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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정 시 20편
1. 그 먼나라를 알으십니까 / 신 석 정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깊은 삼림대森林帶를 끼고 돌면
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
좁은 들길에 야장미野薔薇 열매 붉어
멀리 노루새끼 마음 놓고 뛰어 다니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 나라에 가실 때에는 부디 잊지 마셔요
나와 같이 그 나라에 가서 비둘기를 키웁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산비탈 넌지시 타고 나려오면
양지밭에 흰 염소 한가히 풀 뜯고
길 솟는 옥수수 밭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먼 바다 물소리 구슬피 들려오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어머니 부디 잊지 마셔요
그 때 우리는 어린 양을 몰고 돌아옵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오월 하늘에 비둘기 멀리 날고
오늘처럼 촐촐히 비가 나리면
꿩 소리도 유난히 한가롭게 들리리다
서리까마귀 높이 날아 산국화 더욱 곱고
노란 은행잎 한들한들 푸른 하늘에 날리는
가을이면 어머니! 그 나라에서
양지밭 과수원에 꿀벌이 잉잉거릴 때
나와 함께 고 새빨간 능금을 또옥 똑 따지 않으렵니까?
2. 영구차의 역사 / 신 석 정
강물같은 밤을
잉태(孕胎)한 촛불 아래
분향(焚香)이 끝난
다음,
영구차(靈柩車)는 다락같은 말에 이끌려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흰 장미(薔薇)꽃으로 뒤덮인
관을 붙들고
놋날같은 눈물을 흘리며
목메어 우는 少女를 보았다
능금빛 노을이 삭은 하늘 아래
아아라한 산(山)들도
입을 다물고 서있는 황혼(黃昏)이었다
영구차(靈柩車)를 이끄는 백마(白馬)의 갈기가
바람에 나부끼는 것이
역력한 어둠발 속에
그 아리잠직한 少女의 백납(白臘)같은 손아귀에 잡힌
영구차(靈柩車)의 흰 장미꽃은 뚜욱 뚝 떨어졌다
아득한 어둠 속으로
저승보다 아득한 어둠 속으로
영구차(靈柩車)를 이끄는 말발굽 소리와
그 영구차(靈柩車)에 매달려 끝내 흐느끼는 少女의 울음소리에
나는 그만 소스라쳐 깨었다
촛불을 켜놓고,
나는 시방 그 어둠속에 사라지던
영구차(靈柩車)와 영구차(靈柩車)에 매달려 흐느끼던
소녀(少女)를 생각한다
그것은 아버지의 영구차(靈柩車)도 아니었다
그것은 어머니의 영구차(靈柩車)도 아니었다
그것은 이웃들의 영구차(靈柩車)도 아니었다
이 지옥(地獄)같은 어둠이 범람하는 지구(地球)라는 몹쓸 별에
내가 아직 숨을 타기도 전에 그러니까 아주 오랜 옛날
그 어느 별을 지나갔을 나의 외로운 영구차(靈柩車)이었는지도 모른다
촛불이 흔들리는 강물같은 밤에......
3. 차라리 한그루 푸른 대로 / 신 석 정
성근 대숲이 하늘보다 맑아
댓잎마다 젖어드는 햇볕이 분수처럼 사뭇 푸르고
아라사의 숲에서 인도에서
조선의 하늘에서 알라스카에서
찬란하게도 슬픈 노래를 배워낸 바람이 대숲에 돌아들어
돌아드는 바람에 슬픈 바람에 나는 젖어 온몸이 젖어...
난(蘭)아
태양의 푸른 분수가 숨 막히게 쏟아지는
하늘 아래로만 하늘 아래로만
흰 나리꽃이 핀 숱하게 핀 굽어진 길이 놓여 있다
너도 어서 그 길로 돌아오라 흰나비처럼 곱게 돌아오라
엽맥(葉脈)이 드러나게 찬란한 이 대숲을 향하고...
하늘 아래 새로 비롯할 슬픈 이야기가 대숲에 있고
또 먼 세월이 가져올 즐거운 이야기가 대숲에 있고
꿀벌처럼 이 이야기들을 물어 나르고 또 물어내는
바람이 있고 태양의 분수가 있는 대숲
대숲이 좋지 않으냐
난(蘭)아
푸른 대가 무성한 이 언덕에 앉아서
너는 노래를 불러도 좋고 새같이 지줄대도 좋다
지치도록 말이 없는 이 오랜 날을 지니고
벙어리처럼 목 놓아아 울 수도 없는 너의 아버지 나는
차라리 한 그루 푸른 대로
내 심장을 삼으리라
4. 작은 짐승 / 신 석 정
蘭이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밤나무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다문다문 선 사이사이로 바다는 하늘보다 푸르렀다.
