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를 만난 조운은 미 부인의 죽음을 고하며 공자 아두를 바치고, 자룡의 목숨 건 충의를 본 유비는 아두를 땅바닥에 팽개쳐 고마움을 표한다. 한편 장비는 장판교 위에서 홀로 조조의 군사와 맞서고 벽력 같은 호통과 살기 등등한 위세로 그들을 물리친다. 조인의 휘하에 부장 순우도라는 장수가 있었다. 이날 유비 일행을 추격하는 도중, 앞을 가로막는 미축과 한바탕 싸우다가 마침내 미축을 사로잡아 자기의 말 안장에다 붙들어 매었다. "오늘 첫째 가는 공훈은 유비를 사로잡는 것이다. 조금만 더 달려가면 유비를 따라잡을 수 있다. 다들 숨도 쉬지 말고 달려라!" 미축을 사로답은 순우도는 크게 기세를 올리면서 1천여 명의 수하 군사를 이끌어 소나기 쏟아지듯 급히 달려오던 길이었다. 순우도는 앞쪽에 한 떼의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져 도망가는 중에 한장수가 말을 타고 있는 것을 보자 곧장 그리로 말을 달렸다. 그를 보니 유비군의 장수임에 틀림없었다. 미축을 사로잡은 순우도는 다같은 장수로만 여기고 겁없이 칼을 빼들고 조운을 한칼에 내려칠 기세로 덮쳐 왔다. 한편 조운은 앞서 달려오는 적장의 말에 미축이 꽁꽁 묶여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다. 조운은 즉시 창을 높이 들고 순우도를 맞아 싸우니 처음에는 제법 거세게 부딪쳤다. 순우도도 역시 장수였던 까닭이다. 그러나 순우도는 이번에 상대하는 적장이 자기가 사로잡은 장수와는 비교가 되지 않음을 깨닫고 슬며시 말머리를 돌렸다. 그 순간이었다 조운의 날카로운 창날이 이미 순우도의 몸을 산적 꿰듯 찌르고는 그 창을 휘두르니 순우도의 몸은 선혈과 함께 땅바닥에 패대기쳐졌다. 뒤따르던 군사들이 그 모양을 보고 주춤거렸다. 조운은 졸대들을 향해 쏜살같이 말을 몰아 창을 휘둘러 수십 명의 군사를 찔렀다. 나머지 졸개들은 조운이 달려가지 전에 이미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조운이 몇 명의 졸개들을 휩쓸자 그들은 모두 줄행랑을 놓고 말았다. 조운은 적의 말을 빼앗아 감 부인을 태우고 미축의 결박을 풀어 말 위에 앉힌 후 장판교 쪽으로 달려갔다. 장판교 위에는 아직 장비가 말을 세운 채 있었다. 장비는 안장 위에 장팔사모를 걸치듯 옆으로 들었는데 이글거리는 횃불 같은 눈으로 이쪽을 향해 노려보고 있었다. 그 앞쪽으로 조운이 달려가자 장비가 창을 꼬나잡더니 눈을 부릅뜨고 호통을 쳤다. "옳지, 저기 오는 자는 사람이냐, 짐승이냐? 무슨 까닭에 우리 형님을 배반했느냐?" 조운이 들으니 어처구니없는 말이었다. 분기가 치솟기도 했을 뿐 아니라 미 부인을 구해야 할 다급한 처지라 큰 소리로 외쳤다. "물러서시오. 감 부인이 여기 계시오!" 그제서야 뒤따르는 감 부인과 미축을 본 장비는 머쓱해하며 언성을 낮추었다. "조운, 자네는 조조의 군문에 투항한 것이 아니던가?" "무슨 소릴 하는 거요?" "실은 그런 소문이 있어, 만약 자네가 이곳에 오면 일격으로 요절낼 작정이었네." "두 마님과 공자를 찾아 헤매다 간신히 감 부인만을 찾아 여기까지 모시고 온 것인데, 주공은 어디 계시오?" "저기 나무 그늘에서 잠시 쉬고 계시네. 형님께서 두 마님과 공자의 소식을 몰라 걱정하고 계시네." 조운은 미축을 돌아보며 말했다. "미자중은 부인을 모시고 한 걸음 먼저 가시오. 나는 다시 가서 미 부인과 공자를 찾아보겠소." 말을 마친 조운은 다시 거느린 몇 기를 이끌며 말을 몰아 오던 길로 되돌아갔다. 한참을 달리는데 저쪽에서 10여 명의 수하를 거느린 젊은 장수 하나가 이쪽을 향해 마주 오고 있었다. 등에는 장검을 짊어졌고 손에는 제법 화려한 장창을 비껴 든 것으로 보아 지체가 높은 자임을 알 수 있었다. 그 자는 조운이 몇 사람만을 거느리고 달려오고 있었으므로 감히 적군이 마주 달려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모양으로 태연했다. 조운은 불문곡직하고 쏜살같이 말을 달려 그에게 창을 휘둘렀다. 마주 오던 장수도 놀라며 창을 들어 맞섰고, 뒤따르던 10여 명의 군사들도 칼을 빼들고 맞섰다. 조운은 마주 오던 장수와 엇갈리기가 무섭게 한 창으로 그를 찌르고 말았다. 그 나머지 졸개들은 조운의 창에 찔려 순식간에 몇이 죽고 나머지는 달아나기에 바빴다. 조운은 적장의 등에 멘 칼이 범상한 칼이 아님을 알고 시체의 등에서 장검을 뽑아 살펴보았다. 칼자루에는 금빛으로 '청홍'이란 글씨가 상감되어 있었다. 조운은 그 글씨를 보자 크게 기뻐했다. "오, 이 사람은 조조가 아끼는 신하 하후은이었구나." 조운이 듣기에는, 하후은은 맹장으로 이름 높은 하후돈의 아우였다. 그리고 조조의 가까운 신하 중에서도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는 자였다. 조조에게는 보검이 두 자루가 있었는데 하나는 의천이며 또 한 자루는 청홍이었다. 조조 자신은 의천검을 차고 다녔으며, 청홍검은 총애하는 하후은에게 주어 자기를 뒤따르게 했던 것이었다. 이 청홍검은 아무리 강한 쇠도 무 베듯이 끊어버리는 명검 중의 명검이었다. 조운은 다시 말 등에 올라 적진을 향해 달렸다. 이때 이미 조운의 시야가 미치는 곳에는 모두 조조군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무수한 군사들이 미처 도망가지 못한 백성들과 유비군의 패잔병들을 찾아 무차별 살륙하고 있었다. 조운은 그 적중을 향해 두려움도 없이 오직 미 부인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마님, 마님은 어디 계십니까?" 이미 주위는 구름 떼 같은 적군들이었다. 힘을 다해 그들을 무찌르다 얼핏 뒤돌아보니 그나마 뒤따르던 몇몇 군사도 보이지 않았다. 혼자가 된 조운은 때마침 상처를 입고 땅에 쓰러져 있는 여인에게 미 부인을 보았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 여인은 꺼져 가는 듯한 목소리로 숨을 헐떡이며 가까스로 말했다. "장군께서 찾으시는 미 부인인지는 모르나 왼쪽 다리를 창에 찔린 채, 저기 농가의 흙담 아래에서 아기를 안고 있는 귀부인을 보았습니다. 어서 가 보십시오." 조운은 그 말을 듣자 귀가 번쩍 띄었다. 말을 달려 단숨에 그곳으로 달려갔다. 과연 그곳에는 불에 반쯤 탄 농가가 있었는데 뒤꼍의 곳간과 무너져내리다 만 흙담이 남아 있었다. 조운이 말에서 내려 사방을 휘둘러 보는데 흙담 아래쪽에서 여인의 흐느낌 소리와 어린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 조운이 보니 아두 아기를 안고 말라 버린 우물가에서 미 부인이 흐느껴 울고 있었다. 조운은 급히 달려가 미 부인 앞에 엎드렸다. 미 부인이 울음을 그치더니 반색을 하며 말했다. "장군을 만났으니 이제 아두는 살았습니다. 이 아이의 부친은 쉰 살이 되는 오늘날까지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자식이라고는 오로지 이 한점의 혈육밖에 없습니다. 