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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지 (6) 구도실- 취은당파 (醉隱堂派)
영양(英陽)의 진산(鎭山)은 일월산(日月山) 으로,
그 일월산 바로 아래가 취은당파 (醉隱堂派) 세거지 구도실
행정명 경북 영양군 일월면 도곡리(道谷里) 이다.
경북에는 ‘실’ 로 끝나는 지명이 많은 데, 한자로는 ‘곡(谷)’으로 받는다.
한실-大谷, 무실-水谷, 박실-朴谷, 닭실-酉谷, 가마실-釜谷 주실-注谷 등 )
위 구글위성사진중 영양읍 오른 쪽 한내 가 전에 소개한
용계(龍溪)공파 세거지 로 대종회 총무 창건씨네 고향이고,
영양읍 왼쪽 ‘청기’ 는 우재(愚齋)공파와 취수당(醉睡堂)파의 세거지로
바로 나의 고향으로 다음 편에 소개할 예정이다.
구도실 아래 주실(注谷)은 한양 조씨 세거지로 시인 조지훈이 이곳 출신이다.
현(現) 대종회(大宗會) 승홍(承洪) 회장님 이 구도실-취은당파 (醉隱堂派)다.
취은당파 (醉隱堂派) 의 분파과정은 세계도상 다음과 같다.
파조(派祖 - 11세(世) 휘(諱) 允成) 에 대하여는 먼저 4편에서
잠깐 말씀 드렸으니, 임란(壬亂)을 맞아 형님 문월당(問月堂)과
아우 분 (諱: 允成)이 함께 출전하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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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이 아우 윤성과 함께 맹세하여 말하기를 (公與弟允成 約曰)
…………
드디어 벽에 보왜구 라는 세글자를 쓰고는 (遂題 報倭寇 三字于壁)
붓을 던지고서 분기하여 함께 과거에 급제하고 무과에 힘썼는데
(投筆奮起幷等勸武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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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은당(醉隱堂) 파명(派名)의 유래 (由來)
파조(派祖) 11세(世) 휘(諱) 允成)의 증손(曾孫) 되는 14세(世: 휘(諱) 三達)의
호(號)가 취은당(醉隱堂)으로 파(派)의 이름이 여기서 비롯되었다.
취은당 (醉隱堂) 사진 :
14세(世) 취은당공(醉隱堂公 ; 휘(諱)삼달(三達) 의 정자(亭子)
소재 : 경북 영양군 일월면 도곡리 441 442 443
구도실 마을 다시 근경으로 본다
위에 압정 꽂은 곳이 취은당 자리- 영양군 일월면 도곡리 441 442 443 번지다.
취은당공(醉隱堂公) 행장(行狀) 은 다음 구절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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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는 삼달(三達) 이고 자는 달부(達夫)이며 본관이 함양이다.
시조 휘 광휘는 고려조에 문과장원으로 좌복야(左僕射) 겸(兼)
흥위위 (興威衛) 상장군(上將軍)에 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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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公)은 신체가 상당히 컸던 모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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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몸집이 남달리 컸으며 (幼姿狀魁梧)
안색이 붉고 모난 얼굴에 위의가 있어 한번 보면 덕 있는
거인임을 알 수 있었다….(一見知其爲鉅人長德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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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당호를 취은당 이라 한 연유를 읽어 보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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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월산중에 집을 짓고 스스로 호를 취은당 이라 (自號醉隱堂)
온갖 좋은 꽃이며 괴기한 나무를 심고 (植名花異木)
못을 파고 연꽃을 심어 매양 맑은 아침과 달밤이며
꽃가지 빨갛고 단풍잎 붉게 빛나면, 봄 가을에
시녀로 하여금 거문고 한 곡조 타고 (令侍女彈琴一曲)
파란 독에 술이 익으면 (綠樽方온)
취하다 문득 노래하고 노래하며 다시 취하니 (醉輒歌 歌而復醉)
모르겠다 세상 일이야 무슨 관계냐 (爲何物也)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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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신선놀음 하신 듯 하다 ^^
그래도 다음 구절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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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공이 비록 술꾼들에게 숨어 있으나 또한 방탕하지도 않았고
구애될 것도 없는지라 부모 섬김에 효도를 다 하며
벗으로 더불어 믿음이 있고 재물에 임하여는 청렴하며
남의 급하고 어려움에는 의협심이 높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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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근대사에 비유하면 시골 신사(紳士)-Gentleman 이셨던 듯 !
왜 이 어른이 술과 노래와 벗들과 어울리며 세월을 보냈는지 ?
원래 술을 즐겨서 그랬다면 더 이상 붙일 말이 없으나…..
그건 제대로 된 대답이 아니니 당시 상황과 맞추어 보기로 한다.