蘭이와 나는
작은 짐승처럼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짐승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蘭이와 내가
푸른 바다를 향하고 구름이 자꾸만 놓아 가는
붉은 산호와 흰 대리석 층층계를 거닐며
물오리처럼 떠다니는 청자기 빛 섬을 어루만질 때
떨리는 심장같이 자지러지게 흩어지는 느티나무 잎새가
蘭이의 머리칼에 매달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蘭이와 나는
역시 느티나무 아래에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말없는 작은 짐승이었다.
5. 빙하 / 신 석 정
동백꽃이 떨어진다
빗속에 동백꽃이
시나브로 떨어진다
수(水)
평(平)
선(線)
너머로 꿈많은 내 소년을 몰아가던
파도소리
파도소리 부서지는 해안에
동백꽃이 떨어진다.
억만년 지구와 주고 받던
회화에도 태양은 지쳐
엷은 구름의 면사포(面沙布)를 썼는데
떠나자는 머언 뱃고동 소리와
뚝 뚝 지는 동백꽃에도
뜨거운 눈물지우던 나의 벅찬 청춘을
귀대어 몇번이고 소근거려도
가고오는 빛날 역사란
모두가 우리 상처입은 옷자락을
갈가리 스쳐갈 바람결이여
생활이 주고 간 화상(火傷)쯤이야
아예 서럽진 않아도
치밀어오는 뜨거운 가슴도 식고
한 가닥 남은 청춘마저 떠난다면
동백꽃 지듯 소리없이 떠난다면
차라리 심장(心臟)도 빙하(氷河)되어
남은 피 한 천년 녹아
철 철 철 흘리고 싶다.
6. 어린 양을 데불고 / 신 석 정
어린 양을 데불고 내가 사는 곳은
호반의 성근 숲길을 거쳐
다냥한 햇볕이 분수로 쏟아지는
푸른 언덕 근처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구름이 지나가는 발자취소리랑
싹트는 푸른 소리 들려오는 곳입니다
어린 羊을 데불고 내가 사는 곳은
저녁노을 붉은 속에
일월을 두고 사랑을 맹세하는 청춘들이
자주 오고가는 강기슭이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푸르른 강물소리 새소리 젖어 흐르고
꽃 피고 지는 소리 들려오는 곳입니다
어린 양을 데불고 내가 사는 곳은
별들이 나직이 옛이야기 하는 곳
피 묻은 역사도 죄도 벌도 없는 곳
그러한 새로운 풍토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짙푸른 하늘에 매달린 지구에서
아주 머언 위도緯度라고는 아예 생각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1954. 12
7. 어머니 記憶 / 신 석 정
어느 少年의ㅡ
비오는 언덕길에 서서 그때 어머니를 부르던 나는 少年이었다. 그
언덕길에서는 멀리 바다가 바라다 보였다. 빗발 속에 검푸른 바다는 무서운 바다였다.
“어머니” 하고 부르는 소리는 이내 메아리로 되돌아와 내 귓전에서 파도처럼 부셔졌다. 아무리 불러도 어머니는 대답이 없고, 내 지친
목소리는 海風 속에 묻혀 갔다.
층층나무 이파리에서는 어린 청개구리가 비를 피하고 앉아서 이따금씩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청개구리처럼 갑자기 외로왔었다.
쏴아 ... 먼 바닷소리가 밀려오고, 비는 자꾸만 내리고 있었다.
언덕길을 내려오노라면 짙푸른 동백잎 사이로 바다가 흔들리고,
우루루루 먼 천둥이 울었다.
자욱하니 흐린 눈망울에 산수유꽃이 들어왔다. 산수유꽃 봉오리에서 노오란 꽃가루가 묻어 떨어지는 빗방울을 본 나는 그예 눈물이 펑펑 쏟아지고 말았다
보리가 무두룩이 올라오는 언덕길에 비는 멎지 않았다. 문득 청맥죽을 훌훌 마시던 어머니 생각이 났다. 그것은 금산리란 마을에서 가파른 보리 고갤 넘던 내 소년시절의 일이었다.
