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소궁주, 이제 그만 궁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지금 여길 떠나면 안 돼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직 사람들의 회복이 덜 됐어요.”
“그 사람들은 백록파에서 돌봐주겠지요.”
“그렇지만… 어!”
“소궁주?”
검선자 주묘연은 대화 도중 설화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듯싶은 천진난만(天眞爛漫)한 표정으로 얼굴에 하나가득 미소를 짓자 의아한 생각이 들어 말을 걸려고 했다.
“끼야~!”
“소궁주?”
“묘연 언니, 서방님이, 서방님이 온대요!”
“상공이오? 그게 무슨?”
주묘연은 설화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궁으로 돌아가는 문제를 이야기하다 난데없이 상공이 온다며 좋아하다니…?
“묘연 언니, 나 어때요? 아냐, 옷을 갈아입을까? 그래, 그게 좋겠어!”
“진정하세요, 소궁주! 도대체 상공이 언제 오신다는 거예요?”
“지금 백록산을 지나고 있대요!”
“그게 무슨…?”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설화 소궁주는 물론 상공도 신비스런 구석이 있었다. 수년간 한솥밥을 먹으며 지냈지만 지내면 지낼수록 더욱 모를 사람들이었다.
***
“무량수불, 시주에게 아내가 있었단 말이오?”
보리대불은 자신의 물음에 고개로 대답하는 귀선(鬼仙) 백호나한을 새로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신선들과 요괴, 마인들은 도(道)를 얻기 위해 영원히 수련하는 존재들이었다. 그것은 귀선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선기와 마기를 함께 지니고 있어 내부에서 그 기(氣)가 상충(相衝)하므로 더욱 용맹정진(勇猛精進)해야 하기 때문에 일가(一家)를 이루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부부(夫婦)의 연(緣)으로 맺어진 신선이 아예 없지는 않지만 극히 드문 일이었다. 보리대불은 백록산에 거처를 두고 있는 여신선이 있는지 기억을 더듬었지만 백록산은 백록파라는 무림 문파가 자리잡고 있을 뿐 보리대불의 기억에 백록산엔 여신선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그가 조정의 장수라는 신분에 생각이 미쳤다.
“혹, 사바세계의 여인을 아내로 두고 있소?”
“그게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아, 아니요. 단지 놀라워서….”
“그보다 언제까지 날 쫓아다닐 생각인가?”
라혼은 보리대불이라는 선불을 제압하고 그에게 수미산에 데리고 가줄 것을 청했다. 그러나 보리대불은 귀선을 선산(仙山)에 데리고 가는 일에 주저했다. 그래서 수미산에 있는 선불(仙佛)들의 뜻을 묻기 위해 한발 먼저 수미산에 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수미산의 선불들은 의도를 알 수 없는 귀선을 선산에 들이는 것에 난색을 표했고, 일단 옆에서 지켜본 연후 판단을 내리는 것으로 그의 뜻을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보리대불은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화둔술을 두 번이나 사용해 도망을 갔는데도 라혼이 쫓아왔다는 사실이었다. 라혼은 보리대불의 기운을 좇아 이미 결계로 보호받고 있는 수미(須彌)의 위치를 파악한 지 오래였다. 결계 안에서 바로 화둔술을 쓸 수 없었는지 어느 한곳에 나타나 다시 기운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다시 나타난 것을 보면 대충 위치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지금 보리대불은 귀찮은 혹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
“내가 없으면 수미에 오르지 못합니다, 무량수불.”
“그럼 법술이나 가르쳐주든가?”
“허허허, 제 보잘것없는 법술이 어찌 시주의 그것에 비하겠습니까?”
라혼은 자신을 감시하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드러낸 보리대불의 의지에 찬 눈빛에 쓴웃음을 지었다. 세상에 아무 대가 없는 일이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는 순간이었다. 수미의 위치를 알게 된 대신 혹을 하나 얻었으니 말이다. 라혼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길을 걸었다.
검은 갑주를 입은 장수와 굴강한 인상의 승려가 아무 말 없이 잘 닦인 산길을 지나 도착한 곳은 삼엄한 경계가 펼쳐진 백록파 입구였다.
“멈추시오. 귀공이 무슨 일로 백록파를 찾았는지 모르나, 본파는 현재 봉문 중이오. 그러니 이만 산을 내려가주시오!”
“본인은 이곳에 있는 나의 아내를 찾아왔소.”
“아내? 귀공의 아내가 누구인데 여기서 아내를 찾는단 말이오?”
라혼은 경계의 기색이 역력한 도사의 물음에 대답했다.
“나의 아내는 천상천화요!”
“천상천화가 당신의 아내라고? 그럼 당신이 관부 제일 고수 백호나한이겠구먼?”