이 어린 것을 가련하게 여겨 주십시오. 장군께서 이 아이를 잘 보호하여 제 부친의 얼굴을 다시 보게 하여 주시면 이몸은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미 부인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운은 송구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미 부인에게 권했다. "부인께서 이 난을 겪으시게 된 것은 오로지 이 운의 죄입니다. 말씀은 뒤로 미루시고 어서 제 말에 오르십시오. 제가 죽기로 싸워 적군을 뚫고 부인과 아두 아기를 모시고 가겠습니다." 조운이 미 부인에게 말에 오르기를 권했으나 미 부인은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아니 됩니다. 말이 없으면 장군은 어떻게 싸우며 이곳을 어떻게 빠져나가겠습니까? 아두는 오로지 장군께 맡겼으니 장군은 이 아이를 보호하셔야 합니다. 나는 이미 중상을 입은 몸, 이제 죽어도 아무 여한이 없습니다. 어서 이 아이를 안고 떠나시오. 이 몸으로 하여 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적군의 함성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저들이 닥치기 전에 어서 말에 오르십시오." 조운이 다시 미 부인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말에 오를 것을 재촉했다. 미 부인은 아두를 조운에게 내밀었다. "자, 이 아이의 목숨은 오로지 장군께 달렸소이다." 조운은 미 부인이 건네 주는 아이를 받으면서도 어서 말에 오르라고 간청했다. 적군의 함성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미 부인은 손을 저을 뿐이었다. 조운이 이번에는 언성을 높이며 말 위에 오르기를 강권했다. "부인께서는 적이 들이닥치면 어쩌려고 이러십니까?" 그때였다. 미 부인은 그 말에도 대답도 하지 않고 몸을 홱 돌려 우물 속으로 몸을 던졌다. 자기의 목숨을 던져 유씨의 뒤를 이을 외아들을 살린 미 부인의 용기와 결단은 주군의 아내답고 백성의 어미다운 것이었다. 조운은 목놓아 울었다. 조운은 풀과 나뭇가지를 우물에 던져넣고 흙담을 밀어 부인의 시체를 숨겼다. 혹시라도 조조군이 미 부인의 시체를 알아볼까 염려해서였다. 조운은 자신의 갑옷 끈을 늦추고 엄심갑안에 아두를 품고 갑옷을 덮었다. 이때 아두는 세 살의 나이였다. 아두를 갑옷 속에 품어 안고 조운이 말에 오를 때는 이미 흙담 밖과 부근의 풀섶에는 적의 보군이 몰려와 있었다. 적의 대장은 조홍의 부장인 안명이었다. 조운은 그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말을 박차 흙담을 뛰어넘었다. 안명은 삼첨양인이란 칼을 잘 쓰는 인물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는 조운을 보자 칼을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조운의 창과 안명의 칼이 강한 기운으로 한 차례 부딪치니 섬광을 일으키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갈 길이 바쁜 조운이 기합 일성과 함께 창으로 찔러 들어가니 안명은 창에 찔려 말 위에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조운은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곧장 창을 휘둘러 안명의 졸개들을 헤치며 쏜살같이 내달았다. 조운이 말을 달려 갈 길을 재촉하는데 또 한 무리의 군마가 앞을 가로막았다. 선두에 달려오는 장수를 보니 '하간 장합'이라 쓴 대장기를 머리 위에 나부끼고 있었다. 조운은 달리던 속도를 늦추지 않고 나는 화살처럼 말을 몰 뿐이었다. 장합은 용력이 가볍지 않은 장수였다. 조운의 장창을 맞아 10여 합이나 다투었다. 조운은 아두를 품에 안고 있어, 그와 오랫동안 다툴 마음이 없었는지라, 거세게 찔러 들어가며 그가 주춤거리는 사이 길을 열어 말을 몰아 달아나기 시작했다. 장합은 조운이 달아나는 것을 보고 기세를 올리며 뒤쫓았다. 조운은 말에 채찍을 가해 앞으로 내달았다. 그러자 갑자기 말이 허공에 뜨는 듯하더니 '쿵'하는 소리와 함께 말과 사람이 한꺼번에 큰 구덩이 속에 떨어지고 말았다. 장합이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구덩이에 빠진 조운을 향해 장창을 겨누어 힘껏 찌르려 할 때였다. 한 줄기 붉은 빛이 구덩이 속으로부터 뻗쳐 나오는가 싶더니 조운의 말이 껑충 몸을 솟구쳐 구덩이 밖으로 뛰어올랐다. 땅 위에 오른 조운은 그대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힘차게 달렸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뒷날 사람들이 이 일을 찬탄하여 시를 지어 기렸다. 공자의 몸을 붉은 빛이 싸고 용처럼 날아올라 말은 장판파의 포위를 뚫었네. 아두는 하늘로부터 타고난 운이기에 조자룡도 신위를 떨쳤네.
장합은 그 모양을 보자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감히 뒤쫓을 엄두를 내지 못한 채 군사를 거두어 진지로 돌아가고 말았다. 조운은 쉬지 않고 말을 몰았다. 그때 홀연 뒤쪽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 왔다. "조자룡은 달아나지 말고 게 섰거라!" 뿐만 아니라 앞쪽에서 두 장수가 한꺼번에 나타나 창칼을 휘두르며 길을 끊었다. 뒤에서 쫓는 장수는 마연과 장의이며, 앞쪽의 장수는 초촉과 장남으로 모두 지난날 원소의 수하에서 이름을 떨치던 장수들이었다. 진퇴양난이었다. 조운이 앞과 뒤의 네 장수를 상대로 있는 힘을 다해 싸우고 있는데 조조의 군사들이 일제히 몰려 겹겹이 에워싸이고 말았다. 조운은 창 대신 등에 멘 청홍검을 빼들었다. 청홍검은 과연 보검이었다. 칼날이 번뜩일 때마다 적장의 칼이나 철갑도 무 잘리듯 잘려져 나갔다. 칼과 철갑이 잘리니 네 적장도 견뎌내지 못했다. 청홍검을 몇 차례 휘두르자 피가 튀고 비명이 일었다. 네 장수가 차례로 조운의 청홍검에 낙엽지듯 목이 떨어지자 졸개들은 간담이 서늘했다. 조운이 보검을 휘두르며 길을 여니 수많은 졸개들이 죽고 상했다. 조운은 마침내 졸개들을 모조리 쳐서 물리친 후 길을 열었다. 이날 조조는 경산 높은 곳에서 싸움터의 정세를 굽어보고 있었다. 그러다 좌우에게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저 장수는 대체 누구인가? 마치 무인지경을 달리듯 나의 진중을 바람처럼 달리고 있구나." 조홍을 비롯한 여러 장수들이 손을 이마에 갖다대고 저게 누구냐고 제각기 묻고 있었다. 조조가 답답하다는 듯 다시 말했다. "급히 가서 알아보고 오라!" 