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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안] '지대본위화폐' 시대를 상상한다⑪ㅡ파내는 자원과 남기는 자원: 러시아 호주 캐나다
이원영 (국토미래연구소장) + AI 동료들
지금까지 살펴본 나라들은 대체로 사람이 조밀하게 모여 사는 곳이었다. 중국과 유럽, 한국, 그리고 미국의 대도시들. 지대를 만드는 것이 밀도라면 이들에게 유리한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렇다면 반대편은 어떤가. 국토는 광대한데 사람은 적고, 대신 땅속에 묻힌 것이 많은 나라들 말이다. 러시아와 걸프, 호주와 캐나다. 이 기준 앞에서 그들은 어떻게 되는가. 여기서 이 구상이 특정 진영의 기획인지 아닌지가 판가름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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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종류의 자원
먼저 원리 하나를 세워두자. 자원국이라고 다 같은 자원국이 아니다.
파내야 값이 되는 자원이 있다. 석유와 가스, 철광석과 석탄. 땅속에서 꺼내 팔아야 비로소 소득이 된다. 꺼내는 만큼 줄어들고, 꺼내는 과정에서 대개 그 자리의 생태가 훼손된다.
남겨두어야 값이 되는 자원도 있다. 숲과 습지, 담수와 생물다양성. 그대로 두는 동안 탄소를 붙잡고 물을 순환시키고 기후를 고르게 한다. 베어내면 한 번의 목재 수입이 생기지만 해마다 제공하던 서비스는 사라진다.
지대본위 체제에서 전자를 가진 나라는 화폐적 지위를 잃고, 후자를 가진 나라는 얻는다. 사용가치의 흐름을 담보로 삼는다는 원칙에서 곧바로 따라 나오는 결론이다. 앞서 말한 대로 채굴본위에서 수분본위로 옮겨간다는 것의 실질적 의미가 이것이다.
러시아 — 가장 절박하되 가장 불리한
러시아만큼 탈달러의 동기가 절박한 나라는 없다. 2022년 외환보유고가 하루아침에 동결되는 일을 직접 겪은 당사자다. 화폐의 담보를 남의 손에 두면 안 된다는 이 연재의 명제를 러시아만큼 뼈저리게 아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브릭스 결제 논의를 밀어붙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게다가 위안 결제로 기우는 것은 중국에 대한 종속을 뜻하니 꺼린다. 어느 패권국에도 속하지 않은 기구라는 설계는 그 딜레마의 답이 될 수 있다. 토지 국유화의 역사를 가진 나라이니 지대가 공동체의 것이라는 명제 자체에도 거부감이 적을 것이다.
그런데 셈을 해보면 불리하다. 세계 최대의 면적을 가졌으되 인구밀도는 극히 낮다. 앞서 여러 번 짚었듯 지대를 만드는 것은 넓이가 아니라 밀도다. 사람이 모여 오가고 사귀는 데서 장소의 값이 생기는데, 광대한 툰드라와 타이가에는 그 밀도가 없다. 그러니 지대 지분은 국토 면적이나 현재의 자원 수출액에 훨씬 못 미치게 산정된다. 게다가 순사용가치 개념을 적용하면 채굴은 감점 요인이 되니 상황이 더 나빠진다.
러시아 협상단이라면 이렇게 물을 것이다. "석유와 가스를 파는 것은 왜 채밀이고, 도시에서 임대료를 걷는 것은 왜 수분인가."
정당한 반문이니 답을 준비해야 한다. 필자는 두 가지로 답하겠다.