“그렇소. 본장이 백호나한 라혼이오!”
백록파의 1대 제자 낙성검사(落星劍士) 현고(賢故)는 갑주까지 그럴듯하게 차려입고 자신이 백호나한이라 주장하는, 얼굴이 반반한 사내를 유심히 살폈다. 맹룡과강(猛龍過江), 용맹스러운 용만이 강을 건널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상대는 무공을 익힌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현고는 은밀하게 백록파 제자들만 알아볼 수 있는 손 움직임으로 본당에 간적(姦敵)이 왔음을 알렸다. 검은 갑주의 사내는 별 볼일 없어 보였지만 같이 온 중의 안광(眼光)이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었다.
“흥! 이젠 본파도 별 볼일 없어진 모양이군. 백호나한이 남례성에서 진토인들의 반란을 토벌하는 장수라는 것을 천하에 모르는 자가 없거늘….”
라혼은 백록파의 도사들이 우르르르 몰려나오며 도사답지 않게 노골적인 살기를 드러내자 슬쩍 미소지으며 보리대불을 바라보았다.
“나는 천상천화를 찾을 테니 여기는 대사가 수습하시오!”
“어? 아니….”
라혼은 주변의 마나를 동결시키고 그대로 몸을 활처럼 휘게 한 뒤 그 탄력을 이용해 순식간에 몸을 이동하는 최상승의 궁신탄영(弓身彈影) 수법으로 이제 막 포위망을 형성한 백록파의 도사들의 머리 너머로 몸을 날렸다.
“어?! 잡아라!”
“매스 서제스천Mass Suggestion! 저 중을 쓰러뜨려야 날 쫓을 수 있다!”
그리고 쫓아오는 백록파의 도사들에게 [매스 서제스천Mass Suggestion : 집단 암시] 주문을 걸어 우선순위를 반대쪽에 있는 보리대불을 쓰러뜨려야만 쫓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만들었다.
“중부터 쓰러뜨리고 놈을 쫓아라!”
―와아~!
라혼의 주문에 걸린 백록파 도사들은 본당에 이르는 계단으로 뛰어오르는 검은 흑갑(黑甲)의 사내를 쫓지 않고 반대쪽의 보리대불을 쳐갔다.
“이, 이런….”
보리대불은 주변의 정기(精氣)가 마치 결계가 쳐진 양 움직이지 않자 본신 내공만을 사용해 죽어라 덤비는 도사들을 맞았다. 도사(道士)는 신선이 되기 위해 수련하는 자들이었다. 그런 의미로 선불인 보리대불 입장에선 이들이 후배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가차 없는 살수를 사용해도 수세적인 입장밖에 취할 수 없었다. 귀선의 술수로 인한 미혹에 빠진 것이 분명한 이들을 해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주변 정기가 꿈쩍하지 않으니 도사들이 휘두르는 장검(長劍)을 오랫동안 잊고 있던 체술(體術)을 사용해 피하느라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법술(法術)을 사용하지 못하는 까닭에 보리대불은 그저 절정 수준의 무공을 지닌 고수일 뿐이었다.
계속 곁에 있으려 하면서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던 보리대불을 억지로 써먹으며 골탕을 먹인 라혼은 백록파의 본당 연무장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백록파의 명성과 규모치고는 상당히 협소한 연무장엔 많은 도사들이 검을 뽑아들고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멈춰라! 감히 백록산에서 소란을 일으키다니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구나!”
걸걸한 말투에 단단한 바위를 연상시키는 백록파 장문인(掌門人) 만근거암(萬斤巨巖) 오중자(晤重子)는 무거운 분노성을 터뜨렸다. 이미 인세의 무영살수에게 형제이자 든든한 후원자인 장로 오문자(晤問子)를 잃었다. 그런데 간적들이 한번 본산을 불태웠다고 또다시 기망(欺罔)하려 하니 그 분노가 하늘을 찌를 지경이었다.
“나는 백호나한 라혼이오. 오해가 있으신가 본데, 본장의 아내인 천상천화를 불러주신다면 오해를 풀 수 있을 것이오!”
“이, 이놈이 천강진(天岡陣)으로 포진(布陣)하라!”
“존명!”
백록파가 자랑하는 건곤천강진(乾坤天岡陣)이 순식간에 짜이면서 무서운 기세로 상대를 압박했다. 라혼은 분노에 눈이 멀고, 귀가 막힌 이들을 말로써 설득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막무가내(莫無可奈)인 상대를 대하는 방법은 일단 진정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과, 힘으로 제압하는 방법이 있는데 라혼은 그 후자를 택했다.
―쿠웅!
―파바바바바바박, 쿠르르릉~!
