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승의 시 「눈물」 읽기
< 정 재 영 >
다형(茶兄)이라는 아호를 가진 걸 보면, 김현승은 커피를 무척 좋아했다한 말을 믿을 수 있다. 그가 활동하던 시절은 일제 말기와 해방 후 나라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다. 커피 값이 무척 귀하고 비쌌던 시절이었다. 대부분 일반인들의 기호품만은 아니었던 시절이었다. 대개 배운 사람들이라는 의미의 식자(識者) 의식을 가진 사람들의 대접용이었다. 집에서 손님을 접대할 때, 일부러 방 안을 춥게 만들 후 뜨거운 커피를 내놓았다는 그와 가까웠던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커피 자체에서 전통적 다도(茶道) 의식도 함께 가졌던 것 같다. 전통적인 차가 아닌 서양에서 유래된 커피를 좋아 하게 된 것은 부친이 당시 서구문물을 접할 기회가 많은 목사라는 신분에서 쉽게 이해됨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말을 먼저 하게 된 동기는 그의 시가 한국인으로 기독교라는 종교에서 영향을 받은 서구 가치관으로 해석해 나가며 작품 활동했다는 것을 추정함은 아주 당연하다는 것을 미리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는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 김현승「눈물」전문.
시의 어조는 매우 단아한 소리다. 왜냐면 슬픔을 나타내는 눈물이라는 객관상관물을 들어 신의 섭리로 받아드리는 비탄을 극복해고자 하는 의지를 담은 작품이기에 그렇다. 마치 슬픔의 현실을 극복하는 자기 고백, 즉 일종의 신 앞에 드리는 신앙고백이자 기도인 이 시는 차분하고 경건한 리듬을 가지게 된다.
이 시를 만든 동기는 어린 아들을 잃은 자신의 비극에서다. 사람으로 당하는 가장 큰 슬픔은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마음일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만든 이 시는 인간의 비극의 슬픔과 이해할 수 없는 신의 뜻과의 괴리를 눈물이라는 사물을 들어 기독교 신앙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려는 신앙인의 자세를 엿볼 수 있다.
눈물이란 사물이 가지는 개념을 가지고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독창적으로 해석하는 이 시는 인간의 슬픔을 신앙으로 승화시키는 기독인의 종교성을 맛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간 존재론에 대한 고백의 명시 중 하나다.
그가 눈물이 가지는 개념, 즉 보조관념에 대한 원관념이 무언가를 시를 읽으며 살펴보자.
눈물을 과학적으로 해석한다면 다음과 같다.
<눈의 바깥쪽, 위쪽에 있는 눈물샘에서 나오는 분비액으로 각막의 표면을 광학적으로 균일하게 유지하고, 세균이나 노폐물과 이물질을 세척하며, 항균작용도 할 뿐 아니라, 각막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기능을 가진 액체다. 성분은 수분, 나토륨, 그리고 미량의 미네랄과......>같이 설명할 수 있다. 만일 이런 내용을 위해 시를 만들었다면 그것은 전혀 시의 주제가 안 될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글 쓰는 일은 안과의사 아니면 생물학자에 지나지 않는다. 시란 눈물이 가지는 속성에서 가지는 이미지를 가지고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대신 보여주는 예술이다.
첫 연에서의 주제는 생명이다. 떨어져 다시 많은 열매를 맺는 씨앗으로의 성격의 사물로 본다. 단서 조항이 있다. <더러>라는 말이다. 이 듯은 <간혹>이라는 단어로 대치할 수 있겠다. 즉 흔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흔하지 않는 비극과 그 의미 즉 눈물은 신앙인에게는 새로운 창조의 시발이며, 새로운 세계의 약속이라는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처음부터 강조하고 있다. 이 약속은 옥토라는 말에서 그 의도는 더욱 분명해진다. 옥토에 떨어지는 씨앗이란 열매의 수확의 약속을 미리 예측하며, 죽음의 새로운 의미가 있음을 찾아내는 태도이다. 기독인의 신앙은 죽음이 종말이 아닌 새로운 세계의 약속이라는, 그것도 풍성한 결실을 위한 의미 있는 약속이라는 것을 믿고 있다. 이것은 종말론에 대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자 특색인 것이다.
두 째 연의 주제는 순수다.
신 앞에서 슬픔 자체도 신의 섭리 안에서 찾을 수 있는 신뢰이자 변치 않는 신앙의 본질임을 고백하고 있다. 고난을 통한 자기 극복에서 그의 시 「절대 신앙」에서 볼 수 있는 신과 인간의 완전한 합일성을 찾아보게 된다. 어떠한 경우에도 변치 않고 가지게 되는 순수한 믿음인 것이다. 흠도 점도 없는 어린 양을 바쳤던 제사처럼 그의 슬픔 자체도 승화시킨 순수를 눈물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신 앞에 올리는 것이다.
세 째 연에서는 나아종이라는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맨 마지막이라는 최후, 최종, 결론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가장 값진 것, 소유하고픈 것 중 가장 아끼는 것 까지도 바치는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을 엿보게 된다.
넷 째 연에서 주의할 언어는 꽃과 열매다. 이 두 단어에서 그의 다른 시를 잠깐 기억해 내야 할 필요가 있다.
오직 한사람을 택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 김현승「가을의 기도」3연.
가을의 열매를 위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듯이, 꽃의 시듦은 첫 연의 옥토(비옥한 땅)에 떨어지는 씨앗의 기대를 함축하고 있다.
마지막 연에서의 주제는 웃음과 눈물의 순차적 의미다. 웃음 다음에 오는 신의 의미가 눈물이라는 것이다. 창세기의 마지막 인간 창조의 순서를 연상케 한다. 남자를 지으시고 여자를 만든 창조의 완전성과 완결성의 의미로 시인은 웃음의 축복 다음에 오는 가장 큰 축복을 하나님의 알 수 없는 섭리를 신뢰함으로 자기의 슬픔의 해석을 의탁하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최고의 믿음의 모습이요 완결성의 신앙 자세인 것이다.
시련 속에서 신의 위대한 뜻을 살피는 자세는 기독시인이 가져야 할 내용이자 궁극적 지향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 고백은 욥기의 후속편이자, 만일 현대에 와서 신약에 시편을 추가할 경우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서슴치 않고 추천했을 것이다.
=들사람의 문학 공방 『하늘못』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