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백제라는 두 나라를 건국한 소서노는 우리 민족사에서 수 많은 남자들보다 더 배포가 있고 마음이 너그러운 정말 여걸 중에 여걸이다.
[자료]부여의 시조 해모수의 후손 고추모의 여자관계 정리
고주몽은 북부여 황제 해모수의 아들 고진의 자손인 고모수와 유화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단군의 정통혈통입니다.
주몽이 태어나기 전의 역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북부여는 4대째인 고우루 황제 때에 이르러 스스로 동명왕이라 칭한 영웅 고두막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고 가섭원에 따로 동부여를 세웁니다.
고두막은 북부여 대신 졸본 부여라는 국명을 선택하고 그의 아들 고무서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황제에 오르지요.고우루의 동생 해부루가 가섭원에 세운 동부여는 해부루의 아들인 금와황제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었구요.
주몽의 아버지 고모수는 당연히 금와왕의 먼 친척뻘로서 비록 실권을 갖지는 못했으나 그 혈통 때문에 누구도 무시하지 못한는 권위를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그가 유력자인 하백의 딸 유화와의 사이에서 주몽을 낳자 주몽은 금와황제의 아들인 대소황태자를 위협할만한 존재로 견제를 받지요.
이런 핍박 탓에 그는 약관의 나이로 동부여를 탈출해 졸본부여로 망명하게 되고 마침 고령에 후사가 없음을 고민하던 졸본황제 고무서는 자신의 딸과 주몽을 결혼시키고 BC 58년, 주몽에게 보위를 물려준 후 병사합니다.
물론 해모수의 혈통인 동부여 왕실에 비해 떨어지는 혈통적정통성을 해모수의 혈통인 주몽을 통해 극복하려는 계산도 있었지요.
하지만 황비인 고무서의 딸 (이하 그냥 졸본공주라고 함)은 주몽을 들러리로만 삼은 채 정권을 좌우하려고 하게 되고 결국 주몽은 왕비 및 졸본 토착귀족에 맞서기 위해 만주 일대의 유력자인 연타발의 딸과 혼인하게 됩니다.이 연타발의 딸이 바로 유명한 여걸 소서노입니다.
당연히 이전의 부부의 정이고 뭐고 다 사라진 주몽과 졸본공주는 갈라서게 되고 주몽과 소서노는 쿠데타를 시도했다가 실패한 후 남쪽으로 도망가게 됩니다.
황비일파를 제거하려다가 도망간 들러리 황제 주몽대신 주몽과 졸본 공주의 아들인 아달황제가 섭정인 어머니 밑에서 제대로 들러리를 서게 된 것이죠. 하지만 병약한 아달황제는 오래가지 않아 의문의 죽음을 맞게되고 나라의 유일한 실권자인 졸본공주는 금와왕과 혼인하여 동부여와 졸본부여를 한 나라로 통합합니다. 갈라졌던 부여가 국혼을 통해 통일된거죠.
한편 그 사이에 남쪽으로 도망갔던 주몽은 장인인 연타발의 부와 부인인 소서노의 수완에 힘입어 그 땅에 기반을 잡고 결국 작은 나라인 고구려를 세우게 됩니다. 그리고 이 작은 나라는 주몽의 리더쉽과 소서노의 지략에 힘입어 순식간에 급부상하면서 부여를 압박할 만큼 성장하지요.
여기서부터 족보가 복잡해지는데요.소서노는 주몽에게 시집오기 전에 이미 우태란 귀족과 결혼을 했었고 그 사이에서 이미 아이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비류입니다. 그리고 주몽과의 사이에서 나은 둘째가 바로 온조입니다.
한편 주몽은 젊어서 동부여를 탈출 하기 전에 이미 어머니인 유화부인이 정해준 예씨라는 미인과의 사이에서 유리라는 아들을 가지고 있었죠.
문제는 갑자기 급부상한 고구려의 예봉을 피하고 화친을 도모하기 위해서 유화부인의 장례를 성대하게 치름으로서 화해 제스쳐를 보낸 것은 물론,볼모나 다름없이 지내던 예씨와 유리를 고구려로 보내 온 것이었습니다.
