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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이 썰렁한 것은 솅겐조약 효과
2011년 5월 11일, 수요일 아침 7시쯤.
어제 석양에 이어 포르투갈 쪽 미뉴 강 국경 표지판 앞에 다시 섰다.
이베리아 반도인이 늦잠꾸러기인 것은 이해하나 소위 국경인데 인기척이 전혀 없다.
하기는, 포르투갈과 스페인 간에는 나폴레옹의 이베리아 반도판 정명가도(征明假道)
외에는 이렇다 할 긴장관계가 없었다.
(해군력이 약한 프랑스는 영국의 무역 거점국인 포르투갈을 공격하기 위해 스페인을
압박한 것이며 결국 반도전쟁-스페인 독립전쟁-의 단초가 되었다)
사도 야고보의 길에서 2번째로 국경을 걷는다.
프랑스 길 피레네 산맥에 이어 포르투 길의 미뉴(Minho/스페인은 Mino) 강이다.
청색바탕에 열두개 황금별 유럽연합기가 펄럭이고 있는데도 나치주의와 공산주의에
의해 동서유럽이 각기 긴장관계에 있던 신(scene)이 뇌리에 남아있기 때문일까.
긴 다리를 건너갈 때 돌연 제동이 걸릴 것 같은 느낌에 약간 긴장이 되었으니까.
아직껏 깊은 잠에 빠져있는 듯 온누리가 고요한 이 아침에 검푸른 미뇨 강 한복판의
저 부지런한 어부는 스페인인일까 포르투갈인일까.
모터보트 한대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강물을 가른다.
스페인으로 가고 있는가 포르투갈로 가는 중일까.
저들에게 국적이 무슨 의미 있겠는가.
우리의 임진강에는 저런 날이 언제나 올까.
지리산 천왕봉에서 백두대간을 탈 때는 늘 이대로 백두산 천지까지 직행하게 되기를
열망하며 힘차게 북진한다.
그러나 국경도 아닌 통한의 휴전선에 막혀서 맥없이 남하할 때는 애잔하게도 날으는
새들이 마냥 부러워진다.
공중의 조류도, 물속의 어족도 선망할 필요 없는 이름뿐인 국경을 걸으며 한국 늙은
이가 갖어본 감상이며 간절한 염원이었다.
아침 7시 20분.
포르투갈 체류 4일 16시간여 만에 다시 스페인 땅으로 돌아왔다.
투이 국제교(포르투갈은 발렌사국제교)를 걸어 발렌사 보다 흥미로운 현대적 면모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옛 것이 잘 보존되고 있는 중세도시 투이(Tui)에 도착한 것.
이 다리는 1878년에 에펠(Alexandre Gustave Eiffel)이 놓았다는데 그는 11년 뒤인
1889년에 파리의 에펠탑을 세운 유명한 프랑스의 건축가, 엔지니어다.
1990년대에 건설한 다른 국제교도 있는데 다리들 양쪽이 모두 썰렁한 이유가 '솅겐
조약(Schengen Treaty) 효과라는 것.
국경시스템을 최소화하여 국가간의 통행에 제한이 없게 한다는 내용의 조약이란다.
각 국경에 검사소와 검문소가 없고 썰렁한 까닭을 투이에서 비로소 알았다.
스페인 북서쪽 갈리시아(Galicia)지방의 폰테베드라(Pontevedra) 주에 속한 지자체
투이는 현재는 인구 17.200여명의 지자체지만 선사시대부터 거주지역이었단다.
비고(Vigo) - 투이 고속도로 건설중 발굴된 유물들을 통해서 확인되었다는 것.
투이에 도착함으로서 닷새간의 반 농아(聾啞) 생활도 청산하게 되었다.
갈리시아 지방은 바스크 지방과 더불어 만만치 않은 지방색을 고집해 갈리시아 어를
병용하고 있지만 안내판을 대충 이해하고 인사말이라도 나눌 수 있으니까.
벌써 1개월 이상 스페인에 익숙해졌으며 갈리시아는 프랑스길(동쪽)에 이어 두번째
(남쪽) 진입한 땅이라 그런지 마치 타향에서 떠돌다가 고향에 돌아온 느낌이었다.
