받아먹은 까닭에 보기 드문 우량아였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유아동 우량아대회에 출전하여 일본 아이들을 물리치고 그해 우량아로 뽑힌 것이 생애 최초의 수상경력이 된 셈이다. 환갑이 다된 요즘도 내가 하는 작업량을 지켜 본 사람들은 ‘25시의 사나이’니 ‘체질의 사나이’니 하며 건강을 타고났다고 한다. 아마도 이런 저력은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체질과 예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덕분이 아닌가 싶다.
내가 어렸을 때 기억으로는 발연리(勃然里)를 ‘바려니’라고 쉽게 발음했었는데 이 점은 지금도 여전하여 고향 냄새를 물씬 풍기게 하고 있다. 이 집은 넓고 평평한 채마 밭 위에 새로 잘 지었는데 네모반듯하게 ㅁ자로 돌담을 쌓고 솟을대문과 담장에는 조선기와를 올렸으나 새로 지은 집에는 초기를 올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 지주셨던 할아버지께서 해마다 쏟아져 나오는 볏짚을 이용하기 위해서 였다고 들었다. 그래서인지 우리 집 지붕은 언제나 노란 색을 띠고 있었고 지붕의 두께가 겹겹이 시루떡 엎어놓은 것처럼 두꺼웠다. 일꾼들은 가을걷이가 끝날 무렵이면 해마다 어김없이 타작마당에서 긴 지네발 같은 이엉을 엮는 바쁜 일손을 움직였고 집안은 온통 잔치 분위기로 풍요로웠다. 여느 기와집보다도 훨씬 굵은 목재로 지어진 이 집이 초가를 고집한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 집은 한 울타리 안에 앞뒤에 두 채의 집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뒷채는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본래부터 기거하시던 평범한 농기 주택이었으나 앞채는 심미안이 있으셨던 아버지께서 직접 설계하시고 또 많은 돈을 들여 유별나게 지으신 집이라고 들었다. 내 키만큼이나 큰 라디오와 사냥개가 나팔 앞에 쪼그리고 앉은 그림이 그려진 유성기, 독일제라고 알고 있는 쌍발 엽총등과 집 구경한다고 방문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또 이들을 흥미롭게 하는 것은 동물원과 식물원을 방불케 하는 각종 희귀 화초와 수석과 애완 동물들을 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좀 커서 들은 얘긴데 우리가 원래 삼형제였다가 맨 큰형이 3살 땐가 마당에 풀어놓은 거위에 놀라 경기로 앓다가 죽었다고 했다. 그런데도 그 후로 낳은 우리 형제를 한 마당에서 키우시며 그때 그 거위를 그대로 기르셨으니 아버지의 고집과 취미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이 집의 뒷편에는 대나무 밭이 울창해서 낮에도 컴컴하고 무서웠다. 나는 할머니와 대숲이 내다보이도록 명함 크기 만한 유리 조각을 붙여놓은 북창가에 앉아서 할머니로부터 한국형의 의리있고 인정 많은 호랑이 얘기를 많이 들었다. 밤에는 대숲까지 내려와서 담 너머로 기웃거리는 금오산 호랑이의 파랑 눈빛도 보았던 것 같다. 원래 대나무는 미풍에도 잎끼리 서로 스치면서 스산하고 맑은 퉁소 소리를 낸다. 사람들은 댓줄기의 곧음은 볼 줄 알면서 댓잎 소리의 곧음은 듣지 못한다. 마음을 비우고 곧게 살면 끝내 곧은 소리를 낼 수 있는 그림을 그릴 것이라고 믿고 지금도 중계동 화실 안마당에 10여평이나 되는 대나무 밭을 재산목록 1호로 애지중지 하고 있는 것도 알고 보면 다 어릴 때 들은 대밭 소리가 그립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나는 문풍지 소리와 솔바람 소리와 대금의 새는 듯한 애절한 소리는 모두 이 댓바람 소리와 통하며 절개 높은 선비의 카랑카랑한 치음과도 하나였음을 40년, 묵죽을 그려본 연후에야 겨우 알게 되었다. 예로부터 곧은 대나무를 집 뒤 북쪽에 밀식하는 뜻이 호환을 막고 산짐승의 접근을 소리내어 미리 알림으로서 가축을 보호하는 천연의 세콤장치였음을 생각하니 실용적인 면에서도 조상들의 지혜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때 할머니는 나에게만은 생선류를 빼고는 절대로 네발 달린 작은 잡고기를 입에도 못 대게 하셨다. 공교롭게 우리 집은 부모와 형이 모두 쥐띠고 나만 호랑이 띠다.