8. 역사 / 신 석 정
1.
저 하잘것없는 한 송이의 달래 꽃을 두고 보드래도, 다사롭게 타오르는
햇볕이라거나 보드라운 바람이라거나 거기 모여드는 벌 나비라거나
그보다도 이 하늘과 땅 사이를 어렴풋이 이끌고 가는 크나큰 그 어느
알 수 없는 마음이 있어 저리도 조촐하게 한 송이의 달래 꽃은 피어나는
것이요 길이 멸하지 않을 것이다.
2.
바윗돌처럼 꽁꽁 얼어붙었던 대지를 뚫고 솟아오른 저 애잔한 달래
꽃의 긴긴 역사라거나 그 막아낼 수 없는 위대한 힘이라거나 이것들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모든 것을 내가 찬양하는 것도 오래오래 우리 마음
에 걸친 거추장스러운 푸른 수의囚衣를 자작나무 허울 벗듯 훌훌
벗고 싶은 달래 꽃같이 위대한 역사와 힘을 가졌기에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요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3.
한 송이의 달래 꽃을 두고 보드래도 햇볕과 바람과 벌 나비와 그리고
또 무한한 마음과 입 맞추고 살아가듯 너의 뜨거운 심장과 아름다운
모든 것이 샘처럼 왼통 괴여 있는 그 눈망울과 그리고 항상 내가
꼬옥 쥘 수 있는 그 뜨거운 핏줄이 나뭇가지처럼 타고 오는 뱅어같이
예쁘디예쁜 손과 네 고운 청춘이 나와 더불어 가야 할 저 환히 트인
길이 있어 늘 이렇게 죽도록 사랑하는 것이요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9. 들길에 서서 / 신 석 정
푸른 산이 흰구름을 지니고 살듯
내 머리 위에는 항상 푸른 하늘이 있다
하늘을 향하고 산림(山森)처럼 두 팔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이냐
두 다리는 비록 연약하지만 젊은 산맥으로 삼고
부절히 움직인다는 둥근 지구를 밟았거니....
푸른 산처럼 든든하게 지구를 디디고 사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이냐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
저믄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보자..
푸른 별을 바라보는 것은 하늘 아래 사는
거룩한 나의 일과이거니....
10. 꽃덤풀 / 신 석 정
태양을 의논하는 거룩한 이야기는
항상 태양을 등진 곳에서만 비롯하였다.
달빛이 흡사 비 오듯 쏟아지는 밤에도
우리는 헐어진 성터를 헤매이면서
언제 참으로 그 언제 우리 하늘에
오롯한 태양을 모시겠느냐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이야기하며 이야기하며
가슴을 쥐어뜯지 않겠느냐?
그러는 동안에 영영 잃어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멀리 떠나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몸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맘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드디어 서른여섯 해가 지나갔다.
다시 우러러보는 이 하늘에
겨울 밤 달이 아직도 차거니
오는 봄엔 분수처럼 쏟아지는 태양을 안고
그 어늬 언덕 꽃덤풀에 아늑히 안겨보리라.
11. 임께서 부르시면
가을날 노랗게 물들인 은행잎이
바람에 흔들려 휘날리듯이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호수에 안개 끼어 자욱한 밤에
말없이 재 넘는 초승달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포근히 풀린 봄 하늘 아래
굽이굽이 하늘가에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파란 하늘에 백로가 노래하고
이른 봄 잔디밭에 스며드는 햇볕에서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12. 흰 석고상 / 신석정
-젊은 리힐리스트 홍에게서 들은 꿈 이야기
사뭇 푸른 하늘 아래
멀리 트인 푸른 벌판을
나는 누구를 찾아 이리 헤매이는 것일까?
끝없이 헤매이다 다다른
소나무 대 수풀 다옥한
작은 언덕 아래 작은 마을은
혈맥이 정지한 듯 고요한 마을이었다.
아무리 목 놓아 불러 보아도
마을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고
멀리 흐르는 강물소리
멀리 흐르는 푸른 강물소리......
그 언제 한물이 지내갔는가?
죽은 듯 고요한 이 마을은
엄청난 전란을 겪었는가?