조홍이 말을 달려 산을 내려가 조운을 앞질러 가며 큰 소리로 외쳤다. "거기 싸우는 장수는 누구인가? 이름을 밝혀라!" 그 물음에 조운이 서슴없이 대답했다. "나는 상산의 조자룡이다!" 조운이 청홍검을 움켜쥐며 조홍을 노려보았다. 덤벼들면 한칼에 내려칠 기세였다. 조홍은 말머리를 돌려 조조에게 달려가 장수의 이름을 밝혔다. 조조가 무릎을 치며 감탄해 마지않았다. "저 장수가 바로 말로만 듣던 조자룡이었구나. 적장이지만 참으로 대단한 호걸이로다. 그야말로 보기드문 호장이 아닌가. 만약 그를 얻어 나의 진중에 둘 수만 있다면 비록 천하를 손바닥에 넣지 못하더라도 한이 되지 않을 것이다. 급히 각 진지에 알려라. 조자룡이 가까이 오거든 활을 쏘지 말도록 하라. 단기 필마이니 사냥하듯 에워싸서 사로잡아 데려오도록 하라!" 조조의 영에 장수들은 즉시 10여 기의 전령을 각 진지에 보냈다. 참다운 용사나 훌륭한 장수를 보면 비록 적장일지라도 자기의 휘하로 받아들이고 싶은 것이 조조의 성정이었다. 조조의 훌륭한 무인이나 선비에 대한 욕심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마치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하는 듯한 열정까지 가미되어 있는 듯했다. 이전에는 관우에게 그와 같은 사모에 가까운 마음을 가졌다가 후회를 한적이 있는 조조였지만 그 병적이랄 수도 있는 인재에 대한 욕심과 열정은 변함이 없었다. 조조의 이 같은 욕심은 조운에게는 하늘의 도움이나 다름 아니었다. 달려가는 곳마다 적군은 열 겹 스무 겹 에워쌌으나 조운은 필사적으로 싸워 번번이 길을 열었다. 그럴 동안 칼로 찍어 쓰러뜨린 큰 기가 2개, 빼앗은 창이 세 자루, 창으로 찌르고 칼로 베어 죽인 조조 수하의 제법 알려진 장수가 무려 50여 명이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몸에는 화살 하나 꽂히지 않았고 칼과 창에 의한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 그러나 조운의 온몸은 선혈로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그의 청홍검도 자루까지 피에 얼룩져 있었다. 물론 적군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선혈이었다. 뒷사람이 그의 용맹을 기리며 노래했다. 전포와 갑옷 붉게 물들었네. 그 누가 당양에서 그를 맞서랴. 예나 지금이나 위태로운 주인 구한 이는 상산의 조자룡이 있을 뿐이네. 조운은 한동안 말을 달려 산기슭의 언저리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곳에도 하후돈의 부장 종진.종신이라는 형제 장수가 두 편으로 나누어서 진을 치고 있었다. 형인 종진은 큰 도끼를 잘 쓰며 아우인 종신은 방천극의 명수로서 이름난 장수였다. 이 형제들이 조운이 달려오자 좌우에서 고함을 지르며 덤벼들었다. 뿐만 아니라 장요와 허저의 휘하 군사들도 그를 사로잡고자 폭풍처럼 들판을 휩쓸며 몰려왔다. 좌우의 적과 후방의 대군을 함께 맞이한 셈이었다. "조자룡, 어서 말에서 내려 항복하라!" 형제는 조운의 앞을 가로막으며 외쳤다. 조운이 창을 치켜들며 형제들을 노려보자 종진이 먼저 큰 도끼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조운도 말을 몰아 도끼와 창이 부딪쳤다. 그러나 세 번을 어우르기도 전에 종진은 조운의 창에 찔려 말 아래로 굴렀다. 조운은 말을 박차며 그대로 달렸다. 형 종진이 조운의 창에 찔려 죽는 걸 보자 종신이 급히 뒤를 쫓았다. 종신의 말이 조운의 말꼬리를 입으로 물 수 있을 만큼 따라붙자, 종신은 방천극을 들어 조운의 등을 향해 내리쳤다. 그 순간 조운이 별안간 말머리를 홱 돌리며 창으로 방천극을 막았다. 두 사람은 팔을 뻗으면 얼굴이 닿을 거리였다. 조운의 왼손에 들린 장창이 '휙'하고 위로 치켜올려지며 종신의 방천극을 튕겨냈고, 그와 동시에 오른손으로 청홍검을 뽑아 종신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종신의 얼굴은 투구와 함께 반쪽으로 갈라지니, 그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 끔찍한 죽음을 지켜 보던 종진.종신의 휘하 군사들은 모두 한결같이 기겁을 한 채 뿔뿔이 흩어졌다. 조운은 말을 박차며 다시 장판교를 향해 질주했다. 그러나 미처 장판교에 이르기도 전에 등 뒤에서 또 함성이 일어났다. 형주의 장수였다가 조조에게 항복했던 문빙이 이끄는 군사들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천하의 조운이라지만 그도 이젠 말과 함께 기진맥진해 있었다. 말머리를 돌려 싸우는 대신 말을 박차며 앞만 보고 내달았다. 한동안을 그렇게 달리다 앞을 보니, 장비가 장팔사모를 비껴들고 다리 위에 말을 세우고 있었다. "익덕! 익덕!" 조운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문빙은 기력이 쇠진한 조운에게 함성을 더욱 크게 지르며 몰려오고 있었다. "익덕, 나좀 도와 주시오!" 조운이 거듭 외치며 장판교를 향해 달렸다. 장판교 위에서 조운을 지켜 보던 장비가 마주 달려나오며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자룡은 어서 가라. 저것들은 내가 맡을 테니!" 조운은 장비에게 뒤를 맡기고 단숨에 다리를 건넜다. 조운은 지친 말을 몰며 20여 리쯤 달려가니, 유비가 군사들과 함께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조운은 급히 달려가 말에서 뛰어내리자 울음을 터뜨렸다. 유비도 온몸에 피범벅이 된 조운의 모습을 보자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조운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했다. "조운의 죄 만 번을 죽어도 씻을 길이 없습니다. 미 부인께서는 몸에 큰 상처를 입으신 채 제가 아무리 권해도 말에 오르시지 않고 끝내 우물에 몸을 던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조조에게 시신을 뵈지 않으려고 흙담을 쓰러뜨려 그 우물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공자만을 품에 안은 채 적의 포위를 뚫었습니다. 공자는 조금 전까지 제 품속에서 울고 있었는데 이제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두렵기만 합니다." 조운은 그 말과 함께 갑옷의 가슴막이를 풀어헤치고 아기를 꺼내고 보니 아두는 세상 모르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 "다행히 공자께서는 무사하십니다." 조운은 그제서야 가슴을 쓸며 아두를 안아 유비에게 바쳤다. 