할머니 말씀은 호랑이띠는 강하니까 닭이나 개나 토끼, 꿩 같은 약한 짐승을 해쳐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미신 같은 이런 고집불통의 할머니 육아법이 잠재적으로 작용하여 오늘날까지도 나는 작은 잡고기를 먹지 못하게 되었다. 할머니의 본 뜻은 고기를 먹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약자 편에서 설 수 있는 어짊과 용기를 갖으라는 것이었을진대 뜻을 잃고 형식만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아온 날들을 뒤돌아본다.
뽕 갉아먹는 소리
‘바려니’집은 유난히도 넓은 대청마루가 높은 누마루를 사이에 두고 ㄱ자로 집을 감싸고 있었다. 건너방과 사랑방이 대청마루와 툇마루까지 연 이어져있어 어린 나에게는 학교 강당처럼 크게 느껴졌던 공간이었다. 그러나 그 큰방은 누에 철이 되면 양잠 선반을 방안 가득 드려놓고 어머니는 누에 기르는 일에 전념하셨다. 대문 앞에 너른 채마밭이 온통 뽕나무밭이었다. 일하는 아낙네들이 종일토록 따 들인 뽕 잎사귀를 아파트처럼 겹겹이 쌓여진 선반 위에 골고루 나누어주는 일에 숨돌릴 틈도 없었을 것이다. 젖 달라고 보채는 아들에게 “놀다 오면 젖 준다”며 문 밖으로 내보내실 때면 나는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놀기보다는 벌어진 대문 사이로 어머니를 지켜보다가 조금이라도 틈이 생기면 냉큼 뛰어들어가 “엄마, 놀다 왔어, 젖 줘”하면서 엄마 품으로 기어들곤 하였다. 나는 막내둥이의 사랑을 흠뻑 받으면서 늦게까지 모유를 배불리 먹고는 누에치는 방에 드러누워 뽕 갉아먹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낮잠 잘 때가 많았다. 한없이 높은 천장의 도배 무늬와 새끼 손가락 만한 누에 벌레들이 고개를 내저으며 그리는 동그라미가 아스라히 겹쳐지면서 깊은 잠에 빠져들곤 하였다.
동양화론에 ‘화선지에 먹물이 스며드는 소리가 마치 누에가 뽕잎을 갉아먹는 소리처럼 들려오거든 너는 비로소 그림에 입문했음을 알라’고 하였다. 붓 잡은지 20여년이 지나도록 아무리 조용한 곳에서 그림을 그리고 귀를 바짝 드려대도 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자동차 소음으로 시끄러운 낙성대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나는 내 붓질 속에서 소나기 퍼붓는 소리를 들었다. 이 무슨 환청인가. 다시 운필을 해보았다. 똑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틀림없이 화선지에 먹물이 번지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분명 내가 다섯 살 때 누에치던 방에서 잠들기 전에 자장가처럼 들려오던 누에가 뽕 갉아먹는 소리, 바로 그 소리였다. 소들광문 넓은 들판을 가로질러오던 먼발치의 소낙비 소리와도 흡사했다. 실로 붓을 들고 살아온지 29해 만에 옛 화가들이 이르는 말뜻을 터득할 수 있었다. 그 소리는 가슴으로만이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그래서 주변의 소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의 천진함으로 돌아갔을 때 들을 수 있는 신명의 음성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내 작품 속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전원적 서정성과 향토적 흙 냄새는 모두 이때부터 터잡기 시작한 자연과의 친화력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뽕밭에 나가 종일토록 오이를 따먹던 일, 방금 쩌낸 번데기를 바가지로 퍼내다가 동네 아이들과 나누어 먹던 일, 산등성이 넘어 제사공장 가는 길목 용바위 둠벙에서 미역감자고 꼬셔 내던 그때 친구 손금남(전 대술면장)이의 모습들이 ‘바려니’소리만 들어도 필름처럼 연이어 돌아간다.
