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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묵채색미술자료실 스크랩 ◈ 조선시대의 명화 감상
보리수 추천 0 조회 57 10.02.07 15:0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조선시대의 명화 감상

 

 

작가 : 정선(鄭敾)
아호 : 겸재(謙齋) 또는 난곡(蘭谷)
제목 : 통천문암(通川門巖)
언제 : 17세기 후반
재료 : 족자 종이에 수묵
규격 : 131.6 x 53.4 cm
소장 : 간송 미술관

해설 :

문암에는 통천(通川)문암과 고성(高城)문암이 있어 혼동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그림은 통천 남쪽 동해변에 위치한 통천문암을 그린 것이다. 정선은 관동(關東)의 여행 때마다. 이 통천문암을 많이 그렸듯이. 현재 전하는 화적(畵跡)이 적지 않다. 그 중에 이 그림이 가장 노숙한 필치를 보이는바. 수직준(垂直?)을 찰법(擦法)에 가깝도록 부드럽게 구사하여. 거의 윤곽을 노출시키지 않으면서. 골기(骨氣)를 내재시키는 방법으로. 대상의 본질을 함축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이그림은 정선 최만년의 득의작(得意作)으로 보아야 하겠고. 어느 순간의 사생(寫生)이라기 보다 이전의 사생을 토대로 이상적인 가경(佳景)을 구현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생각된다. 일렁이는 파도가 곧 덮쳐들 것처럼. 물결은 하늘과 맞닿아 땅위에 군림하고. 먼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흐르는데. 거대한 바위산이 육지로 들어가는 문인 듯. 우뚝 솟아 파도의 침노를 막고 있다.

그 사이를 동자 하나만을 데리고 나선 단촐한 선비의 행차와. 말타고 구종(驅從)잡힌 호사스런 행차가 함께 지나고 있다. 모두 선비차림인데. 형편의 차이 때문이라기 보다. 의취(意趣)의 고하가 두 행차의 차이를 가져오게 한 듯하다. 정선이 스스로이고 싶어한 것은. 아마 긴 지팡이를 짚고 앞서가는 단촐한 행차였을 것이다. 그래서 문암 사이에 들어서다가 발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바다를 바라보는 유연한 모습으로 선비를 표현하고, 심술기 어린 철모르는 동자의 심정은 지루하기만 하다는 듯 왈자걸음으로 나타나고 있다.

 

 

 

 

작가 : 정선(鄭敾)
아호 : 겸재(謙齋) 또는 난곡(蘭谷)
제목 : 해인사도(海印寺圖)
언제 : 17세기 후반
재료 : 족자 종이에 수묵담채
규격 : 22.9 x 67.5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해인사는 9세기 초엽 신라 시대에 창건된 사원으로, 범어사(梵魚寺). 통도사(通度寺) 와 함께
한국 3대 명찰의 하나로 손꼽힌다.
또 고려판 대장경(大藏經)의 판목이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그림은 경상남도의 명승지 가야산(伽倻山) 기슭에 있는 해인사 가람(伽藍)의
제당(諸堂)을 중심으로. 계류나 단풍으로 물든 산들의 경치를. 담채를 섞은
수윤(秀潤)한 필치에 의해 부채면 위에 그린 것이다.
정선은 이 해인사도를 비롯하여 인왕산. 금강산 등의 명산. 명승지를 탐방하여
자주 그 진경을 그리고 있다.

이러한 진경도를 필두로 그가 그리는 산수는 실경에 기초한 것이 많은 중국화의
분본화법(粉本畵法)의 범위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던 이조 회화 가운데.
혼자서 이것을 개방시켰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물론 정선에게 있어서도 표현기법의 점에서는. 종래의 화가들과 같이 절파적(浙派的)인 것이나.
고씨화보(顧氏畵譜) 등에서 배웠다고 여겨지는. 오파(吳派) 문인화 계통의 남종(南宗)화풍의
섭취가 엿보이는 것은. 이 그림에 많이 사용된 미점(米點)이나 피마준(披麻?)에 의해서도
알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한 기술모방에 그치지 않고. 이러한 장점들을 참작하여
자기 것으로 소화시켰다는 점은. 그가 조선 시대의 탁월한 산수화가였음을. 어느 누구도
부정할수 없는 사실이다.

그림 속에는 해인사(海印寺)란 자제(自題)와 겸재(謙齋)의 관기(款記).
그리고 정(鄭). 선(敾)이란 백문방인(白文方印)이 하나씩 있다.




 

작가 : 정선(鄭敾)
아호 : 겸재(謙齋) 또는 난곡(蘭谷)
제목 : 정양사(正陽寺)
언제 : 18세기 중엽
재료 : 족자 종이에 담채
규격 : 22.7 x 61.5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실경(實景) 산수의 소재로도 빈번하게 그려졌던 금강산(金剛山)은. 화가들을 포함해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한반도 중심부에 위치한 성산(聖山)이다.

정선이 그의 실경산수를 대성함에 있어 수차에 걸친 방문이 불가피했으며.
금강산이 준 감동이 어떠했는가는. 현존 작품수를 통해서도 짐작이 가능하다.
정양사는 이른바 정선 화풍으로 지칭될 수 있는. 주요 골격인 암산(岩山) 표현의
수직준(垂直?)과. 토산(土山)표현의 미점 및 산의 정기를 드러낸 담청이 창연(蒼然)한
완숙기의 작품이다.
이를 더욱 분명히 입증해 주는 겸로(謙老) 란 관서(款署)가 있다.

포치(布置)에 있어서 정선에 의해 정형화된. 근경의 토산. 그 너머로 보이는 골산(骨山) 등.
그의 특징을 빠짐없이 담고있다.

더욱이 부채면이 산세를 전개하는 데. 더없이 적합한 화면임을 잘 알고 있던 그는.
그림과 같은 훌륭한 화면구성을 이룩하였다.
노년기로 접어든 의연하고 의젓한 산의 자태가. 노대가(老大家) 정선의 마음과 정신을 거쳐.
화면에 재창조된 이 그림은. 완숙의 극에 달한 대가로서. 한 곳의 허술함이나 흐트러짐이
전혀 보이지 않는. 오묘한 조화와 질서를 갖추고 있다.

정선의 실경산수는 한 개인의 천재적 우수성에 기인된 요소도 없지 않으나. 모든 문화가 그러하듯
그 연원은 오래되었으니 현존하는 화적(畵跡)에서도 살필 수 있듯이 계회도(契會圖)나
중국 사행시(使行時) 그 여정을 그린 조천도(朝天圖) 등도 실경산수 발전과정에 있어
간과할 수 없는 그림들이다.

정선의 실경산수는 그 이후에도 유례를 찾기 힘든 넓은 시야로 대경(大景)을 화면에 집약시킨
구성의 묘 또한 그가 창안한 준법(?法). 용묵법(用墨法)에 못지않게 중시되어야 할 것이다.

 

작가 : 정선(鄭敾)
아호 : 겸재(謙齋) 또는 난곡(蘭谷)
제목 : 취성도(聚星圖)
언제 : 18세기 중엽
재료 : 족자 비단에 담채
규격 : 145.8 x 61.5 cm
소장 : 한국개인

해설 :

이 작품은 주자대전(朱子大全) 권85의 취성정화병찬(聚星亭畵屛贊)에 나오는.
후한(後漢) 때의 명사 진식(陳寔)의 고사도(故事圖)이다.

취성 이란 덕이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란 뜻으로. 주자(朱子)도 그가 살던
고정(考亭)에 취성정을 두었었다.

송자대전(宋子大全)에 보면 송시열(宋時烈)이 김수증(金壽增)과 함께
<취성도>를 만들었는데. 주자의 찬(贊)의 뜻이 깊고, 또 장식(張?). 황헌(黃軒)의
논설이 의의가 커서. 쇠세(衰世)를 권계(勸戒)하는 큰 단서가 될 만하여.
김수증 과 이 그림을 그리는 일을 경영하였다.

이들은 서로 그림의 곡절을 헤아린 다음. 먼저 주자의 찬문을 쓰고. 다시 주자. 남헌.
면재의 논설을. 찬 아래 붙인 다음. 그 아래 우암의 발(跋)을 적어 동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하는데. 실제 그림 발문에도 족자를 만들었다고 써 있다.

취성도는 상단에 위에서 말한 찬과 발문이 예서체로 단정히 적혀있고.
하단에는 바로 진식(陳寔). 순숙(筍淑) 양가의 고사(故事)가. 아주 사실적으로
산수화 안에 전개된다.
나무. 개울가의 바위. 인물묘사. 산봉의 기법이 모두 겸재정선의 것이 틀림없으니.
예전부터 전해온 취성도를 보고 모사(摹寫)한 것임이 분명하다. 인물, 소, 수레등이
작은 그림인데도. 매우 꼼꼼하고 각종 나무들. 그중에서도 대숲. 삿자리울타리.
초당의 지붕은 말할것도 없고. 방안의 기물과 산수병풍까지 그림 속에 있어
정선의 실경도들과는 달리. 여간 치밀하지가 않다.

뒷산은 주름잡힌 계곡을 피마준(披麻?)과 태점(笞點)으로 처리하고.
청록산수의 채법(彩法)이 돋보이기도 한다. 원경의 고산준봉에서도 세심한 구성을 하고 있다.

