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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시 남동구도림동[도림문중 37세 양진] 행사내용을 보시려면 아래주소를 크릭해주세요. http://cafe.daum.net/kkoohee/1pML/97
사회자 인사(지파순회를 하신 분들께 안내 말씀) 여기 모셔진 선조님의 세거하신 유래를 말씀드리기 위해서 나누어드린 世系分派圖를 설명하겠습니다. 유인물로 나누어드린 약식으로 세계분파도를 표현한 것이고 도림문중만을 설명 하고자 굵은 글씨로 표현한 것이니 이해바랍니다.
판도공파 종회 전임 태환 종장님과 용걸 종장 및 회원 여러분이 도림수산 문중에 오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도림수산문중이 이곳에 세거한지 아마 400여년 만에 제일 커다란 경사로 생각 합니다.
파평윤씨 宗人 판도공 지파여러분께 도림문중의 일원으로써 여기계신 24世 집의공 선조님의 세거와 유래를 설명할 수 있는 기회에 정말 영광스럽게 생각 합니다.
저는 시조로부터 37세이며 24世 執義公의 13代 후손이고 도림수산 문중 발전에 봉사하고 있는 양진입니다. 사실 유래와 세거에 대해여 더 많은 내용을 잘 아는 도림문중 원로 분들이 무척 많으시나 부족한 저 한테 조금 젊다고 해서 도림문중을 설명하라고 해서 조심스럽습니다. 소개하는데 혹여 선조에 관한 호칭에 결례가 있거나 표기가 잘못되어 있으면 정정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여기 함께하신 [제학공][부윤공] [정정공]각 支派후손이시므로 판도공의 중심으로 약간의 설명을 드리는 것이 예의라 생각했습니다. 명문거족 중 5대 반열에 있는 파평 윤씨인 시조 태사공 휘 신달님의 후손으로 윤기 1120년 이르는 동안 선조님께서 오늘과 같은 날을 예비하시기 위해 무수한 희생과 또는 혈족의 대를 이어가기위해 역사를 거스르기도 하고 또 왕권과도 타협도하고 무리를 하면서 권력의 욕심 반복 하시고 타 성씨문중에게는 다소지탄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尹氏門中을 굳건한 가문으로 지키기 위함이었다고 봅니다. 우리 모두 다 같이 선조님께 감사함에 예를 갖추는 의미에서 묵념으로 하겠습니다. 시조 태사공이하 모든 선조들께 묵념으로 예를 갖추겠습니다. [일동 묵념~~~ 바로]
-12세 양간공소개 우선 설명에 도움을 갖고자 판도공의 조부님과 부친의 대한 설명을 하고 시간상 선조의 벼슬 등을 생략할겠습니다. 나누 어 드린 유인물에 도림문중 가계보 세거현황을 보면서 설명을 듣도록 하구요. 위에서 시조태사공 부터 11世 문현공 까지는 생략 토록 하겠습니다. 그럼 시조태사공으로부터 12세손이시고 문숙공 휘 윤관 장군으로 부터 7대손이시며 판도공 휘 승례님의 조부가 되시는 양간공(諱 안숙)님을 먼저 소개로 시작하겠습니다.
-13세 영평군 소개 양간공께서는 4형제를 낳으셨잖아요?(諱리/諱척/諱거충/諱득인) 이중 둘째이신 영평군 (휘 척)이 바로 판도공의 부친 되십니다. 영평군께서는 5형제를 낳으셨는데 판도공께서 는 5형제 중 막내로 태어 나셨구요.