광해군을 방벌(放伐) 한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경상우도의 대북 (大北) 세력은 대부분 멸문을 당하고,
조선 정치는 서인(西人)이 주도하는 가운데 남인(南人)이 끼어 든
형국이니, 그나마 기호남인(畿湖南人)은 몇 자리 얻어 걸리나,
영남의 남인에게는 거의 해당이 없었다.
그나마도 현종(顯宗) 때 두 차례 예송(禮訟), 숙종(肅宗) 때
엎치락 뒤치락을 거친 뒤, 남인(南人)은 중앙정치무대와 연이
영영 끊어진다.
그럼에도 남인(南人) 선비들이 끝까지 의연했던 것은
통상 학문으로 닦은 인격 탓을 하지만,
지방에 뿌리 내린 든든한 재력 뒷받침도 무시 못할 것이다.
이제 본 주제로 돌아 와 … 어려서부터 학문만 닦은 선비가
막상 현실에서 관직에 나갈 가망이 거의 없다면 ?
요즈음이야 고시 보다 안되면 딴 길로 나가지만 조선조에서 선비가
책 읽는 것 말고 달리 생업을 하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고
자칫하면 사족 (士族)의 신분에서 밀려 나갈 수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살림도 넉넉한 신사가 음풍농월(吟風弄月) 밖에
달리 무엇에 마음을 붙이겠는가 ?
그러던 중 이 어른이 모처럼 활약할 기회를 맞는다.
행장을 다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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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신(戊申)년에 호서에 도적이 나타나 (戊申湖西賊起)
여러 고을에까지 미치니 의병(義兵)이 일어나는 본읍으로 달려가니
공으로써 대장을 삼았다. (以公爲義兵大將)
자제들이 놀라 달려가 (子弟大奔告曰)
‘아버지 나이 예순 둘 늙으신 몸으로 (大人今年六十二老)
실로 이 어려운 책임을 맡아 어찌하겠습니까 ?
(而此任實所難堪奈何)
이러자 공이 큰 소리로 말 하는 데..
‘ 나라의 불행이 이 변란에 있거늘 나는 글 읽은 선비라
이 어찌 충분의 마음이 없으랴 ! (豈無忠憤之心乎)
나라를 위하여 도적을 잡아 시체를 집 앞에 싸놓아야
내 마음이 쾌하겠거늘 이것 무슨 말이냐 ?”
하고 그 날로 달려 들어 고을의 선비들과 단결하여 서약을 정하고
수건과 군복에 화살을 꼽고 칼과 북을 가지고 일군에 나서니
보는 사람들이 다 놀라 뒤로 물러나 말하기를
‘참으로 대장의 풍채다. (眞大將風采也) ‘ 고 하였다.
부중이 듣고 장차 일도(一道)의 도원수(都元帥)를 삼으려 하였더니
(花府聞之將擬以爲一道都元帥 :
족보 한글번역에는 부중이라 했지만
花府 란 안동도호부를 말함이니
안동부사로 번역함이 더 좋을 듯
아니면 영양현감 정도로 읽을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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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인용문중 무신년 호서의 도적 (戊申湖西賊) 이란, 바로 영조 4년
(1728년) 무신년에 일어난 이인좌 (李麟佐)의 란(亂) 이다.
서인(西人)이 노론(老論) 소론(小論) 갈라지고, 노론(老論)이 정국을 장악하니
소론(小論)은 남인(南人)과 손을 잡는다. (뿌리가 다르지만 원래
집안싸움 나면 형제가 남만 못하고, 적의 적은 곧 동지가 아닌가 ?)
소론+남인 연합체가 최후의 기세를 올린 것이 경종(景宗 :장희빈소생) 때로
노론 4대신을 죽이는 등 기세를 올리지만 (소위 신임사화(辛壬士禍)
불과 4년 만에 승하하고 영조(英祖)대왕이 뒤를 잇는다.
영조의 즉위로 소론 일파는 극도로 불안해 지니 이는 영조가
세제(世弟) 로 있을 때 음해공작을 필사적으로 한 바 있는 데
(거꾸로 노론은 세제 옹립공작을 필사적으로 했다)
이런 판에 바로 그분이 임금이 되었음에야 !
여기에 실은 영조대왕과 노론들이 경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나돌고
(소론에서 일부러 퍼뜨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경종 재위시
영조를 세제로 책봉하고 대리청정을 시키는 과정에 노론이 무리하게
밀어 붙여, 이런 의심을 받을 빌미를 제공했다)
이에 영조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문제 삼고 소론 과격파와 남인 일부가
연합하여 청주에서 거병한 것이 바로 이인좌 (李麟佐)의 란(亂) 이다.
