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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장애인 올림픽' 자원 봉사자
전시가 끝났다.
성공적이지 못했지만, 인야에게 보름간의 치열했던 고투가 남긴 것은 감당하기 버거운 빚더미뿐이었다.
바르셀로나의 8월은 잔인하도록 뜨거웠고, 습기를 머금은 무더위는 비쩍 마른 인야의 몸을 더 바짝 말리려 들었다. 아무도 없는 ‘침묵의 집’ 거실에 앉아 있으면, 텅 빈 통장과 무방비 상태로 마주한 현실이 그를 위협했다.
그렇다고 올림픽이 열리는 바르셀로나 현지에 살고 있던 인야가 아예 올림픽에 눈과 귀를 닫고 모른 척할 수만도 없었다. 게다가 전시가 끝나자 올림픽도 막바지로 달리고 있던 즈음이었기에,
그런 괴로움을 잠시나마 떨쳐버리려고 인야는 자신의 조국 한국의 경기장을 찾아가기도 했다.
여자 핸드볼 결승에서 노르웨이를 꺾고 금메달을 따는 순간, 황량한 가슴에 스며든 뜨거운 감정은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위안이 되어 주었다.
하루는 시내에서 돌아오는 길에 ‘깐 까라예우’의 청년 '후안 마'의 어머니를 만났다.
“내가 우리 아들한테 들었는데, 우리 동네하고 청년들 그림을 그렸다면서요?”
“아, 예...”
그렇게 시작된 얘기였는데,
전에(두 달쯤 전) 자기 아들이, 인야의 그림 ‘깐 까라예우의 다섯 친구들'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자기가 그림의 모델이 되었다는 자랑을 해대기에... 그런가 보다 했었는데,
며칠 전 자기 집안 식구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도, 그 그림이 완성되어 이미 전시도 됐다는 자랑을 해대기에...
은근히 자신도 그 그림이 궁금해지고 또 보고 싶었다며,
“혹시, 나에게도 그 그림을 보여줄 수 있나요?” 하고 묻는 것이었다.
인야에겐 정말 의외였고, 반가운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걸로 끝난 게 아니라,
“그 그림, 성당 아래층에서 그렸다면서요?” 하기까지 해서,
“예, 그림이 커서 집에선 못 그릴 그림이라서요. 그리고... 최근에 그렸던 건데, 이번에 끝낸 전시의 대표작이었을 수 있습니다.” 하자,
“그래서 지난 주말엔 성당에서 그 얘기를 하게 되었고, 다른 사람들도 보고 싶어 하는 눈치던데요......” 하니,
인야는 반가우면서도 그 순간엔,
‘아니, 벌써 동네방네 소문이 다 났다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전시장 방명록에, ‘전시의 성공을 빈다'거나, ''깐 까라예우'가 자랑스럽다’는 글을 남겨놓았던가 보구나......' 하고 어림잡기도 했는데, 그렇지만 그 순간엔 또,
“예, 보시고 싶다면 제가 보여드려야지요. 허지만, 아직은 전시장에 있고 그걸 옮겨와야 하니까, 조만간 제가 후안 마에게 연락을 하면 그 뒤에 조용히 오셔서 보세요......” 하자,
그녀는 의아하다는 눈치로,
“왜요? 전시까지 한 작품이라면서... 왜 조용히 보라는 거죠?” 하니,
“아, 전시한 것과, 제 ‘작업실 개방’하고는 또 다른 입장이라서요......” 하면서, “‘전시’는 공식적으로 제 작품을 선보이는 거지만, ‘성당 작업실’을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할 수는 없는 일이라서요......” 하자,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는 것 같더니, 다시 끄덕이면서,
“이해할 수는 있겠어요. 무슨 뜻인지......” 했다.
“그러니, 며칠 뒤에 제가 후안 마에게 연락을 할 테니, 그 이후에 조용히 오셔서 보세요.” 하는 식으로 약속을 했다.
사실 별 일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인야가 생각해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았다.
그렇잖아도 실패한 전시로 풀이 죽어 있는 자신이었지만,
‘그래도 난, 이런 사연을 담은 그림도 그린 화가잖아?’ 하는 뭔가 모를 뿌듯함이 함께 하면서 조그마나마 마음의 위안을 얻었던 것이다.
어차피 자신의 그림에 대한 이야기이고, 그렇잖아도 그 그림은 처음 구상 단계에서부터 이런저런 얘깃거리가 많았기에... 자꾸만 그림이 풍성해지는 기분이 들어, 조그만 감동 같은 것도 느껴졌던 것이다.
올림픽 마지막 날, 인야는 우연히 TV를 켰는데 마라톤 경기가 나오는 것이었다.
사실 인야는 마라톤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생방송으로 중계를 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한국 선수가 선두 그룹에 끼어 있다는 얘기에, TV는 이내 인야의 시선을 박제해버렸다.
저녁을 준비하려 부엌을 들락거리면서도 눈은 화면에서 뗄 수 없었다.
화면 속에는 한국 선수와 일본 선수가 사투를 벌이고 있었는데,
'1등이 아니어도 좋으니, 제발 일본에게만은 지지 말아달라!'는 간절함이 인야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그런데 경기가 중반을 넘어설 무렵,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선두를 달리던 일본 선수가 성 가족 성당 부근에서 신발이 벗겨지는 사고를 당한 것이다.
