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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윤석 시인의 작품집 『스팸메일』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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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세계로 떠나야 ㅎ ㅏ ㄹ ㄸ ㅐ
김태경 (시조시인. 문학평론가)
몇 걸음 먼저 걷는 자
시조란 무엇인가. 시조 이론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우리는 시조가 과거에서부터 있어왔던 정형시이기 때문에, 이미 정립된 시조 이론에 맞게 창작해야 한다고 여겼을지 모른다. 시조가 생성, 변형되어온 과정과 현대시조로 자리매김 하게 된 배경, 시조가 지향해오던 가치, 시조를 향유하던 계층의 특성과 문학적 반영 등은 시조문학사에 근거한다. 따라서 지금 다시 시조문학론을 집필한다고 해도, 일부 추가. 변형되는 내용이 있을 뿐 그동안 기술했던 내용에 큰 변화는 없을 것이다. 지금 세상에 나온 시조문학론이 어디에서 기인했는가를 생각해볼 때, 장르의 역사가 길다는 점에 착안하면 우리가 꺼낼 수 있는 얘기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간단히 언급하자면, 과거부터 지니고 있던 시조의 특성, 장르적 자기동일성을 바탕으로 하여 특정 시인과 학자에 의해 시조이론이 정립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시조는 긴 역사를 지나오면서 놀랍게도 몇 가지 큰 변화를 도모한 적이 있다. 면밀히 따지고 보면 윤선도의 「어부사시사 」도 기존에 알고 있던 3장 6구 형식에 후렴구를 삽입하면서 형태적으로 5행 시조로 보이게 만들었고 40수로 이루어진 장형시조이다. 사설시조도 평시조의 형태에서 변형을 꾀했는데, 우리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향유 계층의 호응을 얻어 널리 퍼졌기 매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때는 지금 쓰,이고 있는 현대시 양식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하고 싶은 말을 충분히 담아내고자 했던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시기상 적절한 변화였던 것이다. 변화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신체시가 유입되어 오던 근대이행기에는 4행 시조가 나왔는가 하면, 그 후에는 이은상의 양장시조도 세상에 나왔다. 그러면서 시조의 이런 변이 형태가 있어왔다는 사실이 시조문학사에 남게 되었다. 주지하듯, 시조문학론은 특정 시인과 학자들 몇몇에 의해 정리되는 것이고 새로운 시작은 창작자들이 어떤 작품을 발표하는가에 기인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시인들의 창작물이 발표되고 난 후 그것에 바탕을 두고 이론이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에 발표되고 있는 시조를 기존의 시조문학론으로 모두 설명할 수 없다. 시인들은 늘 이론보다 몇 걸음 더 나아가 있으며, 그들이 앞서가는 속도를 이론이 따라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있는 이론으로 시인의 상상력을 제한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그런데 일부 시조 연구자나 평론가, 시조시인은, 유독 시조에 관해서는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과거에 정립된 이론에 국한도이 지금- 여기의 시조를 평가하는 경우가 있다. 시조의 주제의식과 형상화 방식, 전개 양상 등, 시조문학사를 제외한 시조 이론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시조’에 해당하는 얘기일 뿐이다. 지금-여기에 시조를 창작하고 있는 시인들은 이미 몇 발자국 앞서 걷고 있다.
이로써 시인들의 존재는 더 소중해졌다. 우리는 시조시인 한 명 한 명의 존재를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이 곧 지금-여기의 시조 세계를 구축해가는 일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첫 시집『스팸메일 』을 세상에 내놓은 백윤석 시인의 시조 속으로 들어가 보려고 한다. 몇 걸음 앞서 걸으며 고민했을 백윤석 시인만의 시조문학론과 창작 세계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백윤석 시인이 새로운 방향으로 홀로 걸으며, 시조 안에서 어떤 것들을 실현하고자 했는지 공감할 차례이다.
사람 곁에 꽃이라는 프리즘
사람은 왜 문학작품을 읽을까. 위로받고 싶거나 내면에 엉켜있는 감정을 말로 표현하기 힘들 때, 그런데 그것을 표현하고 싶을 때 문학작품을 읽는다. 쓰는 행위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백윤석 시인의 내면에 내재된 표현 욕구가 시조와 만났다. 그리고 그 욕망은 2016년〈경상일보〉에 「문장부호, 느루 찍다 」가 당선되면서 세상에 드러난다. 그가 시조를 창작한 지 16년이 지나서였다. 긴 시간 그의 욕망 속에서 오랫동안 자리 잡은 대상은 무엇이었을까. 첫 시집『스팸메일』을 열어 보면, 가장 먼저 다양한 ‘꽃’을 만나게 된다. 시집의 제1부가‘꽃이 내게 전하는 말’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새로운 출사표로 1번의 자리에 놓은 ‘꽃’은 시인이 세상과 만나게 하는 문이었다.
꽃은 인간과 가깝게 있으며 인간의 생활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축하나 위로 등의 마음을 전할 때 보편적으로 활용되며 집에서 꽃을 직접 키우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 문학작품에서도 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주몽 신화에 등장하는 주몽의 어머니 이름은‘화花 가 들어가 있는 ’유화柳花‘이며 신라의 향가 「헌화가」 「산화공덕가」, 설화 「화왕계」 에도 꽃이 중요한 소재로 등장한다. 그리「 고 널리 알려진 김소월의 「진달래꽃」 과 김춘수의「꽃」으로 그 계보가 이어진다. 그러므로 인간과 역사적, 물리적으로 가까운 꽃을 백윤석 시인이 주요 소재로 삼았다는 것은 전혀 어색한 일이 아니다.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백윤석 시인이 꽃을 바라볼 때의 시선과 꽃을 통해 접하는 세상에 대한 인식일 것이다.
너 한 발 나 한 발로
내딛는 무욕의 땅
엎어지면 일으키고
얼어서면 잡아끄는
저 들녘
하늘 오르는
두레박 물질 소리
-「타래난초」 전문
하늘에 오르면 무엇을 말하고 싶을가. ‘타래난초’는 줄기 따라 꽃이 매달린 모습을 하고 있는데, 꽃이 줄지어 선 모양이 마치 하늘에 오르는 두레박과 흡사하다. 시인의 발상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미국 시인 존 프레더릭 님스john frederick Nims는 “어떤 것을 이해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그것과 유사한 것으로 잘 알려진 어떤 것과 연관시킴으로써 출발한다(......)우리의 정신세계는 유사함을 발견하면서 작용한다”1) 라고 말한 바 있다. 새로운 대상이 시신경을 거쳐 뇌에 들어왔을 때, 그것과 유사한 특성을 지닌 대상이나 현상이 떠오른다는 것이다. 이런 유사성에 의해 비유가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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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유혜숙,「서정주 시의 ‘꽃’이미지에 나타난 제의성 고찰」,『한국문학이론과 비평』11, 한국문학이론과 비평학회, 2001. 6. 16쪽 재인용.