영남의 남인들도 노론에 대하여 불만이 많았을 것이나,
평생 배운 것이 주자학, 성리학인데 군주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킬 생각은 추호도 없었을 것이나,
이런 경우 중요한 것은 사실 보다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반란 평정 후 반드시 다가 올 연루자 색출을 피하자면
그 토벌에 앞장 서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 아니겠는가 ?
위 인용문 중 자제들이 말리니까 취은당 (醉隱堂)이
한 말씀을 다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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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어찌 충분의 마음이 없으랴 ! (豈無忠憤之心乎)
나라를 위하여 도적을 잡아 시체를 집 앞에 싸놓아야
내 마음이 쾌하겠거늘 이것 무슨 말이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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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으로서 옛 어른 말씀을 분석한다는 것이 민망하나 한번 해 보면
1) 물론 공은 성리학자로서 충분(忠憤)의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2) 그러나 더하여 반란이 끝난 후 충분히 예상되는 연루자 대숙청을
피하자면 진압에 앞장 서는 것이 제일 좋고,
3) 또 여러 대째 멀어진 중앙정치와 연결할 기회도 아니겠는가 ?
그러나.. 조선 후기 정치사를 보면 어떤 징크스 같은 것을 볼 수 있으니
다 된 밥에 코 빠뜨리고,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지는 것은 남인(南人)이요
재수 좋은 과부는 엎어져도 꼭 가지 밭이라는 꼴은 노론(老論) 이다.
이 징크스는 한두 번이 아닌데….
취은당 (醉隱堂)이 노구를 이끌고 출전 하기도 전에 반란은 싱겁게 진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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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군이 호서지방 도적과 싸운다는 첩보가 들려 옴에
드디어 진을 파하게 되었다. 공이 슬퍼하며 말하기를
‘나의 한 죽음이 이미 늦었구나’ 하였다. “
公慨然曰 我之一死已遲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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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괜히 해 보는 말씀이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정국과 연결하면 2차 대전 종전 당시 백범 선생이
조선에 침투시킬 유격대를 편성했다가 미처 실행도 하기 전
왜적이 무조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 우리가 이 전쟁에
한 점 공로도 없으니 장차 이를 어쩌랴’ 하셨다는 일화가 생각난다.
이상 취은당 행장기를 간략하게나마 살펴 보았고….
얼마 전 모임에서 정조 (正祖) 대왕 때 이른바
영남만인소 (嶺南萬人疏)에 취은당 파 중 어느 분이
(그 휘(諱) 는 미처 못 들었다) 앞장 서셨다는 이야기를
잠깐 들었다.
이 영남만인소 (嶺南萬人疏)는 영양파의 조상분들도 해당되는
영남 남인들이 정권에 다가가기 위한 최후의 노력이었던 만큼 부연해 본다.
영남 (嶺南)이란 당연히 경상도 선비들이요
만인소 (萬人疏)는 만사람이 연명으로 올린 상소라는 뜻이다.
경상도 선비 집안에는 집집마다 이 영남만인소 (嶺南萬人疏)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오고, 선조가 앞장 섰다는 것을 은근히 내 비치곤 한다.
일례로 몇 년전 외가에서 외8대조 되는 분의 문집을 펴내는 데
나도 외손(外孫)이라고 한 질 보내와 읽어 보니, 이 어른이 (외8대조)
영남만인소 (嶺南萬人疏) 때 가장 앞장 선 것 같이 써 있었다.
만인소 (萬人疏) 글자 그대로 일만 명이 조금 넘었으니
전에 그 숫자를 본 적이 있는 데 1만에서 몇 백 명이
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조대왕 당시 경상도 인구가 얼마였는지? 정확히 모르고, 경상도가
다른 도 보다 인구가 많긴 했지만 1백만 명 정도 아니었을까 ?
그 중 남자만 따지면 대략 50 만에 당시 문자즉 한문 해독율이
1-2% 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몇 글자 더듬더듬 읽는 것 말고 문장을 지을 수 있는 실력.
경상도 방방곡곡에 글 줄이나 읽는 선비들은 모두 참여하였는데,
오늘 날처럼 지하철역에서 서명 받으면 좀 좋으련만
당시야 다 걸어오고 가서 서명했을 테니 이것이 보통 일이겠는가 ?
집집마다 고을마다 전설이 될 수 밖에 없다.
이 영남만인소 (嶺南萬人疏) 이야기도 다 하자면 엄청 길겠으나
요점만 이야기하면 사도세자 즉 정조대왕의 생부(生父)의
명예회복에 관한 것이다.
사도세자가 어떻게 돌아 간 것이야 다 알 것이고
정조가 임금에 올랐지만 사도세자 사사(賜死) 에 깊이 관여한
노론(老論) 벽파(僻派)의 세력은 여전히 두껍고 강하여,
선왕(先王- 영조) 이 하신 일을 감히 못 바꾼다고 하니,
자기 아버지 복권이라고 임금 마음대로 할 수는 없었다.