원퉁이 방죽
집에서 200~300m, 금오산 말무덤 골짜기로 오르면 그리 넓지 않은 방죽이 나온다. 방죽 뚝방에 오르면 예당평야(소들광문)가 시원하게 한눈에 들어온다. 발아래 평화로운 동네가 펼쳐있고 왼쪽으로 나즈막한 산등성엔 대단위 사과밭이 연이어지고 뽕나무 밭 넘어 문전옥답과 신작로 사이에 기찻길이 가로놓여져 있다. 해질녘에 석양빛을 받으며 긴 여운을 남기고 사라져 가는 객차의 뒷모습에서 동심 속에서도 막연하나마 넓은 세상에 대한 꿈을 키우면서 자랐다.
“한여름 가뭄에 냇물이 마르면 우리들의 놀이터도 옮겨지게 마련이다. 한참 가물어 냇바닥에 이끼마저 타버리고 봉천 다랭이 반달 논에 거북금이 가기 시작하면 원퉁이 방죽 물도 개흙바닥 밑으로 자지러든다. 그래서 드러난 방죽 밑창의 새까만 진흙바닥은 하늘을 쳐다보며 한숨짓는 어른들의 심중은 아랑곳 하지 않고 마냥 철딱서니 없는 개구장이들의 천국이 되어버린다. 개흙바닥에 접시물만큼 마지막 남은 흙탕물 속에 버둥대는 미꾸라지 잡기에 신바람이 나기도 하려니와 두 눈만 빠끔히 뚫어 놓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 몸에 개흙으로 맥질을 한 다음에 불볕에 달구어진 너럭바위에 기어올라 네 날개를 벌리고 벌렁 나자빠져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으면 개흙이 마르면서 살갗을 옥죄어주는 듯한 묘한 쾌감을 맛보는 일광욕법도 일품이 아닐 수 없다. 흡사 <몬도가네> 영화에나 나오는 깜둥이 여인들의 말똥 화장법과도 같은 개흙 마사지를 실컷 즐기면서 진종일 뒹굴며 시간가는 줄을 모른다. 이렇게 온몸에 맥질한 새까만 진흙이 쇠딱지처럼 희뿌옇게 말라붙게 되면 조심스레 한 조각씩 딱지를 뜯어내기 시작한다. 이때 흙 딱지 속에 붙은 솜털이 뽑혀 나가는 알싸한 촉감은, 마치 언젠가 읍내 병원에서 예방주사를 맞을 때 예쁘게 생긴 간호원이 알콜에 적신 솜을 핀셋에 집어들고 내 팔뚝 위를 문질러 댈 때 처음으로 느꼈던 그 알싸한 감촉과 신통하게도 닮은 거라고 생각했었다. 지금도 나는 몸에 붙었던 반창고를 뜯어 낼 때면 어린 시절에 느꼈던 그 싸-한 감촉이 되살아나곤 한다…”고 고향에서의 유년기 추억을 쓴 적이 있다.
호랑이 할아버지
해방 직후 농지개혁으로 가세가 기울었으나 내가 ‘바려니’에서 유년기를 보낼 는 호랑이 할아버지로 통했고 마치 ‘황금박쥐’영화에 출연하는 주인공처럼 머리에는 털모자, 손에는 멋쟁이 단장에 새까만 망또를 걸치고 전국을 유람하셨던 신식 할아버지셨다. 조부께서는 부농이셨으나 집안에는 매우 엄격하시고 근검하시어 수챗구멍으로 밥 한 톨만 나가도 대노하셨다. 늘 사랑방에 좌정하시어 시조 읊기를 즐기셨는데 아버지의 그림 공부는 철저히 감시하셨던 것으로 안다.