-14세 판도공 소개 판도공께서는 창왕1년 1389년 문하평리(고려시대 문하부의 종2품 벼슬 참지정사)로 권근과 함께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 돌아와서 (“중국후한의 2대 황제이구요 이름은 유장이며 廟號 (묘호)는 현종이고 시호는 명제입니다”) 明帝지시에 따라 공양왕을 즉위케 하였지요. 이어 판개성 부사와 판도판서를 엮임 후 공양왕4년(1392)파산에 은거하시 다가 卒하시고 장단 작목동 묘 좌측에 안장 후 순충보조공신과 문충 시호를 받으신 충신이며 파평 윤씨 판도공파 파시조가 되십니다. 판도공의 5형제의 諱를 나열하자면 첫째 휘 승휴/ 둘째 휘 승도/ 셋째 휘 승순/ 넷째 휘 승경/ 다섯째 휘 승례 (판도공)입 니다. 또한 판도공께서는 삼형제를 두셨습니다. [장남 諱규 대제학공][차남 諱보노 부윤공][삼남 諱 璠(정정공)] 이 삼형제의 후손이 바로 파평윤씨 판도공파 종회라 칭하는 것입니다.
-15세 정정공 소개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써 판도판서이신 판도공의 삼남 정정공 휘 번께서는 세조의 국구(國舅 왕의장인)가 되시고 대사헌, 우참찬 판중추원사 등을 지냈으며 뒤에 영의정에 추증 파평 부원군에 추봉 되었구요. 너무나 유명하신 정희왕후의 친정 아버지이신 정정공에 관한 소개는 생략하구요. 분류를 꼭 하자면 다음과 같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정정공께서는 삼형제 두셨는데 중 맏아들 휘 사분(士昐)이 우의정을 지내고 , 둘째 아들 휘 사윤은 예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내고 정난공신으로 셋째 諱 사흔은 좌리공신으로 우의정에 오르므로써 형제 정승으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그러나 사분과 사흔은 두 집안에서 같은 시기에 왕비가 배출되니, 왕실을 배경으로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으로 갈라져 정치적 대결을 벌이게 되는 불운을 맞는 안타까운 역사도 있습니다.
-16세 양평군소개 16세 휘 사분 사균 사흔(양평군)삼형제중 도림문중은 그 중 3자 사흔(양평군)의 후손이 되십니다.
-17세(공양공)18세(영상공)19세(정평공)20세(참판공) 양평군의 차남 諱 계겸(공양공)께서 5형제를 두셨는데(諱 욱/선/순/임/무) 그 중 장남 이신 諱 욱(영상공)의 후손이며 그의 장남 부원군 정평공(지임)께서는 국구가 되시고 문정왕후의 친정아버지가 되시는 정평공(휘 지임)은 5형제 두셨는 데 (諱 원개 원량 원필 원로 원형)중 셋째휘 원필 참판공이 직계선조가 되십니다. 또한 참판공께서는 4형제를 낳으셨는데 (諱 윤 위 회 집)그 중 3남 21世諱 회(천안공)께서 (천안군수역임) 당하리에 묘역 쌍분으로 모셔져 있으며, 이곳 公의 증조부가 되십니다.
-21세 천안공 22세 판관공 公의 조부 22세 휘 제현(판관공)님께서는 안동판관역임) 당하리 천안공 우측 삼쌍분 으로 묘역이 있으십니다. 公의 부친 되시는 23세 풍덕공(휘 간) 풍덕군수로 역임하셨는데 평소 절친한 인조반정을 일으킨 효령대군 후손 완풍군 1623년(광해군 15) 이서(李曙)가 서인 일파가 광해군과 집권당인 대북파(大北派)를 몰아내고 능양군(綾陽君)인조를 왕으로 모시자고 장단부사로 부임하면서 풍덕공께 반정사에 협력할 것을 고하자 풍덕공께서는 임금이 (광해군)비록 도가 없으나 신하의 도리로 임금을 벌할 수 없다 하여 즉일로 낙향을 하셨다고 문헌에 나왔습니다. (동조를 했으면 아마도 공신칭호를--???)아마도 윤원형이 일으킨 을사사화 후의 일이라 무척 조심스러워 했을꺼라 봅니다. 그 후 인조 12년 6월20일에 졸하셨습니다. 그때 나이 74세 장수하셨습니다. 도림문중은 公의 曾祖父 諱 회(천안공) 祖父 諱 제현 판관공과 父親 諱 侃 풍덕공께 매년 음력 10월 6일 50여명의 후손들이 선조께서 모셨던 방식으로 교하 당하리에서 추향제를 지냅니다. 그 이하 천안공파로 종회를 발족하여 매년 음력 10월6일 교화에서 추향제 참배 후 총회를 거쳐 종사에 관한 업무를 보고 하고 개진하여 천안공 종사를 돌보고 있습니다.
