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다섯째로,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30) 합니다.
우선적으로, “성령을 떠나시게 하지 말라” 하지 않는 점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십시다. 주님께서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 하신 대로 성령님은 우리를 떠나시지 않으십니다. 성실하지 못하고 실수 많은 우리를 떠나실 수도 있고 버리실 수도 있으시련만 “근심”하시나 떠나시지 아니 하시고 영원히 함께 하시며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어찌 근심하게 할 수가 있단 말인가?
구속의 날까지
어찌하여 성령님을 근심시키면 아니 되는가?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30하)고 말씀합니다. “인치심”을 받았다는 말은 1:13절에서 언급한 거듭남을 가리키고, “구원의 날”이란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실”(빌 3:21) 영화의 날을 가리킵니다. 성령을 “보혜사”라 하는 것은 위로자, 조력자, 상담자라는 뜻인데, 거듭남으로부터 구속의 날까지 우리를 책임져 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성령님을 근심시켜 드릴 수가 있단 말인가?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즉 구원을 얻었으나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즉 완성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요일 3:2), 이것이 “구속의 날”입니다. 우리의 낮고 천한 몸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과 같이 변화될 그 날까지 성령님은 우리들을 책임지시고 인도하시러 오셨습니다. 그런 성령님을 근심시켜 드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한 거듭남과, 구원의 완성인 “몸의 구속”은 성령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거듭남)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영화)”(롬 8:11)고 말씀합니다. 끊어지지 않는다는 황금 고리(롬 8:29-30) 중에서 하나 남은 고리는 영화뿐입니다.
성화의 성경적인 동기
이점에서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는 30절이 놓여 있는 좌표를 확인해 보시라고 제의합니다. 그래야만 사도의 의도를 파악할 수가 있기 때문인데 앞에는,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 마귀로 틈을 주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고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라”는 등 4가지 권면이 있고, 뒤에는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31-32)는 권면이 뒤따릅니다. 그런데 권면의 중간에 돌발적으로,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는 말씀이 끼어 있는 구조입니다.
처음에는 그 연관성에 대해서 어리둥절해 하다가 놀라움과 감탄을 금할 수가 없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너희는 성령으로 거듭난 새 사람이다 너희 속에는 성령님이 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 사람의 행실이나 습관대로 행한다면 한 마디로 너희 안에 내주하여 계시는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는 것이다 알겠느냐 너희는 성령님을 모셨다는 이 한 가지를 절대로 잊어서는 아니 된다”는 그런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이점에서 성도들을 성화로 이끌어 주는 것도 교훈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이라는 점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일깨워주는 말씀은 서신서 여러 곳에 나타나는데 문제가 많은 고린도교회를 사도가 어떤 방도로 치료해주고 있는지 고린도전서 6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2),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3),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9),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15),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16),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19)고, 6번이나 “알지 못하느냐”고 망각하고 있는 그들의 정체성을 일깨워줌으로 치료해주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 내에는 음란, 우상숭배, 간음, 도적질, 술취함, 토색하는 자 등 옛 사람의 행실을 벗어버리지 못한 문제들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들을 향해 사도는 특히,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3:16), 너희 몸이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6:19)고 성령이 함께 내주하신다는 점을 일깨워주고 있음을 대하게 됩니다. “너희가 이같이 행한다면 너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이 어떠하시겠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권면 중간에,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는 의도입니다.
우리도 이 엄청난 영광스러움과 경이로운 사실을 얼마나 자주 자주 잊어버리고 지냅니까? 묻고 싶습니다. “나는 홀 몸이 아니라 내 안에 성령님을 모셨다”는 점을 하루에 몇 번쯤 인정하며 고백하고 있습니까? 사도 요한은,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요일 3:1)고 말씀하는데, 불신자들만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도 우리의 변화된 신분과 지위를 알지 못하고 망각하고 있지 않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는 말씀은 앞에서 말씀한 4가지 권면과 뒤에 이어지는 권면의 근거가 되고 성화의 동기가 되는 요점인 것입니다. “내가 옛 사람의 습관대로 행한다면 하나님 가족의 일원으로써 그 가문에 누를 끼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지 않는다면 아버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에 모독을 돌리는 것이 된다”는 점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자”라는 말도 그리스도인들에게만 해당이 되는 특권이요, 영광입니다. 불신자들에게는 근심시킬 성령도 없는 자인 것입니다.
첫댓글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