‘타래난초의 꽃이 핀 모양-이곳에 부호가 하나 있는데 컴퓨터에서 못 찾겠음. 김문억 주-하늘 오르는 두레박’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단순히 시각적 비유에서 멈추지 않고, 이를 청각 이미지로 전환하여 “두레박 물질 소리”를 듣는 것으로 갈무리한다. 그의 시적 상상력이 단순하지 않고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시인의 발상은 비유에서 시작되었지만, 초장과 중장을 지나오면서 의인화 기법으로 이어진다. 인용 시에서 ‘나’와 타자인 ‘너’는 서로 “무욕”의 땅에서 “엎어지면 일으키고/일어서면 잡아”끌어 준다. 백윤석 시인은 타래난초의 모습에서 인간이 상호 부조하는 양상을 읽어낸 것이다. 의인화anthropomorphism는 어원상 ‘인간의 형태를 지칭하는 그리스어에서 파생되었다. 의인화는 인간의 특징을 사물이나 자연물에 투사하는 것을 말하는데“투사의 과정 자체는 투사자인 인간의 관점과 욕망으로 대상을 대상화 혹은 인식적으로 수용한다는 함의를 내포”2)한다. 우리가 사는 세계가 “무욕의 땅”은 아닐 것이다. 자본과 물질에 대한 욕망으로 다툼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시인이 이렇게 표현한 것은 자연물인 타래난초에서 ’무욕‘의 경지를 읽어내고 이를 시인 스스로 내면화한 심적 행위가 대상에 투사된 것이리라. 백윤석 시이은 의인화를 통해여 타래난초와 인간의 세계를 연결하고, 양자가 하나로 융합되는 가능성을 시조로 나태냄으로써, 이들이 상호부조하는 이상 실현의 소망을 향해 한걸음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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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전세재,「포스트 휴먼 :의인화와 동물-되기의 기법」,『문학과 환경』 7, 문학과 환경학회, 2008. 12. 1167 쪽.
의인화 기법은 자연의 사물이나 배경을 보여주기 위한 은유적 수단으로 활용되는데, 백윤석 시인은 그런 문학적 기교에 머물지 않는다. 인간 사회 속에서 느끼는 고독과 고립을 꽃이라는 자연 이미저리를 활용하여 의인화하고, 이 기법을 기반으로 인간과 자연이 상호작용하게 한다. 다음 시를 만나보자.
미황사 대웅전 앞 햇살 한 뼘 남은 자리
안거에 들지 못한 벌 몇 마리 불러 와서
비파꽃 향기를 안고
현 고르는 저물녘
봄 그리 기다리며 탑을 도는 사람보다
털외투 입고 와서 꽃망울 터뜨리는
안으로 멍든 세상에
오체투지 던지는 꽃
너테 낀 가풀막 위 수레 한 대 뒤뚱인다
장갑도 양말도 없이 어둠을 되작이는
할머니 꽁꽁 언 손발,
눈보라를 헤쳐 간다
-「비파꽃 설법說法」전문
시적 화자는 전남 해남 땅끝 마을에서 위치한 미황사에 있다. 그리고 대웅전 앞에 피어있는 비파꽃과 마주하였다. 이꽃은 “털외투 입고 와서 꽃망울 터뜨”린다. 비파꽃은 본래 늦가을에서 초겨울에 걸쳐 피는 새끼손톱만큼 작은 하얀 꽃인데, 그 모습이 화자의 눈에는“안으로 병든 세상에/오체투지 던지는”듯 비춰진 것이다. 비파꽃을 의인화하여 고독과 고립을 견디는 인간을 형상화한 대목이다. 이런 비피꽃의 모습은 셋째 수에 와서 할머니로 연결된다. 할머니는 얼음이 낀 경사 길에 수레 한 대를 끌고 가신다. 할머니는 “장갑도 양말도 없이”“꽁꽁 언 손발”로 “눈보라를 헤쳐” 가고 있다. 비파꽃과 할머니가 겹치면서 자연 이미저리와 인간이라는 이항二項이 접목되는 것이다. 의인화는 대상을 통해 인간의 경험이나 말을 전달하므로 인간 중심적이기 쉽지만, 백윤석 시인은 꽃과 할머니 사이의 이분법적 경계를 지움으로써, 둘 사이의 관계성을 형성하는 영매적靈媒的인 시도를 하고 있다.
백윤석 시인이 꽃을 노래하는 방식은 그 곁에 사람을 불러 세우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인간이 상호부조하는 모습에 대한 희망으로 표현되거나 고독과 고립 속에 묶인 소외된 자를 위로하는 것으로 형상화 된다. 다음 시에서 만난 제비꽃은 백윤석 시인에게 어떤 영감을 주고 있을까.
소슬바람 귓속말로 보도는 들썩인다
스펙 없는 발걸음들 박자 놓친 퇴근길에
블록 틈,
제 계절 잃은
제비꽃에 발이 멎고
비정규직 후일담이 무자맥질 하는 길목
몸통 불린 큰 그늘이
일순, 나를 덮쳐오면
꺼지던
불씨 살리는
보랏빛 몸짓 하나
피곤한 뒤축 끌며
또 하루가 눕는 시간
불쑥 이는 삼각파도 골목 꽉꽉 조여와도
철 이겨 피는 꽃대는
끝내 막지 못한다
-「꽃대, 일어서다」전문
시인의 눈에 들어온 제비꽃은 보도블록 틈에서 계절을 잃고 피어 있다. 이런 제비꽃의 “보랏빛 몸짓”은 꺼져가던 불씨도 살릴 만큼의 생명력을 지녔다.“철 이겨 피”어 있는 모습을 본 화자는 현실에서 오는 무게를 덜어내고 삶의 에너지를 얻는 것이다. 그렇다면 화자는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가.“스펙 없는 발걸음”으로 “비정규직 후일담이 무자맥질 하는 길목”에 있다. 그가 사는 하루의 끝이 피곤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러나 제비꽃을 보며‘꽃대’를 일으켜 세운다. 크게 달라질 것 없이 늘 비슷한 일상의 연속이지만, 그 안에서도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자연물을 발견하고, 구겨지고 주름진 시간을 펼쳐내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 “꽃대 하나 일”으켜 세우는 또 한 사람이 있다. 다음 작품을 눈여겨보자.
후드득 빗소리에 대합실이 다 젖는다
쉼 없이 비를 털며 들락대는 사람들 속
척추 흰 우산 하나가
구겨진 채 나뒹군다
한 때는 온몸으로 빗줄기를 막던 그도
살대가 부러지면서 하염없는 잠에 빠지고
노숙의 차디찬 빗소리
꿈결인 듯 듣고 있다
일순, 그 안에서 꽃대 하나 일어선다
성긴 꽃 잎눈이라도 손아귀에 움켜쥐고
비 듣는 세상 밖으로
무릎걸음 걷는다.