그 찰나의 순간, 인야는 강렬한 예감을 느꼈다.
'이것은 우리에게 행운이 따른다는 계시인가.'
손기정이 일장기를 달고 달려야 했던 1936년 베를린의 한이 이곳 바르셀로나에서 풀릴 것만 같은 묘한 확신이 차올랐던 것이다.
에스빠냐 광장을 지나 최후의 1인으로 남은 황영조가 숙명의 라이벌인 일본 선수와 나란히 달리기 시작하자,
인야의 손은 바들바들 떨려왔다.
마침내 마라톤 코스 중 가장 험난한 오르막인 ‘몬쥬익’으로 접어들었을 때, 인야는 두 손을 모아 생전 찾지도 않던 하느님께 기도했다.
“하느님, 제 모든 기운까지 그에게 주십시오. 그가 이기면 저 역시 이 지독한 현실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승점을 2km 남겨둔 내리막길, 황영조가 마침내 일본 선수를 따돌리고 치고 나갔다.
인야는 안절부절못하며 거실을 서성였다.
현지에 살면서도 태극기 한 장 준비하지 못한 미안함과 뒤늦은 후회가 몰려왔지만, 온몸의 감각은 이미 트랙 위의 선수와 하나가 되어 있었다.
마침내 올림픽 스타디움의 문이 열리고, 황영조가 압도적인 거리 차로 당당히 1위로 들어서는 순간,
인야는 숨이 멎는 듯했다.
56년의 세월을 건너온 민족의 한이 풀리는 드라마틱한 승리였다.
결승점을 통과한 선수가 트랙 위에 쓰러졌을 때, 인야 역시 텅 빈 ‘침묵의 집’에서 홀로 뜨거운 박수를 치며 눈물을 닦아냈다.
그 승리는 실패한 전시회로 상처 입은 화가의 영혼에 던져진 가장 눈부신 구원과도 같았다.
축제는 끝났고 사람들은 하나둘 도시를 떠났다.
하지만 인야는 떠날 곳이 없었다. 밀린 화랑 임대료를 갚기 위해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몽땅 털어 넣어야 했고, 팜플렛 제작을 둘러싼 복잡한 금전 문제도 여전히 그의 발목을 잡았다.
아픈 속을 부여잡고 새벽 통증에 잠을 깨는 날들이 이어졌다.
꿈으로 잠을 설치다가 새벽에 형한테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 안녕하시고?” “근데, 이번 추석에는 못 갑니다......”
정신없이 전화를 끊고 나니, 뭔가 아쉽기 그지없었다.
며칠 뒤 성당 작업실에서 그림을 마주하고 행복해하던 후안 마 어머니의 미소는, 작가를 떠난 작품이 스스로 생명력을 얻어 타인에게 가닿는 신비로운 순간을 인야에게 선물해주었다.
그래도 ‘전시 마무리’가 숙제처럼 남아 있었다.
물론 며칠 전에 인야는, 그동안 빚으로 안고 있었던 ‘화랑 임대비’를 결국 아르바이트 보수를 받아, 이미 보관 중이던 그 전의 다른 아르바이트 보수와 탈탈 털어 지불하며 마무리를 지었다.
그런데 조금 의외였던 건,
화랑 주인이 인야를 자신의 집에 식사초대까지 해서 갔다 왔다는 사실이다.
'글쎄,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내 진심이 느껴진 게 아니었을까?(허긴, 그 여자는 애당초 내 상황과 어려운 처지를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다. 그런데도 내가 최선을 다해 일을 처리하는 것에 믿음이 생겼던 걸까?' 하기는 했지만,
그런데 인야가 더 놀랐던(웃기는) 건, 처음 화랑을 계약할 때부터 전시 기간 중에도 내내 사무적이기만 했던 그 여자는, 더구나 작품 판매 건에서도 인야가 하도 깐깐하게 굴어선지, 별로 좋은 시선마저 보내지 않았었는데... 인야의 그림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도 모자라, 어색할 정도로 태도마저 친절하게 확 바뀌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전시와 관계되는 일중 아직 끝내지 못한 것도 있었는데,
‘G사’측의 팜플렛 협찬 문제가 끝내 말썽이었다.
인쇄소 측의 실수로 원래의 계획대로 인쇄되어 나오지 않은 것이 비비 꼬여, 아직도 해결되지 않아서였다.
그러니 ‘G사’측의 독촉 전화가 계속 걸려오곤 했는데,
원래 대금을 전시자에게 양도하기 전에는 단 한 번의 전화도 없던 회사가, 문제 발생 후부터 하루에도 두세 차례 전화를 걸어오며 인야를 괴롭히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 장본인인 최 아무개라는 사람은 올림픽이 끝나자마자 한국으로 돌아갔다 하고, 그래선지 그 누구도 해결하려 들지 않는 상황이었는데,
인쇄소 측도 자신들의 실수였음에도... 나 몰라라 하는 것 같았고,
돈을 갖고 있는 심도 그 문제에 대해선(다른 문제도 마찬가지지만) 가타부타 일체 언급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결국 인야가 나설 수밖에 없어, 어쩔 수 없이 인쇄소에 찾아갔다.