하나는 거두는(징수하는) 것과 재는 것은 다른 일이라는 점이다. 앞선 회에서 다른 공유부 — 궤도와 주파수, 데이터, 탄소 — 를 두고 정리한 바 있다. 이들은 정산의 대상이지 척도의 자리는 아니다. 자원 지대도 마찬가지다. 석유와 가스에서 나오는 지대는 정당한 소득으로 인정하고 사용료로 걷되, 다만 그것을 화폐 발행의 기준으로 삼지 않을 뿐이다. 척도는 해마다 재생되는 것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자원의 저주에서 벗어나는 유인이다. 채굴지대를 화폐 기준으로 삼으면 러시아 경제는 영원히 자원 수출에 묶인다. 유가가 오르면 흥청거리고 내리면 휘청이는 구조, 제조업과 도시가 좀처럼 자라지 못하는 구조가 그대로 굳는다. 반면 지대본위에서는 도시를 키우고 사람이 모여 살게 하는 것이 곧 발권 기반을 넓히는 일이 된다. 인구 감소에 시달리는 나라에 이것은 결코 작은 유인이 아니다.
다만 정직하게 덧붙이면, 지금의 러시아가 이 논리를 곧바로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다. 자원 수출로 국가를 지탱하는 나라에 자원의 화폐적 지위를 낮추자고 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산에 지정학을 넣으면 그림이 달라진다. 이것이 러시아 한 나라의 손익 문제가 아니라 여러 대륙이 함께 참여하는 결제망의 문제라면, 자산 동결의 위험에서 벗어난다는 것만으로도 지대 지분의 손실을 넘어서는 유인이 된다. 3천억 달러를 하루아침에 잃어본 나라에게 이것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그 결제망에서는 어느 한 나라에 종속되지도 않는다.
여기에 하나를 더해야 한다. 러시아의 타이가와 툰드라, 그리고 북극권의 습지는 세계적 규모의 탄소 저장고다. 생태 지대를 계정에 올리면 러시아는 파내는 자원에서 잃은 몫을 남기는 자원에서 상당 부분 되찾는다. 이 나라는 두 종류의 자원을 모두 가진 나라이며, 어느 쪽으로 셈할 것인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걸프 — 이미 스스로 그 길을 가고 있다
산유국의 처지는 러시아와 같되 더 극단적이다. 사우디아라비아와 걸프 국가들은 채굴지대가 국가 재정의 거의 전부이고, 사막 국토라 사용가치 지대는 몇몇 도시에 한정된다. 지대본위 질서에서 이들의 지분은 현재의 오일머니 위상에 한참 못 미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들 스스로가 이미 이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우디의 비전 2030이든 아랍에미리트의 산업 다각화든, 핵심은 석유 이후를 준비하는 것이다. 걸프 국가들이 국부펀드로 런던과 뉴욕의 빌딩과 인프라를 사들이는 것도 결국 채굴지대를 사용가치 지대로 전환하는 행위다. 남의 도시의 지대를 사는 것이니까.
여기에 이 구상의 날카로운 함의가 있다. 지대가 공동체로 환수되는 체제에서는 사서 가질 것이 남지 않는다. 그러니 걸프에 대한 정직한 메시지는 이렇게 될 것이다. 남의 도시 지대를 사 모으는 대신, 당신들의 도시를 사람이 모여 살고 싶은 곳으로 만드는 편이 낫다. 두바이와 리야드가 이미 그 길을 가고 있기도 하다.
한 가지 덧붙이면 이슬람 금융과 뜻밖의 친화성이 있다. 이자를 금하되 실물자산에 기반한 수익 분배는 허용하는 구조, 특히 임대차에 기반한 이자라(ijara) 방식은 지대본위의 문법과 통한다. 채무 이자가 아니라 실물 사용료를 화폐의 근거로 삼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호주 — 뜻밖에도 가장 앞서 있는 나라
여기서 반전이 나온다. 자원 수출로 번영해온 호주가, 실은 이 연재가 제안하는 방향을 가장 멀리까지 실행해본 나라다. 앞서 한국의 이행 설계를 이야기하며 잠깐 언급했던 그 사례를 이제 자세히 볼 차례다.
수도 캔버라가 속한 오스트레일리아 수도특별구는 모든 주거용 토지가 임차권이다. 아무도 땅을 소유하지 않고 99년간 빌려 쓴다. 캔버라의 첫 개발이 1920년대에 이루어졌으니 초기 임차권이 이제야 만기를 맞기 시작했는데, 소액의 갱신료만 내면 다시 99년을 빌릴 수 있다.