정리하자면 주몽이 동부여에 있을 때 예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큰 아들이 유리.졸본공주와의 사이에서 낳은 둘째가 친위쿠데타 실패로 도망친 주몽을 대신해 들러리를 서다 죽은 아달왕 친아들이 아닌 소서노의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셋째가 비류,그리고 소서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넷째가 바로 온조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미 너무 커져버린 소서노의 영향력과 수완을 두려워한 주몽은
소서노와 그 두 아들을 경계하며 공공연연히 유리를 후계자로 선언했고
이 배신에 떠밀려 남하한 소서노와 그녀의 두 아들 온조, 비류가 세운 나라가 바로 백제입니다.
금와황제의 아들인 대소가 보위를 이은 부여는 부여에서의 볼모시절의 한을 갚겠다는 듯 몰아치는 유리황제의 공세에 밀려 결국 AD22년 유리황제의 아들인 대무신황제의 손에 멸망하게 됩니다.
한편 전남편 주몽을 축출하고 금와황제와 재혼하여 부여를 통일한 졸본 공주는 금와황제와의 사이에서 요망이라는 아들을 낳게 되고 이 아이가 부여가 망하기 직전인 AD21년 갈사국을 세워 여러 대를 버티다가 결국 고구려에 의해 멸망당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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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백제를 건국한 여걸-소서노
비류백제(어하라)=발해만 지역
온조백제=>인천=>한강이남(풍납토성)
구태백제=>황해도(대방)
비류백제<온조백제<구태백제=동아시아 해상제국
[구태백제가 백제를 통합하고 한반도-일본-중국-동남아시아를 담로네트워크를 통하여 해상무역을 독점하는 해상제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역사기록에 나타나는 소서노
소서노에 대한 기록은 「한단고기」의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와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에 짧게 실려 있다.
소서노에 대한 기록이 별로 없으므로 포의문자인 한자로 기록된 그의 이름 소서노를 분석함으로써 어느 정도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
소서노라는 이름은 그녀가 무당이면서 무장임을 나타낸다. 소召자에는 무당이 굿을 할 때 작두거리에 들어가서 칼을 입에 무는 형상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그 가 작두거리를 하던 무당임을 알 수 있다.
그의 이름 끝의 문자인 노弩자는 그가 세뇌라는 강궁强弓을 쏘던 무장이었음을 나타낸다. 이 문자도 그가 굿 12거리 중에서 사냥굿을 하던 무당이었음을 나타낸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연타발延佗勃의 딸로 역사무대에 등장한다. 연타발은 북부여의 2세 단군 모수리慕漱離(재위 35년)의 상장上將인 무인이었다. (북부여기 상) 모수리 단제는 연타발을 요녕성 해남(요동만에 있는 해안 도시)에 있는 평양에 파견하여 성책을 설치하게 하였다.
연타발은 졸본 사람으로 갈사曷思의 남북을 오가면서 재물을 모아 부를 이루었다.
은밀하게 고주몽을 도와 나라를 세우고 도성을 정하는 데에 크게 공헌하였다. 뒤에 그가 다스리는 무리를 이끌고 구려하九黎河로 옮겨 고기를 잡고 소금장사를 하였다. 고주몽이 북부여를 칠 때 5,000석을 내어 도왔다.
고주몽이 서울을 눌현訥見으로 옮길 때 이 일을 앞장서서 하였고, 나라가 망하여 떠도는 북부여의 백성을 위무하고, 왕이 하는 일을 잘 할 수 이도록 하여 공을 세웠다. 이리하여 坐原이라는 벼슬에 봉작을 받았다. 그의 나이 80에 숙었다. 그때가 다물多勿(서기전 37-19, 추모왕의 연호) 34(년도에 착오가 있는 듯 하다)년 병인 3월이었다.
문자학의 관점에서 본 召西弩(소서노)
召西弩라는 세 문자는 이 문자가 갖는 본래의 의미를 도출해 내면, 이 문자의 의미와 관련이 되는 다른 문자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召西弩시대의 역사를 유추해 낼 수 있게 한다.
召西弩 세자를 각각 분리하여 한자씩 의미를 추적한다.
召
한자풀이로 보면, 召는 刀+口(칼을 입에 물고 있다는 뜻)이다. 소서노가 여자이므로 여자로서 입에 칼을 물을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면 무당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무당은 작두거리에서 작두를 타기 전에 칼을 물어 작두신명의 위력을 보여준다.