죽은 듯 고요한 이 마을은
문득 어느 집 층층계를 무심코 오르다가
흰 장미처럼 발가벗은 여인이
햇볕이 드시게 흐르는 창 옆에
가로누워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당황하였다.
꼬옥 다문 입술이랑 감은 눈이랑
아무 말이 없다
고요하다
어디서 비롯하여 어디로 끝나는
눈 덮인 산맥보다 희고 고운 곡선이여......
가슴을 파헤치고 머리를 묻어도
볼에 볼을 문질러도 말이 없다
끝끝내 껴안은 채 흐느껴 목 메이게 울다가
차디찬 석고상에 소스라쳐 나는 꿈을 깨었다
시방 나는 안개 자욱한 거리를 헤매이며
다시 붙잡고 목 놓아 울어볼 사람을 찾노라
모두 움직이는 석고상인 것을......
모두다 움직이는 석고상뿐인 것을......
오오
멀리 흐르는 가물소리......
역력히 들려오는 그 강물 소리....
13. 장미꽃 입술로 / 신 석 정
- 이 삭막한 지대에도 한 송이의
장미꽃을 피워낼 스페이스는 있는 것이다.
그렇다!
오늘은 흐드러지게 핀
저 장미꽃의 웃음소릴 듣자.
어린 손주처럼 예쁘디예쁜
장미꽃의 티 없는 웃음 속엔
음모도 밀고도 원수도 데모도 없다.
더구나
우리들이 마음 죄이는 눈물겨운 가난과
독감처럼 만연하는 절량농가 없어서 좋다.
참한 봉오리마다 깃들인
햇볕과 이슬과 별들의 이야기 속에는
오월 밤을 이슥히 울고 간
귀촉도 소릴 머금고
때때로 잉잉대는 어린 꿀벌들의
향기 젖은 실내악 소리와
꽃 이파리에 연신 사운대는 바람소리가
진정 서럽도록 서럽도록 고와라.
나의 사람아
날로 식어가는 우리들의 가슴일랑
저 진한 장미꽃 입술로
오늘은 한 번만 뜨겁게 문지르자.
14.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 신 석 정
저 재를 넘어가는 저녁 해의 엷은 광선들이 섭섭해 합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그리고 나의 작은 명상의 새 새끼들이
지금도 저 푸른 하늘에서 날고 있지 않습니까?
이윽고 하늘이 능금처럼 붉어질 때
그 새 새끼들은 어둠과 함께 돌아온다 합니다
언덕에서는 우리의 어린 양들이 낡은 녹색 침대에 누워서
남은 햇볕을 즐기느라고 돌아오지 않고
조용한 호수 위에는 이제야 저녁 안개가 자욱히 내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늙은 산의 고요히 명상하는 얼굴이 멀어 가지 않고
머언 숲에서는 밤이 끌고 오는 그 검은 치맛자락이
발길에 스치는 발자욱 소리도 들려오지 않습니다
멀리 있는 기인 뚝을 거쳐서 들려오는 물결 소리도 차츰차츰 멀어갑니다
그것은 늦은 가을부터 우리 전원을 방문하는 까마귀들이
바람을 데리고 멀리 가버린 까닭이겠습니다
시방 어머니의 등에서는 어머니의 콧노래 섞인
자장가를 듣고 싶어하는 애기의 잠덧이 있습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인제야 저 숲 너머 하늘에 작은 별이 하나 나오지 않았습니까?
15. 가슴에 지는 낙화소리 / 신석정
백목련 햇볕에 묻혀
눈이 부셔 못 보겠다.
희다 지친 목련꽃에
비낀 4월 하늘이 더 푸르다.