이에 반해 사도세자 죽음에 동정적인 세력이 노론의 소수파인
시파(時派)에, 이인좌의 란 이후 지리멸렬한 소론(小論)과
벌써 200년 가까이 정권 근처에 가보지 못한 영남의 남인(南人) 이었다.
따라서 표면상 명분은 돌아간 사도세자의 신원운동이지만
내면에는 정권 근처에 가보고 싶은 계산이 들어 있었다.
가만히 보면 집권세력이 못마땅한 임금은 꼭 소수파를 찾게 되고
그 대상은 조선 후기 영원한 야당-영남의 남인일 수 밖에 없었다.
만인소 (萬人疏)가 올라 가자 정조대왕 내심으로야 엄청 반가왔겠지만
그 내색이야 차마 못하고 또 당시 정국의 주도자 노론(老論) 벽파(僻派)의
뿌리가 너무 깊어 덥썩 받아 들이지는 못하나 아주 은근한 말투로
이제 그만 하라는 비답을 내리게 되고, 그 은근함에 함축된 의미를
아는 영남 선비들은 계속 상소를 올린다.
이제는 돌아가셨지만 전에 집안 어른분 들이 네번 상소 올린 것을
임금이 네번 다 비답 하셨노라고 자랑하는 것을 들은 적 있다.
그러나 사실 이건 상소내용 보다도 임금과 영남 선비들이 은연중에
서로 심정이 통한 것 -시쳇말로 짜고 치는 고스톱 비슷하였다.
정조 대왕이 오래 살았다면 영남의 남인들도 오래 간만에 쨍하고
햇빛 한번 볼 날도 있었겠으나, 앞서 말 한대로 남인의 징크스가
다시 나왔는지 ? 대왕은 너무나도 아깝게 일찍 승하한다.
이 영남만인소 (嶺南萬人疏)가 마지막 시도였고 이후 영남의 남인은
조선조가 망할 때 까지 재야의 처사로 있을 수 밖에 없었으니,
경상도에서 일타하는 집안의 조상 자랑을 들어도 구체적으로 캐고 들면
고위관직은 임진란(任辰亂) 즈음 이야기고 그 후는 거의 무연관(無緣官)이다.
그 아쉬움 크기 만큼 영남만인소는 더욱 신화가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아… 마지막으로
구도실에서 주실을 거쳐 영양 앞에서 반변천과 합류하는
장군천의 이름 유래가 취은당이 의병대장으로 나가실 때
그 풍채가 워낙 당당해서 붙었다는 이야기를 인터넷에서 보았다.
이런 것이야…. 사실 관계를 따지는 것은 중요치 않다.
아래는 그 장군천 사진을 인터넷에서 푼 것이다.
아래에 취은당공 행장(醉隱堂 公 行狀) 을 붙인다.
한글 번역 (1)
(사족 : 오른 쪽에서 셋째 줄 “ 장원으로 좌복야 겸홍위 위 상장군 운운 은
바로 시조 함양군의 관직을 소개하는 것인데
마치 ‘겸홍위’ 라는 벼슬을 지낸 것으로 착각하기 알맞다.
교정 및 식자과정에서 띄어쓰기가 잘못 된 것으로
좌복야(左僕射) 겸(兼) 흥위위 (興威衛) 상장군(上將軍)으로 읽어야 한다.
사소한 인쇄상 오식(誤植)이나 거슬려 한 줄 토를 달아 본다.
한글 번역 (2)
한글 번역 (3)
한문본
첫댓글 #어쩌면 이리 도 많이 아시는지 답사 해 보고싶군요 취은당 ...선조님들 은덕으로 이리 행복하겠죠항상 감사하며 허물없이 살아야만 될것이라 다짐해봅니다 감사 하구요^^
이렇게 좋은 자료를 올려주셔서 알지못하는 많은 종친께 이해할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신게 너무 고맙죠 ^^
읽어보니..오대택손자의. 능력과실력이. 함양오씨의. 뿌리연구에 크게 기여하느것. 같아 기쁨니다.. 함양오씨의 각종파에. 이런글. 자기근본. 뿌리찾는이. 몇이나될까??.. 하여튼..대단합니다. 좀더정진하여. 좋은글 써주시길 바랍니다. 오정호씨도..영양에서 집짖기 바쁘고. 대구에서12일. 임원회의하고. 10월말쯤. 서울사무실 오픈예정이고. 전국주소록만들기에. 대구총무님 열심이니 머지않은장래에. 뵈올날 올것 입니다. 좋은글 .많이 써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