 
 

작가 : 조영석(趙榮?)
아호 : 관아재(觀我齋)
제목 : 송작도(松鵲圖)
언제 : 18세기 중엽
재료 : 족자 비단에 담채
규격 : 46.5 x 41 cm
소장 : 한국개인

해설 :
조영석은 자를 종보(宗甫). 호를 관아재(觀我齋)라 하는데.
숙종. 영조 연간에 활약한 대표적인 사대부 화가로 겸재(謙齋) 정선(鄭敾).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과 함께 사인삼재(士人三齋)라 일컬어졌다.
그는 높은 관직을 지내진 못했지만 시. 서. 화 삼절로 선비의 청빈한 삶과 풍류를 즐긴 것이.
그의 문집(文集) 관아재고(觀我齋稿) 곳곳에 잘 나타나 있다.
송작도는 왼쪽 중앙에서 아래로 휘어지면서 처지는. 늙은 소나무 줄기에 까치 두 마리가.
나란히 오른쪽을 향해 앉아 있는 것을 그린 그림인데. 까치는 꼬리를 치키고 내린 것만 빼놓고는.
둘 다 앉은 자세가 같다.
흰 호분(胡粉)을 두껍게 칠한 까치 배의 영모기법(翎毛技法)과. 늙은 소나무의 갈필 붓놀림이
대조적이고. 나란히 앉은 까치의 자세에 변화가 조금 있었더라면. 공간구성이 좀 나았을 것이다.
실제로는 그림밑에 후손 조문서(趙文瑞)의 시(詩)가 같이 표장되어 전체적인 구도에 안정감을 주고 있어. 그림만 따로 보는 것과 는 다르다.

 
 

작가 : 조영석(趙榮?)
아호 : 관아재(觀我齋)
제목 : 원주행선도(原州行船圖)
언제 : 18세기 중엽
재료 : 족자 종이에 담채
규격 : 62.5 x 43.5 cm
소장 : 한국개인

해설 :
조영석의 그림은 특히 인물과 속화(俗畵)에서. 당대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고. 산수화에 있어서도
남종문인화풍의 수용이라는. 또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특히 산수인물화 중에는
설중방우(雪中訪友)나 유음납량(柳陰納凉)처럼 속화나. 자신의 삶의 분위기를 반영한 작품이.
많이 전하여 크게 주목된다.
이 그림역시 특별한 사연을 담고 있다.
그가 37세 때 가을에 그의 벗 김신로(金莘老)가 가족과 함께 섬강(蟾江)을 따라 원주(原州)로
이주하게 되자. 그 석별의 정으로 그림과 칠언율시(七言律詩)를 지어 주었던 것이다.
제시의 내용대로 책가지를 보자기에 쌓아 싣고. 배를 타고 원주로 떠나면서 대화를 주고받는
장면이다.
강 대안(對岸)은 갈대밭의 해오라기로 시정을 살려냈고. 뱃길은 유려한 필치의 물결 묘사로
속도감을 나타냈다

 
 

작가 : 변상벽(卞相璧)
아호 : 화재(和齋)
제목 : 계자도(鷄子圖)
언제 : 18세기 중엽
재료 : 족자 비단에 수묵담채
규격 : 94.4 x 44.3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변상벽은 자를 완보(完甫). 호를 화재(和齋)라 했으며. 초상화를 잘 그려. 국수(國手) 라는
칭호를 받았고. 벼슬이 현감(縣監)에 이르렀던 화원화가(畵員畵家)이다. 생몰년은 알수 없으나.
그가 그린 윤급(尹汲)의 노년기 초상화로 미루어. 그의 활약연대를 대략 영조 연간으로
짐작할수 있다.
그는 특히 고양이를 잘 그려 변고양(卞古羊)이라는 별칭으로 까지 불렸으며, 고양이 라고 하면
그를 지칭할 정도로 이 분야에서 독보적 위치를 누려왔다.
이작품의 표현은 동심적이라기 보다 매우 정밀하게 어미 닭과 병아리의 생태사실(生態寫實)에
힘을 기울였으며. 나무와 꽃 그리고 날아드는 나비와 벌들을 그린 세밀한 필선(筆線)과는
대조적으로. 배경의 괴석묘사(怪石描寫)가 대범한 수묵 처리를 보인다.

 
 

작가 : 김두량(金斗樑)
아호 : 남리(南里)또는 운천(芸泉)
제목 : 견도(犬圖)
언제 : 18세기 중엽
재료 : 화첩 종이에 수묵
규격 : 94.4 x 44.3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김두량은 영조(英祖)대에 활약한 화가로. 자는 도경(道卿).
호는 남리(南里)또는 운천(芸泉)이라 했다.
그는 산수화가로 일가를 이루고. 인물화에도 능했으나. 때로는 고양이를 소재로 한
뛰어난 작품을 남기고 있다.
그 중에서도 이 개 그림은. 그 화흥(畵興)이나 묘사의 기교등 그의 독특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가려운 곳을 뒷다리로 긁는 개의 생태가, 자못 익살스럽게 묘사되어 있으며.
이와 같은 사실수법의 묘미는. 그의 새로운 묘사기법과 더불어.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표현이었다.
배경인 초목의 묘사와 대조적인. 동물의 입체적 표현기교는 아마도 서구적 묘사기법. 이르테면
당시 중국 북경(北京)을 통해 들어온. 서양화 기법을 이런 주제 속에서 시도해 본 자취라고도
볼수 있다.

 
 

작가 : 김두량(金斗樑)
아호 : 남리(南里)또는 운천(芸泉)
제목 : 월야산수도(月夜山水圖)
언제 : 18세기 중엽
재료 : 족자 종이에 수묵담채
규격 : 81.9 x 49.2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김두량은 도화서(圖畵署) 화원으로 별제(別提) 벼슬까지 지냈는데.
그의 호 남리’ 는 그를 신임한 임금의 사호(?號) 였다고 한다.
그처럼 화원으로서 별제에 발탁된 점이나. 임금의 사호가 있었다는 사실로 보아.
대단히 두각을 드러냈던 화가임이 분명하다.
이 그림은 낙관에 보이는 갑자(甲子) 란 간기(干紀)로 미루어. 49세 때의 작품임을 알수 있다.
안개 낀 늦가을의 으스름 달빛 풍경을 독특한 묵훈법(墨暈法)으로 실감있게 표현하여.
그 쓸쓸한 정취가 가슴에 스미는 듯하다. 이처럼 자율화된 기법으로 한국 자연의
스산스러운 정취를. 실감있게 나타내 준 예는 매우 드물다.
그의 다른 작품으로는. 전가낙사도(田家樂事圖) 등 가작(佳作)들이 약간 전해질 뿐이며.
그는 화가로서의 계보나 교우관계를 자세히 밝힐 자료가 없다.

 
 

작가 : 심사정(沈師正)
아호 : 현재(玄齋)
제목 : 하경산수(夏景山水)
언제 : 18세기 중엽
재료 : 화첩 종이에 담채
규격 : 33.5 x 41.7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심사정의 자는 이숙(?叔). 호는 현재(玄齋)이며. 정선 과 더불어 18세기의 대표적인 문인화가이다.
부사(府使)를 지낸 그의 아버지 심정주(沈廷胄)도 그림을 잘 하였다. 그는 젊어서 정선에게서
그림을 배웠으나. 때마침 유행하기 시작한 남종(南宗)산수화에 심취하여. 스승인 정선의
진경(眞景)산수화 보다는. 전통적 중국화제(畵題)의 문인화를 즐겨 그렸다.
이그림은 여름 장마철. 산간의 비오는 경치를 묘사 하였는데. 화면 중앙에 흐르는 시냇물 위로,
돌다리가 가로놓여 있고. 오른쪽 근경에 담묵의 버들과. 초묵(焦墨)으로 둥치와 가지를 치고.
총총히 잎새를 묘사한 몇 그루 나무가 서 있는데. 우장을 쓴 두 행인이 보인다.
돌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가면 가파른 벼랑이 있고. 물을 따라 길이나 있는데. 중경 숲속에
초가 몇 채가 지붕만 보일 뿐이다.
그뒤로 산등성이가 밋밋하게 여름 안개 위로 전개되고. 멀리 담청색의 원산이 보인다.
그 위 왼편 공간에. 천고절작(千古絶作) 이라 끝을 맺는 평시(評詩) 한 귀절이 초서채로 써 있어.
달아빠진 붓과 지두(指頭)로 꼭꼭 찍은 듯 한 전체 분위기와 잘 어울리고 있다.

 
 

작가 : 심사정(沈師正)
아호 : 현재(玄齋)
제목 : 강상야박도(江上夜泊圖)
언제 : 18세기 중엽
재료 : 족자 비단에 수묵
규격 : 153.8 x 60.8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심사정의 작품 중에서는 특히 눈을 끌게 하는 복고풍의 작품이다.
명대(明代)의 원체(院體)산수화로 느껴지는 북종화(北宗畵)적인 여운을 원숙한 기법으로 처리하여.
거의 조선시대의 것으로 볼수 없을 정도로. 아주 자연스럽게 중뮌岵?감각을 갖추고 있다.
원경 또한 미불(米?)이나 동기창(董其昌)을 연상시키는 격조를 띠고 있고. 화면의 색감도
가라앉은 어두운 색으로 일관하여. 충만감이 있는 그림의 밀도를 느끼게 한다.
번지듯 스며 있는 담묵과 부드럽고 습윤한 농묵이 차분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이 그림은
1747년의 작품으로 41세 때의 그림이다.