이맘때면 친굴 불러
잔을 기울이던 꽃철인데
문병 왔다 돌아가는 친구
뒷모습 볼 때마다
가슴에 무더기로 떨어지는
백목련 낙화소리…
16. 꽃상여 가는길 / 신 석 정
- 지하의 추엽에게 주는 시
임해산은 덩스럽게 높았다
그 아래로 그 아래로
다옥한 대 수풀이 있는 마을
그 마을에서 네 소년의 꿈은 나날이
바다처럼 자라났었다
바이올린을 들고
대피리를 들고
너와 내가 다니던 길은
찔레꽃 열매가 유달리 붉은 길이었다
바다 건너 연산이 푸르게만 보이는 길이었다
아버지를 두고
어머니를 두고
아내와 어린 것을 두고
네 꽃상여가 가던 길은 그 길이었다
너와 내가 거닐던 그 길에
네 꽃상여가 떠나던 그 길에
오늘 아버지의 꽃상여가 또 떠나야 하는 그 길에
슬픈 이야기만 빚어내는 찔레꽃 열매가 붉어 심장보다 붉어
슬픈 이야기만 빚어내는 바다 건너 연산이 푸르게만 푸르게만 보이는구나
17. 청산백운도 / 신 석 정
이 투박한 대지에 발은 붙였어도
흰 구름 이는 머리는 항상 하늘을 향하고 사는 산
언제나 숭고할 수 있는 푸른 산이
그 푸른 산이 오늘은 무척 부러워
하늘과 땅이 비롯하던 날 그 아득한 날 밤부터
저 산맥 위로는 푸른 별이 넘나들었고
골짝에는 양떼처럼 흰 구름이 몰려오고 가고
때로는 늙은 산 수려한 이마를 쓰다듬거니
고산식물들을 품에 안고 길러낸다는 너그러운 산
정초한 꽃그늘에 자고 또 이는 구름과 구름
내 몸이 가벼이 흰 구름이 되는 날은
강 넘어 저 푸른 산 이마를 어루만지리......
1947. <슬픈 목가>수록
18. 소년을 위한 목가 / 신 석 정
소년아
인제 너는 백마를 타도 좋다.
백마를 타고 그 황막한 우리목장을 내달려도 좋다.
한때
우리 양들을 노리던 승냥이떼도 가고
시방 우리 목장과 산과 하늘은
태고보다 높고 조용하구나.
소년아
너는 백마를 타고
나는 구름같이 흰 양떼를 데불고
이 언덕길에 서서 웃으며 이야기하며 이야기하며 웃으며
황막한 그 우리 목장을 찾아
다시 오는 봄을 기다리자.
19. 곡창의 신화 / 신 석 정
바다도곤 넓은 김만경金萬頃 들을
눈이 모자라 못 보겠다 노래하신
당신과 우리들의 이 기름진 땅을
아득한 옛날에
양반과 벼슬아치와
조병갑이와 아전 떼들의 북새 속에서
그 뒤엔
을사조약乙巳條約에 따라붙은 동척회사東拓會社와
가와노상과 노구찌상과 중추원참의中樞院參議와
애놈의 통변들의 등쌀에 묻혀
격양가도 잊어버린 벙어리가 되어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아들과
손주들이 대대로 이어 살아왔더란다.
서러운 옛 이야기 지줄대며
동진강東津江 굽이굽이 흐르는 들을
그 무서운 악몽이 떠난 지 스무 해가
되었다 하여
우리 할아버지들의 피맺힌
옛 이야기를 잊지 말아라.
태평양太平洋을 건너왔을
지리산智異山을 넘어왔을
모악산母岳山을 지나왔을
다낭한 햇볕이 흘러간다 하여
우리 할아버지들의 땀이 배어든
이 몽근 흙을 잊지 말아라.
그 언젠가는 이 기름진 땅에
우리 눈물겨운 소작인小作人의 후예로 하여
드높은 격양가로 메마른 산하를 울리고
미국보리와 풀뿌리로 연명하던
그 섧고 안쓰러운 이야기는
동진강 푸른 물줄기에 살려
아득한 아득한 신화로 남겨두자.
20. 등불 / 신 석 정
비바람 부는 속을
총총히 걸어왔느니라.
눈보라 치는 속을
견디고 걸어왔느니라.
그러나
비바람 속에서도
눈보라 속에서도
항상
우리들의 꿈과 생시는
빛나는 설계를 도모하여 왔거늘
차라리
孤高(고고)한 우리들의 의지는
저 명멸하는 계단에서도
꺼질 줄 모르는 등불이었노라
라일락꽃이
무더기로 피던 날에도
모란꽃잎으로 뜨거운 가슴을
문지르던 날에도
다 타지 못한 사연이사
가쁜 숨결을 안고 서서
하늬바람에 묻어오는
봄을 기다리며 살아왔노라.
아예
초라한 지난날일랑
돌아볼 겨를도 갖지 말라!
인젠
벅차는 전진의 궁리를 위하여
다만 가슴을 태울 뿐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