-「어떤 우산」 전문
시적 대상이 그도 한때는 튼튼한 우산처럼“온몸으로 빗줄기를 막”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삶의 무게로“살대가 부러지면서”“척추 휜 우산”인 양 “구겨진 채 나뒹”구는 노숙 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시인은 그가“무릎걸음”으로 “비 듣는 세상 밖으로” 걸어 나가는 모습에서 꽃을 연상한다. 「어떤 우산」이 우리가 이번 장에서 살펴보는 다른 시편들처럼 꽃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백윤석 시인은 세상 밖으로 나가기 위해 일어나 걷는 모습을“꽃대 하나 일어선다”라고 형상화 하고 또 그가“성긴 꽃 잎눈”을 “손아귀에 움켜쥐고” 있다고 말하면서, 꽃을 사람 안으로 불러온다. 사람이 곧 꽃인 셈이다. 이런 시적 행위는 고독과 고난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에 대한 연민과 애정 섞인 시인의 눈에서 발아된다. 여기에 백윤석 시인의 고유한 언어가 잘아 숨 쉰다.
이 밖에도 백윤석 시인이 사람 곁에 꽃을 두는 시조는“금빛햇살 눈이 부신/국적 잃은 한 구석에/전통혼례 예비하는 서양 신부”(「족두리꽃」)를 조명하거나, “감긴 태엽 다 풀린 듯/멈춰 선 시계 하나”를 보며 “갈 길 잃은 손끝에도/빛의 다비 남겨”(「시계꽃」)지길 바라는 소망을 담고 있다. 또는 “다 잠든 야음을 틈타/기습 공격”하는 “파르티잔 달 구비 장군”(「달구비 대첩」으로도 그려진다. 백윤석 시인은 위로받고 싶고, 위로하고 싶을 때 꽃의 곁으로 다가간다. 꽃은 자연물 중에서도 연약하고 아름답지만 끈질긴 생명력도 지니고 있다. 꽃을 만난 시인은 내면에 엉켜 있는 감정과 말을 시조 안에 풀어 놓으며 내면의 결핍을 채워가는 것이다. 앞으로 시인이 어떤 대상과 함께하게 될지 그의 시적 행보가 주목된다.
온고지신이라는 ‘기본값’과 변형의 미
문학이 당대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므로, 시인은 그 개인이 속한 집단의 역사적 기억을 작품 속에 담게 마련이다. 그리고 동일한 역사적 기억을 가지고 있는 다른 개인들은 문학을 토대로 서로 소통하게 된다. 이때 어떤 특정한 역사적 기억에 대한 시인의 인식과 표현 방법 등이 집단을 이루고 있는 개인들로 하여금 당대의 현실을 객관적이고 새로운 시각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한다. 이는 그 집단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중요한 지표로 작용하기도 한다.
백윤석 시인은 이번 시집 제3부에 ‘온고지신’이라는 주제로 시조 작품들을 선보였다. 여기에는 역사적 사실을 재현하는 데 집중한 「이산」「세검정을 읽다」「초당의 불빛」과 같은 일군의 작품이 있는가 하면, 역사적 사실을 변용한「훈민정음해례본을 읽다2」「달, 황진이」「어사의 달」「완도莞島를 말하다」등의 새롭고 흥미로운 작품들이 구성되어 있다. 이 작품들은 대부분 인물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전설적인 인물은 역사에서 패자의 기억이 도사릴 때, 비범한 인물에 대한 민중의 문학적인 해원 의식을 바탕으로 소환된다. ‘좌절의 상황-영웅 모티프의 시적 도입-회복과 상생의 의지’라는 단계를 거치며 시화되는 것이다. 이로써 현실 문제를 타개하고 극복할 수 있도록 원자화된 개인을 집결시키는 효과를 준다.
「논개, 용궁에 가다」역시 전설적인 인물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작품은 역사에서 여성 영웅으로 알려진 논개를 소개로 하면서, 설화의 후일담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반적으로 논개 설화는 임진왜란 때 2차 진주성 전투라는 역사적 배경 위에 전해진다. 성이 함락되자 제장이 자결하고, 성에 있던 관군, 의병, 민간인이 왜적에게 도륙된 뒤, 관기 논개가 왜장을 유인하여 남강에 함께 투신한 사건이 근원 설화이다. 야담집에 수록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논개 설화의 뒷이야기를 백윤석 시인의 시적 상상력을 통해 들어보자.
오물을 끌어안고 푸른 바다 넘본 논개
오염 물결 투기죄로 용궁에 잡혀 오는데 오매, 용궁에선 전혀 못 본 천하제일 절색이라, 문어장군, 거북장군, 오라는 무슨 오라 껴안기 몸 비비기 호송 마냥 늦어지고, 건장 체크 한답시고 젖꽃판, 깊은 숲 훒기, 진단법도 다양하다. 편작도 울고 갈 새 시대의 치료법이라나, 게다 끌고 영문 모르고 끌려간 작달막한 왜인 장수 구린내 펄펄 나는 입 벌리며 하는 말이 그 누가 아무리 자기네 땅이라 우겨도 죽도에서 죽도록 맞고 싶어 독도를 죽도라고 우겼다나, 여차저차 끝에 용왕 앞 끌려간 논개, 이생에 한이 많아 후생에 반도의 왕으로 태어나길 간청하는데 남해 용왕, 미모 탐하다 헛송신을 했다나 봐, 어머나, 반도의 왕으로 보낸 이가, 보낸이가 글쎄... 논개의 거푸집에 왜장을 넣었다나
아뿔싸, 이 일을 어째 반도 저리 요란하다.
-「논개 용궁에 가다」전문「
논개 설화에서 왜장은 ‘오물’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사후에 논개가 받는 것은 의로운 행동에 대한 ‘포상’이 아닌 뜻밖의 ‘벌’이었다. 죄목은 오물이라는 오염 물질을 바다에투기한 행위이다. 이 때문에 논개의 사후 행적은 의외의 사건들과 결합하게 된다. “용궁에서 전혀 못 본 천하제일 절색”인 논개가“새 시대의 치료법”이라는 명목하에 농락당하고“작달막한 왜인 장수”는 “구린내 펄펄 나는 입 벌리며”독도를 죽도라고 우“기는가 하면 용왕 앞에 끌려간 논개가”후생에 반도의 왕으로 태어나길 간청“했는데 , 반도의 왕으로 보내진 이는 결국 왜장이었다. 백윤석 시인이 전하는 논개 설화의 뒷이야기는 다분히 씁쓸한 풍자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풍자인가 논개설화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일본과의 관계에 대한 역사적 기억과 현실에 대한 풍자인 것이다. 오랜 시간 변하지 않는 역사에 대한 뼈아픈 비판과 조소가 반영되어 있다.
