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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모습 |
1890년 12월 21일 첫 미사를 드린 ‘장림성당’을 모체로 창립된 서울대성당은 대한성공회 서울교구의 주교좌성당이자 어머니교회다.
민족의 아픔을 함께 나누던 서울대성당은 1987년 민주화를 위한 ‘범국민대회’의 개최지가 되면서 민주화의 출발점에 나란히 섰다.
한국 교회의 분열 속에서도 교회 일치와 화합을 추구해왔다.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5호로 지정된 국내 유일의 로마네스크 성당은 상공에서 보면 거대한 십자가 형상을 띤다.
서울대성당은 전통적인 예전과 교회음악 등으로 십자가의 세로축을, 활발한 사회선교 사업을 통해 십자가의 가로축 역할을 균형 있게 감당하며 다양한 선교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서울 중구 정동 시청역. 시청을 중심으로 한 분주한 서울과 서울대성당을 중심으로 한 고즈넉한 서울 두 개의 모습이 공존한다.
서울대성당을 들어서면 건물의 아름다움이 우선 눈에 들어온다.
한국 유일의 로마네스크 양식 건물이 주는 장중하고 위풍당당한 모습과 한국의 조각보를 착안해 만든 스테인드글라스의 아기자기한 모습이 어울려 친근하게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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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중 순교한 분을 기리는 추모비 |
중국에서 선교를 하기 위해 머물던 스코트 주교는 조선 선교의 필요성을 영국성공회에 알린다.
1889년 11월 1일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대한성공회의 초대 주교로 고요한(C.J 코프) 신부가 서품되었다.
고요한 주교는 1890년 9월 29일 제물포에 첫 발을 디딘 것을 시작으로 1890년 11월 서울에 교회 터를 마련하기에 이른다.
당시 서학현(西學峴)으로 지금의 서울대성당이 있는 자리다.
1890년 12월 12일, 낡은 한옥에 십자가를 달고 ‘장림성당’이라고 불렀다.
예수가 이 땅에 다시 강림(장림)하시기를 소망하는 마음이 담긴 이름이었다.
장림성당은 1년 뒤인 1891년 11월 1일, 미사를 시작하게 되어 교회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108년 전인 이날을 교회 창립일로 지키고 있다.
1892년 11월 27일에는 순 한국식 건축양식으로 지은 새성전 축성식을 갖는다.
1892년에는 성가수녀회의 모체인 ‘수도회’의 문을 열었다. 1893년에는 ‘고아원’을 개설했고, 1895년에는 ‘성 베드로병원’을 개원했다.
1894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성서해설서 <조만민광(照萬民光)>을 출판하고, 1899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창세기 번역서 <구약촬요(舊約撮要)>를 발간하는 등 풍전등화 같은 나라의 운명 앞에 낙심하던 백성들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문서출판 사업에 앞장섰다.
‘장림성당’은 교회 이름대로 새벽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교육사업과 병원사업, 그리고 문서사업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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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좌성당을 디자인한 아더딕슨. |
서울대성당 건축
1904년 7월 5일 고요한 주교가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을 하고 한국 YMCA 창설자의 한 사람인 단아덕(A. 터너) 주교가 후임으로 부임한다.
단아덕 주교는 1908년, 서울대성당 최초의 전도사로 송세준을 임명한다.
1910년에는 ‘조선종고성교회’로 부르던 성공회의 명칭을 ‘대한성공회’로 고치고 첫 대한성공회 전국의회를 통해 대성당을 건축하기로 결의한다.
그러나 1910년 단아덕 주교의 별세로 교회 건축은 미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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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더딕슨이 디자인한 주교좌. 주교의 좌석이 있어 주교좌성당이라고 불린다. |
제3대 주교는 1911년 11월 1일 부임한 조마가(M.N. 트롤로프) 주교다.
조마가 주교는 한국에서 10여 년간 선교한 경험을 바탕으로 대한성공회의 체제와 신학을 정립하는 데 앞장섰다.
전통을 중시하고, 엄격한 예전을 존중하며 조직화된 직제를 강조한 조마가 주교의 신학적 방향이 오늘날 대한성공회의 바탕이 된다.
조마가 주교는 새성전 건축을 시작한다.
1917년 영국 건축가 아더 딕슨에게 새성전 설계를 맡기면서 네 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첫째, 한국 교회의 활동을 고무할 수 있도록 전국 신자들에게 전도의 열의를 일으키고 용기를 줄 수 있는 유형의 중심체가 되어야 한다.