조운의 손에서 아버지 유비 손으로 넘겨지는 것도 모르고 아두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러나 유비는 아두의 얼굴도 보지 않은 채 받자마자 땅에다 내던지며 소리쳤다. "이 못난 핏덩이 때문에 하마터면 훌륭한 장수를 잃을 뻔했구나!" 거느린 사람들에 대한 두터운 정과 아낌이 혈육의 정보다 더한 것임을 보게 된 조운은 목이 메었다. "이 운이 주공의 크신 은의에 답하려면 이 목숨을 다 바쳐도 모자랄 것입니다." 조운은 마침내 땅에 떨어진 아두를 감싸안은 채 울먹이며 말했다. 온갖 고초를 헤치고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돌아온 조운은 유비의 그 같은 마음을 보자 고통도 사라지고 새로운 힘이 불끈 솟았다. 주공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고 다시 한 번 마음 속으로 다짐하고 있었다. 한편, 조운을 뒤쫓던 문빙은 장판교에 이르러 장비와 맞닥뜨리자 덜컥 겁이 나 황급히 말을 세웠다. 장비가 호랑이 수염과 머리칼을 곤두세우고 고리눈을 무섭게 부릅뜬 채 장팔사모창을 움켜쥐고 말 위에 턱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다리 동쪽에 있는 숲에서는 먼지가 자욱 일면서 바스락대는 소리와 함께 말발굽 소리가 어지럽게 들려 왔다. 숲에는 필시 수만 명의 복병을 숨겨 놓았다고 여긴 문빙은 섣불리 장비에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더 나아가지 못한 채 잠시 말을 세우고 동정을 살필 뿐이었다. 조금 있으려니까 조인.이전.하후돈.하후연.악진.장요.장합.허저 등의 장수들이 각기 휘하 군사들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그러나 그들도 문빙과 같은 생각이었다. 장비가 혼자 고리눈을 부릅뜨고 있자 공명이 무슨 계책을 꾸민 것인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아무리 장비가 용맹한 장수라고 하지만 수십만의 대군이 몰려오는데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홀로 맞을 리가 없을 터였다. 이때 조조도 경산에서 내려와 중군을 이끌어 장판교 방향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조운이 달아난 곳을 뒤쫓으면 그곳에 유비가 있으리라!" 조조가 중군까지 이끄니 깃발과 군마의 흐름은 격류가 계곡에서 분출하듯 금세 들판 위로 쏟아져 메워졌다. 이때 장비가 여전히 고리눈을 부릅뜨고 노려보고 있으려니 조조군의 후진에 푸른 비단 일산과 모월과 정기가 보였다. 장비는 틀림없이 조조가 정세를 살피러 왔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의기를 돋우며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연인 장비, 익덕이 여기 있다. 어느 놈이든지 나와서 나와 자웅을 겨루어 보자!" 장비가 목청을 돋워 소리치자 그 목소리는 들판을 뒤흔드는 벽력과도 같았다. 조조군은 등골이 오싹해지며 모두들 얼굴빛이 달라졌다. 조조가 서서히 가까이 다가가 보니 말 위에 한 장수가 떡 버티고 있었다. 호랑이 수염은 양쪽으로 갈라졌고 커다란 입은 굳게 다물었는데 눈썹과 눈꼬리, 머리털이 모두 곤두서 있었다. 조조는 좌우에게 일러 일산과 모월과 정기를 치우게 했다. 장판교 위의 장수가 일산을 보고 자신이 있는 곳을 짐작하여 곧장 달려올까 두려웠다. 이어 조조는 좌우를 둘러보며 말했다. "지난날 관운장이 내게 말하기를, 나의 아우 장비와 스스로를 비교하면 그 발치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또한 그가 화를 내어 백만의 군사들 속에 뛰어들어도 대장의 목베어 오기를 주머니 속의 물건 꺼내듯한다고 했다. 그 장비가 저기 있으니 모두들 경솔히 나서서는 안 될 것이다!" 조조는 여러 장수들을 제지하는 한편 장비를 노려보았다. 그때 장비가 다시 부릅뜬 눈으로 군사들을 휘둘러보며 호통을 쳤다. "연인 장비가 여기 있다. 어느 놈이든 어서 나오라!" 장비가 말을 몰아 몇 걸음 나서며 횃불 같은 눈으로 휘둘러보았다. 그 무시무시한 모습에 조조의 주위를 호위하던 군사들이 물결이 일 듯 동요를 일으켰다. 아니 그 위압적인 고함 소리와 자태는 호위병뿐만 아니라 전군에게도 공포의 물결을 일게 했다. 조조는 잠시 망설이다가 가만히 영을 내려 군사를 물리도록 했다. 장비가 저토록 위세를 부리는 것은 틀림없이 공명이 내린 계책이 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공명의 계책에 몇 번 낭패를 당했던 조조인지라 군사를 물린 후 뒷일을 정하기로 작정했다. 장비가 가만히 지켜 보니 조조군이 슬며시 군사를 물리고 있자 더욱 의기가 솟구쳤다. 이번에는 사모창까지 휘두르며 목청껏 소리쳤다. "이놈들아 싸울 것이냐 도망칠 것이냐? 그도 저도 아니면 내가 건너가리라!" 그러자 조조 곁에 있던 하후걸이라는 장수가 깜짝 놀라는 통에 그만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 광경을 본 군사들이 더욱 동요하며 겁에 질렸다. 조조는 군사들의 사기가 크게 위축되었음을 보고 말머리를 돌렸다. "물러나라!" 조조가 영을 내리니 장수들도 일제히 조조를 뒤따라 서쪽을 향해 말을 달렸다. 모든 군사는 산이 허물어지듯 앞다투어 달아났다. 등 뒤에 장비가 금세라도 뒤쫓는 듯하여 창과 칼을 버리고 달아나니 마치 어린 아이가 벽력 소리에 놀라고, 사냥꾼이 범과 표범의 울부짖음에 놀라 넋이 빠진 꼴이었다. 가까스로 뒤따라온 장요가 조조의 말고삐를 잡고 말했다. "승상께서는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장비 한 사람을 이토록 두려워하시다니 연유를 알 수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군사를 돌려 장비를 쳐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유비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소리에 조조는 비로소 꿈에서 깨어난 듯한 얼굴이 되었다. 즉시 장요와 허저를 시켜 다시 장판교로 가서 형세를 살펴보도록 했다. 장비는 조조 군사들이 한꺼번에 물러가는 것을 보자 뒤쫓지는 않았다. 조조군에 비해 거느린 군사가 너무 적었을 뿐만 아니라 장비의 계책이 탄로나면 대군 앞에 유비까지도 또다시 위급한 지경에 빠질지 모를 일이었다. 이에 장비는 매복시켰던 부하 20여 기를 급히 숲 속에서 불러내어 말고삐에 달았던 나뭇가지를 풀게 했다. 그리고는 장판교를 끊어 조조군이 건너지 못하게 한 다음에야 유비에게 돌아갔다. 유비에게 이르른 장비는 그때까지의 일들을 소상히 전했다. 그 소리를 듣자 유비가 장비를 칭찬하는 가운데도 한 마디 애석하다는 듯이 탄식했다. "과연 아우다운 용맹이로다. 그러나 생각이 모자랐구나!" 