다음 인용시는 앞서 살펴 본 작품들과 다르게 서양의 고전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에서 소재를 취하였다. 이 작품 역시 「논개 용궁에 가다」처럼 인물의 사후 행적에 대한 상상력으로 진행되지만, 「논개, 용궁에 가다」보다 해학적이다. 그리고 그 해학 속에는 휴머니즘이 녹아 있다.
마르자나 도움으로 천국에 간 알리바바
동방의 작은 나라 금수강산 보고 싶어 옥황상제 뇌물 먹여 양탄자 타고 내려오다 천국 문에 걸린 올, 실밥이 솔솔 풀려 서울 저 한복판에 뚝! 하고 떨어졌겠다. 전후 사정 안 가리고 허둥지둥 내려온 터라 주머니는 텅텅 비고 배에서는 구조 신호... 동굴 같은 은행 앞에 선 줄 보고 저도 서서 무작정 기다리는데, 기다리는데 앞선 사람들이 뭔가를 찾아 흡족한 듯 돌아가는 거라, 순서가 돌아오자 그냥은 갈 수 없어 잊을 뻔 했던 주문을 기억해 내 냅다 외치는데 열려라 참깨! 아무리 외쳐 봐도 문은 열리지 않고 제 말만 반복하는 숨어 있는 여자 목소리 혹여 마르자니가 아닐까 밤을 새워 나오길 기다리는데... 이직도 은행 모퉁이에 쪼그려 앉은 사람 보거들랑
굶주린 이방인에게 관심 몇 닢 떼어주시길.
_「알리바바 한국에 오다」전문
마르자나는 지혜로워서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마르자니의 도움으로 알리바바는 천국에 가게 되었는데, “동방의 작은 나라 금수강산 보고 싶어”“양탄자 타고 내려오다 천국 문에 걸”려 서울로 떨어지게 되었다. 돈은 없고 배가 고픈 상황에서, 은행 앞에 줄지어 선 사람들을 보고 자기도 무작정 기다린다. 그러나 현금인출기의 존재를 모르는 알리바바는 “열려라 참깨!”를 외치다가 지친 상태가 된다. 현금인출기에서 흘러나오는 여자 목소리에 혹시 마르자니가 아닐까 생각하며 밤새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고 시인은 마무리에 재치 있게 덧붙인다. “아직도 은행 모퉁이에 쪼그려 앉은 사람 보거들랑//굶주린 이방인에게 관심 몇 닢 떼어주시길”이라고.
마무리 구절에서 알리바바는 두 부류의 인간상을 떠올리게 한다. 하나는 빈곤한 노숙자이고, 다른 하나는 망명하거나 소외된 외국인이다. 이 작품을 읽는 혹자는 이 두 부류의 인간상 말고 또 다른 인간상을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그게 누구이든 알리바바는 거처를 정하지 못하고 굶주린 채로 은행 모퉁이에 쪼그려 앉아 있다. 그가 이렇게 되기까지의 형상화 과정은 해학적이었지만, 시조의 종장에는 해학보다 인간의 온정이 자리한다. 사람에 대한 연민과 휴머니즘이 내재해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요즘 시조에 흔히 보이는 ‘노숙자’와 같은 진부한 시어는 쓰지 않았다. 대신 고전을 차용하여 색다른 시적 상상력으로 소회된 인간상을 형상화하고 인간애라는 주제의식까지 담아냈다. 백윤석 시인이 시적 형상화에 대한 고민을 어떻게 풀어가고 있는지 알게 해주는 부분이다.
이번 장에서는 백윤석 시인이 시조 속에 담은 ‘온고지신’의 경향과 고전의 현대적 변용까지 살펴보았다. 시인이 작품에서 이를 어떻게 형상화 하였는지 따라가 보면 그가 고전과 전통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였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시적 형상화 과정을 통해 고전에 대한 해석과 수용은 물론 독자와의 소통 의지 양상도 엿볼 수 있다. 그는 우리 역사에 기록된 인물들의 영웅적 행보나 특징을 소재로 현재의 시간을 되돌아보고 비판적 목소리를 담아내기도 한다. 또 역사적 인물이나 고전을 변용하여 시적 상상력을 발휘하고 새로운 이미지의 시조를 선보이는 데 주력한다. 물론 그 배경에도 역사 현실에 대한 고민과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 정의로움 등이 녹아 있다. 백윤석 시인이‘온고지신’을 통해 독자들과 소통하고 싶은 담화도 이러한 것들을 내포하고 있을 것이다.
시조를 바꾸는 감수성, 시조가 바꾸는 감각
감수성은 일반적으로 외부 세계의 자극을 받아들이고 느끼는 성질을 일컫지만, 문학예술에서는 특히 이성과 구분되는 정서적 개념으로 인식되곤 했다.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은 감수성이라는 개념에 대해, 대상에 대한 감성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정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 장르보다는 서정 장르인 시에서 더 중시되었다. 한국 문학사에서 근대문학의 시작과 동시에 지각된 감수성은 주체가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와 연관되고 시대 상황에 따라 변화한다. 하나의 대사에 대해서도 그것을 바라보는 주체에 따라, 즉 시인에 따라 시재의 감수성이 작용하는 방식에 의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여기의 감수성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오늘날은 감수성에 대해 분절적으로 감성의 영역에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감수성은 나와 타자에 대한 공감 능력은 이성에 근거한 사고력과도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에서 말하는 감수성은 감성과 사고력의 어디쯤에 위치한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시인은 나와 타자, 나와 세계 사이의 관계를 민감하게 인지하는 사람이므로 감수성이 예민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시인 내면에서 감성과 사고력을 민활하게 작동시키고, 감각을 통해 이를 인지하며 감각적 언어로 표현한다. 시인이 좋은 시고를 쓰기 위해서 좋은 감수성을 지니고 있어야 할 것이다. 좋은 감수성이란, 시적 대상과 시적 상황에 적합하도록 감성과 사고력을 움직이게 하는 데서 온다. 여기서 감각적 언어를 거치면 더 좋은 시조가 세상에 나오게 되는 것이다. 백윤석 시인은 좋은 감수성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는 시인이며, 이를 시조로 표현하고자“그 신기루 잡으려/연필에 침을 묻”(「시인의 말」)히고 있다. 다음 시에서 시조에 대한 그의 속내를 엿볼 수 있다.
점 하나 못 챙긴 채 빈 공간에 갇히는 날
말없음표 끌어다가 어질머리 잠재우고
글 수령 헤쳐 나온다.