 
 

작가 : 심사정(沈師正)
아호 : 현재(玄齋)
제목 : 명경대(明鏡臺)
언제 : 18세기 중엽
재료 : 화첩 종이에 담채
규격 : 27.7 x 18.8 cm
소장 : 간송미술관

해설 :
내금강(內金剛)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장안사(長安寺)를 지나. 기암이 연이은
백천동 (百川洞)계곡을 따라 오르면. 문득 방주형(方柱形) 거암이 눈앞에 우뚝솟아나고.
그 밑으로는 만폭동(萬瀑洞) 물줄기가 흘러 오다가. 깊이 모를 큰못을 이루어 놓는다.
여울져 흐르던 물이 갑자기 흐름을 멈춘 듯. 명경지수(明鏡止水)가 되어 주위의
제봉(諸峯)을 머금고. 고요히 누워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방주형 암봉을 명경대라 하고. 못은 황천강(黃泉江). 못가의 소대(小臺)는
업경대(業鏡臺)라 하였다. 모두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명부(冥府)세계를 상징한 이름들이다.
이곳을 마치 사후(死後)의 저세상으로 생각했던 듯. 얼마나 절승(絶勝)이었기에 문득
현세감(現世感)을 잃고. 저세상으로 착각할 정도 이었을까.
때문에 이곳은 조선시대 후기를 풍미한 진경산수화의 소재로.
뭇 화가들의 손에 자주 요리되곤 하였다.
이그림은 현재 (玄齋) 심사정이 그린. 일련의 금강산도 중의 한 폭이다.
심사정은 정선과 달리 남종 화풍을 조선화한, 조선남종화의 종장(宗匠)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진경산수화를 그린 것은 얼핏 이례적으로 보일수도 있지만. 그가 50대 이후
남종화풍을 조선화시키는 과정에서. 조선전통화풍의 맥이 정선의 진경산수에 닿고 있음을
간파하고. 이후 정선의 화법을 즐겨 구사 하였던 것을 생각하면. 심사정의 진경산수는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정선의 금강산도에 비하면 골기(骨氣)가 다소 상실되었지만. 절대준(折帶?)을 사용하여
거암과 주위봉우리들을 단순화시키고. 거암을 나타내기 위해 옅게 바른 천강색(淺絳色)을.
먹빛 짙은 태점(笞點)과 산뜻하게 조화시키는 기량은. 남종화법을 자유롭게 구사한
노대가(老大家)의 원숙한 솜씨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다. 업경대 위에는 갓 쓴 선비 셋이 앉아,
절경에 넋을 빼앗기고 있는데. 그 곁에는 삭발한 승려 하나가 맨머리를 드러내 놓고 서서.
열심히 무엇을 설명하고 있는 듯 하다. 아마 주변 경관을 자세히 지적하며 안내하고 있는 모양이다.
대(臺) 아래에는 그들 세 선비를 태우고 왔을. 남여(藍輿) 두 틀이 보이고. 그 곁에 고깔쓴
군상(群像) 다섯이 보이니. 아마 대 위의 안내승과 합쳐 6인의 승려가. 이 세력있는 선비 셋을
남여에 태우고. 금강산을 구경시키고 있는 모양이다.
당시 여덟 천민(賤民)의 하나로 박해받던 승려들의 진상을. 눈으로 확인할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작가 : 심사정(沈師正)
아호 : 현재(玄齋)
제목 : 선유도(船遊圖)
언제 : 18세기 중엽
재료 : 종이에 담채
규격 : 27 x 39.5 cm
소장 : 한국개인

해설 :
심사정이 초년에 그림을 배운 정선(鄭敾)은 동국진경산수(東國眞景山水) 라는.
우리나라 산천을 실제로 보고 그리는 실경화법(實景畵法)을 다져나가고 있었는데.
심사정은 어느 정도 화가로 성장하자. 중국에서 들어온 전통적화법을 더 좋아하여
그 기법을 익히고. 명나라 오파(吳派)의 대가인 심주(沈周)의 화풍을 많이 따랐다.
심사정의 산수화는 전체적으로 남종화 법을 따르고 있지만, 보수적. 고전적 이어서
창조적 개성이 모자란다는 평을 들었다.
그러나 만년에는 오히려 대담하고 실험적인 지두화(指頭畵)와 몽당붓 같은 것을 써서.
소품들에서 상당한 수준을 보였다. 그리고 거칠거나 작고 섬세한 필법을 겸하여.
스승인 정선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었다. 이 그림은 화제(畵題)가 알려지지 않은 만년작인데
구도. 묵법. 필법에서 완숙한 경지를 보여준다.
구도를 살펴보면 파도가 심한 바다 한가운데에. 약간 오른쪽 아래로 치우치게 일엽편주를 띄어놓고.
그림 상단부를 가로질러 안개를 걸쳤고. 그 위에 파도같기도 하고 구름같기도 한 것을 그려 넣어.
구도에 변화를 주고 있다. 다음에 매우 꼬불꼬불한 묵선으로 파도의 움직임을 표현하고 있으며.
거의 일적선으로 약간 비스듬이 그려진 배는. 이상할 만큼 정지되어 있어서 전체적으로 볼 때.
정(靜) 과 동(動)의 대비를 보여 준다. 배 한가운데에는 대발로 만든 선실(船室)에 휘장을 걷어올린
창문이 있고 선미 가까이에는 탁자 위에 문적(文籍)과 화병. 향로. 술잔등이 보이며. 용트림을 하며
구부러진 고목위에 학 한마리가 막 외발로 몸의 평형을 유지하면서 부리로 무엇을 쪼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출렁이는 파도의 흐름은 해룡(海龍)이 신선들의 배를 호송하는 듯하고.
하늘에는 운룡(雲龍)이 인도하는 것 같다. 학과 선인. 바다등의 고사(故事)나 신선 이야기를
회화로 엮은 것으로 생각된다.

 
 

작가 : 강희언(康熙彦)
아호 : 담졸(淡拙)
제목 : 인왕산(仁王山)
언제 : 18세기 중엽
재료 : 종이에 수묵담채
규격 : 24.6 x 42.6 cm
소장 : 한국개인

해설 :
강희언 의 자는 경운(景運). 호는 담졸(淡拙) 로.
운과(雲科)에 급제하여 감목관(監牧官)의 벼슬을 지냈다.
동국문헌(東國文獻) 화가편(畵家篇)에 의하면. 그는 특히 풍속화와 호렵도(胡獵圖) 등을
잘 그렸다 한다.
인왕산도는 오늘날 새로운 안목으로 평가해서 미처 몰랐던 강희언의 두드러진 자질을 돋보여 주는.
뛰어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작품은 당시의 화단에서는 좀처럼 실천하기 어려웠던.
정확한 원근법과 거의 완전한 투시가 이루어진 서구적 기법의 사생풍경을 연상케 해줄 뿐더러.
산수 묘사의 전통적인 준법(?法)을 초월해서 특이한 묵훈(墨暈)의 농담과 작은 점묘(點描)로
이루어진 입체감의 표현이. 매우 참신한 감각을 드러내고 있다.
더구나 인왕산의 산용(山容) 전체를 동북방에서 바라볼수 있는. 도화동(桃花洞) 에서 측면으로
묘사한 화의(畵意)도 새롭고. 또 능선을 타고 꿈틀거리는 서울 성곽을. 분명하게 부각시킨
포치(布置)도 매우 주목할만하다.
이러한 한국 사경(寫景)산수의 좋은 전통은. 정선이 이미 이루어 놓은 기틀이 있었으나.
강희언의 이 작품은 그러한 기틀 위에서 한 단계 더 근대화 되었다는 느낌이 깊다.
 

작가 : 강세황(姜世晃)
아호 : 표암(豹菴)
제목 : 영통동구(靈通洞口)
언제 : 18세기 중엽
재료 : 화첩 종이에 담채
규격 : 32.8 x 54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강세황은 사림(士林) 출신의 서화가로서. 자는 광지(光之) 호는 표암(豹菴)이다.
그가 개성(開城) 일대의 명승을 여행하면서. 담은 송도기행첩(松島紀行帖)은
17면으로 꾸며진 하경(夏景)들로. 그중 하나인 이 영통동구는. 바윗더미의 입체 표면에.
대담하게 준법(?法)에서 벗어나서. 채색의 농담(濃淡)으로 훈염(薰染) 함으로서.
그 입체감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파격적인 입체묘사는. 당시의 한양 화단에서는
획기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 중에는 미불(米?).
예운림(?雲林)을 비롯한 중국 송(宋). 원(元). 명대(明代)의. 명가(名家)들 작품을
방작(倣作)한 것이 많고. 특히 명대 절파(浙派). 오파계(吳派系)의 각체(各體) 그림을 익혔으며.
당시 한양 화단에서 자리잡히기 시작했던. 북종화(北宗畵)와 절충된 남종화(南宗畵)의 정착과.
그 국풍화(國風化)에 보이지 않는 키를 잡았던 작가였다.

 
 

작가 : 강세황(姜世晃)
아호 : 표암(豹菴)
제목 : 백석담(白石潭)
언제 : 18세기 중엽
재료 : 화첩 종이에 담채
규격 : 32.8 x 54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앞의 영통동구(靈通洞口) 와 같이 松島紀行帖에 실려 있는데. 백석담 은 17면 중
세 번째 게재되어 있다.
비 갠 뒤의 투명해진 공기를 통해서 바라다본. 백석담의 순간적인 아름다움을 화면에 옮겼음을.
제발(題跋)에 의해서 확인된다.
송도기행첩은 강세황의 실경산수도 중에서 대표작에 속하는 화첩인데. 이화첩 가운데서도
백석담 은 영통동구(靈通洞口). 청석담(淸石潭)과 더불어 백미로 손꼽히는 수작(秀作)이다.
정선(鄭敾)과 같은 넓은 시야의 대경(大景)을 화면에 압축하는 점에선 뒤지나.
시야가 좁은 대신 대상을 집중적으로 나타낸. 화면구상이나 과감한 생략은. 오히려
그보다 진일보한 점도 없지 않다.
강세황의 실경 산수는 정선의 영향이 역력함을 부인할수 없으나. 그 나름대로
분명한 개성을 갖추고 잇다. 수묵 위주로 원근에 따라 농담의 구별이 분명한 묵선.
그 위에 담록과 담청색이 가채되어 밝고 담백한 화면. 나타내고자 하는 목표에 있어
중요부분의 과감한 선택과 생략의 겸비. 산세나 바위 처리에 있어 선염(선염)에 의한
색의 농도차가 보여주는 입체감 등을 특징으로 열거 될 수 있다.