그러면서도 인야는 분명 자신의 행동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돈과 관계된 일이 미결 상태라 어떻게든 빨리 매듭짓고 싶었고, 또 그런 일로 인해 더 이상 구설수에 오르기도 싫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관계자들은 다 무사태평인데, 왜 인야 자신만이 조급해 하고 그런 일에 불편해 하는지 의문이기는 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모른척하고 비벼 뭉개며 살고 있는데, 왜 나는 못할까?'
그러면서 자신이 잘하는 짓인지 조차도 의심쩍어 지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런 모든 일들이 ‘돈’에서 비롯된 것 같았다.
인야가 충분히 가진 사람이었다면 애당초 그런 일들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테니까.
올림픽의 화려한 불꽃이 꺼진 뒤, 영사관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세간의 관심이 적고 수발이 힘들어 모두가 기피하던 ‘장애인 올림픽(패럴림픽)’의 자원봉사직을 맡아달라는 요청이었다.
“나 먹고살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무슨 봉사?”하며 처음엔 짜증이 났지만,
일손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는 영사관의 사정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인야는 자신의 전시가 끝난 뒤, 올림픽도 끝나고... 그로부터 약 한 달 뒤에 열리는 '장애인 올림픽'의 봉사자가 된 것이다.
인야는 거기서 한국에서 온 선수들의 통역과 뒷바라지를 하기로 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그것은 봉사가 아니라 치열한 생존의 현장이었다.
선수단이 도착하는 날부터 인야는 일을 시작해야 했는데, 뇌성마비 장애인 선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사람의 손길 없이는 불가능했다(화장실, 식당, 선수촌 침실 등 화장실 수발부터 식당에서의 식사 보조, 선수촌 침실까지 인야는 온종일 휠체어를 밀고 끌며 전쟁 같은 하루를 보냈다.).
그러다 보니,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 모르게 아무 정신이 없다가... 그들이 안락하게 침실에 들어가는 것까지를 보고나서야 겨우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자정이 가까워져 있었는데, 인야는 녹초가 돼 있었다.
'글쎄, 보람찬 일일 수는 있겠지만, 앞으로 보름여 그 일을 해야 한다니......'
한심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드디어 장애인 올림픽도 개막을 해서, 인야는 원색적인 노란색 자켓을 입고 다시 몬쥬익으로 향했다.
개막식 날, 인야는 선수단의 일원이 되어 휠체어를 밀며 몬쥬익 메인스타디움의 트랙을 밟았다.
꽉 찬 관중석과 뜨거운 조명 아래 서자 가슴이 뭉클했다. 특히 맹인견이 최종 성화 주자를 안내하는 장면에서는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TV 화면 속에는 노란 자켓을 입고 환하게 웃는 인야의 모습이 기록되었고, 그는 비로소 자신이 이 거대한 축제의 가장 낮은 곳에서 소중한 톱니바퀴가 되었음을 실감했다.
선수들의 경기 일정에 맞춰 숙소에서 경기장까지 이동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피를 말리는 작업이었다.
조직위원회에서 운영하는 셔틀버스를 기다리고, 무거운 휠체어와 각종 부속 장비를 챙겨 타고 내릴 때마다 인야의 등은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었다. 여기저기 찧고 부딪히며 상처가 나기도 했지만, 쾡하니 들어간 눈을 비비며 자정이 다 되어서야 ‘침묵의 집’으로 돌아오는 날들이 반복되었다.
인야가 전담한 종목은 ‘보치아’였다.
뇌성마비 중증 장애인들이 공을 던져 표적구에 가까이 붙이는 이 경기는 고도의 집중력과 두뇌 싸움이 필요했다.
인야는 자신이 돌보는 선수들이 비록 몸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해도, 일반인보다 뛰어난 계산 능력과 승부욕으로 경기를 지배하는 모습에 경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결승전 날, 인야는 인생의 가장 비정한 단면을 목격했다.
세계 최강의 실력을 갖춘 한국 선수단은 덴마크와 금메달을 다투었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한국의 승리가 확실시되는 상황이었으나, 심판진의 편협한 판정이 찬물을 끼얹었다.
덴마크 팀은 오심을 이용해 비굴할 정도로 잔인한 수 싸움을 벌였고, 주최국인 스페인 관계자들은 이를 묵인하며 사태를 무마하려 들었다.
“이건 말도 안 돼요! 공정한 판정이 아니라고요!” 인야는 울화통이 터져 소리쳤지만, 이방인 자원봉사자의 외침은 거대한 시스템의 장벽에 부딪혀 흩어질 뿐이었다.
결국 금메달을 빼앗긴 한국 선수들은 통곡하며 시상대 위에 은메달을 내던졌다. 두 눈으로 그 억울한 현장을 지켜본 인야 역시 주저앉아 눈물을 쏟았다.
정직과 성실이 통하지 않는 냉담한 현실, 그 비정한 세계 앞에서 인야는 찢어지는 마음으로 선수들을 껴안았다. 세상은 정의롭지 않았고, 신은 누구의 편도 아닌 듯 보였다.
선수들이 한국으로 떠나던 날, 인야는 그들 편에 한국으로 보낼 몇 통의 편지를 실어 보냈다.
