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치주의의 과제
정태욱(郑泰旭)
한국 인하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I. 머리말
존경하는 길림대 선생님들 및 학생들 앞에서 발표를 할 수
있게 되어 대단히 기쁘고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오늘 함께 얘기하고 싶은 주제는 법치주의입니다. 법률가, 법학자들에게 법치주의는 지고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법치주의의 개념에 대하여는 많은 논의가 있지만, 저는 법의 고자인 灋와 佱로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灋자는 악을 물리쳐 공정함을 얻는 것을 의미하고, 佱는 모범으로 삼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灋는 법의 일을 말해주고,
佱는 일반화를 뜻합니다. 이렇듯 법치주의란 부정함과 부당함을 배제하는 공정성을 공동체의 기본원칙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고 할 것입니다.
저는 이와 같은 법치주의의 과제를 세 가지 차원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공동체 구성원 상호 간에 자의성을 배제하고 공평함을
얻는 것, 둘째는 국가권력 구성과 행사에서 자의성을 배제하고 공공성을 얻는 것, 셋째는 사법절차 자체에서 자의성을 배제하고 적정성을 얻는 것입니다.
이 세 과제의 관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법의
일차적 목표 사회 구성원들 간의 삶의 평화와 정의입니다. 구성원들의 삶과 공동생활에서 자의성을 배제하여
공평함을 얻는 것이 법치주의의 기본 과제입니다.
둘째, 그러한
법의 일을 위해 국가 공권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 공권력이 다시 해악의 원천이 될 수 있습니다. 공명정대해야 하는 국가권력이 오히려 부당한 억압과 수탈의 주범이 될 수 있습니다. 국가권력의 자의성을 배제하고 공공성을 확보케 하는 것이 법치주의의 핵심 과제입니다.
셋째, 앞의
두 방면의 과제는 궁극적으로 사법(司法)적 보호를 통해 달성됩니다. 재판절차가 부정하거나 부당하면 법치주의는 충족될 수 없습니다. 설사
결과가 옳게 나와도 누구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승소자도 아쉬움이 남고, 패소자는 승복을 못하고, 법은 권위를 잃습니다). 사법(司法)의 적정성은
법치주의의 필수 과제입니다.
II. 본론
위 세 가지 과제를 차례로 분설해 보겠습니다.
1. 사회관계의 공평성
1) 인적 공평
구성원들 상호 간에 법적 능력 혹은 자격이 공평해야 합니다. 모든 이들은 동등하게 법적 보호를 받을 자격을 부여받아야 합니다. 현대
대부분의 법질서는 신분제도를 철폐하였고, 민족, 성별, 종교, 정치적 성향 등에 관계없이 원칙적으로 권리능력, 의무능력, 행위능력, 책임능력의
평등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고정된 등급으로 나뉘어 있는 곳에서 공평함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법인도 감안해야 합니다. 전통적으로 교회와 같은 종교단체, 현대 사회에서는 기업과 같은 영리법인이 자연인보다 훨씬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단체와 법인에게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책임을 어떻게 귀속시킬 것인지가 중요한 법적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2) 물적 공평
구성원들 상호 간에 자산의 분포가 공평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컨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대립이 있습니다. 어떤
체제이든 부익부 빈익빈이 구조화된 체제에서는 공평함을 말할 수 없습니다. 가능하면 모든 사회 구성원들의
기초생활이 보장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나아가 ‘공동의 이익은 공동으로 향유한다’는 원칙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토지 가치, 자연 자원, 공동체의 지적 유산의 이익을 특정 소수, 혹은 특권층이 독과점하는
것은 막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공동의 비용은 공동으로 부담한다’는 원칙도 필요합니다. 과세의 공평이 요구됩니다. 나아가 국가 재정정책, 통화정책에서의 공평이 요구됩니다. 이익은 특정집단이 향유하는데 관련
위험과 비용은 일반 사람들이 부담하는 행태는 방지되어야 합니다.