바람 한 점 낚고 싶어
발길 잡는 행간마다 율격 잠시 내려놓고
어머니 말의 지문 따움표로 모셔다가
들레는 몇몇 구절을
초장으로 앉혀야지
까짓것, 급할 게 뭐람 쌍무지개 뜨는 날엔
벼룻길 서성이는 달팽이도 불러들여
중장은 느림보 걸음,
쉼표, 촘촘 찍어보다
그래도 잘 익혀야지, 오기 울컥 치미는 날
뙤약볕 붉은 속내 꽉 움켜쥔 감똑지로
밑줄 쫙! 종장 그 너머
느낌표를 찍을 터
-「문장부호, 느루 찍다」전문
백윤석 시인의 데뷔작이기도 한 위 시는 시조를 쓰는 과정과 문장부호를 조화롭게 연결하여, 시조를 천천히 무르익게 만들어가는 시인의 자세를 형상화하였다. 화자는 시조를 쓰며“바람 한 점 낚고 싶”지만 “점 하나 못 챙긴 채 빈 공간에 갇히”고 만다. 그럴 때는 “말없음표 끌어다가 어질머리 잠재”운다. “발길 잡는 행간마다 율격 잠시 내려놓고”내면에서 어수선하게 떠드는 몇 구절을‘초장’에 쓰고, 중장은 “쉼표 촘촘 찍”으며 천천히 이어간다. 그러다가 “쬐약 볕 붉은 속내 꽉 움켜쥔 감꼭지”처럼 종장에는 느낌표를 찍으며 마무리한다. 시조를 쓸 때 화자의 정서 변화같이 읽히기도 하지만, 실은 시조 장르가 지닌 호흡이나 보현적인 전개 양상으로 봐도 무방하다. 다층적 의미에 문장부호를 배치하여 감각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것이다. 시조에 대한 진지한 시인만의 감수성으로 ‘시조’의 감각적 세계를 펼쳐 보인 수작이다.
창작은 “숨 막히는”“가중처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뜬눈으로 지새우다 곧추앉은 책상 앞에/손에 쥔 애먼 연필심만/툭! 힘없이 부러”(「불면, 혹은 기근」지기 십상인 것이다. 때때로 “찾아올 땐 저만 급해 볼일 봤다, 코를 고는/저 저 저,/웬수 바가지 시詩‘(「어떤 신방」)와 같다. 하지만 멈추지 않는 시조 창작에 대한 백윤석 시인의 열정은 다음 시를 선보이게 한다.
나, 너는 모르던 사이 콤마조차 없던 사이
단어, 단어 사이에는 협곡의 바다가 있다
그곳에 돌고래가 와서 점프하며 뛰논다
‘와’라는 낮선 다리가 협곡에 놓인 순간
외딴섬인 단어들은 연륙교에 묶인다
다리가 놓이자마자 어디선가 날아 온 새
꿈틀 조차 않던 섬이 ‘와’에게 붙들린 뒤
어느 새가 둥지 틀자 우리로 변한 사이
관계를 무너뜨린 건 초겨울에 핀 개나리
개나리는 새를 날리고 고래마저 사라지자
나는 다시 백지 위 외마디의 굼뜬 단어
발등에 대못을 질러 구두점을 찍는다
-「사이에 대한 언어학적 고찰」전문
위 시에는 지금-여기에 자주 등장하는 ‘나’와‘너’의 ‘사이’에 대한 철학적 고민이 담겨 있다. ‘나’와 관계를 맺지 않은 ‘너’는 각기 개별자로 존재하는‘나’‘너’일 뿐이다. 양자 간의 단절을 말하기 위하여 시인은 이 둘 사이에 “돌고래가 와서 점프하며 뛰” 놀 수 있을 정도로 깊은 “협곡의 바다가 있다” 고 말한다. 그런데‘나’와 ‘너’ 사이에 ‘와’라는 낮선 다리“가 놓인다. 이렇게 둘이 관계를 맺는 순간, 외딴섬처럼 갖자 떨어져 있던 단어는‘연륙교’로 묶이고 어디선가‘새’들도 날아온다. 마르틴 부버 Martin Buber에 의하면, 사람은 ‘너’에게 접함으로써 ‘나’가 된다.
그리고 ‘나’라는 의식은 관계의 짜임 속에서 나타난다. 그렇지만 관계 사건은 농축되었다가 먼지처럼 흩어진다.3)잠시‘우리’로 변했던 ‘나’와 ‘너’는 ‘와’가 없는 ‘나’‘너’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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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마르틴 부버, 표재명 옮김, 『너와 나』문예출판사,2018. 47쪽.
초겨울에 피면 안 되는 개나리같이 관계는 무너지고, 개나리는 새를 날리며, 협곡에 있던 고래마저 사라진다. 관계의 종결과 동시에 고래마저 사라진 걸 보면, 관계 맺기 전에 바다에서 뛰놀던 고래는 관계의 기능성과 희망을 내포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사실“잉태되는 순간부터 사람은 섬이었다(......)연륙교, 그 짧은 길은 /끝내 닿지 않았다 (「섬」), 그렇기에 관계에 있어 ”발등에 대못을 질러“마침표와 같은 ”구두점을 찍는“일은 어렵지 않게 발생할 수 있다. 타자로서 ‘너’는 ‘나’와 합일이 쉽지 않은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백윤석 시인의 감수성이 ‘관계’ 라는 추상적인 외부 자극에 닿았을 때, 이성에 근거하여 감상적 수식을 절제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감성과 사고력의 적절한 조화 위에 언어학적 발상을 덧입혀, 시조를 지금-여기에 알맞은 감각의 세계로 안내하는 것이다.
이 밖에도 백윤석 시인이 지닌 개성 있는 감수성으로 시조를 낮선 감각의 세계로 안내하는 작품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가령 지구를 포함한 행성들을 보며“연이은 저 연쇄 충돌/블랙홀에 빠지는 별”(「포켓볼」)을 떠올리거나, 수학적 상상력에 기반 하여 ‘관계’에 대해“차집합 뻥 뚫린 상처/아물기를 기도”하고“ 교집합 서로 나눈 공감/아직 남”(「집합에 대한 언어학적 고찰」)아 있다고 표현하는 부분이 그러하다.
한편, 다음 시는 ‘네팔’이라는 시어에 중의적 기법을 적용하여, 유머를 동반하면서도 대상에 대한 진정성을 드러낸다.
히말라야 근처랬지
수도는 카트만두
서울에서 비행시간은 기껏해야 6시간 반
그런데 어쩐 일인지 난 2달 째 비행 중
급유는 하는 걸까
조바심 자꾸 생겨
만년설 덮였어도 따사롭게 느끼는 곳,
이제는 그만 내려서 그곳에 닿고 싶네.
지상에 단 한 곳, 이르고픈 미답의 성지
아, 코앞에 있어도 쉽게 닿지 못하는
언제나 가 닿을지 모를
그리운 그, 너의 팔
-「네팔」전문
첫 수는 고유명사로서의 ‘네팔’에 대해 언급하며 사직된다. 비행기로 6시간 반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수도 ‘카트만두’에, “어쩐 일인지 난 2달 째 비행 중”이다. 그러면서 독자들의 궁금증을 자아낸다. 둘 째 수에서도 화자가 ‘만년설’이 뒤덮일 정도로 추운 ‘그곳’을 따사롭게 느낀다고 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또 한 번의 의문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화자는 마지막 수에서 그곳이 고유명사 네팔이 아닌 ‘너의 팔’이라는 의미를 지닌‘네 팔’이었다는 정보를 준다. 이로써 앞서 두 수에서 가졌던 궁금증과 의문이 해결되고, 독자들은 그의 작품에서 위트를 느끼면서도 대상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화자의 진정성을 이해하게 된다.
