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거리 신포동에 대한 글을 인천신문에서 퍼왔습니다
문화 도시 신포동의 마지막 명운이 다한 때는 대략 80년대 말쯤이리라. 조금 더 늘여 잡으면 90년대 초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는 몸이 많이 축간 손설향 시인이 드문드문 이 골목을 출입했고, 랑승만(浪承萬) 시인이 불편한 몸으로 가끔 목노에 앉았었다. 장년층으로는 아동문학가 김구연(金丘衍)과 시 쓰는 김학균(金學均) 등이 얼굴을 보였고, 이 글을 쓰고 있는 김(金) 모도 거기에 끼어 있었다.
서예가 김인홍(金麟弘) 선생과 서양화가 정순일(鄭淳日) 화백이 한 주일에 한 번 아주 잠깐씩, 아직 가늘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신포주점에 얼굴을 보였다. 그 외에 누가 더 있었을까. 누가 이 약주를 마시러, 누가 반세기 인천 문화의 체온을 느끼러 신포동에 나왔었을까.
인천에서 가장 누추한 선술집이었으면서도 인천 문화의 메카로 군림했던 백항아리집. 전쟁 후 이 무렵이 될 때까지 가장 은성(殷盛)한 시절을 누리던 백항아리집의 카바이드 불빛이 꺼지면서 신포동에 몰락이 닥쳤는지 모른다. 이제 이 골목에 남은 것은 신포주점과 다복집과 대전집, 그리고 보신탕을 내는 북청집뿐이다.
불우했던 시인 최병구(崔炳九)의 뼈 가루가 백항아리 문지방과 신포주점, 옛 마냥집 술상 아래 뿌려진 것을 아는 사람은 이제 몇이나 남아 있을까. 토요일이면 어김없이 서울에서 내려와 홀로 술잔을 들던 박 송(朴松) 시인, 드물게 뵙던 윤부현(尹富鉉), 정벽봉(鄭僻峰) 선생들의 방담이나 소설가 심창화(沈昌化) 선생의 안경 너머 웃음, 서예가 부달선(夫達善) 선생의 한시, 그리고 일찍 타계한 김영일(金英一) 화백의 아름다운 은발. 또 그를 그토록 아끼던 고여(古如) 선생!
해거름이 지나 도착하던 미술평론가 김인환(金仁煥) 교수, 소설가 이정태(李鼎泰) 교수, 살아 있다면 한창 나이였을 이석인(李錫寅), 허욱(許旭), 이효윤(李孝閏) 시인들. 문인 사진작가로 유명한 김일주(金一州) 형, 조우성(趙宇星), 정승렬(丁承烈) 시인, 화가 장주봉(張柱鳳), 서울에서 왔다가 다시 수원으로 간 채성병(蔡成秉) 등도 해가 지면 신포동에서, 만날 수 있었던 사람들이다. 아아, 신포동이여, 그리움이여.
그러나 이제 다시 이곳에 봄바람이 불려 한다. 젊은 예술인 그룹 ‘사람과 사람’이 신포동의 영화를 되살리기 위해 작품전을 여기 대폿집 목로에서 벌이기도 하고, 모 연구소에서 인천 예술인들의 얼굴을 부조(浮彫)해서 그들이 생전에 다니던 술집에 부착할 계획도 세우고 있다고 한다. 명소를 만든다는 것이다.
인천 예술인들의 애환이 서린 거리, 인천 문화가 숨 쉬고 생장하던 본거지, 이 골목길, 이 시장통 길을 우리가 다시 열어야 한다. 진정한 인천은 여기에 있다.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