 
 

작가 : 강세황(姜世晃)
아호 : 표암(豹菴)
제목 : 연강제색도(烟江霽色圖)
언제 : 18세기 중엽
재료 : 족자 종이에 담채
규격 : 36 x 73.7 cm
소장 : 도오교 국립박물관

해설 :
화면 전체가 우선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의 넓은 강을 중심하여 대각선으로 분리되고.
전경 왼쪽에 강안(江岸)이 있어. 미법수림(米法樹林) 속에 기와집 누각이 보인다.
강 건너 오른편으로 좀 치우쳐. 여름비가 그친뒤 안개 자욱한 가운데. 발묵(潑墨)으로 묘사된
산봉우리들이 연이어 솟아오르고. 더멀리 원산의 푸른 봉우리와 산등성이가 아득하게 나타난다.
강 건너 안개짙은 숲속에. 담묵으로 처리한 어촌이 흐릿하니 모습을 드러내고.
그 앞에 짙은 먹으로 다리를 하나 걸쳤는데. 수면에 거꾸로 비친다. 널찍한 강심(江心) 에는
고깃배 하나. 애써 삿대질하는 어부가 강을 건넌다.
강 이쪽에 농묵으로 큼직한 미점(米點) 을 찍어 윤기나는 숲으로 가느다란 길이 나있어
누각으로 이어진다. 화면 왼쪽 위 공간에 표암(豹菴) 이라 쓰고.
그 아래 광지(光之) 라고 새긴 주문인(朱文印) 하나가. 고깃배와 대칭을 이루면서
그림에 산뜻한 생기를 북돋게 하고 있다.

 
 

작가 : 강세황(姜世晃)
아호 : 표암(豹菴)
제목 : 벽오청서도(碧梧淸署圖)
언제 : 18세기 중엽
재료 : 종이에 수묵담채
규격 : 30.1 x 35.8 cm
소장 : 한국개인

해설 :
강세황의 작품에는 중국 명가(名家) 들의 작품을 모방한 것이 많고.
그는 특히 명대의 절파(浙派). 오파계(吳派系) 의 화법을 몸에 익혀.
당시 한양의 화단에 대두하기 시작한 북종화(北宗畵) 와 절충된. 남종화(南宗畵)의 정착이나
그 국풍화(國風化)에 보이지 않는 기수가 된 화가이다.
강세황은 숙종 때에 예조판서를 지냈던 가현(珂?)의 아들로 61세에 처음으로 관직에 나와
영릉참봉(英陵參奉)을 거쳐 한성판윤(漢城判尹) 등의 중요 직책을 지내는 동안.
예술을 통해서 정조(正祖)의 각별한 지우(知遇)로 지내기도 했다.
이 벽오청서도 는 강세황의 많은 중국적 모방작품 가운데 특히 눈에 띄는 작품이다.
심석전(沈石田)의 그림을 모방하여. 오히려 그 이상의 원숙함과 청정한 담채의 효과를
올리고 있는 것은. 일반적으로 한국 회화에 공통된 색감의 세계이기도 하다.

 
 

작가 : 이인상(李麟祥)
아호 : 능호관(凌壺觀) 또는 보산자(寶山子)
제목 : 설송도(雪松圖)
언제 : 18세기 중엽
재료 : 족자 종이에 수묵
규격 : 117.4 x 52.7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이인상의 자는 원령(元靈). 호는 능호관(凌壺觀) 또는 보산자(寶山子)로
인조(仁祖)때 영의정을 지낸 이경여(李敬輿) 의 현손 이다.
박규수(朴珪壽)는 이인상의 화첩에 기술한 제화(題畵) 속에서. “능호관은 절개있는 인품과
격조 높은 풍류인으로서 일세(一世)에 뛰어난 선비이다.
글과 그림을 아울러 좋아하면서, 여기(餘技)로 정도를 지나치지 않고 항상 산수와
천석(泉石)을 사랑하고. 세속을 멀리하여 왔다” 고 쓰고 있다.
진사 이면서도 겨우 현감으로 관직을 버린 것도 그러한 인품에 인한 것이다.
이 설송도에 표현된 맑고 투명한 분위기도. 그러한 기개의 표현이라 말할수 있을 것이다.
담담한 필선(筆線)으로 쭉쭉 뻗은 소나무 한 그루를 화면의 중앙에. 그리고 그 뒤로
가지가 꼬불꼬불한 또 한 그루의 노송을 교차시킨 배치법은. 그가 즐겨 사용했던 수법이었다.
또 담담한 묵색(墨色)을 다양하게 구사하여 청수(淸秀)한 맛을 더하는 필법도.
다른 사람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의 특기였다. 이인상은 당대의 명문 출신이지만
그의 증조부가 서출(庶出)이었기 때문에 그는 신분적으로 많은 제약을 받았다.
그는 조선시대의 선비화가중 가장 개성이 풍부한 기골(氣骨)이 있는 화가로서
서도나 시문에도 뛰어났지만 그의 그림 수업의 계보나 사승(師承)관계는 확실치 않다.

 
 

작가 : 이인상(李麟祥)
아호 : 능호관(凌壺觀) 또는 보산자(寶山子)
제목 : 송하관폭도(松下觀瀑圖)
언제 : 18세기 중엽
재료 : 족자 종이에 수묵담채
규격 : 23.8 x 63.2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이인상 은 영조(英祖) 때 현감 벼슬을 거치고. 평생을 산수와 천석(泉石)을 벗하며.
속진(俗塵) 을 멀리했던 격조 높은 풍류인으로. 빼어난 화업(畵業)을 남긴 여기(餘技) 작가이다.
중앙 암반에 뿌리를 내리고 용소를 향해 구부러진 노송 한 그루와. 그 곁에 단정히 앉아
시상(詩想)에 잠긴 인물 구도는. 그의 산수화에 자주 보이는 포치법(布置法)의 특징이다.
주제는 노송과 동떨어진 바위 위에 조용히 앉아 있는. 선비의 유연한 모습으로 소품이면서도
 비교적 밀도 있고 짜임새도 있다.
바위 벼랑의 색깔은 회청(灰靑)에 가까운데. 폭포수 물보라의 흰색과. 노송의 연한 녹색이
묘한 조화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병약하면서도 시. 서. 화 에 두루 뛰어났었는데.
그의 표현기법은 비교적 여윈듯 싶은 가는 선휙을 즐겨 썼고. 설채도 매우 담담해서
그의 맑은 문인기질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특유의 스타일이라고 할 수있다.

 
 

작가 : 이인상(李麟祥)
아호 : 능호관(凌壺觀) 또는 보산자(寶山子)
제목 : 선면송석도(扇面松石圖)
언제 : 18세기 중엽
재료 : 족자 종이에 수묵담채
규격 : 25 x 47.7 cm
소장 : 한국개인

해설 :
이인상 은 이윤영(李允榮), 송문흠(宋文欽), 오찬(吳瓚), 김무택(金茂澤) 등과 절친하게 지내면서
벗들과 교유하는 청유도(淸遊圖)를 즐겨 그렸고. 40세 이후에는 은일자(隱逸者)의 고고한
뜻을 그리는. 설송도(雪松圖)나 모루도(茅樓圖)를 주 소재로 했으며. 필법은 담묵과 갈필을
많이 사용하는. 매우 담박하면서 차가운 분위기를 보여주었다.
이 송석도 는 기암에 뿌리를 둔 노송의 힘찬 생명력과 기개를 살린 작품으로. 꼿꼿한 필선과
선결한 담채가 마치 그의 해맑은 정신세계를 은유해주는 듯한 무기에 가득차 있다.
반은 떨어져나간 화제(畵題) 중간쯤에는 윤지지의(胤之之意) 라는 구절이 보이는데.
이는 胤之의뜻 을 말하는 것으로 이윤영이 김무택을 위해 그려 주었던.
청수고사도(淸修稿舍圖) 와 같은 장소를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그의 도서낙관(圖書落款)은 없고 단지 자손영보용(子孫永寶用) 이라는 소장인만 찍혀 있다.

 
 

작가 : 김응환(金應煥)
아호 : 복헌(復軒) 외에 담졸당(擔拙堂)
제목 : 강안청적도(江岸聽笛圖)
언제 : 18세기 중엽
재료 : 화첩 종이에 수묵담채
규격 : 20.7 x 37.3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김응환은 영.정조대(英.正祖代)에 활동이 두드러진 화원중의 한 사람으로,
벼슬은 별제(別提)를 역임했다.
그의 자는 영수 이고. 호는 복헌(復軒) 외에 담졸당(擔拙堂)이 있다.
그의 가문에서는 많은 화원들이 배출되었다. 김득신(金得臣). 김석신(金碩臣). 김양신(金良臣)의
세 조카들을 위시해 장한종(張漢宗), 이명기(李命基)는 사위이고 종손(宗孫) 김건종(金建鍾)과
김하종(金夏宗)도 화원으로 이름을 날렸다.
김응환은 불과 3년 연하인 김홍도(金弘道)으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
31세 때 김홍도 에게 그려준 금강산도(金剛山圖)가 유존(遺存)되고 있으며.
정조 12년 봄에 왕명으로 내외금강산을 탐승하여 화폭에 옮겼는데 이 당시 김홍도도 동행했다.
현존하는 김응환의 작품은 전칭을 포함하여 20여점 알려져 있는데 한폭의 운룡(雲龍)을 제외하곤
모두 산수화들이다.
또한 그의 그림은 일본에 있는 상산승람도(江山勝覽圖)를 제외하곤 50cm 이내의 편화(片畵)들이다.
대체로 실경산수와 더불어 남종화풍의 산수를 그렸음을 알수 있다. 이그림은 일찍이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 게재되어 김응환의 그림중에서 가장 먼저 소개되었던 편화이다.
종앙에 접혔던 자국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화첩에서 떨어져 나온 것으로 보여진다.
마일각(馬一角)의 변각 구도로 오른쪽에 무게를 둔 쌍구(雙鉤)의 노송과 그 아래서 동자를 대동한
인물이 나귀에서 내려 쉬며 강 저편을 응시하고 있다.
시선이 머무는 곳인 왼쪽상단에는 담묵의 갈필로 그린 성근 갈대숲과 돛만 보이는 몇척의 배가 있다. 갈대숲 사이의 배 위에는 피리를 부는 인물이 보인다. 노송과 그 아래 인물의 현격한 크기 차이는
화면의 깊이와 거리감을 부여해 준다.
수묵 위주의 명확한 선묘(線描) 와 두드러지지 않는 담청의 수면은 화면에 신선감을 준다.
그림 내용이 전해주는 시적(詩的)인 분위기는 이 그림의 격조를 고조 시킨다.
왼쪽 하단에 應. 煥의 백문방인(白文方印)이 있다.