20여 일간의 사투가 끝나고 다시 혼자가 된 방 안에서 인야는 앨범 속 노란 자켓을 입은 자신의 사진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광대뼈가 툭 튀어나올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추석을 맞아 인야는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어머니는 상기된 음성으로,
"온 가족이 다 모여 있고, 곧 모두가 성묘에 갈 거란다......" 하시면서, “내년 추석에는 와서 같이 지내자.”고 하셨는데,
'어머니! 저야, 내년 추석에 가도 괜찮고, 또 그럴 수도 있지만, 어머니께선 더욱 늙어계실 텐데요......’ 하는 게 인야의 심정이었다. 그렇지만 어머니의 목소리가 건강한 것 같아... 무엇보다도 마음이 놓였다.
'아, 나는 비록 훌륭한 아들이 못 될지라도, 어머니께서 갖고 계신 나에 대한 믿음에 반한 자식이 되어선 안 된다.' 하는 다짐을 했다.
그런데 추석이라선지, 인야는 아르바이트하는 집에서 점심을 너무 잘 대접 받았고... 돌아와서는 낮잠도 한 숨 잤다.
그런데 바르셀로나에도 밤하늘에는 둥근달이 떠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인야는 그 지겹게 끌던 팜플렛 문제도 해결했다.
여기 바르셀로나 인쇄업자에게 잔여 지불액을 갖다 주는 것으로 모든 걸 마무리 지었던 것이다.
그런데 인야를 어찌 보았는지, 그 인쇄업자가 계속 인야에게 ‘좋은 사람’ 운운하더니,
자기 별장(시체스(Sitses) 소재)에서 ‘축제’가 있다며 주말을 거기서 같이 지내자고 초대까지 하는 것이었다.
의외이기도 했지만 고마운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인야가 일을 정직, 성실하게 했던 건 사실이다.
그런 걸로 보면, 어쨌거나 사람과 사람간의 일은 항상 정직하고 성실하게 하다 보면 결국엔 통한다는 것도 새삼스럽게 인식하게 되었다.
그동안 그 돈을 마련하느라 바쁜 봉사일 와중에도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고, 또 그 보수를 선불로 요구했어야만 했다.
그런데 그 약속(자기 별장에서 축제를 함께 지내자는)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당시 인야는 심신이 너무 지쳐 있었기에, 정말 간절하게 어딘가에 가서 좀 쉬고도 싶었었는데, 어차피 돈도 없는 처지에 그러지 못하던 차에 그 인쇄업자가 그런 제안을 해서 내심 기대했었는데, 끝내는 말 뿐이었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그에게 욕을 퍼부어주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런 사람들을 경멸하기도 했다.
'글쎄, 어디든, 스페인이든 우리 한국사람이든, 원래 떠벌이는 사람들이 약속도 안 지키는 법이지!’ 하면서 그 일을 잊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인야에겐, 또 다른 일인 집세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인야는 생각했다.
'아, 내가 여기서 2년 반쯤 살았는데... 돈 때문에 빠등거리며 산 기억밖에 없구나!' 할 수밖에 없었다.
시내를 가다가 보니 거리엔 ‘책 할인 축제’가 있었고, 책들이 제법 싸 보였다. 미술에 관한 책들 몇 권이 인야를 유혹했지만, 어쩔 수 없이 돌아서고 말았다.
날이 선선해지면서 키만 멀쑥하게 크던 코스모스도 꽃망울을 터뜨렸다.
인야가 한국에서 가져온 코스모스가 3년째 맥을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앞집의 노부부가 어제 오후에 시내로 내려갔는지 문이 굳게 닫혀있었고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별로 가까이 지내지는 않지만 집 주위에 사람 구경 하기가 힘들다 보니(호아낀씨 가족은 아직도 휴가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괜스레 더욱 적적해지는 기분이었다.
오후에 전화가 왔는데, 영사관이었다.
지난번 장애인올림픽 봉사의 대가로 수고비 얼마를 마련했으니 받으러 오라는 것이었다. 순간,
'돈 받고 하는 게 무슨 봉사야?' 하는 거부감과 뭔가 모를 허탈감도 함께 했는데,
인야는 ‘자원봉사’였기 때문에 그런 건 기대하지도 않았었고, 애당초 그런 수고비가 있다는 얘기도 없었기 때문에... 생뚱맞은 일이기까지 했다.
굳이 준다하니 받기는 하겠지만, ‘봉사자’라는 단어가 퇴색되는 기분이라 썩 내키는 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전화를 끊고 생각해 보니,
‘내 주제에 무슨?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받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면서 인야는, 거의 포기 상태였던 ‘안달루시아(Andalucia) 여행’을 떠올렸다.
'내 처지에 무슨 여행?' 하는 생각이 없지는 않았지만,
'이번 주 내에 숙제를 해서 학교에 제출하고, 다음 주 초에 떠나자!'
일단 마음을 좀 느긋하게 먹고,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이용하기로 했다.
'아, 그동안 내가... 너무 힘들었다......'
지독하게 뜨겁고도 서러웠던 1992년 바르셀로나의 여름.