3) 신상필벌
인적 지위와 물적 분배의 구조가 공평하게 제도화 되어 있다면, 그 틀 안에서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각자의 선택과 합의에 따르게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사적 자치와 자기책임의 원칙은 자의성을 배제하는 편리한 방법입니다. 다만, 개별적인 거래관계 및 상호관계에서 부정함과 부당함이 발생할 경우 그에 대한 시정이 필요합니다. 신상필벌(信賞必罰)이
요청됩니다. 계약은 이행되어야 하고, 부당이득은 반환되어야
하고, 손해는 공평하게 부담되어야 합니다. 공정경제를 해치는
부당 행위는 제재되어야 합니다. 행정벌 및 형벌권은 엄정하게 집행되어야 합니다. 중한 처벌보다 빠짐없는 처벌이 중요합니다. 예컨대 ‘유전(권)무죄, 무전(권)유죄’의 풍조는 법치주의의 실패를 의미합니다.
2. 국가권력의 공공성
1) 권력의 대표성
국가권력은 모든 인민의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공화국의 이상이며, 법치주의의 근간입니다. 권력이 공공성을 잃고 특정 집단에 의해 사유화된다면, 그 사회의
법치주의는 패망의 길로 빠집니다. 권력의 공공성을 위해 일차적으로 필요한 것이 대표성의 원칙입니다. 권력은 공동체 구성원들 전체를 대표해야 합니다. 정당은 인민의 총의를
결집하는 제도입니다. 여기에는 ‘복수정당제도―단일정당 혹은 지배정당제도’의 대립이 있습니다. 어떤 제도이든 인민 각계각층을 고루 대표하며 통일성을 확보하는 권력구성을 이루어야 합니다. 정부 기구를 구성하는 원칙으로는 ‘선거―선발’의 대립이 있습니다. 공적
책임감과 역량을 갖춘 인재들이 정부기구를 담당해야 할 것입니다. 권력을 쟁취한 정파가 정실(情實)에 따라 국가의 주요 관직을 채우는 엽관제도(獵官制度)는 통제되어야 합니다.
2) 권력의 책임성
대표성이 책임성까지 담보하지는 않습니다. 권력의 공공성을 위해 권력의 책임성이 추가적으로 필요합니다. 한편으로는
국가기구 상호 간의 견제와 균형, 다른 한편으로는 인민에 의한 책임추궁이 필요합니다. 국가기구 상호 간의 견제와 균형은 권력기구들 상호 간,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상호 간, 그리고 일당국가의 경우는 정당 내 권력기구들 상호 간 그리고 정당과 정부 상호 간에
견제와 균형이 필요합니다. 인민에 의한 책임추궁에는 선거나 소환을 통한 정치적 심판이 있을 수 있고, 인민의 개별적, 집단적 청원권도 보장되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공직자들의 위법행위에 대한 형사소추 및 사법적 심판이 가능해야 합니다. 감찰기구(고위 공직자에 대한 소추권한을 가진) 및 사법부의 독립성이 필요합니다(이에 대하는 아래 다시 설명합니다). 최고권력에 대한 책임성은 통상 정치적 책임 추궁의 형태가 될 것이며, 형사처벌은
임기 후 가능할 것이나, 심각한 경우는 임기 중 탄핵소추도 가능해야 할 것입니다.
3) 권력의 한계성
권력의 공공성과 관련하여 국가권력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
중요합니다. 한 공동체의 수준은 결국 개개인의 주체적 역량에 달려 있습니다. 개인적 삶의 영역 및 공동체의 자율적 영역에 국가의 개입은 자제되어야 합니다.
