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최창일(시인·제주 세계자연해설사) | | | 요즘 극장가에 ‘명량’ 영화 열풍이 뜨겁다. 땡볕만큼이나 그런 것 같다. 학생들이 방학을 맞아 극장가를 찾는다는 게, 땡볕을 이겨내기 위한 에어컨 바람에 피서를 즐기며 영화를 보는 게, 역사 공부도 하고 교우 간에 우정도 쌓고, 이웃과 친구에 대한 진정성 있는 소통으로 다소 인생 공부에 도움을 얻기도 하고 자라나는 세대에 나라에 대한 충성의 대상을 인지 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같기도 하다. 필자 역시 그런 측면에서 극장가를 찾았다. 극장 안은 학생뿐만 아니라 휴가를 즐기는 직장인 기성세대, 노년층까지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전국 150여 개 극장에서 1일 7~ 80만 명이 관람 한다니 대단하다. 이순신 장군의 3대 대첩하면 한산도 대첩, 명량 해전, 노량 해전을 말한다. 조선의 풍전등화 속에 조정은 파당 속에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고, 국력은 피폐해 있었다. 장군은 서인과 원균의 모함에 백의종군하다 칠전량 해전에서 원균이 죽자 삼도 수군통제사로 재 임명되어, 단 12척의 군선으로 330척의 왜선을 물리친 세계 해전사에 빛나는 해전이다.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을 있게끔 한 일이 신비스러워 사람의 마음을 귀신보다 놀라게 한다. 세계5대 해전 하면 트라팔가르 해전, 칼레해전, 살라미스 해전, 악티움 해전, 한산도 해전을 얘기, 하지만, 세계 5대 해전은 상대 전력면에서 1대2 혹은 1대3의 전력으로 다소 힘든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확률은 그 상황과 여건에 따라 승리할 수 있다. 그러나 명량 해전은 25대1의 상대가 우위를 점한 면에서 꿈도 꿀 수 없는 해전사다. 해서 조정에서는 해전을 포기하고 권율 장군과 육 전에 함유하도록 했으나, 장군은 12척의 함선이 있다며 신념을 굽히지 않고 기적을 이루어 낸 것이다. 그래서 인류 역사에 기적이 있기 때문에 장군을 한 가닥의 기적에 목숨을 건 것이다. 그렇다. 삼국지의 제갈공명, 세계 2차대전 당시 아프리카 군단을 이끈 사막의 여우라는 애칭을 얻고 다녔던 롬멜 원수, 명량 해전의 주역인 이순신 장군, 이들은 적과 상대적으로 전투력 면에서 병력, 장비, 물자, 보급 등 턱없이 부족하면서도 항상 적보다 우위 전략과 전술을 구사해 적장의 간담을 서늘케 하고 적 병사에게 우상의 대상이 되고 적의 제왕도 부러워할 정도 였다. 그것뿐이겠나, 이변은 이변을 만들 듯, 7월 30일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서는 철옹성 같던 순천, 곡성 보궐선거 결과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왕의 남자’ 이정현 씨는 자전거로 골목을 누비며 “미치도록 일하겠습니다.”라는 구호로 지역발전을 위한 순천만 정원의 국가 정원화, 순천대학교 의대 유치 등 실리를 바탕으로 야당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듯이 자신의 몸을 낮추고 진정성 있는 사랑과 믿음을 장병에게 심어주기 위해, 명량해전에서 선봉에 서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신념 하나로 대승을 이끌 수 있었지 않나 하고 음미해 본다. 그래서 우리나라 5천 년 역사에 왕(王)의 노래는 없어도 장군의 노래는 있다. “이 강산 침노하는 왜적 무리를 거북선 앞세우고 무찌르시어” 필자의 유년기 초등학교 아침 조회 시간에 많이 불렀다. 그리고 중학교 3학년 때는 이충무공의 시조를 많이 애송했다. “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자,/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 남의 애를 끊나니./ 어찌 보면 장군은 문무를 겸비한 장군이었다. 위로는 왕과 신하들의 두려움과 시기의 대상이었고, 아래로는 하찮은 군선 12척으로 330척의 왜선과 싸운다는 게 두려움에서 장군을 방참(謗讒)으로 대했으나 장군은 전인미답(前人未沓)으로 명량 해전에서 승전고를 울렸다. 다소 삶이 힘들고 어렵고 버겁지만, 무더위를 명량 해전으로 깔끔하게 씻어버리는 마음도 삶에 한 부분이 아닌가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