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부 산문 우수상>
간호사 생활과 함께 하는 ‘묵주의 기도’
김 혜 정 안젤라 (탄방동 성당)
“머리 아퍼! 진통제 주세요! 얼른!”
20대 후반의 젊은 청년이 병실에서 애원하듯 부르짓는 소리가 전 병동이 떠나갈 듯 뒤흔들고 있다. 며칠 전 직장에서 출장을 가다가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친 것이다. 정신이상과 함께 두개골 골절로 머리에는 여러 개의 쇠를 박아 고정을 하고 있으니 심한 통증이 있는 것은 당연하나 계속 진통제를 주사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신경외과 병동의 수간호사인 나는 병실에 들어가 정서적 안정을 취하도록 함께 하는데 옆에서 간호하던 어머니께서 성모님께 드리는 ‘묵주의 기도’를 하시는 것이었다. 잠시 후 환자인 아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침상에 누워 편안하게 잠이 들더니 안정을 보였다. 이 일은 오늘 나에게 아주 특별한 성모님, 성모님이 항상 함께 하신다는 것을 느끼게 한 또 다른 은총으로 다가왔다.
어려서부터 난 유난히 성모님을 무척 좋아하였다. 그러니까 내가 처음 성당을 찾은 것은 초등학교 1학년 때이다. 언니를 따라 공소에 가면 당시 군종신부님께서 추운 겨울에도 마다않고 오토바이를 타고 오셔서 주일미사를 하셨다. 성당에 가기를 좋아하던 나는 성당 마당에 계신 성모님께 인사를 하고 한참을 쳐다본 기억이 난다. 장미 숲에 둘러 싸여 계신 하얀 석고상으로 되어있는 성모님의 모습이 너무 좋은 것이다. 마치 친구 집에 놀러 가면 그 애 엄마가 마당까지 나오시며 반기듯이 말이다.
중학교 때는 아버지께서 버스와 전기도 없는 아주 오지의 마을로 전근을 가셔서 일요일이면 친구와 같이 한시간 반을 걸어 읍내까지 나와 미사참례를 하였다. 그땐 부모님께서 성당을 안다니셔서 같이 가지는 못했지만 말리시지 않으셔서 다행이었다. 자기 전에 매일 쓰는 일기장 첫머리에 “성모님!”하며 하루 일을 적어나갔는데 어느 날 담임선생님께서 아이들 앞에서 읽어주시기도 하였다.
여고시절에는 부모님을 따라 간호사인 큰언니를 만나러 서울 명동에 있던 성모병원에 가면서 나의 소중한 간호사의 꿈을 키워왔다. 아마 그때부터 처음 ‘묵주의 기도’를 하게 된 것 같다. 어느덧 내가 원하는 간호학과를 입학하면서 부모님을 떠나 혼자 도시로 나오게 되자 난 성모님과 약속을 하였다. 매일 ‘묵주의 기도’를 하기로 말이다. 그 약속이 성인이 된 지금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지켜지고 있다. 이렇게 자애로우신 성모님과의 관계는 성모신심으로 꾸준히 이어져 왔다. 그리고 그때 기도지향으로 우리집안이 하루빨리 성가정을 이루도록 열심히 기원하기도 하였다.
졸업 후 사회생활에 첫발을 디딘 나는 충남대학교병원에 올해로 26년째 근무를 하고 있다. 첫 월급으로 카메라를 구입하여 쉬는 날에는 여러 성당을 다니며 마당에 계신 성모님을 렌즈에 담아 사진첩을 만들어서 행복감을 맛보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서서히 성모님의 공경을 더욱 키워왔던 것 같다. 내가 근무하는 간호사 일이 아픈 환자의 생명과 함께하는 직업이라 항상 긴장 속에서 살며 스트레스가 많은 편인데 누군가 옆에서 도와주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든든한 성모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나에게 가장 어려운 때가 있었다면 같이 사시던 부모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실 때였다. 자식이면 누구나 겪는 일인데도 성인이 된 나에게는 자식은 자식인 것 같다. 정년퇴임 하신 후 드디어 영세를 받으시고 두 분께서는 신앙생활을 오래 하셨다. 노환이셨는데 천수를 다하셨다고 주위에서 말씀을 하셨는데도 이별의 상실감에 오랫동안 힘들었었다. 한창 나의 삶이 몹시 괴롭고 계속 헤매고 있어 형제들을 무척 걱정시키고 있을 때에도 매일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하는 ‘묵주의 기도’만은 놓지 않자 큰언니께서 “성모님과 함께 하니 안심이 된다”시며 걱정을 놓으셨던 말이 생각난다. 이렇듯 성모님은 나에게 남다르다. 결국 용기를 내어 정상적인 생활궤도로 돌아온 것은 ‘묵주의 기도’ 덕분인 것 같다. “성모님, 정말 감사합니다!” 지난 5월에는 본당에서 성모의 밤 행사 후 대녀로부터 ‘묵주의 기도’ 새 책을 선물 받은 후에야 비로서 나는 ‘그동안 너덜너덜 해진 책으로 기도하고 있었구나’를 깨닫게 되기도 하였다.
26년 전 처음 신규간호사로 근무할 때는 우리병원이 신부님, 수녀님도 안계신 불모지였다. 우리 한국천주교회가 평신도 신자들로부터 시작한 것과 같이 직원 중에 식당에서 성호경을 한 후 식사를 하거나, 묵주반지를 끼고 있는 신자 한분 한분들이 모여 가톨릭신자회가 만들어지고 ‘묵주의 기도’를 시작하였다. 난 갓 입사하여 그분들과 함께 하면서 황금어장인 단어를 떠올렸던 기억이 난다. 이제는 그렇게 원하던 경당과 원목실이 생겼고 신부님, 수녀님께서 환자들에게 성사를 주시며 그들에게 많은 위안이 되어 힘이 되고 있다. 지금도 성모님께서는 항상 내 옆에 계신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벌써 내 나이 50줄을 바라보고 있다. 한창 팔팔했던 젊은 나이에는 ‘나이 들면 신앙이 식지 않을까? 무슨 낙으로 사나?’하는 철없는 생각을 하였는데 그것이 오산이라는 것을 알았다. 주님의 현존을 아는 살아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기쁨이 또 있다는 것을 몰랐다. 특히 성모님의 가호가 나를 무한한 행복감에 젖게 한다.
오늘도 출근하며 지하철 안에서 ‘묵주의 기도’를 한다. 하루를 성모님과 함께 시작하는 발걸음이 힘차다. 성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게 하려니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하게 된다. 나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모든 환자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성모님이 가장 예뻐하는 수호천사 안젤라 간호사의 하루가 되도록 병원 문을 희망차게 들어선다.
“성모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