인야는 그 거대한 축제의 화려한 겉모습과 장애인 선수들의 처절한 눈물을 모두 가슴에 새긴 채, 새로운 희망을 품고 있었다.
b. '장애인 올림픽' 자원봉사자
전시가 끝났다.
성공적이지 못했지만, 인야에게 보름간의 치열했던 고투가 남긴 것은 감당하기 버거운 빚더미뿐이었다.
바르셀로나의 8월은 잔인하도록 뜨거웠고, 습기를 머금은 무더위는 비쩍 마른 인야의 몸을 더 바짝 말리려 들었다. 아무도 없는 '침묵의 집' 거실에 앉아 있으면, 텅 빈 통장과 무방비 상태로 마주한 현실이 그를 위협했다.
그렇다고 올림픽이 열리는 바르셀로나 현지에 살고 있던 인야가 아예 올림픽에 눈과 귀를 닫고 모른 척할 수만도 없었다. 게다가 전시가 끝나자 올림픽도 막바지로 달리고 있던 즈음이었기에, 그런 괴로움을 잠시나마 떨쳐버리려고 인야는 자신의 조국 한국의 경기장을 찾아가기도 했다.
여자 핸드볼 결승에서 노르웨이를 꺾고 금메달을 따는 순간, 황량한 가슴에 스며든 뜨거운 감정은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위안이 되어 주었다.
하루는 시내에서 돌아오는 길에 '깐 까라예우'의 청년 '후안 마'의 어머니를 만났다.
"내가 우리 아들한테 들었는데, 우리 동네하고 청년들 그림을 그렸다면서요?"
"아, 예......"
그렇게 시작된 얘기였는데, 전에(두 달쯤 전) 자기 아들이, 인야의 그림 '깐 까라예우의 다섯 친구들'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자기가 그림의 모델이 되었다는 자랑을 해대기에... 그런가 보다 했었는데, 며칠 전 자기 집안 식구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도, 그 그림이 완성되어 이미 전시도 됐다는 자랑을 해대기에... 은근히 자신도 그 그림이 궁금해지고 또 보고 싶었다며,
"혹시, 나에게도 그 그림을 보여줄 수 있나요?" 하고 묻는 것이었다.
인야에겐 정말 의외였고, 반가운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걸로 끝난 게 아니라, "그 그림, 성당 아래층에서 그렸다면서요?" 하기까지 해서,
"예, 그림이 커서 집에선 못 그릴 그림이라서요. 그리고... 최근에 그렸던 건데, 이번에 끝낸 전시의 대표작이었을 수 있습니다." 하자,
"그래서 지난 주말엔 성당에서 그 얘기를 하게 되었고, 다른 사람들도 보고 싶어 하는 눈치던데요......" 하니,
인야는 반가우면서도 그 순간엔, '아니, 벌써 동네방네 소문이 다 났다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전시장 방명록에, '전시의 성공을 빈다'거나, ''깐 까라예우'가 자랑스럽다'는 글을 남겨놓았던가 보구나......' 하고 어림잡기도 했는데, 그렇지만 그 순간엔 또,
"예, 보시고 싶다면 제가 보여드려야지요. 허지만, 아직은 전시장에 있고 그걸 옮겨와야 하니까, 조만간 제가 후안 마에게 연락을 하면 그 뒤에 조용히 오셔서 보세요......" 하자,
그녀는 의아하다는 눈치로, "왜요? 전시까지 한 작품이라면서... 왜 조용히 보라는 거죠?" 하니,
"아, 전시한 것과, 제 '작업실 개방'하고는 또 다른 입장이라서요......" 하면서, "'전시'는 공식적으로 제 작품을 선보이는 거지만, '성당 작업실'을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할 수는 없는 일이라서요......" 하자,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는 것 같더니, 다시 끄덕이면서, "이해할 수는 있겠어요. 무슨 뜻인지......" 했다.
"그러니, 며칠 뒤에 제가 후안 마에게 연락을 할 테니, 그 이후에 조용히 오셔서 보세요." 하는 식으로 약속을 했다.
사실 별일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인야가 생각해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았다.
그렇잖아도 실패한 전시로 풀이 죽어 있는 자신이었지만, '그래도 난, 이런 사연을 담은 그림도 그린 화가잖아?' 하는 뭔가 모를 뿌듯함이 함께 하면서 조그마나마 마음의 위안을 얻었던 것이다.
어차피 자신의 그림에 대한 이야기이고, 그렇잖아도 그 그림은 처음 구상 단계에서부터 이런저런 얘깃거리가 많았기에... 자꾸만 그림이 풍성해지는 기분이 들어, 조그만 감동 같은 것도 느껴졌던 것이다.
올림픽 마지막 날, 인야는 우연히 TV를 켰는데 마라톤 경기가 나오는 것이었다.
사실 인야는 마라톤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생방송으로 중계를 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한국 선수가 선두 그룹에 끼어 있다는 얘기에, TV는 이내 인야의 시선을 박제해버렸다.
저녁을 준비하려 부엌을 들락거리면서도 눈은 화면에서 뗄 수 없었다.
화면 속에는 한국 선수와 일본 선수가 사투를 벌이고 있었는데, '1등이 아니어도 좋으니, 제발 일본에게만은 지지 말아달라!'는 간절함이 인야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그런데 경기가 중반을 넘어설 무렵,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선두를 달리던 일본 선수가 성 가족 성당 부근에서 신발이 벗겨지는 사고를 당한 것이다.