한 번은 당진에서 손님이 무엇을 사 들고 와서 “어르신, 이걸 푸욱 고아 ‘드시라고’ 가져 왔구먼유”하면서 족발 한 짝을 내놓는데 끝내 돌려보내시고 나서 가족을 불러 훈계하시는 말씀이 “손 윗분에게는 ‘잡수시라’고 할 것이지 절대로 ‘드시라’고 해서는 아니 된다. ‘들라’는 말은 나이 어린 상전이 들밥 먹는 자리에서 나이 많은 일꾼들에게 먹으라고 하대 할 수가 없으니 수저와 밥그릇을 들고 먹기 시작하라는 명령을 ‘자아! 드시게나’라고 하는 법이니 너희는 조심하여 집안 망신시키는 일없도록 하라”고 당부하셨던 일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 TV에서는 ‘드시라’는 말이 표준어가 되어 버렸다. 학교에서도 제자들은 회식 때마다 스승에게 ‘드세요’를 연발하며 예의바른 표정을 짓는다. 오히려 내가 완고하거나 아니면 예산 ‘바려니’때부터 할아버지에게 교육을 잘못 받은 것은 아닌지 영 혼란스럽기만 하다.
또 할아버지는 담력이 대단하셨던 모양이다. 군청이나 장터에 질러가기 위해 동네 사람들은 과수원과 공동묘지를 넘어 다니는 지름길을 많이 이용했었다. 그런데 폭설이 내린 동짓달에 밤만 되면 고갯마루 턱의 서낭당 고목나무에서 귀신이 손을 흔들며 유혹하는 것을 여러 사람이 목격한 이후로 ‘바려니’ 사람들은 밤에 출입도 못하고 멀리 역 앞을 돌아다니는 불편을 겪게 되었다. 참다 못한 할아버지께서 아들 며느리가 다 말리는데도 자정이 넘은 시각에 장터에 볼일이 있다 하시며 혼자서 외출하셨다. 물론 큰길 쪽으로 내려가시는 것을 확인하고 식구들은 안심을 했다. 그런데 새벽 2시가 넘어도 돌아오시지 않았다. 걱정이 되어 식구들이 대문밖에 막 나가려는데 할아버지께서 떡갈잎이 한 장 단단히 붙어있는 고목나무 한 가지를 꺾어 들고 돌아오셨다. 아침에 동네 사람들을 사랑방에 다 모으시고 설명회를 갖으신 이후로 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편안하게 이용하게 되었다.
해방 직후, 우리가 갈월동에서 살 때도 여전히 멋쟁이 까만 망또에 지팡이를 들으신 할아버지께서 상경하시어 몇 주일씩 묶으시면서 우리 형제에게 명심보감과 소학을 가르쳐 주셨다. 그나마 지금의 내 한문 실력은 이때 맛들여진 덕분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할아버지에게 딱 질색인 것이 하나 있었다. 당시에는 구두 밑창에 쇠 징을 박고 다닌 때라, 길바닥에는 구두징이 많이 흩어져 있었다. 한문 공부가 끝나면 으례히 나는 할아버지를 따라 길바닥을 헤매고 다녀야 했다. 할아버지의 지팡이 끝이 가르치는 곳은 영락없이 다 닳은 구두징이 아니면 녹슬은 쇠붙이가 놓여있었다. 나는 허리를 굽혀 그것들을 열심히 주워서 할아버지의 허리춤에 매단 주머니 안에 넣었다. 당시에는 철이 귀해서 사과 상자에 가득 담아 마루 밑에 밀어둔 이 고철을 한 주먹만 바꿔도 팔뚝만한 엿가락을 툭 잘라 주었을 때다. 그러나 무심한 할아버지는 절대로 바꿈질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언젠가는 덥수룩한 청년을 데리고 오셔서 그 알량하게 모아 두었던 고철들을 모두 실어가게 하시지 않겠니. 그럴 줄 알았으면 한 웅큼 퍼내다가 엿이라도 바꿔 먹었을 텐데…. 그 후로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한 달쯤 지났을까, 하루는 시골에서 할아버지가 상경하시는 길로 나를 앞세우시더니 서울운동장뒤편에 어느 초라한 대장간으로 데리고 가시는 거야. 그런데 이게 웬 일이나? 한달 전에 집에 와서 내가 모았던 고철을 몽땅 싣고 가버린 그 청년이 어두껌껌한 구석에서 풀무질을 하다가 말고 할아버지를 보더니 이마에 흐르는 구슬땀을 훔쳐내며 반갑게 맞이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때 영감님이 도와주시지 않았더라면 쇠가 없어서 가게문을 닫을뻔 했는데 덕분에 이렇게 많은 농기구를 만들게 되었습니다”라며 연신 굽실거리는 것이었다. 