西 西는 서쪽 방위를 나타낸다. 소서노가 서쪽에서 왔음을 의미한다. 그가 정착한 한산漢山에서 볼 때 서쪽을 의미한다.
기묘년 3월에 召西弩는 辰 番 (패대浿帶의 땅)에 이르렀다. 辰은 辰韓 즉 옛날의 眞朝鮮, 番은 番韓 즉 옛날의 番朝鮮으로 보인다. 따라서 진조선과 번조선 사이의 땅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여기를 패대浿帶의 땅이라고 하였다.
召西弩가 高朱蒙에 의하여 어하라於瑕羅에 봉해진 점으로 보아서, 강력한 무력을 기반으로 하여, 진조선과 번조선 사이의 옛 땅 발해만에 있는 동해빈東海濱쪽, 즉 창덕彰德과 현덕顯德 사이에 자리를 잡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弩 弩는 女+又+弓의 문자로 활을 든 여자를 의미한다. 강력한 활인 쇠뇌를 의미하는 문자가 노弩자이다. 낙랑樂浪지역의 옛 무덤에서 노가 출토 되었던 점으로 보아서 노가 고구려의 무기였다고 볼 수 있다.
소서노가 弩를 휴대하였다는 점에서도 소召자에서 보았듯이 두 가지 의미를 도출할 수 있다.
활을 쏘아 짐승을 사냥하여 제사에 올리는 타살거리를 수행하는 무당의 기능이고, 다른 하나는 궁수弓手와 같은 노수弩手의 기능이다. 소서노가 인솔하는 무사집단이 노수집단이었을 것이라는 추리가 가능하다.
이상 세 문자의 뜻을 종합하면, 召西弩는 칼을 입에 물고, 활을 들고 서쪽에서 온 여자라는 뜻이 된다.
이렇게 본다면, 소서노가 인솔하던 무사집단은 남자무사집단이라기 보다는 여자무사집단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아울러 강력하고 무거운 무기를 두 가지나 휴대하였다는 점에서 여자거인이었을 것이라는 추리가 가능해진다.
소서노의 또 다른 의미는 한글 음에서도 도출된다. 한자의 음은 한번 정해지면, 수천 년의 세월이 지나간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므로 한글로 표현할 수 있는 한글 표음의 가차假借로 볼 수도 있다. 아울러 소서노라는 문자에는 표의와 표음의 이중의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召西弩에는 솟아오르다, 솟아오름 등의 뜻이 있다. 솟대나 소도蘇塗 등과 관련이 있는 이름이다. 따라서 솟는다는 의미를 가진 성씨인 소씨蘇氏와 관련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업적을 나타낸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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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 |
온조왕
(BC18~AD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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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동명왕의 셋째아들.
위례성에 나라를 정하고 나라이름을 백제라함.
BC 5년에 서울을 한산으로 옮김.
AD8년 마한을 병합함. |
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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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루왕(2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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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조왕의 아들.
말갈족을 격퇴하고, 농사를 장려하여 백성 생활을 안정 시켰음.
37년 후한의 낙랑군을 멸망시킴 |
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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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루왕(77~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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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루왕의 맏아들.
'삼국사기'의 기루왕 치세에 대한 내용에는 천문이변, 지진, 큰 가뭄, 태풍, 기상이변 등에 대한 간략한 기록이 대부분이다 |
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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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루왕(128~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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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루왕의 아들.
132년에 북한산성을 쌓음 |
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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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왕(166~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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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루왕의 맏아들로 소고왕이라고도 불렸다.
신라를 여러번 침공하고, 210년에 적현성, 사도성을 축조함. |
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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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수왕(214~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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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왕의 맏아들. 132년에 북한산성을 쌓음 |
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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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반왕(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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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수왕의 아들. 나이가 어려 바로 폐위됨 |
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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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왕(234~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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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왕의 동생.
관제를 제정하고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여 국가의 기초를 확립함 |
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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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계왕(286~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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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왕의 아들 |
1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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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서왕(298~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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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계왕의 아들
낙랑군의 서현을 점령하여 영토를 확장하였으나 낙랑군의 자객에게 살해당함 |
1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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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류왕(304~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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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수왕의 둘째 아들.