조조의 대군을 장판교에서 홀로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계책까지 내었으니 무용과 지모에서도 가히 뽐낼 만한 일이라고 여기고 있던 장비였다. 그런데도 유비가 뜻밖에도 생각이 모자랐다고 탄식하니 장비는 알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생각이 모자랐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조조는 술책에 능한 사람이다. 아우가 다리를 끊지 않았다면 오히려 뒤쫓지 않을 것이었다." 그 말에 장비가 볼멘소리로 대꾸했다. "그놈은 내 호통소리 한 번에 10리 밖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어찌 감히 뒤쫓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다리를 끊지 않았더라면 조조는 복병이 있는 줄 알고 감히 쫓아 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리가 끊긴 것을 보면 우리에게 군사가 많지 않으니 겁을 먹고 다리를 끊은 것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에게는 대군이 있으니 장강이건 한수건 그 강을 메우고 건너 올 것이다. 그 까짓 작은 다리 하나 끊어 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유비가 이렇게 말하자 장비는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유비는 곧 말에 올랐다. 조조군이 끊긴 다리를 보고 뒤쫓을 것이므로 군사를 이끌어 면양으로 가기 위해 길을 서둘렀다. 유비는 샛길을 택해 한진을 거쳐 가리라 작정했다. 이때 장요와 허저는 다시 장판교를 살핀 후 조조에게 장비가 다리를 끊고 도망갔음을 조조에게 알렸다. "다리를 끊고 갔다는 것은 우리가 뒤쫓을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이다. 즉시 군사 1만을 내어 세 개의 부교를 놓도록 하여 오늘 밤 안으로 건널 수 있도록 하라!" 조조는 좌우 장수들에게 영을 내렸다. 그러자 이전이 조조에게 가만히 말했다. "그러다가 다시 제갈량의 계교에 말려드는 것은 아닐까요? 함부로 군사를 내시지 마십시오." 그러나 조조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다. 다리를 끊었다면 이는 장비가 낸 계교이지 제갈량이 낸 계교가 아니다. 장비는 한낱 용맹을 지닌 장수일 뿐 또다시 무슨 꾀를 낼 수 있겠는가?" 조조는 이전의 말을 일축하고 급히 진군할 것을 명했다. 유비가 생애 중 몇 번의 패전과 도피를 했었으나 이번처럼 위급하고도 고단함은 없었다. 조조는 처음에는 휘하 장수들에게 추격을 맡겨 놓고 있었다. 그러나 순욱 등이 조조를 부추겼다. "이번에 유비를 놓치면 들판으로 호랑이를 풀어 놓는 것과 같습니다." 조조도 휘하 모사들의 말을 옳다고 여겼다. 언제까지나 유비에게 이끌려 다닐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조조는 뒤쫓는 군사를 수만 기로 늘리고 몸소 지휘하여 군사를 재촉했다. 이 무렵 유비는 한진 가까이에 이르러 있었는데 후방으로부터 흙먼지가 뭉글뭉글 피어 오르고 북 소리와 함성이 천지를 진동시켜 왔다. "앞에는 큰 강이요, 뒤에는 적군이 추격해 오고 있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을 것인가?" 유비는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그러나 뒤쫓는 적에게 앉아서 사로잡힐 수는 없는 일이었다. 유비는 조운을 불렀다. "자룡은 어서 적을 맞을 채비를 하라!" 유비는 다른 장수들에게도 싸울 준비를 하게 한 후 각기 배치를 정했다. 그리고 몇몇 장수들은 유비의 가솔들을 이끌고 계속하여 한수 나루로 나아가게 했다. 조조는 멀리 유비의 행렬이 보이자 여러 장수들에게 엄명을 내리며 의기를 돋우었다. "이제 유비는 가마솥에 든 물고기요, 함정에 빠진 범이다. 이번에 그를 잡지 못하면 고기를 바다에 놓아 줌이며, 범을 산으로 보내는 것과 같으니 모든 장수들은 이 점을 명심하여 한 치의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 이에 장수들은 유비를 뒤쫓기 시작했다. 멀리 가물가물 유비 일행의 모습이 보이자 조조군은 말에 채찍을 가하며 달렸다. 그때 홀연 언덕 뒤에서 북 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리며 한 무리의 군마가 달려나왔다. "어서 오너라! 내가 너희들을 기다린 지 오래다." 앞선 장수가 들판을 울리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손에는 청룡도를 비껴쥐었는데 온몸이 시뻘건 말을 타고 있었다. 이렇게 온몸이 붉은 말은 천하가 넓다 하되 적토마밖에는 없다. 관우는 강하로 가서 유기에게 군사 1만을 얻어 급히 돌아오던중이었다. 그러다 당양 땅 장판파에서 싸움이 크게 벌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한수쪽의 길로 앞질러 온 것이었다. "저 장수는 운장이 아닌가?" 조조는 한눈에 관우를 알아보고 즉시 고삐를 당겨 말을 세우고 여러 장수들을 둘러보았다. 장수들도 그 장수가 관우임을 알아보았다. "또 제갈량의 계책에 빠졌구나." 관우가 불쑥 나타나자 이는 곧 공명의 계책이라고 앞질러 헤아린 조조는 즉시 군사를 물리라고 전군에게 명했다. 조조가 보니 관우가 거느린 군세 또한 적지 않았고 거기다가 공명의 계책이 있다면 가볍게 맞설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지레 짐작했던 것이다. 조조의 명에 따라 급하게 뒤쫓던 수만 기가 이번에는 갑자기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니 썰물이 빠져나가듯 사라졌다. 관우는 10여 리나 그들을 뒤쫓다 말을 멈추었다. 조조군을 뒤쫓는 것보다 유비의 안위가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관우가 한수 나루에 이르자 그곳에서 유비를 만날 수 있었다. 관우가 유비에게 절하며 뵈온 후 그 동안의 일을 고했다. 한수 나루에는 이미 수십 척의 배가 준비되어 있었다. 관우는 유비와 감 부인 아두 등과 함께 배에 올랐다. "둘째 형수는 어찌하여 보이지 않으십니까?" 관우가 의아히 여기며 유비에게 물었다. 유비가 그제서야 당양의 난리속에 우물에 몸을 던진 미 부인의 일을 말하자 관우는 크게 탄식하며 분기를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 "이전에 허전에서 사냥하실 때 이 아우가 조조를 척살하려 하자 형님께서 말리셨습니다. 그때 저를 그대로 놓아 두었더라면 오늘 이런 통탄스러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가 않네. 