포르투갈 닷새 동안에 시계를 손보지 않았으므로 시침을 조정할 일도 없고.
뱃사람의 수호성인 산 텔모 십자가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하려 할 때 미뇨 강을 건널 때 기지개를 펴던 아침해가 산 텔모
국영호텔(Parador nacional San Telmo)숲을 뚫고 황금빛 싱싱한 정기를 보내왔다.
카미노는 옛 골목들과 대성당(Catedral de Santa Maria), 성 클라라회 수녀원(Con-
vento de las Clarisas), 수녀들의 터널이라는 아치길을 통과한 후 산토 도밍고 교회
(Iglesia de Sto. Domingo)와 산 바르톨로메우 데 레보르단스 교회(Iglesia de San
Bartolomeu de Rebordans)를 지나 투이 교외로 빠져 나간다.
로우로 강(rio Louro)에 놓인 베이가 다리(Puente da Veiga) 옆으로 난 비포장 길은
고대 로마 길(Via Romana XlX)이란다.
임시 우회로 안내판이 왜 서있는지는 안내되지 않아 오리지날을 고집했다.
비륵세(Virgen의 갈리시아어/ 중남미 발음은 비르헤) 도 카미뇨(Virxe do Camino/
길의 성모) 마을의 카미노는 바야흐로 시련중이다.
연이어 가로지르거나 삼켜버린 철도와 N-550도로, A-55고속도로 때문이다.
빨간 아스팔트 포장 순례자갓길을 만들고 일부 위험(curve) 구간에는 목제 안전팔을
설치해 다행이기는 하나 안전도가 높지 않다.
아스팔트 위에 길게 찍힌 스키드 마크(skid mark)가 그 증거다.
투이에서 6km되는 비포장 숲길, 열병의 다리(Puente das Febres)라는 이곳에 오랜
세월의 옷을 입은 돌십자가가 서있다.
산 텔모 십자가(Cruceiro San Telmo)다.
아끼 엔페르모 데 무에르테 산 텔모 아브릴 1251/Aqui enfermo de Muerte San Tel
mo Abril1251(산 텔모 1251년 4월 여기에서 병사하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를 마치고 돌아가던 산 텔모가 열병으로 사망했다는 것.
열병(fever)은 항생제가 태어나기 이전에는 양의 동서, 신분, 빈부를 막론하고 회생이
거의 불가능한 전염병이었다.
나는 염병(Typhoid fever장티브스)으로 시체실 앞까지 끌려갔다가 탈출해 살아났다.
회복기의 관리부주의로 재발하여 죽기 직전의 법정전염병 환자 병동에 수용되었는데
운좋게도 탈출에 성공하여 반백년을 더 살고 있다.
1960년대 초의 일인데 내가 살아난 것은 오직 항생제 덕이었다.
아마, 그래서 산 텔모의 죽음을 더 애석해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한데, '산 텔모'가 왜 생소하지 않은 이름일까.
걸으며 생각하고 생각을 더듬으며 걷다가 마침내 배낭을 뒤지게 되었다.
프랑스 길 팔렌시아 주 프로미스타(Fromista)에서 본 '산 텔모 광장'이 떠올라서.
산 텔모 광장은 뱃사람의 수호성인인 산 텔모의 가호를 받는 곳이란다.
그렇다면, 바다와는 전혀 무관한 내륙의 해발 790m 고원마을에 왜 뱃사람의 광장이
있으며 이 마을에서 태어난 그가 어떤 연유로 뱃사람의 수호성인이 되었을까.
더구나, 순례를 마치고 동쪽 고향과 전혀 다른 남쪽 포르투 길을 걸었을까.
투이를 지나 숲길에서 병사했지만 그의 최종 목적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의 이 여정과 뱃사람의 수호성인 칭호가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짐작만 해볼 뿐이다.
공단로(工團路)가 카미노라니?
거의 동행하는 로우라 강은 투이에 비해 강이라기 보다 개울에 불과하나 순례자들은
지금 가뭄 덕을 보고 있는 것이다.
비 많기로 이름난 갈리시아지방인데도 오랜 가뭄으로 수량이 적은데 비가 많이 내린
다면 물을 건너야 할 지역들이 있으니까.