그러자 할아버지께서는 “자네가 고맙다고 인사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바로 여기 서있는 내 손주 녀석일세”하시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는 게 아니겠니. 나는 그 호랑이 할아버지가 그렇게 인지하고 부드러운 분이신지 정말 몰랐었다. 그리고 내가 길바닥에 엎드려 아스팔트에 박힌 구두징을 파내며 모은 고철 부스러기가 저렇게 훌륭한 농기구가 되고 쓸모 있는 연장으로 변해있는 것을 보니 마냥 신이 나서 돌아오는 길에는 할아버지의 지팡이가 가르치기도 전에 더 많은 구두징을 주어 모으며 돌아왔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빠는 그 이후로 커서 훌륭한 화가가 되면 그런 대장간을 꼭 한 번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늘상 해왔단다.…’ (유나에게 1988 이종상 수필집 <솔바람 먹내음> 중에서)
나는 4․19와 5․16을 겪으면서 미술대학 3학년이 되었다. 국전 출품 자격이 비로소 주어진 것이다. 당시 국전에 현실과 동떨어진 안일한 관념 취향의 서정적 소재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에 강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 고학 중에 있던 나는 노동자의 땀흘림이 얼마나 고귀한가를 그려야 했고, 우리의 피흘림으로 이룩한 4월의 학생혁명이 하루아침에 군사정권으로 넘어간 것을 4․19세대가 졸업하기 전에 다시 바로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쇠는 식기 전에 때려야 한다. 4월의 열기가 식기 전에 나는 무엇인가를 해야 했다. 혁명의 강한 메시지를 국전이라는 게시판을 이용하여 우리 또래들에게 보내고 싶었다. 문득 그 옛날 할아버지와 찾아갔던 대장간이 생각났다. 그때 거기서 만났던 그 젊은이가 내 나이 또래 였었다. 대장간 만큼 혁명의 이미지가 은유된 소재가 없었다. 못쓰게 된 것을 두들겨 바로 잡는 대장간은 그대로 혁명의 상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두 4․19세대들만 등장하는 대장간을 그리게 되었는데 뜻밖에 특선이 되었고 혁명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은 실패로 돌아가 버렸다. 그 대신 연이어 노동계층만을 그린다하여 사회주의 작가로 투서까지 받고 기관원에 의해 흑석동 화실을 수색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서울 삼광 초등학교 미술반에서
1943년 아버지의 전근으로 서산 동문리로 이사한 후 그 곳에서 유치원을 다니게 되었다. 이때 기억나는 친구로는 변웅전이 있다. 해방을 맞아 우리 식구는 모두 아버지의 사업체(삼천리 전구)가 있는 서울로 이사온다. 갈월동에 넓은 적산 가옥을 불하 받아 살았다. 여기서 가까운 삼광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한 나는 해방교육 1세대가 되었다. 왜정시대 쓰던 일본 도화책을 그대로 내주며 임화를 그리게 하는 첫 시간부터 담임과 악연을 맺는다. 그것은 내 그림이 믿을 수 없이 잘 그렸으니 그려준 상급생을 대라는 것이었다. 이때 구세주처럼 나타나는 사람이 곰보 얼굴에 곱슬머리에다가 베토벤같이 생긴 조봉현 선생님이셨다. 이 분은 태평양미술학교 출신으로 나중에 문교부 미술교과서 편수관까지 지내셨다. 어찌됐든 이 분의 눈에 들어 담임의 손에서 벗어나면서 5, 6학년 상급생들과 미술부 활동이 시작되었다. 1학년인 나에게 명함 크기 만한 베토벤, 모차르트, 쇼팽 등의 흑백 사진을 내 주면서 모조 전지에 연필로 초상을 확대해 오라는 것이었다. 이 일이 무사히 통과되어 복도에는 온통 내 그림이 걸리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계속 각종 포스터는 물론이고 무대장치까지 저학년인 내가 도맡아 했다.