 
 

작가 : 김응환(金應煥)
아호 : 복헌(復軒) 외에 담졸당(擔拙堂)
제목 : 헐성루(歇城樓)
언제 : 18세기 중엽
재료 : 화첩 비단에 담채
규격 : 32 x 42.8 cm
소장 : 한국개인

해설 :
헐성루는 김응환이 타계하기 1년 전인 1788년 정조의 명에 따라 그린 것으로 여겨지는
금강산첩(金剛山帖)에 속해 있다. 이때 동행한 김홍도(金弘道)는 금강산화첩(金剛山畵帖)을 남겼다.
또항 강세황(姜世晃)도 금강산에 합류했다. 31세때 김홍도에게 그려준 금강산도(金剛山圖)와
비교할 때 비록 15년의 시차를 인정해도 도저히 동일인의 필치로 보기 어려운 현저한 변모가
간취된다. 헐성루는 화면을 상하로 양분하여. 상단에 원경의 골산을 정선화풍으로 그리되.
호분(胡粉)을 입혔고. 하단에는 중앙에 누(樓)를 포치시키고. 그 주변의 경관을 나타냈다.
중경에 나타난 기석(奇石)의 암봉에선. 선염(渲染)에 의한 입체감이 두드러 진다.
실경임에도 불구하고 인물들은. 중국풍의 화본식(畵本式)으로 그렸으며. 이 인물과 건물의 비례도
어색함이 보여진다.
정선의 여맥(餘脈)이 간취되며 강세황의 실경산수와의 연관도 보이고 무엇보다도 현존하는 宗孫
金夏宗의 金剛山畵帖과 비교할 때 가전(家傳) 화풍으로서 또 다른 짐작을 가능케 한다
.

 
 

작가 : 이인문(李寅文)
아호 : 유춘(有春).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
제목 :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 부분
언제 : 18세기 중엽
재료 : 두루마리 비단에 수묵담채
규격 : 44.1 x 856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이인문은 당시 조선 화단(畵壇)의 총아로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와 함께 쌍벽을 이루었던
화가였다.
강산무진도는 그의 대표작으로, 사계절의 대자연의 경관을 그린. 긴 두루마리 이다.
강산만리의 변화무쌍한 풍경이 세화(細畵)로서 끈기있게 그려졌으며.
수산. 농경. 해운에 이르기까지 평화로운 민생(民生)을 감싼 유교적 산수관이 맥맥히 서려있다.
한국 그림으로는 드물게 보는 정력적인 대작이라 할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산수화가 이인문의
관록을 드러낸 작품이기도 하다. 이 두루마리는 원래 완당(阮堂) 김정희(金正喜)가
소장했던 것으로서 두루마리 머리에 “추사 김정희씨 노고지인(秋史 金正喜氏 老考之印)”
“추사(秋史)” 두루마리 말미에는 “김정희인(金正喜印)” “자손영보(子孫永寶)”
“초사진장(秋史珍藏)” 의 수장인이 찍혀있으며. “이인문욱도인인(李寅文郁道人印)” 이라 한
작자 도장이 찍혀있다.
이인문은 영(英). 정조(正祖) 양대에 걸쳐서 활약한 직업화가였으며. 명대 절파계(浙派系)류의
여운을 이은 작가로서 주로 산수화에 전념하면서 당시 한양 화단에 퍼지기 시작한
남종화풍(南宗畵風) 에도 마음을 쓴 작가였다. 이인문의 자는 문욱(文郁). 호는 유춘(有春)또는
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을 즐겨 썼다.




 
 

작가 : 이인문(李寅文)
아호 : 유춘(有春).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
제목 : 누각아집도(樓閣雅集圖)
언제 : 18세기 중엽
재료 : 족자 종이에 수묵담채
규격 : 86.3 x 57.7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이인문의 만년의 작품으로. 구도와 준법(?法) 등 모든 기법이 산수화의 대가다운 깊이를
보여 주고 있다.
그가 비록 화원(畵員) 출신이지만. 이미 문인화의 깊은 경지를 터득하고 있음을.
이 작품을 통해 알 수있다. 특히 가까운 경치의 암벽에서 원경으로 보이는 어렴풋한
송림에 이르기 까지 그 배경에 깃든 청아하게 흘러내리는 계곡물의 정취등은
그의 그림 속에서도 드물게 보는 현실적인 한국 산수의 청정함을 느끼게 한다.
단지. 누각에 모인 인물들의 복식이나 태도 등이 중국풍으로 느껴지는 점에
다소 위화감이 없는 것도 아니다. 화면 위쪽의 화제(畵題)에 의하면 이것은
1820년 경신년(庚辰年)의 작품으로 76세 때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작가 : 이인문(李寅文)
아호 : 유춘(有春).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
제목 : 송계한담(松溪閒談)
언제 : 18세기 말
재료 : 족자 종이에 담채
규격 : 37.3 x 77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이인문은 김홍도와 동갑내기 화원으로 산수에 뛰어났으며. 묵포도(墨葡萄)도 잘 그렸다.
그의 호인 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이 시사하는. 소나무와 맑은 내가 흐르는 정경을.
자주 그림의 소재로 삼았음을. 현존하는 작품을 통해서도 짐작할수 있다.
다만 당시 크게 유행한 실경산수에 대해선 외면한 듯. 이 소재의 그림은 드문 편이다.
수옥정(漱玉亭)과 같은 실경풍(實景風)의 그림에 한복을 입은 인물이 등장되기도 하나.
이 풍속적인 성격의 그림 역시 몇점 안 된다. 이런 점에서 김홍도와 비교되며 다양한
여러 소재를 택하지 않은 점에서 김홍도 명성에 가려 소흘히 됨을 피할수 없었다.
그러나 산수화에서 그아 이룩한 높은 경지는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음은 김정희(金正喜)
구장(舊藏)의 장대한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 및 71세 노필(老筆)로 그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8폭 산수병(山水屛)을 위시해 그 밖의 화적(畵跡)을 통해서 확인된다.
그에 대한 성가(聲價)를 분명히 해주는 평을 살피면 남공철(南公轍)은 이인문을 명(明)의
당인(唐寅)에 비견하고 있으며. 신위(申緯)는 김홍도와 더불어 선조대(先祖代) 화원 중의
묘수(妙手)로 제발(題跋)에 언급하고 있다.
이인문의 산수들은 특히 완숙한 경지에 도달한. 노년시기의 대작들을 통해서 그 진면목을
보게 된다. 박제가(朴齊家)의 화평(畵評) 중에 “ 갈필로 산을 그리고, 발묵으로 나무를 표현해,
명암과 향배(向背)의 묘제(妙?)를 얻었다” 는 구절은 그의 산수를 잘 대변하고 있다.
고송이 적절히 어우러진 숲에서 물소리를 들으며, 담소를 나누는 세인물이 등장된 송계한담은,
선면(扇面) 외에 소폭 편화(片畵)로서, 또는 대폭의 부분에도 자주 나타나는, 그가 즐겨 택한
소재이기도 하다. 적합한 화면구성과 세련된 필치와, 담록가채(淡綠加彩)의 밝은 화면에서
완벽에 이른 화풍임을 알수 있고. 그림 내용이 주는 유현한 분위기는. 이를 넘어 청아함을
불러일으킨다.
왼쪽 하단에 고송유수도인(古松流水道人) 의 관(館) 자가 지워진 관서(款署)는
마치 작품제목 같아 보이기도 한다.

 
 

작가 : 이인문(李寅文)
아호 : 유춘(有春).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
제목 : 도봉원장(道峰苑莊)
언제 : 18세기 말
재료 : 화첩 종이에 담채
규격 : 26.5 x 33 cm
소장 : 한국개인