-24세 관야공 집의공 다음은 여기 모셔진 선조 24세 諱 商자 銓자 집의공에 관한 설명을 하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교화에 계신 풍덕공께서는 장남 관야공 휘 商자民자 휘 商자 銓자 두 형제를 두셨는데 여기 삼쌍분 묘역은 둘째 아들 집의공 휘 상자 전자이십니다. 장남 관야공께서 인천부사로 재임기간(1620)1년으로 계실 때 후손들은 거의 이곳에 거주하여 인천도호부에 막중한 직책을 부여받고(능골 장자골 덕골 수골 등등)가솔들을 정착케 하였습니다. 그 후 400년을 걸쳐 집성촌을 이루며 지금까지 15代를 이어 최초로 이 지역을 지금에 번성된 고장으로 발전시키게 된 동기가 되겠습니다. 공의 부친이신 풍덕공은 인조반정에 고민을 하신 흔적을 보아 필경 역사의 흐름으로 열거하면 완풍군 이서가 장단부사로 있을때 풍덕공과는 매우 절친하였음을 엿볼 수있으며 장남 휘 상민(관야공께서 이곳 부사로) 오실 때 완풍군 이서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관야공께서는 종6품인 충청지역 부여현감으로 계시다가 1620년 37세에 151대 인천도호부사로 종3품 벼슬로 부임하신 것을 보아 매우 빨리 승진 하셔서 올라 오신 것 이지요.
집의공 춘추(春秋)가 9살 어리시니 그때 나의 28세일 때 1627년 인조반정이 있은 후 35세에 이르러 오셨음을 짐작하게 되었습니다. 선교랑 종육품(從六品) 상(上)의 문관 품계벼슬을 하였다가 59세의 나이로 졸하시고 증 집의벼슬 로 품계을 받으셨습니다. 그 후 이곳 장수동에 공양공의 막내아드님 휘 무 후손께서도 1637년 병자호란때 나라가 어수선하여 이곳에 함께 세거하게 된 동기라 할 수 있습니다. 公께서는 명세 명겸 명선 명국 4형제를 두셨습니다. 공의 옆 쌍분은 25世 공의 장남 諱 鳴자世자님의 내외분이시며 선교랑(종6품문관 품계)을 거쳐 증좌승지로 제수(除授) 받으셨습니다. 젊은 나이에 31세 졸하셨으며 자손이 無 하여 公 께선 형님이신 관야공 둘째손자 26世 諱 海자壽자님을 양자하여 代를이어 자손을 번성케 하였습니다. 지금 도림문중은 관야공 집의공으로 족보상 분류로 되었지만 혈통으로 보면 집의공 측 은 관야공 장남 휘 鳴자莘자의 둘째 海자 壽자의 後孫이며 관야공 측은 26世 4남 諱 希자壽자 후손과 막내 5남 諱 昌자 壽자의 後孫들입니다.
그래서 집의공 측은 촌수가 낮고 관야공 측은 촌수가 높습니다. 휘 海壽님은 생원시에 합격하여 진사를 지냈으며 증 대사헌으로 백관(百官)을 감찰하고 기강을 진작하 는 관리로써 제수를 맡았습니다 묘역은 水谷 종산에 있으시구요. 27世 증손자 諱 취관님 동추벼슬(중추부의 종이품 벼슬)지냈으며, 高孫子 28세 휘 동열님은 통덕랑 정 5품계의 문관벼슬로 지냈으며 지금의 중앙정부 과장급인 4급 서기관 정도로 보면 되겠습니다. 묘역은 증조부이신 25世 諱 명세님의 쌍분 오른쪽에 있으십니다. (都堂山에 계신 묘역을 20년 전에 이장하여 이곳 선산으로 모셨습니다).