백윤석 시인의 개성적인 감수성이 반영된 위트는 다음 작품에서 빛을 발한다.
탈옥을 꿈꿔왔다.
입질은 핑계였다
식상한 미끼를 문 건
치밀히 짠 나의 계획
내 몸에
새겨진 죄수복
벗어버리고 싶었다.
조용히 살려 해도
등 떠미는 오지랖에
아무거나 잘 먹으며
엄지손 척! 내미는
답답한
나의 입맛을
사로잡고 싶었다,
-「돌돔」전문
우리는 일반적으로 돌돔이 물 밖으로 나오는 것을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런 평이한 발상에 대한 전복을 꾀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물 밖으로 나오는 것은 ‘탈옥’이며 ‘입질’을 탈옥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핑계였던 것이다. 이는 돌돔의 몸에 새겨진 줄무늬가 죄수복을 연상시키는 것과도 연결된다. 위트 있는 시인의 시적 상상력이 잘 드러나는 지점이다.
「돌돔」의 주조음인 발상의 전환은 둘 째 수에서 극치를 이루는데, 아무거나 잘 먹는 너의 입맛을 사로잡기 위하여 탈옥을 하게 되었다는 너스레가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겠다는 화자의 득의양양한 의지로 읽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인은 작품의 마지막 수에 마침표가 아닌 쉼표를 찍어서 돌돔처럼 싱싱하게 살아 있는 의지가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시적 성취에 대한 시인의 의지를 반영한 것으로도 생각해 보면,「돌돔」은 보편적 인식의 전복과 더불어 시조에 대한 백윤석 시인의 진정성을 내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 그의 첫 시집에는 형태미를 추구하여 의미를 시각화하고 심화하려는 시조가 엿보인다.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직장인의 일과를 그린 「하루의 음계」와 여성성을 상징하는 ‘여우비’, 남성성을 그린 ‘분수’를 소재로 한 「여름 그 에피그램」이 그 예이다.
도심지 밖 시작 음은 높은 도가 내걸린다
애옥살이 겨운 무게 해가 더디 눈을 뜰 때 노루잠 든 하루 일과 들깨우는 수탉 소리 삼복 날 올려 질 식단, 제 차렌지 모르고
시작부터 전쟁이다. 베록잠 안 깬 뒤끝 허둥지둥 고양이 세수그 림의 떡 상 물리고 자동차 기침 소리가 출근길 줄을 선다. 라디오나 크게 틀까, 노땅 티 허물 벗게 몰아닥친 잔소리는 좀 지나면 썰물이라 깜짝쇼, 준비한 랩으로 근심일랑 일단 접고
솔솔 부는 인사 바람 뜬소문만 왁자하다, 만년 과장 내 어깨 위 햇살만 와 두드릴 때 쥐구멍, 볕들 날 있다 추임새를 넣는 바람, 파열음만 자욱하다. 거래처 시소 전화 발길 잡는 안개 더미 넉살 좋게 풀어내고 퇴근길, 한잔 술로도 갈지자로 걷는다
미로였다. 뒤안길은 어둑서니 판을 쳤다. 어머니 꼬부랑길 내굽은 길 펴고 갈 때 들리는 나직한 음성, 굽은 등 다시 편다. 례일도 뒤틀렸다. 바퀴마저 고장 났다. 그럭저럭 안전 운행 급제동도 없던 날에 아이들 키 크는 소리, 못 이룬 꿈 되감고 도 트이는 낮선 길목, 파열음 속 잠이 든다. 먼저 잠든 곤한 모습 안쓰러워 뒤척이다 아내의 코고는 소리 이중주 화음 낼 때
끝없는 도돌이표가 가눈 눈을 키운다
-「하루의 으마계」전문
여우비
어제 낮 대로에서
방뇨하던 고 계집애
메마른 이내 가슴
불 잔뜩 싸지르고
제 볼일
이미 봤다고
내빼는 꼴이라니
2 분수
발설 못 해 누른 속내
시절 고이 벼르다가
한여름 뙤약볕에
뜨겁게 몸을 달궈
단번에 달아오른다
오
한 르
홀 가
황 슴
, .
저 .
.
-「여름, 그 에피그램」전문
「하루의 음계」는 사설시조인데 길어진 중장에 연 구분을 하여 음계벼로 의미 단위를 분절하였고,「여름, 그 에피그램」은 둘 째 수 종장에 카타르시스를 보여주기 위해 형태미를 살려 표현하였다. 오늘날의 시조에서는 두 시가 보여준 형태미 추구 량상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백윤석 시인은 어번 시집에서 이러한 시도를 아주 드물게 두 편에서만 시도하고 있고 전반적으로 시조의 기본 형태를 지키는 편이다. 그의 시조의 형태미 추구에 대한 시조론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확고해질지는 다음 시집을 만나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형태미를 구구한 시편이 확장될 수도 있고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다음 시집이 궁금하고 또 그의 창작 세계가 어떻게 변모할지 기대하게 된다.
시인 모두 자기만의 시조론과 시조 창작론이 있다. 그동안 발표된 시조 창작론이 이 시조에 입분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자중물이 될 수 있지만, 그것이 읽는 사람의 창작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시조 창작은 개이만의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들이 계속해서 새로운 시도를 하면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시조들이 제상에 니온다면 그에 맞는 새로운 시조 이론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아직도 ‘시조는 무엇이다’ 내지는‘시조는 이렇게 써야한다’라고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시조를 두고 명확하게 ‘무엇이다’ 라고 말할 t 있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시조는 계속 조금씩 변화를 겪을 것이고, 그게 시조시인들의 일이기 때문이다. 시조 이론가들이 시인들의 놀랄 만ㄴ한 작품들을 보고 자기가 알고 있던 시조 세계가 깨어지는 경험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시인과 시조 이론가들이 자기가 알고 있는 시조 세계가 깨어지고 문이 열린다는 것ㅇㄴ 좋은 일이다. 고루한 시조에서 조금씩 발걸음을 옮기고 점점 새로운 새계로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진보이고 진화이다. 시조가 정형 양식라고 해서 시조의 진보와 진화까지 그 자리에 고정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이번 장에서 백윤석 시인이 자신의 감수성을 시조에 표현하는 양상, 그의 감수성이 시조를 어떻게 감각와하는지 몇편의 시를 통해 살펴보았다. 시조의 진보와 진화를 위해, 백윤석 시인이 지닌 지금-여기의 감수성이 새롭고 감동적인 시조론을 낳길 빌어본다.
