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우리에게 주신 말씀
본문 : 이사야 51장 1-16절
『오늘 말씀은 ‘바벨론으로 끌려와 오랜 포로생활로 절망과 낙심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며, 구원으로 인도하실 것을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지금 저들은 나라가 망하여 바벨론으로 끌려와 오랫동안 고된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거룩해야 할 시온 예루살렘은 누구도 돌보지 않아 황폐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저들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많은 백성들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아 보지 않으시고 버리셨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런 저들에게 1절에 “의를 따르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는-” 하며, 몇 가지 당부하는 말씀과 함깨 저들을 구원하여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51장 전체 내용입니다.』 따라서 51장에서 말하는 핵심은 ‘바벨론에서 포로생활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제가 있습니다. 1절에 나오는 “의를 따르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는-”입니다. 이 말은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다 구원해 주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의를 따르는 자와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자를 구원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오늘 여러분이 의를 따르는 자, 하나님을 찾아 구하는 자가 되길 소망합니다. 그런 저들에게 또한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첫 번째 말씀은 ‘생각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과 2절에 보면, “생각하여 보라”는 말이 나옵니다. 성경 원문에 보면 ‘나바트’라고, ‘바라보다, 주시하다. 눈여겨 보다’는 뜻으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1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말씀입니다. ‘너희가 의를 따르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자라고 한다면, 마땅히 떠낸 반석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주시하며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왜 반석과 구덩이를 바라보아야 할까요? 그 이유가 있습니다. 여기서 ‘떠낸 반석과 파낸 우묵한 구덩이’는 아기를 낳는 출산의 현장을 말합니다. 우리나라와 달리 당시 이스라엘에선 여자가 아기를 낳을 때, 돌 두 개를 놓고 그곳에 쪼그려 앉아 아기를 낳도록 했습니다. 마치 옛날 재래식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산모가 쪼그리고 앉아 있는 밑의 바닥에 구덩이를 파서 그 안에 산파가 있어 아기를 받도록 하였습니다. 그럼 왜 이 말을 하느냐? 열악한 환경 속에서 아기가 태어날 때, 그 부모와 가족이 기뻐한 것과 같이 이처럼 하나님의 마음이 기뻤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2절의 말씀은 무슨 연관이 있을까요?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낳은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이 말 역시, 지금 아브라함과 사라를 생각하고 바라보라는 말이 아닙니다. ‘너희들이 아브라함과 이삭을 너희 조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 아브라함과 이삭을 낳았던 사라를 주시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과연 그들이 잘나서 너희 조상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혼자 있을 때에 내가 그를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하게 하였느니라.” 이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눈여겨 볼 것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의 아브라함이 어땠느냐? ‘혼자 있을 때’입니다. ‘갓 태어난 아기와 같이 아무런 힘도 없을 때’를 말합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되었어요? 창성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요?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1절과 2절의 말씀을 이렇게 해석을 해야 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인 너희들이 그냥 저절로 태어날 줄 아느냐? 산모와 산파가 있었기에 태어났듯이, 하나님께서 너희를 도와주셨기에 현재의 너희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또 아무 것도 없던 아브라함이 너희의 조상이 되고, 너희가 이스라엘이란 나라를 이루었던 것은 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기에 그리된 것임을 자세히 살펴 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첫 번째로 교훈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에 상황을 볼 것이 아니라, 그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시각으로 3절을 보면 어떤 뜻이 될까요? 분명 당시 상황은 시온이 황폐한 곳이 되었습니다. 또 저들이 살던 곳이 사막이 되었고, 저들의 삶은 마치 광야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어떻게 될까요? 사막을 에덴과 같게 만들어 주시고,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과 같게 바꿔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게끔 하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여러분에게 적용해 보길 원합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서 눈에 보이는 환경만 보고 낙심하며 절망 가운데 있는 분이 계십니까? 오늘 우리가 생각하여 볼 것은 눈에 보이는 환경이 아니라, 지금까지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아야 할 줄 믿습니다. 화장실처럼 낙후된 곳에서 태어난 아기가 건강하게 자란다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아니면 살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우리를 건강하게 지켜주셨다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인 줄 믿습니다. 또한 홀로 있던 아브라함을 복을 주어 창성하게 하신 것처럼, 앞으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주어 창성하게 하실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여 날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말씀은 ‘내게 귀를 기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함께 4절을 읽겠습니다. “내 백성이여, 내게 주의하라. 내 나라여. 내게 귀를 기울이라. 이는 율법이 내게서부터 나갈 것임이라. 내가 내 공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리라.” 호세아 1장 9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라.” 말씀이 나오는데, 여기서 ‘너희’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사실 이사야와 호세야는 같은 시대에 활약을 했던 선지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내 백성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늘 본문에는 ‘내 백성, 내 나라’라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내게 주의하라. 