이러 저러 6학년이 되었고, 9월 졸업을 앞두고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가세가 급전직하한데다가 설상가상으로 6․25 동란마저 발발하고 보니 당시 경복중학교에 다니던 형과 살림밖에 아무것도 모르시던 어머니와 다시 고향 땅을 향해 철길을 따라 끝없는 고행의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다. 초등학교도 졸업을 못했지만 지금도 기억에 남는 친구는 교장선생님의 아들이었고 웃을 때면 양볼에 보조개가 깊이 패여 인상적이며 공부를 썩 잘했던 정근모 한 사람 뿐이다.
‘춘삼이 시리즈’의 베룩부리(丹橋里)
삽다리 큰집에서 우리 세모자는 피난살이의 서막이 오른다. 어머니는 광주리 장사를 시작하셨다. 곱게 살림만 하시던 어머니가 머리에 광주리를 이고 수십 수백리 길을 온종일 헤매고 다니시는 것을 보고 있는 어린 가슴은 한없이 슬프기만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자식이 초등학교도 못 마쳤으니 사촌들이 쓰다 버린 교과서를 얻어다가 공부시키는 것이 큰 바램이셨다. 자식들이 안 보이는 동구밖에 나가서는 고무신이 달을 세라 광주리에 이고 맨발로 논길을 걸으셨다. 나는 이런 와중에서도 그림이 그리고 싶었다. 끼니가 간데없는 극한 상황에서 참으로 염치없는 욕심이었다. 큰길가 문방구 가게에서 말라붙은 수채물감 한 곽을 발견할 수 있었다. 누가 사가면 어쩌나 싶어 하릴없이 매일 확인해 보았다. 그러다가 결심을 했다.
‘…며칠을 궁리한 끝에 나도 돈을 벌어야 겠다는 결심이 섰다. 순전히 물감을 살 돈을 마련해 보고 싶은 일념에서 생긴 욕망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속마음을 차마 털어놓지 못한 채 나도 장사를 하게 해 달라고 조르니, 어머니께서는 측은해 하시면서도 장하다는 표정을 지으시며, 그 알량한 광주리 장사 밑천에서 몇 푼을 떼어 엿도가집으로 가셨다. 엿목판에 온통 밀가루 투성이인 몇 가락의 흰엿과 몇 조각의 갱엿을 담아 가지고 장터 어귀에 있는 문방구상 추녀 밑에 자리를 잡았다. 그 곳은 내가 매일 한차례씩 지나면서 맥주 뚜껑 같은 함석 따가리에 말라붙어 먼지가 뽀얗게 쌓인 물감을 부러운 시선으로 늘상 구경하던 곳이었다. …중략… 행여 누가 냉큼 사가지나 않을까 싶어 엿목판과 물감을 번갈아 지켜보며 열심히 장사했다. 어쨌던 그날이 장날이어서 그랬던지 파장이 될 무렵쯤 해서 귀가하는 장꾼들에게 엿을 몽땅 떨이 할 정도로 첫 장사가 잘 되었다. 빈 엿목판을 들고 구겨진 지폐 조각을 헤아리며 수없이 망설이던 나는 나도 모르게 문방구 안으로 들어서고 말았다. 그렇게도 갖고 싶었던 저 물감, 크고 작은 붓, 두툼한 도화지, 굵직한 도화연필과 팔레트며 물통들이 온통 나의 시야를 덮쳐오고 있었다. 닥치는 대로 사서 들고 보니 장사밑천까지도 다 털어야만 했다. 순간 대노하실 어머님의 얼굴이 머리에 떠올랐다. 형의 얼굴이 어머니의 얼굴 위로 겹쳐졌다. 하지만 이 물건들을 다시는 내 놓을 수 없다는 비장한 결의 같은 것이 생겨났다. 순간적으로 묘안이 떠올랐다. 우선 빈 엿목판을 가게 주인에게 맡겨놓고 화구만 챙겨 회푸대종이에 싸가지고 나왔다. 텅빈 우시장의 말뚝 사이를 빠져 나와 어둠이 깔린 대문 밖에서 집안 동정을 살폈다. 인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문을 살짝 빠져 들어가 마루 밑에 흙을 대강 파내고 화구봉투를 통채로 묻어 버린 다음 까치발을 서서 건너방으로 들어갔다. 