남아있는 나..날...속에 소 . . 환... 되는 기. 억.
“한 시절 가장 넓었던/나는 나를 잃었다”
-「골목의 시간」일부
문학의 시작은 여기에서 출발하는 게 아닐까. ‘나’와 ‘시간’에 대한 고민.
‘나’를 들여다보기 위하여, 지나온 시간에 있었던 사건들을 떠올린다. 소위 ‘기억’이라고 말하는 것들은 지금의 시간으로 끌어와 재생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 소급되거나 더 선명해지는 기억도 있겠다. 현재를 살기에도 여유롭지 않은 생활에, 지난 기억을 불러와 시인이 얻는 것은 무엇인가. 시인은 ‘나’라는 존재를 온 감각으로 느끼고 싶어 하지만, 실제 거울 앞에 있는 ‘나’를 확인하면서도 ‘나’를 망각한다. ‘나’는 분명히 현전하는데, 현전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내가 시뮬라크르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마저 들곤 한다. 보드리야르는 이제 ‘지오가 영토에 선행하여 , 심지어 지도가 영토를 만들어낸다.4)라고 밀했다. 시뮬라크르가 시뮬라크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함으로써 더 이상 ’현실/실제‘와 ’상상/가상‘의 구별의 어려워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이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 데도 존재하는 것보다 더 생생한 기호나 인공물들을 만들어 내지 않던가. 지나온 시간에 있었던 기억을 지금의 시간으로 불러오는 이유는 이런 세상에서 ’나‘의 종재를 좀 더 선명하게 느기고 싶은 내적 욕망이 만들어내는 행위일 것이다. ’나‘를 생生의 중심에 세우기 위한 각고의 노력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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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장 보드라야르, 하태환 옮김『시뮬라시웅』민음사.2001.
햇살이 나를 범해 나는 그를 낳는다
배부름도 산통도 없이 쑤욱 쑥 낳은 그
그래서 만만한 게다
무덤덤히 품는 게다
단 한 벌로 계절 나는 무채색 저 의복을
한평생 단 한 번도 갈아입지 못하면서도
그는 참 비위도 좋다,
날 따르는 것을 보면
편안하다, 저 어둠 속 그에겐 굴레가 없다
땅바닥 드러누워 온갖 흉내 다 해내다
비 듣자 따르던 발길
잠시나마 멈춰 선,
-「그림자」전문
‘나’의 현전을 확인하기 위하여‘나’의 그림자를 살펴봐야겠다. 실제의 ‘나’와 ‘나’의 그림자 중에서, 대로는 실제의‘나’ 보다, 내가 만들어낸 시뮬라크르로서의‘나’의 그림자가‘나’의 기억과 욕망을 더 분명하게 읽어내도록 이끈 등불이 되기 때문이다. 위 작품에서 보여주는 그림자의 모습은 만만하거나 덤덤히 품는 모습니다. 또 무채색의 단 한 벌로도 실체의‘나’를 잘 따르면서 굴레 없이 편안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실제의’나‘가 지니는 자아에 대한 기대와 욕망이’나‘의 그림자에 투영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다. 이런 인지 작용은 연실 세계를 살아가는 ’나‘에 대한 반성적 행위이며, 자아 성찰의 과정이다. 이렇게 나의 본질과 욕망을 읽어냄으로써 ’나‘의 현전을 재탐색하는 것이다.
이번 시집의 표제작이면서 제27회 신라문학대상 수상작이기도 한 「스팸메일」에도 존재에 대한 시인의 고민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한 톨 씨앗 잎눈 뜨는 문패 없는 내 뜨락에
잔뜩 덧난 상처마냥 몸 불리는 메일들이
용케도 바람벽 넘어와
술술 옷을 벗는다
끊임없이 거듭되는 공복의 내 하루가
한순간 눈요기로 허기마나 면해볼까
꼿꼿이, 때론 덤덤히
삭제키를 눌러댈 뿐
2.
눈발처럼 떠다니는 많고 많은 인파속에
어쩌면 난 한 낱 눈먼 스팸메일 같은 존대
무참히 구겨진 채로
휴지통에 던져질
눈길 한 번 받지 못한 외로 선 골방에서
팽개쳐져 들어앉아 변명조차 잊었어도
엉켜진 오해의 시간
술술 풀 날 기다리는.
-「스팸메일」전문
‘스팸메일’ 과 ‘나’라는 존재가 한 편의 시조 안에서 만났다.
자조적 어조가 묻어날 수밖에 없겠다. “끊임없이 거듭되는 공복의 내 하루”에 ‘눈요기’도 되지 못해 삭제되는 스팸메일을 마주하며, 화자는 나를 생각한다. “어쩌면 난 한낱 눈먼 스팸메일 같은 존재‘일지도 모르겠구나.”눈발처럼 떠다니는 많고 많은 인파 속“에서 ”눈길 한 번 받지 못한 외로 선 골방“에 있는 난, 이렇게”무참히 구겨진 채로/휴지통에 던져질“지도 모르겠구나. 화자는 왜 이런 생각들에 빠져 있을까. 문제는 ’시간‘이다. 그냥 시간이 아니고 ”엉켜진 오해의 시간“ 때문이다. 합일하기 어려운(작품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어떤 대상과 풀리지 않는 오해의 시간으로 인해 화자는 ’나‘라는 존재가 흔들리는 것을 느낀다.
‘나’는 ‘’너‘라는, 또는 ’그‘라는 대상을 통해 현전을 확인하는 존재이다. 나 혼자 존재해서는 나를 인식하기 어렵다. 타자와 관계를 유지하면서’나‘라는 존재를 인정받을 때 , 진정한 ’나‘를 느끼게 된다. 그런데 화자는“변명조차 잊”고 팽개쳐져 들어앉아“ 있다. 오해가 쌓인 시간들을 곱씹으며, 엉켰던 오해가 풀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결국, 골방 안에 회한의 시간과 흔들리는 존재감이 남아 있을 뿐이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자면 하나 더 있다. 언젠가는 시적 상황을 전복할지도 모르는 그것, 바로 기다림, 오해가 “술술 풀”릴 날을 기다린다는 화자의 마지막 고백에는 희망이 숨어 있다. 그런 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 독자들로서는 정말 그런 날이 올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화자가 그런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작품의 결말은 다소 낭만적이다. 무언가에 대한 희망을 갖는다는 사실 자체가 낭만적 행위이므로 물론 기다림이 영원한 기다림으로 끝나버린다면 화자가 놓인 상황도 비극이 지속될 것이다. 작품은 이런 두 가지 가능성에 대한 궁금증을 독자에게 남겨두었다.
‘나’의 존재에 대한 물음은 어디에서든 진행될 수 있다. 오롯이‘나’로서만 존재하고 싶은 ‘나’이지만, 세상에 던져진 ‘나’는 외부 자극에 의해 오렴되는 일이 다반사이기에, 심지어 생명력이 없는 자본의 세계에 놓여 있는 ‘나’라면? 다음 시「2+1」의 화자와 같은 고백을 하게 될 것이다.