해설 :
이 작품은 행유도(行遊圖)와 같은 화첩의 한 폭으로 四季山水畵帖 에서는 봄풍경으로 되어 있다.
원산의 표현으로 보아 만장봉(萬丈峯)과 삼각산(三角山)이 비껴보이는 도봉산 계곡 어디에 있는
원장(苑莊)아니면 서원(書院)을 배경으로 그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특히 왼쪽 산등성이에 있는 성문은 이런 현장감을 강조하는 일종의 에피소드 처리 라고 생각된다.
이 작품역시 이인문의 티없이 맑은 설채가 돋보이는 명풍으로. 원장의 한가로운 정경과.
초가 마을앞 소 모는 농부의 모습이 그 정취를 더해주고 있다. 왼쪽 냇물가로 구부러진
선묘(線描)들은 냇가의 버들을 표현한 것인데 이런 묘사법은 이인문의 원경을 그릴 때
즐겨 사용했던 것이다. 이인문의 작품들은 대부분 공간의 설정이 열려진 구도법 으로 전개되어.
화면상의 넓이와 깊이가 대단히 멀고 깊게 느껴지는데. 그것은 동시대의 대가이고 그의 벗인
김홍도(金弘道)의 생략을 통한. 집중구도법 과 좋은 대조를 이루는 그들의 개성인 것이다.
때문에 이인문의 작품은 보다 먼 거리에서 작품을 감상할 때 제 맛이 나며. 담묵과 농묵의
강한 대비와 울림은 그의 이런 조형적인 배려에서 나온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작가 : 이인문(李寅文)
아호 : 유춘(有春).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
제목 :
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
언제 : 18세기 말
재료 : 족자 종이에 수묵담채
규격 : 98 x 54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신위(申緯)의 경수당전고(警修堂全藁)에 실린 이인문의 제화(題畵) 속에 “영조(英祖)를 모시던
화사(畵師)중 뛰어난 사람은 고송유수관도인(古松遊水觀道人)과 단원(檀園)이었는데.
 덧없이 단원은 이미갔고 이인문 만 남았다” 라고 한 대목이 있다. 이인문과 김홍도는
같은해에 태어난 동갑으로 같은 무렵에 도화서(圖畵署) 화원이 되어 나란히 두각을 나타 냈는데
김홍도는 남종화풍(南宗畵風)을 절충해서 한국 사실풍경(寫實風景)에 독특한 자기체를 개척하고
국풍화(國風化)된 한국 산수화의 고유한 정취를 정착시켰을 뿐 아니라 서민사회의 생태나
그 서정을 주제로 한 풍속화의 선구자였던 데 반해,
이인문은 보다 충실히 대륙화풍(大陸畵風)을 익혀서 특히 산수화에 그 원숙한 역량을 발휘한
작가였다.
따라서 산수화는 김홍도에 비해 풍토적인 체취가 약할 수밖에 없었다.
하경산수도는 그의 산수화중 드물게 보는 대담한 대부벽준법(大斧劈?法)으로 화면을 압도하듯
호탕한 솜씨를 보여주는 가작(佳作)이다. 암봉 너머로 원산이 담채로 그려졌고
앞은 한그루의 나목(裸木)이 가로막으면서 공간의 깊이를 더해 준다.
 
 
 

작가 : 김홍도(金弘道)
아호 : 단원(檀園)
제목 : 군선도(群仙圖)
언제 : 18세기 말
재료 : 족자 종이에 담채
규격 : 53 x 28 cm
소장 : 호암미술관

해설 :
김홍도는 풍채와 태도가 아름답고 성미는 너그럽고 선선하여. 자질구레한 일에 구애되지 않아서
신선과 같은 인물” 이라고 조희룡(趙熙龍)이 편찬한 호산외기(壺山外記)의, 김홍도전(金弘道傳)에
언급되어 있다.
이와 같은 기술(記述)은. 그가 신선도를 즐겨 그린 것과 견줄 때. 재미있는 사실이 아닐수 없다.
그는 산수. 영모. 도석인물. 풍속에 이르기 까지. 다방면에 걸쳐 수작을 다수 남기고 있다.
만 31세인 1776년에 그린 군선도는. 대작이면서 대표적인 도석인물 병풍에 드는 그림이다.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를 살펴보면 그책에 게재키 위해 사진을 찍었던 1930년대까지만 해도
하부에 성근 필치로 그린 풀이 보이나 현재는 그 부분이 잘려나갔고 각 폭의 세로 모서리들도
조금씩 잘려 그림 폭 사이의 연결이 다소 어긋나 있다.
이 일연의 8폭 군선
는 별도의 배경없이. 크게 세 무더기로 나뉘는 신선들에 의해. 그들의 표정 및
자세만으로도 전혀 어색함이 없는 화면구성을 보여준다.
이 점은 소폭의 풍속화첩에서도 살필수 있다. 김홍도의 전래작들은 도석인물화에 있어서 병풍.
족자. 편화에 이르기까지 많은 유전작(遺傳作)을 살필 수 있는데. 이들도 풍속화에서처럼
배경을 함께 나타낸 것과 배경없이 신선만을 그린 두 가지로 구분된다.
배경이 있는 대폭으로는 6폭과 8폭으로 된 서원아집병(西園雅集屛)이 대표적이며.
또한 10폭 또는 8폭으로 된 고사(故事)를 소재로 한 고사인물화들이 있다.
또한 매폭마다 2 ~ 3명의 신선을 그려 전체가 한 화면으로서의 연결을 의도한 것은 아닐지라도
8폭의 연폭으로 그린 것들도 전래되고 있다. 군선도에 등장한 인물들은 선동을 포함해
19명에 이르며. 나귀. 일각우(一角牛). 다람쥐. 박쥐 등 동물도 보인다.
이 군선도는 속도감이 느껴지는. 대담한 오대당풍(吳帶當風) 의 묵선과. 가늘고 고른 선들을
혼용하고 있다. 동적인 의습선(衣褶線)은 바람에 나부끼는 듯하고. 이와함께 신선들의 자세 또한,
정지상태가 아닌 동적이어서. 화면엔 생동감이 넘친다. 감필의 묘가 발휘된 선묘 위주이나.
부분적으로 보이는 청홍담채의 설채는. 화면에 유현한 분위기를 주며. 특히 얼굴의 설채는
분명히 명암이 고려된 가채(加彩)로. 들어간 부분과 튀어난 부분의 구별이 분명히 나타나 있어
주목된다.
구도와 필력에 있어 소장시절에 그가 도달한 틀잡힌 격조를 알려주는 군선도는 발군의 기량을
과시하는 걸작이다. 이 그림은 현재는 나눠서 족자로 꾸며져 있다.
왼쪽 하단에 병인춘사(丙寅春寫)의 간기(干紀)와 30대에 주로 사용한 호 사능(士能)의
관서(款署)가 있으며. 이어서 백문방인(白文方印) 김홍도인(金弘道印) 과 주문방인
사능(士能)이 세로로 나란히 있다.

 
 

작가 : 김홍도(金弘道)
아호 : 단원(檀園)
제목 : 선인송하취생(仙人松下吹笙)
언제 : 18세기 말
재료 : 족자 종이에 담채
규격 : 109 x 54.5 cm
소장 : 고려대학교 박물관

해설 :
김홍도 도석(道釋)인물은 전혀 배경을 그리지 않고 인물들만 크게 부각시켜.
그들의 표정 및 동작이나 자세만으로. 화면구성을 꾀한 것과. 배경 속에 점경(點景)으로
인물을 담는 두 가지로 크게 나뉘어지는데, 대체로 전자가 앞선것으로 본다.
배경이 있는 경우도 서원아집병(西園雅集屛)과 같이 정교하고 섬세하여.
그야말로 화본풍(畵本風)으로 나타내는 경우와. 전혀 이런 분위기와 는 거리가 먼
평범한 장면으로, 나타내는 경우가 있는데. 대체로 섬세한 쪽이 먼저 그린 것이 된다.
노송만을 화면 중앙에 수직으로 포치시킨, 선인송하취생은 장식성이 전혀 배제된 소탈함과.
번거롭지 않는 담담한 운치를 보여준다. 이와 같이 수직으로 소나무를 그린 예는,
김홍도 보다 한세대 앞선 18세기 전반의. 대표적인 문인화가로 손꼽히는.
이인상(李麟祥)에게서 찾아볼수 있어, 공통점이 보이는 석법(石法)과 더불어.
그의 영향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김홍도가 즐겨 그린 상하
뻗은 노송은 갈필선묘(渴筆線描)로 때로는 노송의 위아래가
화면 밖으로 벗어나 중간만 나타내기도 한다.
노송의 굵은 수직 줄기로 인해 나타난 화면공간엔 폭포를 곁들이거나 학이나 사슴이 신선대신
등장되기도 한다. 소나무와 관계있는 신선으로는 소를 탄 노자(老子)의 배경에 노송이
나타나기도 하며. 노송에 기댄 적송자(赤松子) 등을 열거할 수 있다.
소나무와는 별개로 생황(笙簧)을 잘 부는 신선으로 옥자진(玉磁晉)이 있다.
선인송하취생은 신선보다 오히려 노송이 큰 비중을 화면을 점하고 있는데.
솔잎은 성글고 늙은 줄기의 거친 표현은, 신선과 함께 상징적 의미를 부여한 듯도 하다.
차분한 자세로 앉아 생황을 부는 신선은, 사뭇 유연(悠然)한 정취이며. 의습선은 가늘고
고른 필선으로. 율동감 있는 송린(松鱗)과 는 대조적이다. 오른쪽 상단에 회화적인
아름다움까지 보이는 제발(題跋)은 “생황의 외형은 봉황이 날개짓 한는 것 같고.
불 때 들리는 소리는 용의 울음소리보다 처절하다”. 는 내용이다.

 
 

작가 : 김홍도(金弘道)
아호 : 단원(檀園)
제목 : 마상청앵(馬上聽鶯)
언제 : 18세기 말
재료 : 족자 종이에 담채
규격 : 117.4 x 52 cm
소장 : 간송미술관

해설 :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는 겸재(謙齋) 정선(鄭敾)과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의
동국진경풍속화(東國眞景風俗畵)를 계승하여 이를 기교적으로 변모시켰던 화원화가이다.
풍채가 아름답고 성격이 호방 활달하여. 당시 사람들이 신선중의 사람으로 보았다는.
이야기가 있을정도로 수려한 미남자 였던 보양인데. 그래서인지 이 그림속의 말 탄 양반이나.
구종하인이 모두 늘씬한 몸매로 그려져 있다. 심지어 앞발을 모아세우고 다소곳이 서 있는 적황색 말과. 노변의 버드나무까지도 호리호리한 미태(美態)를 발산하고 있다.
그림속의 인물이 항용 그린 사람을 닮게 마련인 것을 생각하면. 말 탄 사람은
바로 김홍도 자신이라고 하여도 좋을 듯 하다.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나른한 늦은 봄날. 복건에 갓 쓰고 도포는 술띠를 늘여 차려입은.
멋장이 양반이 한 손에 쥘부채 들고. 한손에는 고삐를 잡은채. 길가 버드나무 아래 위에서
화답하는. 노란 봄 꾀꼬리 한 쌍의 흐드러진 교성에. 가는길도 잊은 듯 넋을 잃고 멈춰 서 있다.
모춘여정(暮春旅情)의 시취(詩趣)가 뿌듯이 느껴지는 분위기 이다. 공백을 한껏 강조한
시정(詩情) 넘치는 일각(一角) 구도뿐만 아니라. 적황색 말과 푸릇푸릇한 연초록의 봄버들잎.
등황빛 꾀꼬리의 색조는, 노변과 버드나무 둥치에 찍어낸 청묵빛과, 묘하게 대조를 이루며
어우러져서, 춘정을 한층 자극하고 있다.