또한 公의 차남 25世 諱 명겸의 증손 휘 동규님은 유명한 조선의 실학자로 소남선생 으로써 대한민국 백과사전에 소개된 분이고 그의 유물이 1300여점이 발견되어 학계가 발칵 뒤집어진 일이 있었습니다. 아울러 아들(광로)의 혼사로 장단에 갔다가 문숙공의 묘가 실전되었음을 영조 23년(1747)발견하고 이호문의 후손되는 자를 추궁한 결과 심문(沈門)에서 토지를 사 주면서 “그 고총이 자기 조상의 무덤이라고 사칭하고 제사를 지내 달라”면서 청탁하기에 그 古碑를 주었다는 사실을 실토받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묘하 길 옆에 있는 토분을 파헤쳐 그것이 종중 문헌에 전해오는 교자총 (교자<轎子>는 여진 정벌 당시에 임금께서 하사<下賜>하였던 수레)에 확인되어 틀림없는 문숙공의 묘임을 알게 되었고 지금에 여충사의 모습이 되어진 것입니다. 그 밖에도 많은 설명을 하고 싶으나 시간관계상 줄이고요.
2부 순서에도 소개를 드리겠습니다만 집의공 35世에서 관야공 4째손 희자수자 宗孫으로 양자로간 37세에서 파평윤씨 도림문중에서 가문을 빛낸 3선 구청장도 배출도하였습니다. 그밖에 구의원과 고급공무원 등등 많은 훌륭한 후손들이 도림문중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인물 항열표를 보신는바와 같습니다. 검은색바탕으로 표현한것은 양자출계한 표시입니다. 이로서 도림문중의 세거유래를 말씀드렸습니다. 감히 조상님의 세거의 유래를 말씀드렸습니다. 참으로 부족하였는데 끝까지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 그럼 이왕 오신 김에 집의공께 참배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도림문중 종회장 덕성님께서 앞으로 나오셔서 분향하시면 함께 재배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오찬 장소에 들어가시면 방명록이 2부가 있습니다. 1부는 판도공종회에서 가지시고 또 한권은 도림문중에서 보관할껍니다. 이상으로써 집의공께서 도림동에 셰거하신 유래설명을 모두 마치겠습니다.
[桃林壽山 門中 世系分派圖] (1620년 ~2012년현재)
판도공파종회에서 지파순회방문을 도림수산문중을 택하여 판도공파 종회 전임 태환 종장님과 용걸 종장 및 각 족장님 등 45명이 도림문중을 찾았다. 도림문중 덕성회장과 임원15명은 정성드려 맞아드렸다. 도림수산문중이 이곳에 세거한지 400여년 만에 제일 커다란 경사였다. 참배하시러온 종인들께 24세 집의공(諱 商자銓자)께서 도림동에 세거하신 유래를 말씀드리는데 도움이 될 필요한 世系 分派圖 자료와 일정표 행사 식순과 항렬표를 각 1부씩 나누어 드렸다. 유인물로 나누어드린 세계분파도는 약식으로 표현한것이고 도림문중만을 설명하고저 굵은 글씨로 표현해보았다.
