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스님 입적 후 권력 공백 메우던 과정에서 혼란 거듭
동국대 불국사 인사 둘러싸고 극한 대립, 종단 전체 혼미
정화의 두 축이었던 청담 스님과 경산 스님이 1960년대 후반 종단 발전 방향을 놓고 부딪혀 청담 스님으로 정리된 후부터 청담 스님 입적 때까지는 종정 중심의 종헌 체제와 관련없이 청담 스님 중심으로 종단이 운영됐다.
‘종단 탈퇴 선언’이라는 극약 처방을 써서 청담 스님이 종단을 확실하게 장악한 1969년부터 1972년까지 3년 여간 ‘팍스(pak’s) 조계종’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 시기 군승파견, 세계불교지도자대회 개최, 중앙교육원 개설, 총무원 청사 기공 등 굵직한 종단사업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종정 중심의 종헌에도 불구하고 윤고암 종정과 총무원장 청담 스님 사이에 갈등은 없었다.
청담 스님은 3대 고암 스님에 앞서 종정을 역임한 ‘종정급 총무원장’이어서 종헌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보살의 화신’으로 존경받던 고암 스님의 원만한 화합형 행보도 평화를 가져온 힘이었다. 통합종단 출범 공헌 등 여러 면에서 유일하게 청담 스님에게 필적할 인물인 경산 스님은 ‘팍스 조계종’ 기간 동안 천축사 무문관에 입방해 수행에 몰두했다.
청담 스님이 떠난 빈 자리가 경산 스님에게 돌아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1년 여간 청담 스님 뒤를 이어 총무원장을 맡았던 석주 스님 뒤를 이어 경산 스님이 총무원장에 취임했다. 하지만 상황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통합종단 출범 후 발생한 사회적 물의로 인해 정화의 취지가 많이 퇴색해 있었고 정화의 주역들은 대개 지방 사찰에서 수행하면서 종단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 자리를 정화와 관련 없는 인물들이 차지한데다 일부 자격 없는 출가자들도 등장했다. 종단 발전을 위한 명목이었지만 종단 지도부가 봉은사 등 사찰 토지를 다수 매각하면서 토지 매각에 대한 도덕적 해이를 불러온 점도 문제였다.
경제가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일부 사찰의 수입이 늘어나 주지 인사가 중요한 이슈로 등장했다. 여기에다 이른바 ‘상좌정치’라는 병폐가 겹쳤다. 실질적 권한은 종정에게 있었기 때문에 종정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집행부의 행정에 간여할 수 있었다.
종정 고암 스님과 총무원장 경산 스님 사이에 첫 갈등이 경산 스님 총무원장 취임 4개월 후인 1973년 5월 29일 불거졌다. 총무원장 경산 스님이 제출한 사회국장 해임안을 종정 고암 스님이 거부했다. 이에 대한 반발로 6부장이 사표를 제출한다. 형식상이었는데 고암 스님은 이를 수리한다. 같은 시기 감찰부장이 특별 분담금 시비로 남해 보리암 주지를 폭행하는 사건이 겹친다.
이 문제가 언론에 보도되고 시끄러워지면서 집행부는 곤혹스런 처지에 놓인다. 10월에는 동화사 주지에 총무원장 경산 스님의 상좌가 연임되자 이를 반대하는 수좌들이 총무원 청사에서 난동을 부리는 일이 일어난다.
종단이 계속 시끄러워지자 고암 종정은 종회 기능을 유보시킨다. 이에 1974년 1월 3일 대구 관음사에서 종회부의장 녹원 스님을 회장으로 하는 ‘종권수호회’가 발족하여 고암종정의 종회기능 유보를 반대했다.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 스님들도 “중앙종회 기능을 유보시킴으로써 종단 내외의 불화와 무질서를 가져오게 했다”며 “15일까지 종회를 열지 않으면 전국승려대회를 개최, 반대운동을 양성화하겠다”고 밝혔다.
15일까지 종회 기능이 회복되지 않자 이들 사찰을 중심으로 1974년 1월17일 청룡암에서 ‘전국교구본사연합회’가 결성되어 자체종무행정을 결의하여 종회 유보사태에 대해 반발했다. 1월27일 고암 종정은 “총화와 정진으로 정화를 이룩하자”는 특별담화문을 발표하여 당초의 결정을 번복하고 유보됐던 종회를 열도록 교시했다. 가까스로 2월1일~6일 제34회 정기중앙종회가 열리자, 회의장은 난장판이 됐다. 종회에서는 그동안 쌓였던 모든 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서로 헐뜯다가 난투극으로 치닫는다.
대한불교법조인회가 한창 진행되던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을 위해 나서고 해인사 스님들은 관광지 개발이라는 미명아래 자행되는 파괴를 막기 위해 가야선 공원화 반대운동을 펼치고 있는 터에 종단은 몸싸움까지 펼치며 종단의 위신을 추락시켰다.