 
 

작가 : 김홍도(金弘道)
아호 : 단원(檀園)
제목 : 무이귀도(武夷歸圖)
언제 : 18세기 말
재료 : 족자 종이에 담채
규격 : 112.5 x 52.6 cm
소장 : 간송미술관

해설 :
무이산(武夷山)은 지금 대만의 대안(對岸)에 해당하는. 복건성건녕부(福建省建寧府)에 있는
길이 120리의 명산이다.
36봉과 37암 그리고 그 사이를 흘러내리는 건계(建溪)가 어우러지며, 선경을 빚어내어
한무제(漢武帝) 때부터. 무이군(武夷君) 이라는 신선이 살았다 하고.
가깝게는 松代의 신선 옥섬(玉蟾) 갈장경(葛長庚)이. 이 산속에 숨어 살았다고도 하는.
신비한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빼어난 경치로 인해, 수많은 탐승객이 이곳을 찾아 절경을 읊었으나, 중국 십철(十哲) 중의
한 사람이자. 주자(朱子) 성리학의 개조로서 추앙받는, 남송(南宋)의 주희(朱熹)가 노래한,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만큼 무이산구곡(武夷山九曲)을 유명하게 한 것은 없다.
이후 건계가 36봉 37암을 감아 흘러내리며 빚어낸 아홉 굽이는 화가들에 의해
즐겨 그려지게 되었는데 주자성리학을 국시로 하여 중국보다 더욱 성리학적 학문체계를
발전시켰던 조선에서도 주자의 무이구곡가는 중요한 소재로서 일찍부터 그려졌었다.
김홍도의 이 그림이 구곡중에서 어디를 그렸는지 언뜻 알기 어렵지만.
하엽준(荷葉?)으로 처리된 기암준봉과. 그 사이를 굽이쳐 내려오는 탕탕한 계류를 타고 치닫는
선유(船遊)는 실로 호방장쾌 하여. 무이구곡 전체가 이 한폭에 모두 담겨진 것 같으니.
굳이 어느 굽이의 경치인지를 따질 필요가 없을 듯 하다. 뜸집배 안에 상반신을 드러낸 채
절경을 승람하는 인물로 그려진. 주희의 단아한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사공들이 행색은 분명
조선 사람의 그것이어서, 당시 풍미하던 조선중화(中華)사상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작가 : 김홍도(金弘道)
아호 : 단원(檀園)
제목 : 산사귀승도(山寺歸僧圖)
언제 : 18세기 말
재료 : 종이에 담채
규격 : 28 x 32.7 cm
소장 : 한국개인

해설 :
화면 전부가 하나의 꼴짜기이고. 양쪽 절벽이 가파르게 서 있어 계곡이 깊다.
저 멀리 더 깊은 골에서 흘러오는 계곡물 위로, 어느절로 들어가는 극락교(極樂橋)가,
맛배기와지붕 구조와 둥근 창으로 되어 있다. 이 다리를 건너면 절의 암자가 하나 비스듬히
지붕과 한쪽 벽만 보이는데. 그림의 전경 왼쪽아래에 삭발승 하나가 지팡이를 짚고 벼랑길을 따라
귀사(歸寺)하고 있다. 바위 벼랑은 모두 초묵(焦墨)의 굵직하고 꺾이는,
붓자국으로 힘있게 내리긋고. 절벽의 암준(岩?)도 굵은 초묵으로 담묵 바탕에 내리긋거나
점을 찍었다. 왼쪽벼랑 즉 귀사하는 중의 머리 위로. 단풍난무가 바위에 뿌리를 박고 늘어져 있고.
또 이곳저곳에 시커먼 먹을 찍어. 곧은 침엽수 줄기를 묘사하고. 짧은 횡선으로 두툼하거나
성기게 가지와 잎을 나타냈다. 후면의 계곡은 아득하게 하늘과 접하여. 끝간 데를 모르겠고.
그 위 훤한 공간에다 싯귀를 썼지만. 그중 몇자만 알아보겠다. 또한 암자의 파풍(破風)과.
극락교의 토벽(土壁)에만 연한 주칠과 황토색이 보인다. 근래에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이.
단원의 낙관과 제시(題詩)가 벗겨진 것을 애석해 하는 평어(評語)와 낙관.
도서(圖書)가 왼편에 있다.

 
 

작가 : 김홍도(金弘道)
아호 : 단원(檀園)
제목 : 사인암도(舍人巖圖)
언제 : 18세기 말
재료 : 화첩 종이에 담채
규격 : 26.6 x 31.4 cm
소장 : 호암미술관

해설 :
단원의 병진년화첩(丙辰年畵帖) 속에 들어 있는 산수 10폭 중에는 실경산수가 몇폭 있는데.
그중에는 도담삼봉(島潭三峯). 사인암(舍人巖). 옥순봉(玉荀峯) 등 단양(丹陽)의 절경을
그린 것이 있다. 병진년(1796년) 무렵의 단원 산수는 실경에 입각했으면서도.
실경을 넘어서 회화적인 재구성으로 관념산수(觀念山水)의 경지를 전개하였기 때문에,
이 사인암도도 실경과는 사뭇 거리가 있지만, 우람하고 장대한 병풍 같은 절벽바위의
위용을 한껏 강조하고 있다. 암준(岩?)은 종횡으로 그은 선으로 바위 주름을 나타내고.
여기에 농담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전후와 요철을 드러내고 또한 농담이 있는
태미점(笞米點)으로 운치를 더하고 있다. 화면 아래쪽 강면의 돌무더기와 수목들.
그리고 사인암 꼭대기의 수목 등도. 단원 산수에 나오는 정형으로. 농담을 구사하여
전후를 나타내고 있으며. 소나무 표현역시 예리하고 농묵과 담묵으로 잔가지 와 잎을 나타내어.
단원소나무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 : 김홍도(金弘道)
아호 : 단원(檀園)
제목 : 한계조수도(閑溪釣?圖)
언제 : 18세기 말
재료 : 화첩 종이에 담채
규격 : 26.6 x 31.4 cm
소장 : 호암미술관

해설 :
화면 좌편 위쪽에 치우쳐 담묵으로 묘사된 절벽이. 가운데를 향해 원만한 곳선을 이루면서
물속에 바위들이 듬성듬성 보이는 냇가로 다가와 멈춘다. 시냇물은 전경에서 왼편으로
비스듬히 대각선을 이루는데. 이쪽 언덕 물가에 삿갓을 쓴 이와. 맨상투의 남자가 각각
낚싯대를 드리우고. 말을 주고 받는다. 절벽 중앙에는 발묵기법으로 암층의 일부가 크게
돌출하게 처리하면서. 역시 냇가로 흐르듯 내려오는데, 돌사이에 뿌리 박은 나무들이.
위아래로 기둥과 가지를 뻗으면서. 덩굴을 몇줄 드리우고 있다. 거의 밋밋한 절벽 자체에 비해.
아랫자락은 해삭준(解索?)이 밀집되면서 농도를 더해 표현되고. 나뭇잎 등 여기저기에는
황갈색 담채를 썼다. 화폭 오른쪽 위의 절벽과 대칭이 되는 공간은. 자욱한 안개속에
무한히 비어 있을 뿐이다.

 
 

작가 : 김홍도(金弘道)
아호 : 단원(檀園)
제목 : 매작도(梅鵲圖)
언제 : 18세기 말
재료 : 화첩 종이에 담채
규격 : 26.6 x 31.4 cm
소장 : 호암미술관

해설 :
단원의 병진년화첩(丙辰年畵帖)에 들어있는 화조 10폭중의 하나인 이 매작도는.
단원 특유의 수목에 본홍꽃을 곁들인. 그예가 드문 춘경의 화조화 이다. 밑둥이 굵고 굴절한
매화나무가. 왼쪽으로 가지가 많이 뻗었는데. 그 오른쪽으로는 대나무 몇그루가 비껴 있어서.
화면에 안정감을 주고 있다. 굴절 하였다가 위로 뻗은 매화 줄기는. 그 윗부분에 이르러
다시 오른쪽으로 크게 휘어가다가. 거기에서 잔가지가 오른쪽과 위로 뻗어서.
좌측상단으로는 넓은 여백을 설정하고 있다. 매화나무는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위로 향하는
비스듬한 포치이고. 주제인 까치는 매화나무 윗등걸에 세 마리가. 절묘한 포치로 앉아서
왼쪽 위의 시원한 공간을 바라보고 있는데. 한 마리가 벌써 그 공간을 날고 있어서.
균형이 잘잡혀 있는 명품이다. 전경의 배경은 은은한 담묵으로 부드럽게 처리한 반면에.
상단은 여백으로 처리하여. 무한한 공간감을 자아내는데.
거기에 매화꽃의 설채가 아주 선결하다.