순회행사를 치루고 나서--- 처음 덕성회장님께서 판도공파 종회에서 지파순회방문을 도림문중으로 선택했으면 하는 의견이 판도공파종회에서 연락이 왔는데 어찌했으면 좋겠는가?로 시작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판도공파종회가 어찌 활동하는지도 몰랐고 지파순회라는 문구도 어색하였다. 부친께서 작고하시기 전에 귀가 따갑도록 종사에 관심을 갖고 어른들을 따라다니며 배우라는 말씀이 이제 귓가에 생생하다. 잠시 옛 기억을 참고해보고 순회행사 후의 뒷 이야기를 써보겠다. 우선 36세 諱 德馨(父親尊銜)의 관한 기억을 돌이켜 본다. 2004년 7월에 아버지께서 운명(81歲)하시고 난 뒤 아버지의 평소 쓰시던 낡은 노트에 연필 혹은 볼펜으로 빽빽이 적어 내려간 글들을 보았다. 그곳엔 世代별 行列별 족보를 한눈으로 누가보아도 거부감 없이 알 수 있도록 만들고 계셨던 흔적이 가슴을 메이게 하였다. 대상포진 후유증과 합병증으로 치매를 4년을 앓고 계시다가 결국 아버지께서 완성을 못하시고 끝내 낡은 노트에 미완성으로 남기셨다 그 후 망치로 나의 머리를 맞은 듯 항상 어찌할지 바를 모르다가 아버지의 손때 묻은 族譜와 波譜를 뒤적거리며 아버지께서 하시던 작업을 시작했다. 아버지께서 연필로 써내려가면서 하시던 때와 사뭇 다른것은 컴퓨터로 이용하는것이라 좀 빠르게 완성할 것 같았다. 하지만 완성은 언제가 될지는 몰랐다. 다만 막연히 -- 첨엔 이제 시집가서 애를 둘이나 낳은 딸이지만 그때 나이22살 딸에 컴퓨터 실력을 믿고 시작은 했지만 그도 또한 여의치 않아 농협에가서 컴퓨터를 3개월을 배우고부터 본격적으로 작업에 착수했다. 우선 종친회에 참석을 했다.(이때나이 50세) 참석을 하자마자 총무의 직책을 맡았다. 모두 대화가 잘 안 되는 어른들이라 소화하기가 힘들었지만 귀동냥을 해야 하였기에 열심히 하였다. 총무를 6년을 하였다 회장님 세분을 2년씩 모시게 된 셈이다. 첫째의 목적은 도림문중의 족보를 완성하여 젊은 사람들이 쉽게 보고 너와 나의 촌수? 누구의 후손이고 언제 이곳에 세거하게 동기를 알리는데 우선을 두고 하였다. 그리고 그 자료를 책으로 제본을 만들고 젊은 후손들에게 나누어주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그러면 젊은 후손들이 뿌리를 알게 되면 종친회에 모일 것 같았다. 종친회의 특성은 어른들만이 모이는 것으로 인식되어있어 젊은이의 수혈을 못 받았다. 아내한테 구박을 맞으면서까지 밤을 새웠다. 4년이 지나서 겨우 족보내용을 옳게 보게 되었고 선조님들께 감사함을 알게 되었다. 유구한 1110년의 역사를 이어온 우리 파평윤씨의 후손이란 것이 너무도 자랑스러웠다. 이제 아버지의 미완성을 완성한다는 의미보다 조상의 뿌리를 찾아가면 한 뿌리를 찾을때마다 그 선조님의 애환이 그려지고 자존심이 그려지고 성격과 인품이 보였다. 마치 드라마를 보는 듯 재미가 있었다. 80%의 완성된 것을 제본을 만들어 종친회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반응은 100%였다. 50권을 만들었으나 부족하였다. 그 후 도림문중은 40대부터 60초반이 주류를 이루니 70대 이후는 참석 율이 적었다. 종친이라는 모임은 원로와 젊은이들과 한데 어울려 하모니를 이루어야 의미있는 종회가 될 수 있는데 토론과 대화의 접근성이 부족한 것이 문제일 것이다. 이제는 도림문중은 50여명이 종친회에 등록이 되었고 계속적인 홍보에 함께 종사 일을 볼 젊은이들이 속속 참여를 하고있다. 도림문중은 이제 영원히 불이 꺼지지 않는 불로 종중을 밣혀 줄 것으로 믿는다. 순회방문 후의 느낌을 적는다고 시작했다가 엉뚱한 이야기를 한 것 같다. 덕성회장의 통보를 받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기획하여야 할지 몰랐다. 덕성회장님도 처음이라 의논이 될 것 같지 않았다. 판도공파 종회장과 총무의 전화번호와 이름만을 받았다. 여기저기 알아보니 행사성격이 만만치 않음을 직감했다. 도림문중엔 관야공 소종회가 있고 집의공 소종회가 있다. 두 소종회를 합쳐 도림수산 문중이라 일컫는다. 