그 찰나의 순간, 인야는 강렬한 예감을 느꼈다. '이것은 우리에게 행운이 따른다는 계시인가.'
손기정이 일장기를 달고 달려야 했던 1936년 베를린의 한이 이곳 바르셀로나에서 풀릴 것만 같은 묘한 확신이 차올랐던 것이다.
에스빠냐 광장을 지나 최후의 1인으로 남은 황영조가 숙명의 라이벌인 일본 선수와 나란히 달리기 시작하자, 인야의 손은 바들바들 떨려왔다.
마침내 마라톤 코스 중 가장 험난한 오르막인 '몬쥬익'으로 접어들었을 때, 인야는 두 손을 모아 생전 찾지도 않던 하느님께 기도했다.
"하느님, 제 모든 기운까지 그에게 주십시오. 그가 이기면 저 역시 이 지독한 현실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승점을 2km 남겨둔 내리막길, 황영조가 마침내 일본 선수를 따돌리고 치고 나갔다.
인야는 안절부절못하며 거실을 서성였다. 현지에 살면서도 태극기 한 장 준비하지 못한 미안함과 뒤늦은 후회가 몰려왔지만, 온몸의 감각은 이미 트랙 위의 선수와 하나가 되어 있었다.
마침내 올림픽 스타디움의 문이 열리고, 황영조가 압도적인 거리 차로 당당히 1위로 들어서는 순간, 인야는 숨이 멎는 듯했다.
56년의 세월을 건너온 민족의 한이 풀리는 드라마틱한 승리였다.
결승점을 통과한 선수가 트랙 위에 쓰러졌을 때, 인야 역시 텅 빈 '침묵의 집'에서 홀로 뜨거운 박수를 치며 눈물을 닦아냈다.
그 승리는 실패한 전시회로 상처 입은 화가의 영혼에 던져진 가장 눈부신 구원과도 같았다.
축제는 끝났고 사람들은 하나둘 도시를 떠났다.
하지만 인야는 떠날 곳이 없었다. 밀린 화랑 임대료를 갚기 위해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몽땅 털어 넣어야 했고, 팸플릿 제작을 둘러싼 복잡한 금전 문제도 여전히 그의 발목을 잡았다.
아픈 속을 부여잡고 새벽 통증에 잠을 깨는 날들이 이어졌다. 꿈으로 잠을 설치다가 새벽에 형한테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 안녕하시고?" "근데, 이번 추석에는 못 갑니다......" 정신없이 전화를 끊고 나니, 뭔가 아쉽기 그지없었다.
며칠 뒤 성당 작업실에서 그림을 마주하고 행복해하던 후안 마 어머니의 미소는, 작가를 떠난 작품이 스스로 생명력을 얻어 타인에게 가닿는 신비로운 순간을 인야에게 선물해주었다.
그래도 '전시 마무리'가 숙제처럼 남아 있었다.
물론 며칠 전에 인야는, 그동안 빚으로 안고 있었던 '화랑 임대비'를 결국 아르바이트 보수를 받아, 이미 보관 중이던 그 전의 다른 아르바이트 보수와 탈탈 털어 지불하며 마무리를 지었다.
그런데 조금 의외였던 건, 화랑 주인이 인야를 자신의 집에 식사 초대까지 해서 갔다 왔다는 사실이다.
'글쎄,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내 진심이 느껴진 게 아니었을까?(허긴, 그 여자는 애당초 내 상황과 어려운 처지를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다. 그런데도 내가 최선을 다해 일을 처리하는 것에 믿음이 생겼던 걸까?' 하기는 했지만,
그런데 인야가 더 놀랐던(웃기는) 건, 처음 화랑을 계약할 때부터 전시 기간 중에도 내내 사무적이기만 했던 그 여자는, 더구나 작품 판매 건에서도 인야가 하도 깐깐하게 굴어선지 별로 좋은 시선마저 보내지 않았었는데... 인야의 그림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도 모자라, 어색할 정도로 태도마저 친절하게 확 바뀌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전시와 관계되는 일 중 아직 끝내지 못한 것도 있었는데, 'G사' 측의 팸플릿 협찬 문제가 끝내 말썽이었다.
인쇄소 측의 실수로 원래의 계획대로 인쇄되어 나오지 않은 것이 비비 꼬여, 아직도 해결되지 않아서였다. 그러니 'G사' 측의 독촉 전화가 계속 걸려오곤 했는데, 원래 대금을 전시자에게 양도하기 전에는 단 한 번의 전화도 없던 회사가, 문제 발생 후부터 하루에도 두세 차례 전화를 걸어오며 인야를 괴롭히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 장본인인 최 아무개라는 사람은 올림픽이 끝나자마자 한국으로 돌아갔다 하고, 그래선지 그 누구도 해결하려 들지 않는 상황이었는데, 인쇄소 측도 자신들의 실수였음에도... 나 몰라라 하는 것 같았고, 돈을 갖고 있는 심도 그 문제에 대해선(다른 문제도 마찬가지지만) 가타부타 일체 언급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결국 인야가 나설 수밖에 없어, 어쩔 수 없이 인쇄소에 찾아갔다.