둘째, 어떤 민족이건 간에 교회를 통해 하나의 가족임을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셋째, 전국 교회가 하나의 규범으로 절차에 맞는 예전적인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넷째, 미래 교회 건축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22년 9월 24일 시작한 공사는 경제적인 여건 때문에 본설계대로 성당을 전체를 건축하지 못하고 십자가 형상 가로축을 축소한 일자(一字)형태로 완공하기에 이른다.
조마가 주교는 1926년 5월 2일, 전국에서 모인 1천여 명의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대성당을 ‘성모 마리아와 성 니콜라 성당’으로 명명하고 축성식을 거행했다.
이후 70여 년간 미완성인 채로 있던 건물은 1993년 원 설계도를 발견하게 되면서 교회 창립 103주년을 맞이하는 1994년에 이르러 증축공사를 시작한다.
1996년 5월, 증축 부분에 지하 3층의 교육관을 부속 건물로 하는 총 1,239평에 이르는 현재의 건물을 완공했다.
민족의 아픔과 함께한 서울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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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부터 1938년까지 11년에 걸쳐 제작된 모자이크 제단 성화 |
서울대성당은 우수한 학생들에게 공동생활과 교회교육을 실시하여 장래 성직자와 평신도 지도자를 양성하려는 목적으로 1913년 여학생 기숙사인 ‘성모관’과 1914년 남학생 기숙사인 ‘니콜라관’을 개원했다.
두 기관은 1970년대 초까지 계속되면서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실제로 3·1운동 당시에 서울대성당의 성니콜라 기숙사 학생이었던 홍순복(경성제1고보 재학)이 파고다공원 독립시위운동에 동원책으로 가담했다가, 대성당에서 체포되어 1년여의 옥고를 경험하기도 했다.
이 경험은 고난의 역사를 이겨내기 위한 대전도 운동으로 이어지고, 계속해서 전국의 교회들이 함께 하는 교회 갱신운동으로 발전했다.
교세 확장과 성직자들의 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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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부터 세례의식 때 사용해온 성천(聖泉) |
1930년 영국에서 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오던 조마가 주교는 일본 고베항에서 당한 배사고로 갑작스런 죽음을 맞는다.
조마가 주교의 유해는 지하 소성전 중앙 바닥에 안치되어 지금까지 서울대성당과 함께 하고 있다.
이듬해 구세실(세실 쿠퍼) 주교가 대한성공회 제4대 주교로 부임한다.
복음화의 기치를 내건 구세실 주교는 북한지역을 포함한 여러 지역에 새로운 교회 설립을 추진했다.
그 결과 9년간 51개의 새성당과 회당을 축성해 전국의 교회 수를 115개로 늘리고, 전국의 신자 수도 1만 명으로 늘어나는 등 놀라운 교세 확장을 이룬다. 그러나 1941년 이후 일제에 의해 선교사들은 모두 퇴거당하게 된다.
1945년 해방을 맞았지만 상당기간 어려움을 겪었다.
6·25 동란 중에 서울대성당 주임사제였던 윤달용 신부와 홍갈로 신부, 마리아 클라라 수녀 등은 공산군에 납치되어 순교를 당한다.
같이 납치되었던 구세실 주교는 구사일생으로 다시 교회로 돌아왔지만 1955년 사임했다.
1956년 1월 17일 제5대 주교로 승좌한 김요한(J. Daly) 주교는 새 시대를 열어 가는 교회로서 토착화의 신학과 ‘한국인의 교회’를 만드는 일에 역점을 두었다.
1965년에는 서울교구와 대전교구를 분할하고 서울의 초대교구장으로 이천환 신부가 취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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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고요한 주교 |
1970년대에는 군사정권 아래 사제들이 잇따라 연행, 감시를 당했고 예배까지 방해를 받았다.
1987년 6월 10일에는‘군부 독재 타도와 민주쟁취를 위한 범국민대회’의 개최지가 되면서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가 되는 등 민족의 고난을 외면하지 않았다.
이후 부임한 김성수 주교와 정철범 주교 등의 노력으로 서울대성당은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룩하기 위한 사랑과 평화의 선교활동을 계속 펼쳐 나가고 있다.
1998년 IMF를 계기로 ‘희망터’ 활동을 시작, 다양한 사회 사업을 펼친다.
노인 무료급식과 결식아동을 위한 도시락 사업을 시작했다.