소종회가 각 분류되었지만 순회때 설명한바와 같이 관야공 둘째손자 26世 諱 海자壽자 님께서 집의공 長孫으로 양자를 왔기에 한 혈통이다. 부리나케 임원회를 열고 원로 36세 덕일 회장님을 모시고 판도공파종회지파순회 행사 성격과 범위에 대하여 묻고 숙의 하였다. 덕일 상임고문께서도 수년전에 다녀보고 그 후 건강치 못해 잘 다니지 못하였단다. 작고하신 아버지께서도 포항에 계신 태사공묘역을 다녀오셨다는 말씀이 기억된다. 하지만 식사대접을 잘 해드려야 後에 욕을 안 먹는다는 말씀을 강조할 뿐이지 구체적인 행사내용을 알려주질 않았다. 하여 일단 그럼 모든 행사진행을 집행부서와 筆者한테 맡기고 말았다. 400년만의 귀한 손님들이 찾아온다는 것은 도림문중의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일부러라도 혈족을 모시는 일이 아니겠는가? 옛 날엔 멀리서 말을 타고 아니면 걸어와서 애경사에 참여 했고, 또 종사에 관한 업무를 보았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 들은 몇 날 며칠을 묵었고 부족한 살림살이지만 정성을 다하여 대접하였지 않은가? 나는 이번 순회가 그와 같은 성격으로 생각하면 되겠다 싶었다. 급해졌다. 찾아오신 판도공파 지파손님들께 도림문중의 세서와 유래에 대하여 설명을 하는 것이 기본이지 않겠나 싶어 우선 그동안 자료 수집해놓은 내용을 발췌가 시급했다. 몇 날을 뒤적거려 겨우 찾아내어 다행이었다. 다음은 행사 식순에 대하여 종회에 질의를 하였다. 일단 공문을 보내 달라 요청했다. 공문이 접수되자 곧 바로 순회방문을 도림문중으로 선택해주신 것에 관한 환영의 뜻을 담은 공문과 일정표와 식순에 대한 내용을 보냈다. 일단 공문을 보내놓고 나니 이제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식당예약을 하고 현수막 도안하여 맡기고 임원들과 다시 회동하여 예약 식당에 가서 사전 음식을 시음도 해보았다. 분향은 어떻게? 재배는 어디까지 등등을 논의하고 세거유래설명 관한 시나리오 작성 등은 나 혼자의 일이다. 그래도 기뻤다. 400년만의 귀한 손님을 맞는 대행사에 진행을 맡는다고 생각하니 영광이었다. 물론 선조님께서 도림동에 세거하셔서 지역민을 都堂祭를 통하여 다스리던 토속문화를 재현하고 기획과 진행(행사 때 관객 수 각 구청장 및 지역 수장 400여명모임)하는 직책을 맞고 있는 터이지만 지파순회는 많이 다르다고 생각 했다. 같은 혈족이며 또한 혈족의 내력에 대하여 얼마나 박식한 분들이 많은가? 잘 못하면 자존심을 건드려 호통도 불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럭저럭 행사를 마치고 임원들과 강평하니 많이 부족하여 오셨던 분들한테 죄송한 마음뿐이다 라는 공감을 갖고 반성하였다. 공문접수→공문발송(일정표. 식순. 위치약도 포함)→도착지 안내→오찬장소 예약→ 묘역참배준비(유인물배포)→현수막 설치→참배→오찬장소 이동(안내자 동행)→ 동궁한정식도착→2부 행사 식순에 의한 진행→오찬→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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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지파 방문에 감사 드립니다 판도공 회장님 께서
사진이 모두 나와야 하는데
말씀 하시는 모습만 있네요 안타 깝습니다
우리도 조만간 한번 초청 하겠 습니다
감사합니다. 인사드릴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랫동안 잊고있었던 카페에 들어와 지파순회를 회고했던 글을읽고 감회가 깊었다.
나에게 이런 열정이 있었구나 스스로 대견함으로 칭찬을 해주었다. ㅎㅎㅎ
내일은 파주 추향제를 지내는 날이다. 21세 천안공(휘 회) 22세 판관공( 휘 제현) 23세 풍덕공(휘 간) 선조의 참배를 다녀올것이다.
양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