민간의 형편을 잘 알아 선정을 베품 |
1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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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344~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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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서왕의 맏아들 |
1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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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초고왕(346~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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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류왕의 아들
369년에 마한과 대방을 병합함
고구려 평양성을 점령하고 고국원왕을 전사 시킴
아직기, 왕인을 일본에 보내어 한문을 전파하고 박사 고흥에게 백제의 국사 '서기'를 쓰게함 |
1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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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수구왕(375~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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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초고왕의 맏아들
일본과 국교를 맺어 문물을 보급시키는데 공이 많음 |
1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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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류왕(384~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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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구수왕이 아들
불법을 시행하고 한산에 절을 창건함 |
1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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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왕(385~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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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류왕의 동생
광개토대왕에게 한강 이북을 빼앗기자 이를 찾기위해 출정하다가 병사함 |
1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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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신왕(392~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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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류왕의 아들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모두 패함.
일본과 화친하여 태자를 볼모로 보냄 |
1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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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왕(405~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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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신왕의 아들 |
1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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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이신왕(42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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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왕의 맏아들 |
2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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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왕(427∼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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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이신왕의 아들
송나라와 왕래하고 신라와 화친함 |
2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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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로왕(455~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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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왕의 맏아들
고구려 장수왕의 습격을 받아 피살됨 |
2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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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주왕(475~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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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로왕의 아들
서울을 웅진(공주)으로 옮기고 국방에 힘씀 |
2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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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근왕(477~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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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주왕의 맏아들 |
2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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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왕(479~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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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근왕의 동생
신라와 혼인동맹을 맺고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싸움 |
2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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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50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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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왕의 둘째아들
민생을 안정시키고 국력을 신장하여 국제적 지위를 강화함 |
2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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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왕(523~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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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의 아들
도읍지를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고 함 |
2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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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덕왕(554~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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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왕의 아들
고구려의 침공을 막고 중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함 |
2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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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왕(598~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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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덕왕의 아들 |
2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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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왕(599~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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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공왕의 아들
불교를 숭상하고 살생을 금함 |
3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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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왕(60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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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 당나라와 화친하고 일본에 서적과 불교를 전파함 |
3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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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641~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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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왕의 맏아들. 백제의 마지막 임금
642년에 신라를 공격하여 많은 영토을 얻었으나 사치와 방탕으로 나당연합군에게 패하여 당나라에 압송되어 병사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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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왕조 계보와 각 왕조의 역사 연표입니다.
1대 온조왕(溫祚, ?~28)(BC58년 ~BC19SUS)
고구려 동명왕의 세째아들(혹은 둘째). 위례성에 나라를 정하고 나라이름을 백제라함.
BC 5년에 서 울을 한산(지금의 광주)으로 옮김. AD8년 마한을 병합함.
2대 다루왕(多婁, ?~77)
온조왕아들. 말갈족을 격퇴하고, 농사를 장려하여 백성 생활을 안정 시켰 음. 37년 후한의 낙랑군을 멸망시킴.
3대 기루왕(己婁, ?~128)
다루왕의 맏아들.
4대 개루왕(蓋婁, ?~166)
기루왕의 아들. 132년에 북한상성을 쌓음
5대 초고왕(肖古, ?~214)
개루왕의 아들. 신라를 여러번 침공하고, 210년에 적현성, 사도성을 축조함.
6대 구수왕(仇首, ?~234)
초고왕의 맏아들. 가뭄과 홍수를 대비하여 둑을 쌓고 농사를 장려함.귀 수왕.
7대 사반왕(沙泮) 구수왕의 아들. 즉위하였으나 나이가 어려 바로 폐위됨. 사비왕(沙沸)
8대 고이왕(古爾, ?~286)
초고왕 동생. 관제를 제정하고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여 국가의 기초를 확립함.
9대 책계왕(責稽, ?~298)
고이왕 아들.
10대 분서왕(汾西, ?)
책계왕 아들. 낙랑군의 서현을 점령하여 영토를 확장하였으나, 낙랑군의 자객에게 살해당함.
11대 비류왕(比流, ?~344)
구수왕의 둘째 아들. 민간의 형편을 잘알아 선정을 베풀었다고 함.
12대 설왕( ,?~346)
분서왕의 맏아들
13대 근초고왕(近肖古, ?~375)
비류왕의 아들.