텅빈 방에서 이불을 머리 위까지 뒤집어쓰고 벌렁 누워 버렸다. 모두가 나의 각본대로 연극을 꾸미고 있는 것이다. 밤이 깊어서야 돌아오신 어머니와 형 앞에서 첫 장사의 결산보고 대신 불량배들에게 끌려갔다가 겨우 몸만 빠져 나왔노라고 둘러댔다. 어른 앞에서 이토록 당돌한 거짓말을 해 대는 어린 가슴은 마구 두 방망이질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야속하리 만치 끝내 추궁하시며 “가난한 것은 죄가 될 수 없으나 정직하지 못한 것은 큰 죄악이다. 너로 하여금 애비없는 호래자식이라는 소리를 듣게 하고 싶지 않기에 이 어미는 광주리 장사보다 더한 고생이라도 달게 받으려 한다.”고 간곡히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 나는 더 이상 어머니를 속일 수가 없어서 사실대로 말씀드린 후 마루 밑에 숨겨둔 봉지를 꺼내다 어머님 앞에 보여드렸다. 어머님은 한참을 아무말 없이 그것들을 내려다보시더니 회초리를 꺾어오라고 하신다. 애미를 속인 진실되지 못한 마음을 매질하는 것이라며 종아리에 핏발이 배어 나올 때까지 회초리를 놓지 않으신다. 그러나 회초리를 들고 계신 어머니의 눈자위엔 한없이 이슬이 맺혀져 있음을 나는 훔쳐볼 수가 있었다. 이튿날 어머니께서는 더 좋은 화구를 한 보따리 안고 오셨다. 그리고 세모자는 부둥켜안고 한없이 한없이 울었다. “정직하지 못한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면 정직하지 못한 그림밖에 그릴 수 없다”하시던 어머님의 교훈과 훌륭한 예술가가 되라고 어린 자식 앞에서 흘려주신 그 값진 어머님의 눈물이 지금도 화판 앞에 설 때마다 나의 가슴을 뜨겁게 적셔 오곤 한다. 어머님의 뜨거운 눈물의 뜻을 알게 되는 날 예술의 참뜻도 알게 될 것이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어머님의 눈물 1977 이종상 수필집 <솔바람 먹내음> 중에서)
그렇게도 사림이 되고 화가가 되라고 일러주시던 어머니께서도 아들의 사람됨을 끝내 확인하지 못하신 채로 이제 주님 나라에 가시어 불효의 죄를 영영 용서받지 못하게 되었다.
삽다리 생활을 청산하고 세모자는 예산 읍내로 들어왔다. 어머님의 자존심을 대단한 것이어서 비록 시림이고개, 돌고개를 넘나들면서 나무장사를 해먹고 살 지언정 공연히 일가붙이나 아버지 친구집 찾아가는 것을 죽기보다 꺼려했다. 어머니의 생각은 간단했다. 작은 신세라도 은혜를 입었거든 평생을 잊지 말고 갚을 수 있거든 남의 도움을 청하라는 것이었다. 말이 그렇지 사실 그 점에 대해서는 아무도 장담할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러니 결론은 뻔하다. 자립정신을 기르는 것이 초장의 방법이란 얘기다. 이런 어머니의 교육이 나의 결벽증과 상승작용을 하여 지나칠 정도로 자존심을 지키고자 하는 고집이 강한 게 세상살이를 몹시 피곤하게 할 때가 많다. 벼룩뿌리에는 나보다 두 서너살 아래인 춘삼(최근에 찾아보니 춘선이였다)이라는 순박한 아이가 있었다. 맨발로 밤송이를 발라내고 지네 잡고 뱀 잡으면서 야생초처럼 자연 속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전형적인 시골아이였다. 나는 온갖 시골 생활의 지혜를 춘선이에게서 배웠다. 내 그림에 이 또래 아이들이 많이 등장하는 것도 다 이때 받은 인상이 깊기 때문이다. 나는 이 중에서도 춘선이를 소재로 한 춘삼이 시리즈 작품을 참 많이 그렸다.