사상, 종교, 양심, 학문, 표현 등 정신적 자유는 가능한 폭넓게 보장되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관련 사회적 활동이 국가적, 사회적 해악을 야기할 경우 통제가
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해악을 제거하는 차원에
그쳐야지, 국가가 진리와 정신세계를 장악하려는 것은 과욕입니다. 그
순간 권력의 오용과 남용이 시작됩니다. 기본권 제한에 있어 ‘과잉금지의 원칙’을 헌법적 원칙으로 확립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국가권력의 과도한 간섭 혹은 침해의 경우에는 사법심사 혹은 헌법재판으로 시정하고
구제해야 합니다. 물론 헌법재판 등의 사법심사가 국가의 작용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사법부의 월권이 될 것입니다. 다만, 권력의 오류를 시정하고, 한계를 설정하는 기능은 사법부의 고유 과제로
인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3. 사법(司法)의 적정성
1) 공정한 사법(司法) 보장
사법절차는 매일매일 도처에서 수행되는 법치주의의 현장입니다. 사법절차의 공정성이 인민들의 법과 국가에 대한 신뢰를 좌우합니다. 재판절차는
공개적이고 공정하게 수행되어야 합니다. 법적 보호를 필요로 하는 당사자들이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법원을 찾는 데에 제약이 없어야 합니다. 소송의
제기에 다른 불이익이 없어야 합니다. 경제적, 사회적 이유로
법적 보호를 박탈당하거나 포기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재판절차는 공개적으로 진행되어야 하며, 수사과정에서도 변호인이 배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당사자들의 진술권과
방어의 기회가 보장되어야 합니다. 법관의 판결은 문서로 작성되어야 하며, 단지 결론만이 아니라 판결이유가 제시되어야 합니다.
2) 사법부의 독립
분쟁 당사자, 그리고
국가의 다른 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인 사법부는 재판절차의 핵심이자, 법치주의의 관건입니다. 법관은 의회의 탄핵 소추가 아니면 면직되지 않아야 합니다. 법관은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제척, 기피되지 않아야 합니다. 사법부는
전체 인민을 대표할 수 있는 공평무사한 법관들로 구성되어야 합니다. 최고재판부의 임명은 대통령 및 의회가
할 수 있으나, 일단 임명된 다음에는 다른 국가권력과 단절되어야 합니다. 국가권력만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권력으로부터도 단절되어야 합니다. 법관은
평생 혹은 정년 때까지 법원에 봉직하여야 합니다. 적정한 봉급이 주어져야 합니다. 법관이 부득이 전직할 경우는 교육직이나 다른 독립기관으로 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사법부는 공동체에서 고립되어 있고, 집행권 및 예산권이 없는 가장
미약한 권력이지만, 가장 존경받는 권력이 되어야 합니다. 아울러
고위 공직자를 조사하는 감찰기구도 법원과 같이 헌법적 독립기구의 위상을 확보해야 할 것입니다.
3) 법학의 자율성
법관의 신분은 사회적으로 격리되어야 하지만, 공동체의 법적 논의에서 격리되어서는 안됩니다. 다만, 공동체의 법적 논의는 사법부가 독점해서는 안됩니다. 다른 정치세력이나
경제세력이 주도해서도 안됩니다. 그것은 사법부의 독립을 해칩니다. 법적
논의는 인민들의 총의를 대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정치와 경제에서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대학과 학자들이
담당해야 합니다. 각 나라의 법체계에 상응하는 법학 체계가 구축되어야 합니다. 법원과 학계는 법적 논의에서 상호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학계가
대법원의 대법관 및 헌법재판소 재판관을 배출할 수 있어야 하며, 대법관과 재판관은 퇴임 후 다시 학계로
올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법률가들의 자격은 대학에서의 교육과 시험이 결정해야 합니다. 출제와 채점은 교수들이 주도해야 합니다. 교수직을 위한 특별과정을
따로 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며, 변호사 시험 및 박사과정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법조인이 지원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법학계가 자율성과 권위를 상실하면, 법치주의의
토대는 허약해집니다.
III. 맺음말
법치는 인치의 반대말이라고 합니다. 법은 단순히 사람의 명령이 아니라 원칙의 명령이어야 합니다. 그
원칙은 명령을 내리는 사람 자신도 따라야 합니다. 법은 어느 누구의 편도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의지하는 기준입니다.
법치주의의 이상은 비슷할 것이지만, 법치주의의 현상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가능한 종합하고자
하였지만, 아무래도 한국적 경험에 치우쳐 있을 것입니다. 많은
지적과 가르침을 구합니다. 거대한 역사의 나라 중국의 경험과 관점을 듣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