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호타루(ほたる)
강 중 구
‘가미카제(神風) 유서 세계 기록유산 신청.
일본 가고시마현 지란특공평화회관(知覽特攻平和會館)이 태평양전쟁 말기 가미카제자살특공대로 동원되었던 대원들의 유서 등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신청한다고 2014년 2월 5일 일본 NHK가 보도했다….’
가고시마현 미나미큐슈(南九州) 지란특공평화회관에는 자살특공대원 1,026명의 유서와 사진 등 14,000여 점이 소장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본인의 유서와 편지 등 333점을 「지란의 편지」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신청을 했다는 것이다.
지란 육군소년비행단훈련학교는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 전황이 불리해지자 최후의 특공기지로 자살특공대원들을 태운 전투기를 출격시켰던 곳이다.
신문기사를 읽고 있으려니 영화 「호타루(ほたる:반딧불이)」가 생각난다.
“당신과 함께 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당신을 떠나보내려 합니다 ….”
일본 가고시마 조용한 어촌에 사는 야마오카는 수십 년간 원양어업을 하던 어부였다. 그러나 아내에게 신장병이 생기자 야마오카는 간병을 위해 양식업으로 전환하여 생계를 이어갔다. 소박하지만 행복한 이들의 생활에 옛 친구인 후지에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야마오카 부부는 가슴속에 묻어왔던 과거를 회상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특공대원이었던 야마오카와 동료 후지에는 마지막 출격을 눈앞에 둔 가네야마 소위의 유언을 듣는다. 조선인인 그의 이름은 김선재. 그는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의 가족에게, 그리고 사랑하는 약혼녀에게 닿을 수 없는 이별을 고한 채 폭탄을 안고 하늘로 날아오른다.
야마오카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실의에 빠진 가네야마의 약혼녀 도모코와 대면을 하게 되고 도모코가 가네야마를 잊지 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와 인연을 맺고 서로 의지하며 살아간다.
한편, 전쟁 당시 특공대원들을 따뜻하게 보살펴주던 도미야 식당주인 도리하나 도메(鳥濱とめ) 여사는 야마오카에게 가네야마 소위의 유품을 한국에 있는 유족들에게 전해 달라는 부탁을 한다.
야마오카는 얼마 남지 않은 생을 안고 있는 아내의 회한을 달래주기 위해 그리고 상처받은 과거와의 화해를 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 한다….
「호타루」는 지란특공기지에서 있었던 실화를 토대로 만든 영화다. 도리하나 도메 여사가 운영하는 도미야식당은 그 당시 일본 육군 지정식당이어서 특공대원들이 많이 드나들었고 미쓰야마 후미히로(光山文博:한국명 卓庚鉉)도 자주 출입했다.
도메 여사는 식당에 오는 특공대원들을 자식들처럼 다정하게 대했고, 대원들도 그녀를 어머니라 불렀다. 더구나 두 딸만 두고 있는 그녀는 아무도 면회 오는 사람이 없는 미쓰야마 후미히로를 친자식처럼 생각했다.
특공출격 전날 밤, 작별 인사를 하러온 후미히로는 "오늘이 내 생애 마지막 날이니 고향의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 하더니 '아리랑'을 불렀다. 그녀가 위로하자, "만일 제가 죽어서 영혼이 있다면 내일 밤에 다시 오겠습니다. 반딧불이가 되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그가 제로센(零戰)을 타고 태평양에 몸을 던지던 그날 밤 아리랑을 부르던 방에는 거짓말처럼 반딧불이가 나타났다. 이 전설 같은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호타루」라는 영화가 제작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특공대원들의 유족이나 살아남은 대원들이 지란을 찾아왔으나 숙박할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안 도메 여사는 식당을 여관으로 개조하여 호타루칸 토미야쇼쿠도(ホタル館富屋食堂)를 개업했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흘러버린 지금은 도메 여사는 작고하고 손부인 도리하마 하쓰요(鳥浜はつよ) 여사가 도미야여관을 운영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69년 전에 촬영한 탁경현님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지란특공평화회관에 소장되어있는 경남 사천군 서포(西浦)가 고향인 탁경현님의 자료에는 ‘미쓰야마 소위는 1945년 5월 11일 오전 6시 30분 250㎏의 폭탄을 실은 전투기를 몰고 오키나와 서해 방면으로 560km를 출격하여 산화하였고, 대위로 2계급 특진 추서되었다.’라는 기록과 함께 그가 남긴 ‘난세’라는 하이쿠도 있었다.
‘젖 매달리던 어머니 근황이 마음에 걸리니, 3월의 하늘이라 봄 안개가 끼었는가.’
그랬을 것이다. 새파란 청춘에 조국도 아닌 원수의 나라를 위해 죽어가야 한다는 사나이 심정이야 어찌 필설로 표현할 수 있었겠는가.
가미카제자살특공대는 태평양전쟁 말기 제로센 전투기에 폭탄을 싣고 적군의 함대에 자살공격을 하던 특공대로 1944년 해군 중장 오니시 다키지로(大西瀧治郞)가 창안했는데 성공률이 6%에 불과했으니 일본 군국주의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편도용 연료만 넣은 전투기를 몰고 미국 함정에 자살공격을 감행하게 했으니 일제가 얼마나 전쟁에 미쳐 날뛰었는지를 알고도 남는다.
그 첫 주자였던 세끼 유키오(關行男) 대위는 1944년 10월 25일 출격에서 미국 항공모함 세인트 로(USS St. Lo)에 자살공격을 감행하여 23세에 산화했다. 그 이후 가미가제는 자살공격의 대명사가 되었고 세끼 유키오 대위는 군신(軍神)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출격 전에 "일본도 끝이다. 나처럼 우수한 파일럿을 죽이려 하다니, 나는 천황 폐하가 아니라 미국놈들로부터 내 아내를 지키려고 죽으러 간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는데, 그것은 2007년 신조 다쿠(新城卓)의 감독으로 「나는 당신을 위해 죽으러 갑니다(俺は, 君のためにこそ死ににいく)」라는 영화로 다시 태어났다.
'기러기 룸에 송별 술자리를 준비했다. 어떤 사람은 고함을 지르고 어떤 사람은 유서를 썼으며 어떤 사람은 엉엉 울었다.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린 연회장, 전등을 칼로 치고 의자로 유리창을 부수며 새하얀 테이블보도 찢겨나갔다. 오늘 밤만의 목숨, 내일은 출격. 일본 제국을, 천황 폐하를 위해서라고 다짐하지만 어찌할 바 모르는 학도병사의 심경은 너무 알려져 있지 않았다….'
태평양전쟁 때 쓰치우라(土浦) 해군기지 직원인 카스가 다케오(春日武雄)가 가미카제 대원들의 출격 전날 밤의 상황을 기록한 글이다.
일본의 기록에 의하면 특별공격대는 647개 부대가 편성되었고 해군은 1,298대, 육군은 1,185대가 참가하여 1,030명이 사망했는데 그 중 한극인은 11명이었고 거기에는 1945년 3월 29일 오키나와에서 산화한 17세 한국소년 오가와 마사아키(박동훈)도 있었으니, 세상에서 가장 비극적인 기록이 과연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될 것인가.
지란특공평화회관 들머리에 있는 조선인 자살공격대 위령비에는 ‘아리랑 노래 소리, 저 멀리 어머니 나라에 생각을 남기고 진 꽃들’이란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