 
 

작가 : 김홍도(金弘道)
아호 : 단원(檀園)
제목 : 기우도강도(騎牛渡江圖)
언제 : 18세기 말
재료 : 화첩 종이에 담채
규격 : 26.6 x 31.4 cm
소장 : 호암미술관

해설 :
화폭 전면이 가없는 잔잔한 강물인데. 가운데 큰 버드나무 한 그루가 물속에 잠기듯.
늙은 둥치를 드러내고, 오른편으로 누웠다가는 윗부분이 솟아오르고 있다. 이 나무 앞쪽에
세 그루의 작은 버드나무들이. 큰 버드나무 둥치와 거의 직각으로 교차하면서 자리를 잡는다.
그 뒤 물속을 한 목동이 소 등에 타고 왼편으로 유유히 강을 건너면서. 물에서 이제 막 날아가는
청둥오리 세 마리를 돌아다본다. 작은 버들과 큰 버드나무 둥치 사이 수면에. 아직 두 마리의
물오리가 헤엄치고. 전경에는 초록과 농묵으로. 아주 짧은 연속선과 점들을 찍어.
한 무더기의 수초(水草)를 잘 표현하고 있다. 나무들의 윤곽과 잔가지들 모두 농묵으로
거침없는 속필로 묘사해 가고. 버들잎들은 역시 황록으로 촘촘히 찍었다. 사람. 소. 물오리는
붓끝 세선을 썼으되, 비교적 빠르고도 간소한 선묘이고. 담청을 먹과 섞었거나 황갈색을 인물과
동물에 담채했다.

 
 

작가 : 김홍도(金弘道)
아호 : 단원(檀園)
제목 : 기우부신(騎牛負薪)
언제 : 18세기 말
재료 : 화첩 비단에 담채
규격 : 25.5 x 35.7 cm
소장 : 간송미술관

해설 :
檀園 金弘道는 玄齋 沈師正과 뜻을 같이하던 사대부 화가 표암(豹菴) 姜世晃의 문하에서
화도를 배워 화원으로 출사(出仕)한 화가였다.
강세황은 단원을 조선회화사상 제일의 인물로 높이 평가하고 있었는데,
특히 그의 풍속화 솜씨를 일컬어서는, “더욱 우리 동쪽나라 인물풍속을 잘하여,
선비가 공부하는 것이나, 장사치가 시장으로 치닫는 것. 규중의 여인. 농사꾼.
누에치는 여인 및 가옥의 규모와 산과 들 같으데 이르러서는. 물태형용(物態形容)을 곡진히 하여
어그러짐이 없었으니. 이는 곧 옛날에는 일찍이 없었던 것이다” 라고 극찬할 정도였다.
현존하는 그의 그림이 풍속화보다 산수화가 더 많지만. 풍속화가로서 더 유명한 것도
예나 다를바 없다 하겠다. 봄기운이 무르녹아 아지랑이가 원근 산야에 가득 피어오르면
하루해는 한없이 길고 심신은 나른하기만 하다. 그래도 그 긴긴 해를 양지쪽에서
졸고만 보낼수 없어 나무 한짐을 해 지고 풀 뜯기던 소 등에 올라타고 돌아오다 보니,
어살(漁?)을 매놓은 시냇가에는, 아직도 오리들이 떼지어 놀고있다.
우리 시골 어느 곳에서나 얼마 전까지 보아오던 흔한 장면이다. 나무를 소등에 싣지 않고
스스로 지고 타던 것이, 우리네 양심이었고 고통을 함께 하는 겸허한 자세였다.

 
 

작가 : 김홍도(金弘道)
아호 : 단원(檀園)
제목 : 낭구도(浪鷗圖)
언제 : 18세기 말
재료 : 화첩 종이에 수묵담채
규격 : 39.1 x 49.3 cm
소장 : 간송미술관

해설 :
김홍도는 파도에 매력을 느꼈던 모양으로, 파도를 주제로 한 비슷한 작품이 몇점 전해지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이 <낭구도>는 매우 뛰어난 작품으로. 왼편의 암초에 내려 앉아 있는
바닷새의 무리에. 흰 분채(粉彩)를 입혔을뿐.
어느 것이나 묵색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맑은 담청색으로 선염하고 있다.
단순한 주제이지만 단원(檀園) 김홍도의 대가로서의 관록을 유감없이 발휘한 작품이다.

 
 

작가 : 김홍도(金弘道)
아호 : 단원(檀園)
제목 : 만월대계회도(滿月臺契會圖)
언제 : 18세기 말
재료 : 족자 비단에 수묵담채
규격 : 147.2 x 63.3 cm
소장 : 한국개인

해설 :
개성 송악산(松岳山) 기슭에 있는 고려 왕궁 옛터인 만월대 에서 열린 들잔치를 기념한
일종의 기록화 이다, 발문(跋文)에 의하면. 장준택(張俊宅) 등 칠순 노인 64명이
그들 자손의 주선으로 평소의 숙원을 풀어 만월대에 모여서 큰 잔치를 벌이는 장면을.
당시의 명가(名家) 金弘道에게 그리게 한 작품이다. 화면은 송악산 서쪽만 배경으로 되어있고.
들잔치는 고려 왕궁의 정전(正殿)인 회경전(會慶殿) 폐허 위에서 화려하게 펼쳐지고 있다.
그림속에 등장한 인물은 250명이 넘고, 저마다 다른 자세와 동작이 치밀한 관찰을 거쳐,
그사실적인 묘사에 정력을 기울인 자취가 역력히 드러나 있다. 이 작품은 단원 특유의
일종의 부벽준법(斧劈?法)으 특색이 배경에 분명히 두드러져 있고.
설채도 매우 공을 들였으며. 군중이 입은 옷의 담소(淡素)한 색조까지 가려내서 그렸다.

 
 

작가 : 김홍도(金弘道)
아호 : 단원(檀園)
제목 : 무동(舞童)
언제 : 18세기 말
재료 : 화첩 종이에 수묵담채
규격 : 28 x 23.5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한국 산수화에 새로운 경지를 연 단원 김홍도는. 한편으로 서민과 시정(市井)의 세속적인 일들을 다룬 풍속화를 개척하였다.
단원풍속도첩(檀園風俗圖帖)의 하나인 이 그림은, 풍악의 가락이 숨가쁘게 높아감에 따라 춤추며 돌아가는 소년의 옷자락에서 사뭇 바람이 이는 듯하고. 피리를 부는 말뚝 벙거지의 사내는 양볼이 입김으로 터질 듯 부풀었으며. 흥에 겨운 군상의 표현은 자못 열기찬 율동감을 멋지게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단원의 풍속도에는 구수하고도 익살스러운 흥겨움이 화면에 넘치고 있다.
천민으로 하대받던 대장장이. 풍각장이. 또는 마부나 머슴들의 생활에서 우러나오는 삶의 흥겨움을 해학적으로 다룬 점은 당시로는 파격적인 일이었으며.
단원의 한 걸음 앞선 사회관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작가 : 김홍도(金弘道)
아호 : 단원(檀園)
제목 : 씨름
언제 : 18세기 말
재료 : 화첩 종이에 수묵담채
규격 : 28 x 23.5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단원이 활약한 영.정조(英.正祖)시대는 실학(實學)사상이 크게 일어나 새로운 서민의식이 풍미하던 때로서. 이런 기류와 함께 단원의 풍속화는 서민사회의 생업과 그 생태를 해학적으로 다루어, 단원풍속도 라는 특이한 장르를 정립했다. 단원의 풍속도를 보고 있노라면 서민 사회의 구수하고도 익살스러운 흥겨움이 느껴져, 모르는 사이에 그림 속으로 빠져들고 만다.
이 씨름은 단원풍속도 중의 하나로서, 위아래 두 무리로 관중을 배치하고.
그 한가운데에 서로 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씨름꾼을 그렸으며. 왼편에는
목판을 멘 엿장수를 그렸다. 외면당한 엿장수. 벗어놓은 신발. 갓 따위가
화면의 단조로움을 덜어주며. 긴장된 분위기를 멋지게 조절하고 있다.
안간힘을 쓰는 씨름꾼의 모습과 표정. 흥을 돋구는 군중들의 구도가 자못 짜임새 있을 뿐 아니라. 흥분과 초조가 엇갈리는 가운데 서민적인 해학이 고조되고 있다.

 
 

작가 : 김홍도(金弘道)
아호 : 단원(檀園)
제목 : 관암도(冠巖圖) : 고산구곡도(高山九曲歌) 제1곡
언제 : 18세기 말
재료 : 병풍 종이에 담채
규격 : 60.3 x 35.2 cm
소장 : 한국개인

해설 :
율곡(栗谷)의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중의 제1곡인 관암(冠巖)이다.
관암이란 시냇가에 있는 바위가 선비의 관모 같이 생겨 붙인 이름으로. 여기서부터 시냇물의 경치 좋은 아홉 군데 이름지으면서 상류로 거슬러올라가므로.
구곡중 가장 하류에 위치한 곳이다. 1803년경 그렸으므로 단원의 만년작이라 할수 있는데, 그가 실경을 그릴 때 쓰는 세필을 볼수 있으나, 맹추(孟秋)니 중추상한(仲秋上澣)이니 하여 7,8월에 걸쳐 여러 화가들이 서로 다른때에 그린 것을 한데 모아 표구한 것을 보면. 이미 있었던 다른 구곡도를 보고. 각자 나름대로 다시 그렸으리라 생각된다. 그림 전경에 조그만 시냇물이 있고.이쪽으로 는 다만 소나무 서너 그루와 잡나무들이 서있는 언덕이 있고, 내를 건너 바로 문제의 관암이 서 있다.
그뒤로 중경 왼편에 소나무 몇그루가 서 있는 평평한 언덕이 있어 동자를 거느린 선비가 소요하고. 아래편에서 율곡의 제자라고 생각되는 세 사람이 찾아오른다.
그 언덕뒤쪽 절벽이 오른편으로 기우뚱 솟아오르고 있는데. 가는 초묵갈필(焦墨渴筆)로 약식(略式)송림과 하엽준(荷葉?)의 바위주름을 볼수 있다. 오른편 중경으로 질펀한 미지의 공간이 전개되면서 원경에 그릉이 몇줄기 가로 놓인다. 관암에는 한자로 바위이름이 써있고 단원의 사인암도(舍人巖圖) 같은 곳에서 볼수 있는
모난 바위준법(?法)을 썼으며. 왼편아래 귀퉁이에 단원이 받들어 그렸다고 자서(自書)하고 있다. 글은 김조순(金祖淳)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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