그러면서도 인야는 분명 자신의 행동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돈과 관계된 일이 미결 상태라 어떻게든 빨리 매듭짓고 싶었고, 또 그런 일로 인해 더 이상 구설수에 오르기도 싫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관계자들은 다 무사태평인데, 왜 인야 자신만이 조급해 하고 그런 일에 불편해 하는지 의문이기는 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모른척하고 비벼 뭉개며 살고 있는데, 왜 나는 못할까?'
그러면서 자신이 잘하는 짓인지조차도 의심쩍어지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런 모든 일들이 '돈'에서 비롯된 것 같았다. 인야가 충분히 가진 사람이었다면 애당초 그런 일들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테니까.
올림픽의 화려한 불꽃이 꺼진 뒤, 영사관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세간의 관심이 적고 수발이 힘들어 모두가 기피하던 '장애인 올림픽(패럴림픽)'의 자원봉사직을 맡아달라는 요청이었다.
"나 먹고살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무슨 봉사?" 하며 처음엔 짜증이 났지만, 일손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는 영사관의 사정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인야는 자신의 전시가 끝난 뒤, 올림픽도 끝나고... 그로부터 약 한 달 뒤에 열리는 '장애인 올림픽'의 봉사자가 된 것이다.
인야는 거기서 한국에서 온 선수들의 통역과 뒷바라지를 하기로 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그것은 봉사가 아니라 치열한 생존의 현장이었다.
선수단이 도착하는 날부터 인야는 일을 시작해야 했는데, 뇌성마비 장애인 선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사람의 손길 없이는 불가능했다(화장실, 식당, 선수촌 침실 등 화장실 수발부터 식당에서의 식사 보조, 선수촌 침실까지 인야는 온종일 휠체어를 밀고 끌며 전쟁 같은 하루를 보냈다).
그러다 보니,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 모르게 아무 정신이 없다가... 그들이 안락하게 침실에 들어가는 것까지를 보고 나서야 겨우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자정이 가까워져 있었는데, 인야는 녹초가 돼 있었다.
'글쎄, 보람찬 일일 수는 있겠지만, 앞으로 보름여 그 일을 해야 한다니......'
한심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드디어 장애인 올림픽도 개막을 해서, 인야는 원색적인 노란색 재킷을 입고 다시 몬쥬익으로 향했다.
개막식 날, 인야는 선수단의 일원이 되어 휠체어를 밀며 몬쥬익 메인스타디움의 트랙을 밟았다.
꽉 찬 관중석과 뜨거운 조명 아래 서자 가슴이 뭉클했다. 특히 맹인견이 최종 성화 주자를 안내하는 장면에서는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TV 화면 속에는 노란 재킷을 입고 환하게 웃는 인야의 모습이 기록되었고, 그는 비로소 자신이 이 거대한 축제의 가장 낮은 곳에서 소중한 톱니바퀴가 되었음을 실감했다.
선수들의 경기 일정에 맞춰 숙소에서 경기장까지 이동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피를 말리는 작업이었다.
조직위원회에서 운영하는 셔틀버스를 기다리고, 무거운 휠체어와 각종 부속 장비를 챙겨 타고 내릴 때마다 인야의 등은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었다. 여기저기 찧고 부딪히며 상처가 나기도 했지만, 쾡하니 들어간 눈을 비비며 자정이 다 되어서야 '침묵의 집'으로 돌아오는 날들이 반복되었다.
인야가 전담한 종목은 '보치아'였다.
뇌성마비 중증 장애인들이 공을 던져 표적구에 가까이 붙이는 이 경기는 고도의 집중력과 두뇌 싸움이 필요했다.
인야는 자신이 돌보는 선수들이 비록 몸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해도, 일반인보다 뛰어난 계산 능력과 승부욕으로 경기를 지배하는 모습에 경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결승전 날, 인야는 인생의 가장 비정한 단면을 목격했다.
세계 최강의 실력을 갖춘 한국 선수단은 덴마크와 금메달을 다투었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한국의 승리가 확실시되는 상황이었으나, 심판진의 편협한 판정이 찬물을 끼얹었다.
덴마크 팀은 오심을 이용해 비굴할 정도로 잔인한 수 싸움을 벌였고, 주최국인 스페인 관계자들은 이를 묵인하며 사태를 무마하려 들었다.
"이건 말도 안 돼요! 공정한 판정이 아니라고요!" 인야는 울화통이 터져 소리쳤지만, 이방인 자원봉사자의 외침은 거대한 시스템의 장벽에 부딪혀 흩어질 뿐이었다.
결국 금메달을 빼앗긴 한국 선수들은 통곡하며 시상대 위에 은메달을 내던졌다. 두 눈으로 그 억울한 현장을 지켜본 인야 역시 주저앉아 눈물을 쏟았다.
정직과 성실이 통하지 않는 냉담한 현실, 그 비정한 세계 앞에서 인야는 찢어지는 마음으로 선수들을 껴안았다. 세상은 정의롭지 않았고, 신은 누구의 편도 아닌 듯 보였다.
선수들이 한국으로 떠나던 날, 인야는 그들 편에 한국으로 보낼 몇 통의 편지를 실어 보냈다.