내게 귀를 기울이라” 이 말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의하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카샤브’라고 하는데, ‘귀 기울여 듣다. 청중하다.’는 뜻을 가졌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내 백성과 아닌 백성의 차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와 듣지 않는 자의 차이다’는 말입니다. 왜냐? 율법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율법’은 ‘토라’라고 하는데, ‘가르침, 훈계, 계명, 법령’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나라에서 살려면, 마땅히 지켜야 할 행동과 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들이 살다가 보면 실수를 하고 죄를 지을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율법에 대조하여 회개할 것은 회개를 하고, 돌이킬 것은 돌이켜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4절과 5절에 “내 공의”라는 말이 나오는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 생각이 옳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다 그렇게 산다고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하느냐?’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혹여 여러분의 생각과 경험에 의해 살아가고 계십니까? 아님,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삶을 살고 계십니까? 다르게 말하면,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사느냐? 아님, 여러분 하고 싶은 대로 사느냐?’ 이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그럴 수도 있고,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결과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가 하면, 반대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닐 수 있다는 말이 된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특별히 5절에 “내 팔을 만민을 심판하리니 섬들이 나를 앙망하여 내 팔에 의지하리라.” 이 말씀을 왜 기록하였는지를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양팔에 구원과 심판을 함께 가지고 계시며, 우리가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구원을 받기도 하고, 반대로 심판을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만,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게 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한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겠지요? 그러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세 번째 말씀은 ‘두려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함께 7절을 읽겠습니다. “의를 아는 자들아. 마음에 내 율법이 있는 백성들아. 너희는 내게 듣고, 그들의 비방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의 비방에 놀라지 말라.” 당시 상황은 이랬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이 노예로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기에 너희를 이렇게 두느냐? 너희 하나님이 도대체 너희를 위해 하신 일이 무엇이냐?”며, 빈정됐습니다. 또 “너희가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기 전에 먼저 죽을 것이다” 조롱하고 있었습니다. 분명 당시 상황은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어쩌면 저들 말처럼 하나님을 믿으면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일까요? 전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7절 처음에 어떤 말씀이 나오나요? “의를 아는 자들아. 마음에 내 율법이 있는 백성들아. 너희는 내게 듣고-”입니다. 이 말은 ‘너희가 내 말을 알고 있다면, 너희가 율법을 귀 기울리고 살고 있다면, 내가 한 말을 기억하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려워하지도 말고, 놀라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8절에서 말합니다. 이제 곧 저들은 좀이 옷을 먹는 것처럼, 또 좀 벌레가 양털을 먹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저들을 심판하신 터이니 두려워하지도, 놀라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12절에서도 말씀합니다. “이르시되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 곧 나이니라.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 같이 될 사람의 아들을 두려워하느냐.” 무슨 말입니까? ‘너희를 위로하시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계시는데, 너희는 왜 곧 죽을 사람을 두려워 하며, 풀과 같이 시들게 될 사람을 두려워하느냐?’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더 쉽게 말하면, ‘우리에게 하나님이 계시기에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눈에 보이는 환경 때문에 두려워 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힘이 있는 자를 두려워하고, 누구의 말에 깜짝깜짝 놀라지는 않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의 하나님이 되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오늘 여러분이 하나님의 의를 알고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늘 귀 기울이고 산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손을 붙잡고, 여러분의 세상 모든 근심 걱정 염려에서 구해 주실 줄 믿으시길 자랍니다. 왜냐? 여러분은 16절에 나오는 것처럼 “너는 내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지켜 보호해 주실 줄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리할 때에 11절에 나오듯이 “영원한 기쁨이 머리 위에 있고,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는 기쁨을 맛보는” 은혜가 있게 될 줄 믿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오늘 말씀 역시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잇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예언의 말씀’입니다. 자. 예언이 뭐라고 했어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언이란 말씀하신 대로 할 때 예언대로 되는 것이지만, 반대로 말씀하셨는데도 하지 않는다면 예언이 성취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에서 구원하여 주시겠다고 예언하셨습니다. 그런데 조건이 뭐에요?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것을 생각’하고, 또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에,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믿고 두려워하지 않을 때’에 예언하신 말씀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하여 우리도 오늘 주신 세 가지 말씀을 마음 깊이 생각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복을 받아 가정마다 창성하길 소망합니다. 또한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가 에덴과 같고, 여호와의 동상과 같게 되어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노래소리가 넘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