더 주목할 것은 세제 개혁이다. 2012년 이 지역 정부는 20년에 걸쳐 취득세를 없애고 그만큼을 연간 토지세로 옮기는 계획에 착수했다. 2032년 완료가 목표다. 부동산을 살 때 한 번에 큰돈을 내는 대신 보유하는 동안 해마다 조금씩 내는 방식으로 바꾸는 것이다. 바로 이 연재가 말해온 저량에서 유량으로의 전환이다.
결과는 어떠했나. 독립 조세연구기관 프로스퍼가 8년째에 내놓은 평가에 따르면 전환은 지금까지 성공적이며, 긴 이행 기간이 그 성공의 열쇠로 보인다고 했다. 임대료가 폭등하거나 신규 건설이 위축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자가 점유자의 주택 구매 비중이 2012년 60%에서 2020년 78%로 올랐다. 실수요자가 집을 사기 쉬워졌다는 뜻이다. 여론도 우호적이어서 호주인 다섯 중 셋이 취득세를 없애고 토지세로 바꾸는 데 찬성한다. 2026년에는 생애 첫 주택 구매자의 취득세를 전면 면제하는 단계까지 나아갔다.
물론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최근의 검토 보고서는 20년 일정대로 취득세를 완전히 없애기는 어려워 보인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행이 늦어지고 있다는 것과 방향이 틀렸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거래 과세에서 보유 유량 과세로 옮겨가는 일이 실제로 가능하며, 다만 아주 긴 시간이 걸린다는 것 — 이것이 캔버라가 보여주는 교훈이다. 앞서 이행 설계의 난점으로 짚었던 세입 공백과 정치적 저항에 대한 실증 자료가 여기 있다.
앞서 대만이 부동산 대출의 비중을 규제로 묶어둔 사례를 보았는데, 캔버라는 한 걸음 더 나아간 셈이다. 대만이 회로의 크기를 제한했다면, 캔버라는 담보의 성격 자체를 저량에서 유량으로 옮기고 있다. 전자가 방어라면 후자는 전환이다. 그리고 두 나라 모두 그 선택을 수십 년 전에 시작했다는 점이 우리에게는 뼈아프다.
호주에는 또 하나의 경험이 있다. 2010년 광물자원에서 나오는 초과이익을 국민에게 돌리려던 세제 개편이 광산업계의 대대적 반격에 부딪혀 총리가 교체되고 세금이 무력화된 일이다. "땅속에서 나오는 것은 국민 모두의 것"이라는 명제와 그 정치적 대가를 국민적으로 학습한 나라라는 뜻이다. 논쟁의 언어가 이미 사회에 있다.
다만 호주도 유보할 이유는 있다. 달러 체제와 미국 안보 동맹의 수혜국이고 광물 수출로 번영해왔으니 자원의 화폐적 지위 하락을 반길 리 없다. 그러나 시드니와 멜버른의 주택 문제가 세계 최악 수준인 만큼, 이 논의는 호주에서 외교 사안이 아니라 국내 개혁 의제로 먼저 들어갈 것이다.
소유 구조가 달라도 문이 있다
여기서 앞서 살펴본 사례들을 나란히 놓아볼 만하다. 중국은 토지가 국유이므로 임대조건을 바꾸면 되고, 캔버라는 애초에 모든 토지가 임차권이니 세제만 옮기면 된다. 그렇다면 토지가 사적으로 소유된 나라에서는 불가능한가.
앞 회에서 언급한 맨해튼의 배터리파크시티가 그렇지 않음을 보여준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용광로에서 토지를 팔지 않고 임대하며 그 지대를 공공이 거두어 순환시키는 방식이 이미 굴러가고 있다. 소유 구조가 어떠하든 지대를 공유하는 길은 있다. 다만 나라마다 그 문이 다른 자리에 나 있을 뿐이다.