울창하고 조용한 숲길에는 갈림길이 나타나 헷갈리게 한다.
외딴 집들(hamlet)을 지나면 너른 쉼터가 있는 오르베녜(Orbenlle) 마을이다.
포리뇨 산업단지가 내려다 보이는 위치다.
안내판은'산티아고 포르투갈 순례자의 휴식처'라고 알리지만 이날 따라 순례자가 쉴
만한 곳은 단체 장년과 유년들이 선점해 순례자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쨍쨍한 햇볕을 가리는 그늘막은 커녕 나무 한그루 없는 긴 도로를 걸으려면 휴식이
필요한 시점인데.
화강암 '로사 포리뇨'(Rosa Porrino/Pink Porrino)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상표다.
화강암의 고장답게 유명한 화강암 건축가 안토니오 팔라시오스(Antonio Palacios
Ramilo/1872-1945)도 이곳에서 태어났단다.
비고(Vigo)항을 통해서 이태리와 일본, 중국 등 세계 각지로 수출하는 로사 포리뇨가
주 생산품이라는 포리뇨 산업단지의 지루한 직선 공단로가 하필 카미노라니?
파사렐라(Pasarela)에서는 철로와 A-55고속도로를 육교로 건너 포리뇨(Porrino)로
진입하는데 이 길도 N-550도로다.
폰테베드라 주의 지자체인 포리뇨 시내를 걷다가 괜히 길을 물었나.
애매한 지점에서 한 초로남에게 분명히 레돈델라 길을 물었는데 영국이 고향이라는
그가 친절하게 안내한 곳은 황당하게도 포리뇨 지자체 알베르게.
반(半) 조금 더 왔을 뿐인 한낮에 알베르게라니?
어이없음에도 고맙다(gracias)고 해야 하는 예의라는 것에 고소지으며 돌아섰다.
스탬프 받은 것을 소득으로 여기고 걸음을 재촉했으나 이번에는 알바를 했다.
N-550도로와 같이 가다가 왼쪽으로 탈출해야 하는데 무심코 길따라 가버린 것.
도로따라 계속 가면 레돈델라에 도착한다.
오히려 거리가 단축되고 수월하게 갈 수 있다는 유혹을 차로에 버리고 1.5km쯤을 되
돌아올 때 프랑스 길의 영리한 순례자들이 생각났다.
내 뒤를 따라오던 방그라데시 부부와 한국의 일부 젊은이들이 나를 추월한 적이 없는
데도 종종 알베르게에 먼저 도착해 있었다.
그들의 비법은 돌고도는 야고보의 길을 버리고 직선 도로를 택하는 것.
그들의 변(辯)은 돌아올 길을 뭣하러 가느냐는 것.
그들에게 순례의 의미는 과연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는 아둔한 내 머리여!
로우라 강(Puente rio Loura)을 건너 옛 로마길 표석을 발견함으로서 안심이 되었다.
폰테베드라 주의 또 하나의 지자체 모스(Mos)에 들어선 것이다.
로우라 강이 북에서 남으로 범람하여 계곡을 이룬 지역이고 드문드문 자리잡고 사는
핵심이 없는 마을이라 할까.
카미노는 막달레나 샘(Fuente de Maria Magdalena),산타 에울랄리아 델 몬테 교회
(Iglesia de Santa Eulalia del Monte), 파소 데 모스(Pazo de Mos) 등을 지나 해발
235m코르네도 산(Monte Cornedo)에 오른다.
산 정상은 공원이다.
넓은 공간에는 말탄 산티아고(사도 야고보)에게 봉헌한 교회와 이정표, 여러 형태의
카미노 표석이 있다.
이륙하는 비행기의 굉음이 들린다.
비고(Vigo) 공항이 서쪽 2km 지점에 있단다.
포르투 이후 처음으로 바다가 보인다.
피로를 덜어주는 듯 상쾌한 대서양 비고 만((ria de Vigo/河口)이다.
레돈델라 알베르게의 특별한 체험
코르네도 산 이후는 로우레도, 빌라르 데 인페스타, 레돈델라 한하고 내리막 길이다.
로우레도(Louredo)를 지나면 지자체가 바뀐다.