369년에 마한과 대방을 병합함. 고구려 평양성을 점령하고 고국원왕을 전사시킴.
아직기(阿直岐), 왕인(王仁)을 일본에 파견하여 한문을 전파하고,
박사 고흥 에게 백제의 국사 '서기(書記)'를 쓰게함.
14대 근구수왕(近仇首, ?~384)
근초고왕의 큰아들. 일본과 국교를 맺어 문물을 보급시키는 데 공이많음.
15대 침류왕(枕流, ?~385)
근구수왕의 아들. 불교(佛法)을 시행하고, 한산에 절을 창건 하였음.
16대 진사왕(辰斯, ?~392)
침류왕의 동생. 광개토대왕에게 한강 이북을 빼앗기자 이를 찾기위해서 출정하 다가 병사함.
17대 아신왕(阿莘, ?~405)
침류왕의 아들.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모두패함. 일본과 화친하여 태자를 볼모로 보냄. 아방왕, 아화왕.
18대 전지왕(琠支, ?~420)
아신왕의 아들.
19대 구이신왕(久爾辛, ?~427)
전지왕의 맏아들
20대 비유왕(毘有, ?)
구이신왕의 아들. 송나라와 왕래하고 신라와 화친을 하는등 외교를 통한 친선에 힘을 씀.
21대 개로왕(蓋鹵, ?~475)
휘는 경사(慶司). 비유왕의 맏아들. 고구려 장수왕의 습격을 받아 피살됨.
22대 문주왕(文周, ?~477)
개로왕의 아들. 서울을 웅진(공주)으로옴기고 국방에 힘씀. 병관 좌평 해구(解仇)에게 실권을 빼앗기고 살해됨.
23대 삼근왕(三斤, ?)
문주왕의 맏아들. 13세로 즉위 반란을 일으킨 해구를 진로(眞老)로하 여금 토평하게함.
24대 동성왕(東城, ?~501)
이름은 모대(牟大).삼근왕의 동생. 493년에 신라와 혼인 동맹을 맺고,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싸움.
25대 무령왕(武寧, ?~523)
휘는 사마(斯摩). 동성왕의 둘째 아들. 국내안정에 힘을 쓰고, 쌍현성을 쌓아 외침에 대비함.
26대 성왕(聖, ?~554)
휘는 명농. 무령왕의 아들. 538년 사비로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라 함.
554년 신라 를 공격, 관상성에서 전사함. 성명왕.
27대 위덕왕(威德, ?~598)
휘는 창(昌). 성왕의 아들. 고구려의 침공을 막고 중국과 외교관 계를 수립하고, 신라를 자주침
28대 혜왕(惠, ?~599)
휘는 계(季). 위덕왕의 아들로 즉위 하였다가 이듬해에 죽음.
29대 법왕(法, ?)
휘는 선(宣), 효순(孝順). 혜공왕의 아들. 불교를 신봉하여 살생을 금하고, 왕흥사의 창건 을 착수함.
30대 무왕(武, ?~641)
휘는 장(璋). 수, 당나라와 화친을 맺고, 일본에 중 관륵(觀勒)을 보 내어 천문, 지리, 역본(曆本) 등의 서적과 불교를 전파하였음.
31대 의자왕(義慈, ?~660) 백제의 마지막 왕.
무왕의 맏아들. 642년 신라를 공격하여 많은 영토를 얻었으나 만년에는 사치와 방탕에 흘러 나당연합군에게 패하여 당나라에 압송되었다가 병사함.
◈왕위계승
온조왕 ->다루왕->기루왕->개루왕->초고왕->구수왕->사반왕->고이왕-> 책계왕-> 분서왕-> 비류왕-> 계왕- >근초고왕- >근구수왕->침류왕->진사왕->아신왕->전지왕->구이신왕-> 비유왕->개로왕->문주왕-> 삼근왕->동서왕->무령왕-> 성왕-> 위덕왕->혜왕->법왕->무왕->의자왕 백제가 멸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심각한 내부분열과 지배층의 부패와 향락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듯 지배층이 부패하면 민심은 동요할 수 밖에 없다. 한순간의기쁨이 곧 망국의 조짐이자 멸망의 길인 것이다. (신라 김춘추에의해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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