캐나다 — 모든 것이 한 나라 안에서 충돌한다
캐나다는 어느 유형에도 딱 맞지 않는다.
겉모습은 러시아와 비슷하다. 세계 두 번째 면적에 인구는 적고, 원유와 가스와 광물이 수출의 큰 몫을 차지한다. 두 종류의 자원을 동시에 가졌다는 점도 닮았다. 다만 캐나다에서는 그 긴장이 국내 정치의 전선으로 드러난다는 점이 다르다. 특히 앨버타의 오일샌드는 채굴 과정의 환경 부담이 큰 자원이라 순사용가치 개념을 적용하면 감점 폭이 크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 북방림이다. 캐나다는 아마존, 콩고분지와 함께 세계 3대 산림 지대의 하나를 품고 있고, 그 아래 이탄지는 면적당 탄소 저장량이 열대우림을 훨씬 웃돈다. 세계 담수의 상당 부분과 광대한 습지도 갖고 있다. 생태 지대를 계정에 올리는 순간 캐나다는 남기는 자원의 최상위 보유국이 된다. 파는 자원과 남기는 자원을 동시에 가진 나라인 것이다.
그래서 캐나다는 이 구상 앞에서 국내가 갈릴 것이다. 앨버타는 반대하고 브리티시컬럼비아와 퀘벡은 찬성하는 구도. 탄소세 논쟁이 정확히 그렇게 벌어졌던 나라다.
도시 사정도 짚어둘 만하다. 밀도는 낮지만 인구가 몇몇 대도시에 극단적으로 몰려 있고, 토론토와 밴쿠버는 소득 대비 주택가격이 세계에서 가장 나쁜 축에 든다. 사용가치 지대의 총량은 러시아보다 훨씬 크다는 뜻이다. 밴쿠버가 외국인 취득세와 빈집세를 도입한 것도 이 맥락이었다.
그리고 가장 흥미로운 대목이 남아 있다. 원주민 토지권이다. 캐나다는 수십 년간 원주민과의 조약 및 토지청구 협상을 이어왔고 대법원도 관습적 토지권을 인정해왔다. 즉 "이 땅의 가치는 누구의 것인가"라는 물음이 추상적 이론이 아니라 실제 법정과 협상 테이블에서 다뤄지는 나라다.
여기서 지대본위와의 접점이 생긴다. 이 구상은 소유권을 확정하지 않고도 작동한다. 누가 쓰는지 등록하고 지대를 공동체로 환수하는 구조이니, 소유권 귀속을 둘러싼 해묵은 분쟁을 우회할 길이 있다. 원주민 공동체가 지대의 수취 주체가 되는 방식은 캐나다의 화해 정책과도 어긋나지 않는다. 이 논의를 세계에서 가장 진지하게 받아줄 만한 나라라고 본다.
벌하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돌리는 것
정리하자. 걸프는 잃고, 러시아와 캐나다는 어느 쪽으로 셈하느냐에 따라 갈리며, 호주는 실증 사례를 갖고 있으되 전략적으로는 유보할 것이다. 어느 나라도 순수한 찬성국이거나 반대국이 아니다.
그러나 이 구상이 자원국을 벌하려는 것은 아니다. 자원에서 나오는 소득은 그대로 인정된다. 다만 화폐의 척도가 바뀔 뿐이다. 그리고 그 변화가 향하는 곳은 분명하다. 자원을 파내는 나라에서 자원을 지키는 나라로 화폐적 보상의 방향을 돌리는 것. 유한한 행성에서 어느 쪽에 보상을 주는 것이 옳은지는 굳이 논증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음 회에서는 그 변화의 최대 수혜자가 될 지역들로 간다. 인도와 브라질, 그리고 아프리카. 오늘의 화폐질서에서 가장 소외된 곳들이 왜 이 질서에서는 가장 큰 몫을 갖게 되는지 살펴볼 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