빌라르 데 인페스타(Vilar de Infesta) 부터는 지자체 레돈델라의 마을이니까.
삼림 숲길과 도로를 번갈아가며 내려가면 작은 휴식처(Area de Descanso)가 있고
미로같은 급경사 시골길 따라 마을을 지나면 N-550도로를 만난다.
도로 따라 레돈델라(Redondela) 중심부에 진입했으며 곧 알베르게에 도착함으로서
35km가 넘는 일정을 마쳤다.
한데, 코르네도 산에서 레돈델라가 아무리 내리막 길이라 해도 6km가 넘는 거리인데
1시간 남짓 만에 도착했는데도 아직 활력이 넘쳐나는 듯 했다.
40km 안팎이 일상이 되었던 프랑스 길의 컨디션이 되살아난 셈이다.
햇볕이 엷어져가는 오후 3~4시 이후에 놀라운 가속이 붙는 평소의 습관이 이베리아
반도에서도 여일한 것이 아직 많이 남은 여정을 위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강렬한 햇볕에 순례자들이 겁을 먹고 걷기를 일찍 포기했는지 선착순으로 배정하는
2단침대의 하단이 어느새 동나고 상단만 남아있는 상태였다.
레돈델라 지자체가 카사 다 토레(Casa da Torre/ tower house/ 16c 영주의 집?)를
개조한 순례자 숙소인데 27개의 2단침대가 상단 일부만 남았다는 것.
갈망하던 스페인 땅에 다시 왔으나 2층으로 올라가야 할 처지였다.
하단 젊은이에게 양해를 구해보겠다는 친절하고 성의있는 젊은 여관리인을 말렸다.
프랑스 길에서 종종 그랬는데 그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었기 때문이며 오늘은 2층에
오르내리는 것도 무난할 것 같아서.
그러나 그녀의 늙은이에 대한 성의는 멈추지 않았다.
먼저 내 동의를 구한 후 나를 안내한 곳은 이동거리가 거의 없는 1층의 장애인용 방.
방문에 장애인 표지가 붙어있고 실내 한 쪽에 알베르게 소모품들이 쌓여있기 때문에
분위기가 약간 산만한 것 외에는 일체의 시설을 독점하는 최고의 방이다.
마드리드 길을 제외한 모든 길을 통틀어서 유일하고 아주 특별한 체험을 하게 하는.
바로 옆 대형 휴게실(식당으로 사용)에는 카미노에 관계된 많은 책과 잡지들이 비치
되어 있으며 리마보다 더 많은 자료를 구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15kg을 초과했을 뿐 아니라 날이 갈 수록 늘어나는 배낭의 짐을 줄이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그간 수집한 자료들을 비롯하여 불요불급의 짐을 산티아고 우체국으로 보내기 위해
들른 우체국 직원의 친절은 카미노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을 몇가지중 하나일 것이다.
대화의 단절과 애로에도 불구하고 자상히 설명하기 위해 애를 쓰고 필요할 것이라며
기념엽서들을 선물하는 젊은 직원을.
가벼워진 배낭에 먹고 마실 것들을 비축해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수퍼에서 잔뜩 사들고 돌아온 숙소에서 나를 찾고 있는 중이었다는 로저를 만났다.
많은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친구가 되었으며 사도 야고보의 길이 내게 준 귀한 선물중
하나인 그에게 내 방(?)을 소개하고 맥주를 나눠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포르투 길을 마치고 귀가한 그는 내가 귀국하기 훨씬 전에 e-mail을 보내왔으며 62세
생일 잔치에 대해서도 다시 보내왔다.
이번 여정에서는 인연을 만들지 않겠다고 수없이 다짐하며 한국을 떠나왔다.
기왕의 인연들에 대해서도 소홀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다시 맺어진 이 인연들을 어찌 감당할지!
불가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억겁의 인연이라 한다지만 인연도 식물(植物)과 같은데.
<계 속>
첫댓글 다녀 오신지도 1년이 넘었습니다. 카페지기님의 기억력은 정말 알 수가 없네요. 까미노길 표식인 조개껍데기는 이제 저에게도 친근감이 드는군요.
사진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신통하게도 모든 것이 되살아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