그때는 쥐를 잡으려다 좋은 그릇을 깨뜨릴까 염려해서였다네." 유비가 관우를 아껴 그 일을 말렸다는 말에 관우도 숙연한 얼굴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유비와 관우가 서로 지난 일들로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문득 강 남쪽 언덕에서 북 소리와 함성이 크게 울렸다. 유비가 바라보니 수많은 배가 돛을 올리고 개미 떼처럼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적의 수군이 아닌가?" 유비가 안색을 잃은 채 말하자 관우도 황급히 뱃머리로 나가 바라보았다. 다가오는 배들 중 맨 앞의 한 척은 유별나게 켰다. 그 배 위는 흰 전포에 은빛 갑옷차림의 젊은 장수가 서 있었는데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배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숙부님은 그간 별일 없으십니까? 숙부님과 헤어진 이래 이 조카는 소식을 드리지 못해 죄가 큽니다." 유비가 자세히 보니 그는 다름아닌 유기였다. 유비와 관우는 근심이 일시에 기쁨으로 바뀌자 안색이 밝아지며 유기를 반겼다. 뱃전과 뱃전이 맞닿자 유비는 얼른 유기의 손을 잡아 맞아들였다. "실로 위급한 때에 달려와 주었구나!" 유비는 기쁨과 감회가 뒤섞인 어조로 말했다. 지난날 공명으로 하여금 계교를 내게 하여 유기를 살린 것도 새삼스러운데, 이제 그가 군사 1만과 수군까지 내어 도우러 왔으니 그 감회가 남달랐다. 유기도 유비에게 큰절을 올리고 나서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숙부님께서 조조에게 쫓기신다는 말씀을 듣고 급히 마중 나오는 길입니다." 유기가 수군을 이끌고 오자 유비의 배는 길게 줄을 이은 채 강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유비와 유기는 그 동안 일어났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강의 서남쪽으로부터 또 한 떼의 전선이 쏜살같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병서는 한 일자로 대열을 이루며 질풍처럼 따라 다가오는데 그 진세가 질서 정연했다. 전선을 바라보던 유기가 두려운 목소리로 유비에게 물었다. "강하의 배란 배는 제가 모두 이끌어 왔습니다. 그런데도 또 전선이 다가오니 필시 저 전선은 조조의 전선이거나 아니면 강동의 손권이 이끄는 군사들일 것입니다. 저들의 세력이 만만치 않으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유비가 유기의 말에 놀라며 뱃머리로 가서 유심히 그 배들을 살폈다. 유기의 말대로하면 조조군이 아니면 손권이 이끄는 전선임에 틀림없는데 특히 손권이 이 전선을 내었다면 그 또한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저편의 뱃머리에 한 사람이 이쪽을 살피고 있었다. 그는 머리에 윤건을 쓰고 몸에는 흰 도포를 입고 있었는데 얼른 보아도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오오, 저건 제갈량이 아닌가!" 유비가 기쁨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흰 윤건을 쓴 사람은 바로 공명이었고 그 옆의 배를 보니 거기에는 손건이 타고 있었다. 이에 유비는 급히 배를 마주 대게 하며 공명을 자기의 배로 가까이 오게 하여 물었다. "군사는 어찌하여 이곳으로 오시게 되었습니까?" 유비가 궁금한 나머지 우선 그 일부터 물었다. 공명이 조용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강하에 이른 뒤 운장을 한진으로 향하게 했습니다. 주공께서 조조에게 쫓기면 반드시 강릉으로 갈 수밖에 없게 되어 한진으로 가리라 짐작했습니다. 그리하여 공자 유기에게 먼저 한진으로 가서 주공을 맞도록 청했습니다. 그런 다음 저는 하구로 가서 그곳에 있는 군사를 모두 불러모아 이리로 오는 길입니다." 공명의 말을 듣자 유비는 크게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관우에 이어 유기, 그리고 공명까지 군사들을 이끌고 속속 모여드니 이제는 두려울 것이 없다는 심정이었다. 유비는 의기가 솟구치는 듯 휘하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제는 조조를 깨뜨릴 일을 의논했다. 공명이 먼저 입을 열어 군사의 배치부터 정했다. "하구를 보니 지세가 험준하고 수리도 좋으며 양곡 또한 넉넉했습니다. 주공께서는 그리로 가시어 조조군을 방비하도록 하십시오. 공자 유기께서는 강하로 돌아가셔서 전선을 정돈하고 병기를 수습하여 우리 주공과 돕고 의지하는 의각지세를 이루면 조조를 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공명의 말에 동의했다. "군사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하오나 제 생각으로는 숙부님께서 잠시 강하에 들르셔서 군사를 정돈한 다음에 하구로 가셔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유기가 유비를 만나자마자 헤어지는 것이 섭섭한 듯 강하성으로 유비를 청했다. 그리고 유비 또한 유기의 말을 거절하지 않고 따르자 공명도 굳이 말리지 않았다. 유비는 관우에게 군사 5천을 주며 명을 내렸다. "아우는 먼저 하구 땅으로 가서 그곳을 지키도록 하라. 내 잠시 강하 땅에 들렀다가 그리로 가리라." 혹시 조조군의 진격이 있을지 모르니 하구를 관우에게 방비케 한 뒤 유비와 공명은 유기와 함께 강하성으로 들었다. 한편 다 잡은 듯하던 유비를 놓친 조조는 유비가 수로로 가서 자기보다 앞질러 강릉을 취할까 염려되었다. 이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강릉으로 말을 달렸다. 이때 강릉은 형주의 치중 등의와 별가 유선이 맡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조조군이 몰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조조에게 성문을 열고 백성들을 이끌어 주며 나와항복했다. 이미 유종이 조조의 장수에게 죽임을 당한 마당에 자기들만이 외롭게 조조에게 대항할순 없다고 여긴 것이다. 조조는 성 안으로 들어가 먼저 그곳의 백성들을 위무하고 옥에 갇혀있던 한숭을 불러내었다. 한숭은 유표가 살아 있을 때 일찍이 조조에게 항복을 권했던 유표의 신하였다. 유표가 살아 있을 당시 조조가 사신으로 온 한숭에게 시중벼슬을 내렸는데 그 일로 유표의 노여움을 산 적이 있었다. 조조는 그를 풀어 주고 벼슬을 내렸다. "공에게는 대홍려의 벼슬을 내리노니 앞으로는 나를 돕도록 하라!" 한숭에게 벼슬을 내린 조조는 형주에서 벼슬을 살던 문무의 관원들에게 각기 합당한 관작을 내렸다. 