외국인 근로자를 돌보고,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을 열었다.
무연고 장기수를 위한 교도소 봉사는 물론, 호스피스 봉사와 서울역 쪽방촌 가정과 결연을 맺어 봉사를 하는 등 시대의 요청에 민감한 봉사 활동을 계속 해오고 있다.
2004년부터 ‘주먹밥 콘서트’를 통해 지역인들과 공존하는 열린 공간으로 교회를 개방하고 문화와 만나는 새로운 기부형태를 창출했다.
서울대성당은 교회예산의 1/3을 대외지원금으로 책정,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며 사회를 섬기고 역사와 민중을 위해 봉사하는 오늘을 밝히는 교회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예수님을 본받아 고통 받는 이웃과 함께하는 신앙 공동체로
이현우(바우로) 주임사제
성공회의 이름은 ‘하나요, 거룩하고, 가톨릭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라는 사도신경 가운데 성(聖)과 공(公) 두 자에서 유래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19년 전 코프(한국명 고요한) 주교에 의해 한국에 들어온 성공회는 루터의 종교개혁 이전에 이미 개혁한 전통을 갖고 있다.
서울대성당의 담임목사 격인 주임사제 이현우 신부를 만났다.
성공회의 성격이 독특하다. 개신교 범주에 들어가지만 예배 등에서는 가톨릭적인 요소들이 눈에 많이 띄는데.
성공회 태동의 역사적 배경이 그렇다.
헨리 8세의 이혼 요청을 교황이 거부한 사건이 영국교회 독립의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근본 이유는 아니다.
영국은 6세기부터 거의 천년동안 로마교회에 속해 있었다.
영국의 세금이 로마로 들어가는 등 사회적인 불평등이 존재했다. 이에 대한 불만이 많았던 영주 등은 헨리 8세의 노선을 지지했다.
헨리 8세는 의회를 소집하여 1534년 국왕지상법(國王至上法) 을 발표한 데 이어, 1536년 로마의 감독권을 폐지하는 법령을 발표했다.
이후 여왕 엘리자베스 1세(1558~1603) 가 즉위하자 제일 먼저 가톨릭 세력과 개혁세력을 모아 한 교회를 만드는 일에 힘을 쏟았다.
정착기를 맞은 것.
이후 1559년 로마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포용하는 기도서를 제정하고 1563년 중용 노선을 추구하는 39개 신조를 발표하여 가톨릭적이며 개혁적인 성공회의 전통을 형성하게 되었다.
성공회는 이런 전통을 이어 중용적 신앙을 지키면서 신학적인 다양성을 포용하는 교회의 성격을 갖고 있다.
개신교와 다른 점 중에 하나가 평신도에게는 직분이 없다는 점이다. 장로나 집사 같은 직분은 없지만 2년에 한 번씩 교회 운영 위원을 선출한다. 그 위원회 안에 신자회장이라는 신도 대표도 있고, 목회자를 돕는 사제회장도 있다.
2년 후에 재신임을 받으면 계속 활동할 수 있다.
핵심적인 것은 목회자의 주도로 교회를 이끌어가진 않는다는 거다.
위원회 중심이다.
영국의 의회제도와 맥을 같이한다고 보기도 한다.
장점은 민주적이라는 것이고, 단점은 책임감이 없이 그대로 햇수만 채우게 되는 경우도 있다는 데 있다.
몇 년 전 서울대성당 내에서 여는 ‘수요 주먹밥 콘서트’를 취재한 적이 있다. 푸드 뱅크도 그렇고 사회적인 약자를 돌보는 나눔 운동에 앞장서 왔다고 보는데.
교회가 세상을 향해 해야 하는 당연한 일이다.
교회라면 세상의 소금과 빛의 소명을 감당해야 한다.
일부 교회들이 양적 성장에 눈을 돌리느라 관심을 덜 가졌기 때문에 역으로 부각된 것은 아닌지.
작은 자, 낮은 자를 섬기는 일은 성공회뿐 아니라 모든 교회가 마땅히 해야 될 몫이다.
앞으로 나아갈 방향은.
초기 복음을 전할 때는 다른 교파가 들어가지 않은 곳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다.
또 교회가 있는 곳에는 유치원과 병원을 세우는 등 교육, 의료 사업을 전개했다.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분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우리말로 된 문서를 보급하기도 했다.
앞으로도 대사회적인 책임을 감당하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데 힘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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