걸핏하면 폭탄세일
지라시 넘쳐난다
혼자서도 너끈한 길 끼워 파는 난장에서
십진법 절대 가치가
덤으로 흔들린다
2˟4센티2˟9아나
헷갈리는 셈법 사이
나도 몰래 동떨어져 떨잇거리 되어버린
아, 나는
누구였더라
짚어보는 이 아침에,
나는 어느 진열대 위 덤 포장된 상품일까
반반한 묶음 따위 바라지는 않았어도
어눌한
손가락셈으로
저문 하늘 가눈다.
-「2+1」전문
사람은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는 지나온 시간 쌓아온 기억으로 살아갈 힘을 얻기도 하고, 후회를 만들기도 한다. 오늘을 잘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갖는 것도 훗날 떠올릴 좋은 기억을 남기기 위한 건 아닐는지,「2+1」에서 보는 것처럼 , 마트나 시장에 가면 상품을 여러 개 묶어서 폭탄 세일이라며 요란하게 판매하는 장면을 마주할 때가 있다. 내가 알고 있던 상품의 금전 가치에 혼란이 오면서, 셈법‘이 헷갈리는 경험은 ’나‘를 흔들어놓는다. 백윤석 시인이 그런 기억을 시조 안으로 불러왔다. 앞서 살펴본「스팸메일」이 ’스팸메일‘과 ’나‘를 비교하였다. 이 작품도 「스팸메일」만큼 자조적일 수밖에 없다. “헷갈리는 셈법 사이”에서“나는 어느 진열대 위 덤 포장된 상품일”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자본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시장경제는 인간의 가치마저 물질적으로 환산하는 경향을 띤다. 백윤석 시인도 이런 경향을 체험으로 느겼을 것이다. 떨어지는 상품의 가치와 높아지는 자본의 가치, 그 속에 인간, 그 주에서 ’나‘에 대한 고민으로 아침이 시작된다.
지난 기억은 사람을 성숙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사람의 가치관을 비틀어놓을수도 있다. ,「2+1」의 기억은 오늘의 시간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을 까. 작품에서 말하는 것처럼, “반반한 묶음 따위 바라지는 않았어도” 가치 있는 삶으로‘나’를 채워가게 되길 바라며“어눌한/손가락셈으로/저문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오늘의 시간에 생겨날 오늘의 기억이, 현전하는 ‘나’의 존재적 가치를 느끼게 해준다면, 남아 있는 나날에 백윤석 시인이 우리에게 돌려 줄 이야기는 또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지 모른다.
외로움도 참다 보면
내성이 생긴다고
살갑던 품속 그녀 떠나보낸 어느 해 봄
누군가
말해주었네
눈이 녹듯 잊을 거라
눈이야 때가 디면 제 스스로 결박을 풀지만
내 안에 얼키설키 똬리 튼 인연의 끈
스르르
풀리면 좋겠네
이내 깜냥만으로도
밤새도록 뒤척이다 목울대 잠기는 날엔
창가를 지켜주던 성긴 달빛 몇 줄기가
차라리 눈물이면 좋겠네,
내게는 다 말라버린...
인연은 강들의 조우, 묵묵하던 강들의 조우
만나고 헤어짐이 이리도 쓰린 거라면
바위가 길을 막아도
소리 내지 않으리
-「어떤 내성」전문
이번에 소환된 기억은 이별이다. 사람은 일생에 걸쳐 어떤 방식으로든 이별을 경험한다. 그리고 의미를 부여하는 정도에 따라, 이별은 충격으로 남거나 그냥 흘러가는 자연스러운 인간사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우리가「어떤 내성」을 감상하며 생각하게 될 부분은, 화자가 이별을 대하는 시적 태도와 사유-감성의 흐름이다. 지금까지 백윤석 시인의 첫 시집에 수록된 몇 편의 시조를 읽어보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감성적인 작품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여러 시편에서 발견했던 냉소와 자조, 풍자, 해학 등의 특질보다 백윤석 시인의 감성의 결에 가장 가까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래서「어떤 내성」을 본 지면의 마지막 작품으로 소개한다.
위 시는 묵묵하게 흐르는 강처럼 차분하고 고요한 어조로 이루어져있다. 이는 이별을 대하는 화자의 태도와도 연결되는데, 아픔을 말하면서도 감정을 절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눈에 눈물이 살짝 고였으나 흘러내리지 않고, 입은 말을 삼키며 지그시 다물어져 있는 그런 얼굴을 떠올리게 한다. 아마 이별이라는 특정 사건에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닐 것 같다. 백윤석 시인이 삶의 곳곳에 숨어 있는 상처와 아픔을 대할 때의 태도일 것이라고“창가를 지켜주던 성긴 달빛 몇 줄기”가 “내게는 다 말라버린”“눈물이면 좋겠”다는 고백과, 쓰라린 상처를 두고“바위가 길을 막아도/소리 내지 않”겠다는 다짐에서, 그가 눈물이 말라버릴 정도로 숱하게 많은 아픔과 상처의 시간을 인내고 견뎌왔다는 것을 가늠하게 되기 때문이다. 혼자 남겨지는 외로움도 그냥 받아들이고 참다 보면‘내성’이 생긴다는 누군가의 말처럼,이 작품에는 견딤과 절제의 언어가 담겨 있다.
우리는 첫 시집 이후에도 유지될 백윤석 시이의 자세를 일부 가늠할 수 있다. “천길만길 무저갱 속 누구나 혼자일러니/아파만,아파만 말고/뭐든 밝고 일어서”(「우울증」)서 고요하고 묵묵하게 나아갈 것이라는 사실을! 어느 시인은 ‘시인’에 대해 ‘하인下人’과‘거룩하다’는 단어로 표현한 바 있다. 그는 ‘하인’이‘다른 사람보다 아래 서는 것’이고‘’거룩하다‘는 것은 다름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낮은 자리에 서는 것이고, 글쓰기란 오만한 우리를 전복시키는 것이라고 5)’나를 들여다보고 타자와의 관계를 고민하는 백윤석 시인은 시조 안에서 더 나은 자기를 갱신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다. 그가 보여준 일부 자조적인 목소리는 존재적 회의감의 표출이라기보다는 자기 점검의 과정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내적 발화이다. 이로써 자세를 낮추고 절제하고 인내하는 생의 방식이 ‘내성’으로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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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이성복,『불화하는 말들』문학과 지성사.2015, 18-19쪽 참고.
백윤석 시이의 이러한 태도는 남아 있는 나날 속에 새로운 기억들을 소환하고 오늘도 어디선가에서 ‘나’ 자신과 시조를 전복하는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이제 삭제 키 대신 Enter 키를 누르고 다음 세계로 떠나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