학업을 위하여
피난 생활이 끝날 무렵 대전으로 이주하여 그리던 중학교에 편입학 하게 됨으로써 학업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졸업장이 없는 나를 받아준 것은 불교재단의 보문중학교였다. 이 곳에서 미술부 활동은 물론 문예창작부에서 이용우 선배와 문예활동을 시작하여 표어 당선, 창작시 입상 등의 경험을 쌓았다. 두 번의 수필집을 낼 수 있는 용기가 이런 인연 때문인 것 같다. 그보다도 어머님이 천주교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불교에 가까운 환경을 조성하며 살아왔다. 원효대사의 표준영정을 그렸고, 동국대학에 출강하다가 이것이 인연이 되어 대학원 철학과 석․박사과정까지 여기서 끝내게 되었다. 이런 인연은 이미 보문중학교 때부터 시작되었다. 내가 본격적으로 미술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대전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부터였다.
내가 입학하면서 그 동안 없었던 미술시간이 부활되었고 미술교사 김철호 선생님도 부임하셨다. 당시 <일인일기> 교육을 권장했던 박관수 박사가 막 교장으로 취임했기 때문이었다. 이 분은 뒤에 박정희 대통령의 마지막 은사로 반공연맹 이사장을 맡으셨고 주례까지 서 주셨다. 나는 미술부 활동과 학업에 열중, 그 동안 공부하고 싶었던 소원을 마음껏 풀 수가 있었다. 2학년때 루불동인회를 만들어 전시활동을 시작했으며, 그 당시 <청엽>이라는 석판화집까지 출판하기도 했다. 개교이래 처음 열리는 교내전에는 늘 미술에 관심을 보여주신 교장선생님의 흉상을 제작했다. 조소 흙을 구할 수 없어 미술교사와 함께 유성까지 원정가서 논흙을 파오다가 봉변까지 당했었다. 교장선생님은 늘 ‘취미가 직업이 될 수 있는 사회’를 역설하셨다. 그 당시 교장선생님은 서독에 미술사 공부를 위해 유학 보냈던 딸 자랑을 하셨다. 그 따님이 바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을 역임하셨던 평론가 박래경 선생이다. 이 분이 고2때 만든 교장선생님의 흉상을 부산 오빠 집에서 최근에 찾아내어 가장 초기작품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미술부 활동은 왕성했고 모두 성적이 우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만류를 뿌리친 채 미술대학 진학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지금 단일 고등학교로서 가장 많은 화가군을 이루는 성과를 갖게 되었다. 지금 이화여대 학장인 유희영 교수, 세계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는 파리의 김인중 신부, 서울대학교에 같이 근무하고 있는 하동철 교수,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장이었던 이철주 교수가 모두 같은 미술부원이었다. 그런 미술실에서 나의 운명을 좌우하는 일대 사건이 아주 은밀하고 조용하게 벌어졌다. 남들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그 일이 나에게는 엄청난 인연을 낳게 했다. 오늘에 내가 존재할 수 있었던 모든 것들이 그런 우연의 계기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같은 반에 김동현이라는 쌍둥이 형제가 있었다. 미술실에 찾아오기만 하면 서울예술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성순득이라는 조카 자랑을 침이 마르도록 하고 나갔다. 자기 집안에도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이 있노라고 뻐겨보는 아동심리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았다. 잠재의식 속에 깊숙이 자리잡은 그 친구의 조카 이름이 2년이 지난 다음 내가 서울대 미대 1학년때 우리 학교 주최의 전국 미술실기대회 응모요강을 각 학교 교장에게 발송하는 일을 하고 있던 자리에서 번개처럼 떠오르는 것이었다. 사기를 북돋아주고 싶은 생각이 났다. 그러나 혹시 남들에게 오해를 사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영숙이라는 가명으로 교장에게나 보내는 공문을 학생에게 보냈다. 며칠후 접수된 서류에서 이 학생의 인물 사진을 제일 먼저 훔쳐보고는 못내 흐뭇한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인연으로 해서 우리는 5년 연애 끝에 결혼을 했고 결혼 30주년을 넘기면서 하느님이 맺어주신 귀한 인연에 감사하며 아들, 딸, 사위와 함께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月刊朝鮮> 9月號 通卷 210號 502page-509page
作家의 故鄕 155 忠南禮山 ‘因緣으로 맞닿은 豊饒의 들녘’
一浪 李鍾祥 韓國畵家 (글:李鍾祥 寄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