라혼은 진각(震脚)의 형식을 빌려 공력을 땅의 기운과 상충시켜 백록파 연무장 전역에 걸쳐 땅거죽을 뒤집고는 몸통 전체로 권강(拳剛)의 그것과 같은 철산고강(鐵山鼓剛)을 시전했다. 철산고강의 충격파는 파곤진경(破坤震勁)에 의해 뒤집힌 땅거죽의 흙덩어리를 사방으로 비산(飛散)시켰다.
“우와악~!”
“살려~!”
―퍼버벅~! 후두둑~!
연무장에 라혼을 압박하는 건곤천강진을 구성한 72검사들은 물론이거니와 거리를 두고 라혼을 견제하던 도사들은 난데없는 흙벼락을 맞아야 했다. 그리고 천지가 진동하는, 그야말로 경천동지(驚天動地)할 그의 신위에 백록파 어느 누구도 할 말을 잊었다.
“이, 이럴 수가…? 사람이 어찌?”
라혼을 중심으로 부채꼴로 뻗은 형상으로 깊게 파인 흔적은 방금 그것이 꿈이 아님을 말해주었다. 얼마간의 말없는 대치는 하늘에서 그야말로 눈꽃처럼 하얀 무언가가 떨어져 내림으로써 장내의 기운이 포근하게 바뀌었다.
“꺄아~! 서방님!”
“설화야!”
눈처럼 하얀 백의를 입은 천상천화가 검은 갑주의, 하늘에서 온 천장 같은 장수의 품에 몸을 던지는 것을 지켜본 백록파의 고수들은 그제야 저 막강하기 그지없는 자가 최소한 적이 아님을 알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허허허, 이런 귀한 손님을 못 알아보고 본도가 실수를 한 모양이구려!”
만근거암 오중자는 천상천화의 반응을 보고서야 검은 갑주의 장수가 천상천화의 남편인 백호나한임을 알았다. 어찌하여 남례성에 있어야 할 백호나한이 멀고 먼 북지성까지 올 수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방금 전 보였던 신위라면 충분히 가능도 할 것 같았다.
“아닙니다, 도장. 그보다 제 일행이 귀파의 제자들과 시비가 붙었으니….”
“아! 그러고 보니 현고가 보이지 않는다 했는데 그런 일이 있었구려….”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강적이 친구가 되었을 때 그는 무엇보다 믿음직스럽게 느껴진다. 진각만으로 천지번복(天地飜覆)의 신위를 보인 적이 친구가 되자 두려움 가득한 시선은 순간 존경의 염(念)이 가득한 시선으로 바뀌었다. 백록파는 원래 수도하는 도인들의 문파이나 동시에 힘을 숭상하는 무림 대파이기도 했다. 강하다는 것은 무림인인 백록파 제자들에게 가장 매력적으로 보이는 조건이었다. 그것은 어리고 젊은 제자들뿐만 아니라 장문인인 오중자도 마찬가지였다.
“본장은 과분하게도 본 백록파의 장문인 자리에 있는 오중이라 하오.”
“다시 한 번 인사드립니다. 라혼입니다.”
오중자는 자신의 신분을 내세우지 않는 백호나한을 보며 눈가에 이채를 띠었다. 보통은 자신의 관직과 신분 등을 밝히는 것이 예(禮)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의문은 이내 풀렸다.
“죄송합니다, 장문인! 제가 원래 남례성에 있어야 하나 지금은 약간 사정이 있어 군영을 이탈한 처지라 제가 이곳에 왔었다는 것을 숨겨주었으면 합니다.”
“알았소. 본파의 체면을 보아 내력을 숨기지 않은 장군께 감사드리오.”
그렇게 서로 겸양의 말이 몇 마디 더 오가고 라혼은 조금은 쀼루퉁한 기색의 설화와 함께 설화의 거처가 되어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백록파의 본당은 인세의 공격에 거의 타서 재로 변해 성한 곳이 그리 많지 않았지만 설화가 거처로 삼은 곳은 그나마 탄 냄새나 화기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곳이었다.
“피! 너무해. 나는 서방님이 온다고 해서 얼마나 기대했는데… 싸움이나 하고!”
“그럴까 봐, 너에게 미리 연락했잖아! 네가 너무 늦은 거야! 설화가 마중 나왔으면 내가 무엇 때문에 백록파 인물들과 싸웠겠냐?”
서방님에게 투정을 부리려던 설화는 자신이 미리 나가 기다렸다면 괜한 다툼은 없었을 것이란 말을 듣자 할 말이 없었다.
“그런… 거…였어요?”
“그래! 이 철없는 아가씨야!”
라혼은 곤란한 표정을 짓는 설화의 귀여운 모습을 보고 자연스런 미소를 지으며 설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설화도 서방님의 자상한 미소와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고 얼굴을 마주 보며 아름답기 그지없는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