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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정치가이자 예학사상가, 청백리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선생(1548∼1631)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사계 선생은 율곡 이이 선생의 적통(嫡統)을 이어받아 조선 예학을 정비한 한국 예학의 대가이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혼란에 빠진 조선의 국가정신과 사회발전의 방향을 정립한 주인공이다.
율곡의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나이 31세(1578년, 선조11년)에 관직에 나갔다. 그러나 관직에는 별로 뜻이 없어 고향인 연산에서 예학연구와 저술활동, 후진양성에 전념했다.
아들이자 학문의 정통을 이은 김집(金集)과 송시열(宋時烈)을 비롯해서 송준길(宋浚吉), 이유태(李惟泰), 강석기(姜碩期) 등 훗날 조선사회를 주도했던 서인과 노론계의 대표적 인물들을 키워 내 기호학파의 거두로 꼽히고 있다.
사후인 1657년(효종 9년)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원공(文元公)이며, 1717년(숙종 44년)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연산 돈암서원(遯巖書院), 해주 소현서원(紹賢書院), 파주 자운서원(紫雲書院) 등 10여 서원에 봉향되었다.
특히 영의정 이항복(李恒福)의 천거로 염근리(廉謹吏)로 초선(抄選)되었다.
‘염근리’란 ‘청백리’의 다른 말로 주로 살아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청백리’라 하면 흔히 ‘깨끗하고 유능한 관리’를 말하는데 조선시대에는 일반적으로 살아 있는 이에게는 ‘염근리’ 또는 ‘염리’라 하였고 사후에 ‘청백리’로 일컬었다고 한다. 더 좁은 의미로는 국왕에 의해 최종 간택되어 ‘청백리안(淸白吏案, 청백리대장)’에 등재된 이들을 가리킨다(이영준 외 지음, [조선의 청백리] 참조)
사계 선생의 경우는 워낙 학문적 업적이 출중하여 청백리로서의 면모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살아 생전에 정부에서 공인된 극소수 청백리 중 한분인 셈이다.
선생의 고향인 충남 논산시 일대를 돌아보면 말년에 머무르던 고택, 묘소, 그분을 기려 세운 서원 등 곳곳에서 그분의 발자취를 발견할 수 있다.
1. 은농재(隱農齋)
선생이 말년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와 살면서 학문을 연구하던 곳으로, 1602년(선조 35년)에 건립되었다.
호남선 계룡역 인근인 충남 계룡시 두마면 두계리에 자리잡아, 지어진 지 얼마 안되는 고층아파트와 공존하는 오래된 한옥이 인상적이다.
충남유형문화재 제13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특히 은농재 앞을 지나는 도로가 선생의 호를 따 ‘사계길’이라 불린다.
은농재는 2,800여 평의 넓은 대지에 자리잡은 고택 속 사랑채인데 안채와 대문채, 별당채, 그리고 안채 뒤의 가묘(家廟)와 함께 사괴석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원래는 초가로 지붕을 이은 집이었으나 수리할 때 기와를 얹었다고 한다. 그 외에는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는데 그 큰 규모로 보아 ‘청렴(淸廉, 성품과 행실이 높고 맑으며, 탐욕이 없음)’과 ‘청빈(淸貧, 성품이 깨끗하고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어 가난함)’이 꼭 일치하지는 않았음을 짐작케 한다.
청백리에게 중요한 덕목은 깨끗하고 탐욕이 없다는 것이지 가난하거나 검소한 생활상이 필수적인 요소가 되지는 않았다는 이야기다.
2. 돈암서원(遯巖書院)
은농재를 나와 논산시 방향으로 국도1호선을 달리다보면 도로 왼편으로 돈암서원을 알리는 팻말이 눈에 들어온다.
국도에서 벗어나 약 200여미터 정도 더 가면 곧바로 서원과 마주친다.
돈암서원은 사계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634년(인조 12년) 창건, 1660년(현종 1년)에 사액(賜額)된 충청도의 대표적인 서원이다. 특히 서원내의 사당인 숭례사(崇禮祠)는 선생과 함께 김집(金集),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의 위패가 모셔진 곳이기도 하다. 원래는 이곳에서 서북쪽으로 1.5km 떨어진 곳에 지어졌지만 지대가 낮아 1880년(고종 17년)에 현재의 자리로 이전되었다고 한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보존된 전국 47개 서원중의 하나이다.
사적 제383호로 지정되어 있고 국도 1호선과 인접해 있어 찾아가기도 쉽다.
특히 서원 내의 응도당(凝道堂)은 1633년(인조 11년)에 지어져 유생들을 가르치던 강당으로 보물 제1569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화려하거나 웅장한 모습이 아니면서 평지에 자리잡아 한적하고 편안한 분위기가 일품이다.
관리사무실에 요청하면 문화해설사에게 친절한 설명도 들을 수 있다.
3. 김장생 선생 묘소
돈암서원을 나와 안쪽으로 약 2km 정도 더 들어가면 [사계 김장생 선생 묘소 일원]에 다다르게 된다.
‘묘소 일원’이라 한 것은 선생의 묘소뿐만 아니라 선생의 7대 조모이자 광산김씨의 중흥을 이룬 양천 허씨 부인을 비롯, 그의 아들 철산(鐵山)과 부인, 김겸광(金謙光), 김공휘(金公輝), 김선생(金善生) 등 일가의 묘소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충남기념물 제47호이며 사계 선생의 신도비, 사당, 재실인 염수재(念修齋)와 양천허씨 부인의 재실(齋室)인 영모재(永慕齋)가 함께 자리잡아 가히 광산김씨의 정신적인 고향이라 할 만한 곳이다.
야트막한 언덕에 소나무로 둘러싸인 전형적인 옛 묘역이지만 특별한 치장을 한 호화스러운 것과는 거리가 멀다.
정치적인 권력과 사회적인 지위에 대한 욕심없이 한평생 학문에만 정진한 사계 선생의 소탈한 모습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