그렇게 되니 조조가 형주로 입성했으나 백성들과 문무관리들은 이전과 다름없이 평온을 되찾았다. 형주가 자신의 수중으로 들어오자 조조는 다시 동오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동오를 칠 차례다.' 조조는 다년간에 걸쳐 마음 속으로 다져 오던 생각을 실현하기로 결심했다. 동오를 취하지 못하면 그의 패업은 완성을 볼 수 없음을 뜻한다. 조조는 여러 장수들을 모아 놓고 그 대책을 의논했다. "지금 유비가 강하로 가서 발판을 굳혔으니 필시 다음은 동오와 손을 잡을 것이다. 유비와 손권이 손을 잡으면 일이 까다롭게 되니 그 이전에 동오를 깨뜨려야 하리라!" 순유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의 위세는 당금 천하를 덮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때를 틈타 사자를 강동으로 보내어 함께 강하를 토멸하고 유비를 사로잡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형주 땅을 반씩 나누어 영원히 의롭게 지내자고 손권에게 권하면 손권도 기꺼이 이에 따를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미 천하의 일은 성사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조조는 순유의 계책대로 될 경우 군사를 움직이지 않고도 동오를 자기의 휘하로 넣을 수 있는 길이라고 여겼다. 조조는 즉시 격문을 써서 동오로 사자를 보냈다. 그러나 조조는 이러한 한 장의 격문만으로 동오가 자기에게 굽히고 들어오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사자를 보내는 한편으로 동오의 기를 꺾어 놓기 위한 군세를 과시하는 양면 작전을 꾀했다. 기마군.보군.수군 등 총 83만의 병력을 일으키고 백만 대군이라고 소문을 퍼뜨렸다. 조조가 군사를 내는데 강물을 따라 강동으로 나아가는 그 군세가 실로 장관이었다. 수로와 육로를 동시에 진병시키니 물의 전선과 뭍의 기마군.보군이 나란히 열을 이뤄 나아갔다. 조조의 군사가 나아감에 서쪽으로는 형주.협중에 이르고 동으로는 근춘.황주에 이르기까지 3백여 리에 걸쳐 진영과 진책이 이어졌다. 이 무렵 강동의 손권은 시상군에 군사를 주둔시킨 채 조조군의 동태를 엿보고 있었다. 조조가 대군을 거느리고 양양에 이르러 유종을 항복시키더니 이번에는 대군을 이끌고 강릉도 그의 수중에 넣었다는 것이었다. 동오와 국경이 맞닿은 형주마저 조조의 손에 떨어지자 손권도 더 이상은 조조군의 형세만을 살필 처지가 아니었다. 이에 손권은 여러 장수들을 불러모은 뒤 대책을 의논했다. "이제 우리도 태도를 결정할 때가 되었다. 공들의 의견을 기탄없이 밝히도록 하라!" 동오에서 대현으로 불리는 노숙이 먼저 입을 열었다. "유표를 조상한다는 명목으로 제가 형주에 다녀오겠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은밀히 강하에 들러 유비와 만나 이해득실을 설명한 다음 그에게 동맹을 맺자고 밀약을 맺고 오겠습니다." 노숙의 말에 손권이 물었다. "유비와 동맹을 맺는다면 조조는 더욱 화를 내며 우리에게 그 칼끝을 들이댈 게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유비의 세력이 약해졌기 때문에 조조는 유비를 뒤로 하고 강동으로 대군의 방향을 돌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비의 군세가 강해지면 배후가 염려되니 조조가 곧장 우리에게 밀고 들어오지 못할 것입니다." 손권은 고개를 끄덕였다. 노숙의 말에 수긍이 가기 때문이었다. "이 숙이 형주로 가려는 데에는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형주에서 강하에 이르기까지 조조와 유비의 허실을 분명히 보고자 함입니다. 형주는 우리와는 이웃해 있는 땅으로, 그 강산이 천연의 요해로서 지키기가 좋으며 백성들이 많고 양곡이 넉넉한 곳입니다. 만약 유비와 손잡고 조조를 쳐부수는 날에는 우리는 형주를 취할 수가 있습니다. 형주를 취하는 날에는 바로 천하 패업을 이룰 수도 있을 것입니다." 손권은 노숙의 말을 옳게 여겼다. 이에 그날로 예물을 마련해 주고 강하로 향하게 했다. 조조가 형주를 떨어뜨리자 동오로서는 흥하느냐 망하느냐 하는 중대한 기로에 서게 되었다. 또한 동오의 움직임은 동오 스스로에게 뿐만 아니라 조조에게도 유비를 깨뜨릴 수 있는 중대한 열쇠가 되는 것이었다. 이때 강하 땅에 이른 유비도 공명.유기와 함께 앞일을 의논하고 있었다. 공명이 계책을 내었다. "동오는 멀리 있고 조조는 가까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품고 있는 삼국정립을 실현시키려면 먼 곳의 동오로 하여금 조조와 싸우게 만들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커다란 두 세력이 서로 싸우게 하여 그 힘을 반으로 줄이고 나서 우리가 도모하는 바를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손권에게 구원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유비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공명에게 물었다. "강동에는 뛰어난 인재들이 많습니다. 반드시 그들도 앞을 멀리 보고 있을 터인즉 어찌 우리와 손을 잡겠다고 할 것입니까?" 유비의 말에 공명은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했다. "두고 보십시오. 머지않아 동오에서 사자가 올 것입니다. 조조가 백만대군을 이끌어 장강.한강에 걸쳐 진을 치고 먹이를 노리는 호랑이처럼 노려보고 있는데 어찌 손권이 보고만 있겠습니까? 동오에서 사자가 오면 제가 배를 타고 동오로 가겠습니다. 저의 변변치 않은 변설로나마 남과 북 양쪽을 서로 싸우게 하겠습니다. 그래서 만약 남쪽이 이기면 힘을 모아 조조를 치고 형주를 수중을 거두어야 합니다. 반대로 조조가 이기면 우리는 그 기회를 타서 강남을 취하면 될 것입니다." 공명이 이렇게 말하자 여러 사람들은 선뜻 납득하지 않았다. 공명의 말은 어디까지나 그의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겼다. 손권의 군세가 또한 강성한데 어찌 유비에게 손을 잡자고 사자를 보내 온다는 것인가? 유비는 걱정하며 공명에게 거듭 물었다. "군사의 말씀은 매우 높은 계교이나 먼저 강동에서 사람이 와야 할 것 아닙니까?" 유비의 걱정스런 물음에 공명은 다만 웃으며 위로할 뿐이었다. 그런데 강변을 지키는 군사로부터 급한 전갈이 왔다. "강동의 손권을 대리하여 문상을 하러 왔다면서 노숙이라는 분이 왔습니다." 그 말에 유비 이하 여러 사람들은 그저 놀랄 뿐이었다. 강동에서 노숙이 왔다고 하자 공명은 유기에게 물었다. "동오의 손책이 죽었을 때 형주에서 주문하는 사신을 보낸 적이 있습니까?" 