20여 일간의 사투가 끝나고 다시 혼자가 된 방 안에서 인야는 앨범 속 노란 재킷을 입은 자신의 사진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광대뼈가 툭 튀어나올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추석을 맞아 인야는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어머니는 상기된 음성으로, "온 가족이 다 모여 있고, 곧 모두가 성묘에 갈 거란다......" 하시면서, "내년 추석에는 와서 같이 지내자."고 하셨는데,
'어머니! 저야, 내년 추석에 가도 괜찮고, 또 그럴 수도 있지만, 어머니께선 더욱 늙어계실 텐데요......' 하는 게 인야의 심정이었다. 그렇지만 어머니의 목소리가 건강한 것 같아... 무엇보다도 마음이 놓였다.
'아, 나는 비록 훌륭한 아들이 못 될지라도, 어머니께서 갖고 계신 나에 대한 믿음에 반한 자식이 되어선 안 된다.' 하는 다짐을 했다.
그런데 추석이라선지, 인야는 아르바이트하는 집에서 점심을 너무 잘 대접 받았고... 돌아와서는 낮잠도 한 숨 잤다.
그런데 바르셀로나에도 밤하늘에는 둥근달이 떠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인야는 그 지겹게 끌던 팸플릿 문제도 해결했다.
여기 바르셀로나 인쇄업자에게 잔여 지불액을 갖다 주는 것으로 모든 걸 마무리 지었던 것이다.
그런데 인야를 어찌 보았는지, 그 인쇄업자가 계속 인야에게 '좋은 사람' 운운하더니, 자기 별장(시체스(Sitges) 소재)에서 '축제'가 있다며 주말을 거기서 같이 지내자고 초대까지 하는 것이었다.
의외이기도 했지만 고마운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인야가 일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했던 건 사실이다. 그런 걸로 보면, 어쨌거나 사람과 사람 간의 일은 항상 정직하고 성실하게 하다 보면 결국엔 통한다는 것도 새삼스럽게 인식하게 되었다. 그동안 그 돈을 마련하느라 바쁜 봉사일 와중에도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고, 또 그 보수를 선불로 요구했어야만 했다.
그런데 그 약속(자기 별장에서 축제를 함께 지내자는)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 당시 인야는 심신이 너무 지쳐 있었기에, 정말 간절하게 어딘가에 가서 좀 쉬고도 싶었었는데, 어차피 돈도 없는 처지에 그러지 못하던 차에 그 인쇄업자가 그런 제안을 해서 내심 기대했었는데, 끝내는 말뿐이었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그에게 욕을 퍼부어주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런 사람들을 경멸하기도 했다.
'글쎄, 어디든, 스페인이든 우리 한국 사람이든, 원래 떠벌이는 사람들이 약속도 안 지키는 법이지!' 하면서 그 일을 잊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인야에겐, 또 다른 일인 집세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인야는 생각했다. '아, 내가 여기서 2년 반쯤 살았는데... 돈 때문에 빠듯거리며 산 기억밖에 없구나!' 할 수밖에 없었다.
시내를 가다가 보니 거리엔 '책 할인 축제'가 있었고, 책들이 제법 싸 보였다. 미술에 관한 책들 몇 권이 인야를 유혹했지만, 어쩔 수 없이 돌아서고 말았다.
날이 선선해지면서 키만 멀쑥하게 크던 코스모스도 꽃망울을 터뜨렸다.
인야가 한국에서 가져온 코스모스가 3년째 맥을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앞집의 노부부가 어제 오후에 시내로 내려갔는지 문이 굳게 닫혀있었고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별로 가까이 지내지는 않지만 집 주위에 사람 구경 하기가 힘들다 보니(호아낀씨 가족은 아직도 휴가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괜스레 더욱 적적해지는 기분이었다.
오후에 전화가 왔는데, 영사관이었다.
지난번 장애인 올림픽 봉사의 대가로 수고비 얼마를 마련했으니 받으러 오라는 것이었다. 순간, '돈 받고 하는 게 무슨 봉사야?' 하는 거부감과 뭔가 모를 허탈감도 함께 했는데, 인야는 '자원봉사'였기 때문에 그런 건 기대하지도 않았었고, 애당초 그런 수고비가 있다는 얘기도 없었기 때문에... 생뚱맞은 일이기까지 했다.
굳이 준다 하니 받기는 하겠지만, '봉사자'라는 단어가 퇴색되는 기분이라 썩 내키는 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전화를 끊고 생각해 보니, '내 주제에 무슨?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받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면서 인야는, 거의 포기 상태였던 '안달루시아(Andalucía) 여행'을 떠올렸다.
'내 처지에 무슨 여행?' 하는 생각이 없지는 않았지만, '이번 주 내에 숙제를 해서 학교에 제출하고, 다음 주 초에 떠나자!'
일단 마음을 좀 느긋하게 먹고,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이용하기로 했다.
'아, 그동안 내가... 너무 힘들었다......'
지독하게 뜨겁고도 서러웠던 1992년 바르셀로나의 여름.
인야는 그 거대한 축제의 화려한 겉모습과 장애인 선수들의 처절한 눈물을 모두 가슴에 새긴 채, 새로운 희망을 품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