동국대 관선이사체제로 전락, 수좌들까지 나서 종식 호소
상좌 전횡 폐해 겪은 종단, 종정 기준 ‘힘 있는 문중 제외’
이 해 5월에는 불국사 주지 문제가 터졌다. 전임 주지 범행 스님이 신임 주지 황진경 스님의 발령을 반대하고 주지 인계를 거부하며 총무원을 상대로 제소했다. 불국사 주지 인사에다 동국대 문제가 겹쳐졌다. 동국대 문제는 표면적으로는 봉은사 토지를 매각해 사들인 당시 총무원 청사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벌어졌다.
그 이면에는 종단 내 갈등이 도사리고 있었다. 동국대 이사장 선출을 둘러싸고 서로 반목하면서 학교운영에 차질을 빚었다. 수덕사 계열로 이른바 ‘선학원파’인 채벽암 스님 후임으로 통도사의 박벽안 스님이 동국대 이사장에 올랐는데 이를 둘러싸고 서로 갈등이 빚어졌다.
불국사 주지인사ㆍ동국대 문제 해결을 위해
1974년 6월 열린 종무행정 지도위원회 모습.
종단의 간부이며 학교법인 이사인 한 스님이 당시 서돈각 총장을 무고하는 일이 벌어졌다. 자신이 미는 스님을 이사장으로 밀지 않아서라는 것이 당시 언론의 분석이었다. 결국 해당 스님은 구속되고 서돈각 총장과 전 현직 이사장도 공금 전용 혐의로 입건됐다. 스님들 사이의 갈등이 소송으로 번져 결국 학교 이사진 대부분이 연루되는 아픔을 겪은 것이다.
이로 인해 학교는 1974년 6월11일 결국 관선이사 체제를 맞는다. 동국대 문제와 불국사 주지 인사 건은 서로 얽혀 있었다. 불국사 주지 인사에 등장하는 인물이 동국대 문제에도 등장했다. 자칫 하면 동국대처럼 불국사도 관선 관리인을 파견할지 모르는 위기에 놓이자 종단은 수덕사 계열로 종단에 몸담지 않고 존경받는 선승으로 있던 월산 스님을 모신다.
스님은 “분규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절에 부임할 수가 없다”며 주지로 있던 법주사에서 종적을 감추면서까지 사양했지만 설득 끝에 불국사 주지를 맡게 된다.
불국사 주지 임명을 둘러싼 분쟁에다 동국대 관선이사 체제로 인해 종단은 혼란을 거듭한다. 조계종 신도 100여명은 1974년 6월21일 총무원 회의실에 모여 손경산 총무원장을 면담, 불국사와 동국대 재단분규 등 최근 야기된 불미스러운 사태에 대해 추궁하는 한편, 조속한 수습을 촉구했다.
서울, 수원, 대구 등지에서 모인 신도들은 이날
① 총무원은 무모한 인사조처를 철회할 것
② 무능한 종정과 총무원장은 사퇴할 것
③종단 내 승려들을 정화할 것 등을 결의했다.
한편 이같은 사태를 수습키 위해 이날 모인 종정지도위원회는 강석주(전 총무원장) 스님 등 7명의 원로급 스님으로 분규수습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각 사찰의 선원, 강원, 종비생 등 각계 각층에서 수행에 집중하던 사람들이 이러한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에 전국교구본사연합회를 위시하여 대덕 스님들이 이 문제를 수습하고자 ‘전국승려대표자회의’를 1974년 7월16일에 개최하고 중재에 나섰다.
1974년 7월18일부터 23일까지 제35회 종회가 열려 종정과 총무원장의 동반퇴진을 요구한다. 그러나 고암 종정의 사표는 처리되었지만 종단 집행부퇴진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손경산 총무원장 사퇴안은 철회되고 총무원 4부장의 사표를 수리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새로운 종정은 파벌색이 없는 스님으로 모시기로 한다. 문제는 종정 고암스님이 아니라 그 상좌에게 있다는 것이 당시 스님들의 판단이었다. 상좌 정치 폐해를 혹독히 겪은 것이다. 종정 추대과정에서 종정 후보로 물망에 오른 사람은 향곡(부산 묘관음사 주지), 서옹(백양사 조실), 운허(역경원장), 경봉(통도사 조실), 월산(불국사 주지)스님 등이었다.
한국불교의 대종(大宗)을 이루는 용성(범어, 해인, 신흥사), 수덕(수덕, 법주, 불국사), 한암(오대산 중심)스님과 통도사 등의 문중과 계보가 관련있는 스님은 제외하기로 한다. 이에 따라 가장 계보 색채가 옅다고 판단된 서옹 스님이 추대됐다.
하지만 이는 착각이었음이 곧 드러난다. 문제는 사람이 아니라 체제였다. 권한이 있는 한 그 힘을 이용하려는 세력은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 필연적 결과였다. 지루한 싸움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됐다.
[불교신문 2720호/ 5월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