공명의 뜻밖의 물음에 유기가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그런 일이 없습니다." "그것 보십시오. 동오와 형주는 대대로 앙숙지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경조의 예를 갖추는 것은 문상이 아니라 이쪽의 허실을 엿보기 위한 것임이 분명합니다." 공명은 유비에게 가만히 웃으며 노숙이 온 뜻을 깨우쳤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유비에게 무언가 귀엣말로 속삭였다. 이윽고 유기는 사람을 내보내 노숙을 맞아들였다. 노숙은 유기에게 조문을 하고 유비에게도 예물을 전한 후 인사를 올렸다. 문상을 마치자 유비는 술자리를 마련하고 노숙을 후당으로 청했다. 술잔이 오고갔다 노숙은 술이 거나하게 취하자 유비에게 슬며시 물었다. "유 황숙의 명성을 들은 지 오래이지만 만나 뵈올 길이 없었는데 이처럼 뵙게 되니 큰 기쁨입니다. 그런데 유 황숙께서는 근자에 조조군과 싸우셨으니 그쪽의 실정에 매우 밝으시리라 믿습니다. 감히 여쭙겠습니다만 도대체 조조의 군사는 얼마나 됩니까?" "글쎄올시다. 나는 군사도 적고 믿을 만한 장수도 많지 않은 터입니다. 그러니 조조가 온다는 말만 들으면 곧 달아나고는 해서 조조군의 수효를 잘 알지 못합니다." "유 황숙께서는 제갈공명의 계략을 쓰셔서 두 번이나 화공으로 조조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셨다는데 어찌하여 모른다고 하십니까?" 유비가 대답을 회피하자 노숙은 단념하지 않고 다시 대답을 청했다. "허허, 사실이 그러한 것을 어쩌겠습니까? 공명이라면 자세하게 알고 있을 것입니다." 유비가 슬며시 공명을 쳐들었다. 노숙이 조조군에 대해 물으면 '모른다'라고만 얘기한 것도, 또 공명을 내세운 것도 다 공명이 은밀히 꾸민 계책이었다. 노숙은 유비가 공명을 거론하자 몸이 달았다. 유비에게 공명을 만나게해 달라고 청했다. 유비는 마지못한 듯 공명을 불러 오도록 했다. 이어 공명이 들어왔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기다리고 있던 공명이었다. 노숙이 공명에게 절하자 공명도 절을 하며 첫 대면의 예를 다한 뒤 자리에 앉았다. 노숙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선생의 재덕은 일찍부터 듣고 흠모해 왔는데 오늘 다행히 이렇게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여쭤 보겠습니다. 천하가 위급한 지경에 빠진 이 사태를 어떻게 보시는지 높은 가르침을 바랍니다." "조조의 간교한 계교는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만, 그를 당할 힘이 없어 이처럼 피할 따름입이다." 공명이 무거운 어조에 한숨까지 내쉬며 말하자 노숙은 갑자기 말머리를 바꾸어 엉뚱한 물음을 던졌다. "황숙께서는 당분간 이곳에 머무르실 작정이십니까?" 노숙의 물음으로 보아 공명에게 묻는 말이라기보다 차라리 유비에게 묻는 말로 보아야 했다. 그러나 유비가 입을 여는 것을 막기라도 하듯 얼른 공명이 대답했다. "주공께서는 창오 태수 오신을 이전부터 잘 알고 계시므로 장차 그곳에 가시어 몸을 의탁하실 생각이십니다." 노숙이 공명의 대답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노숙뿐만 아니라 유비도 공명의 그 같은 말에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공명의 말에는 필시 곡절이 있을 것이라 여긴 유비는 공명이 말하는 데 따라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유비마저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노숙이 말했다. "오신은 군량미의 저축도 없고 군사도 적어 홀로 견뎌내기도 힘에 겨운 실정입니다. 도저히 남을 도울 형편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어찌 여러분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노숙이 그렇게 말하며 유비와 공명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자 공명이 태연히 대답했다. "오래 머물러 있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선 잠시 가서 의탁하고 보자는 것이외다. 그런 후에 따로 뒷일을 정해 볼 생각입니다." 공명의 말에 노숙은 잠시 입을 다물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이윽고 본심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우리의 주군 손 장군은 강동 여섯 고을을 수중에 장악하고 있으며 군사는 강성하고 양곡 또한 넉넉합니다. 거기다가 어진 선비들을 공경하시는 까닭에 장강일대의 영웅들은 거의 손 장군의 휘하에 몰려들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건대, 유 황숙께서 믿을 만한 사람을 보내시어 동오와 손을 잡고 함께 대사를 도모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동오와 동맹을 맺자고 은근히 권유해 오는 노숙의 말에 공명은 속으로는 기뻐했으나 짐짓 근심스런 얼굴로 말했다. "황숙께서는 손 장군과는 이제까지 교분이 없으시니, 누군가가 간다하더라도 좋은 결과를 맺지 못할 것입니다. 거기다가 믿고 보낼 만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공명이 노숙의 말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듯하자 노숙이 황급히 다시 입을 열었다. "양 선생의 백씨께서 지금 강동의 모사로 계시는데, 항상 선생과 만나시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내 비록 재주와 덕은 없으나 양 선생과 동맹하여 손 장군을 뵙고 더불어 대사를 의논함이 어떨까 합니다." 옆에서 두 사람의 설왕설래를 듣고 있던 유비는 짐짓 불안해하는 얼굴을 하며 슬며시 딴전을 피웠다. "공명은 내 스승이므로 한시도 곁을 떠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자 공명이 짐짓 목소리를 가다듬어 유비에게 청했다. "사태가 워낙 급하니 아무래도 다녀오는 것이 좋겠습니다. 원하건대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공명이 정중한 목소리로 청하자 유비는 차마 물리치지 못하는 척하며 승낙했다. 노숙은 유비와 유기에게 작별을 고하고 공명과 함께 배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