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 선물
송 준 점
5월 마지막 휴일은 내 생일이었다. 매해 다가오는 생일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올해의 생일은 오랫동안 고여 있던 물을 다 퍼내고 깨끗이 정제된 샘물이 솟아나는 듯 머릿속이 명징해지는 날이었다. 징을 치고 난 긴 여운처럼 머릿속이 텅 비면서 맑아지는 낯선 기분이었다. 오랜만에 즐기는 휴일의 단잠을 깨고 찾아온 이 생경함은 모든 것을 정지시켜버렸다. 일순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가슴 속 깊은 곳의 물줄기만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미역국이라도 따시게 끓이 묵었나? 생일 축하한데이. 그라고 계좌번호 하나 보내라.”
어머니의 음성은 언제나처럼 건조했지만 부드러웠다.
잠이 덜 깬 나의 귀를 열게 하는 어머니의 말씀은 계속됐다. 딸한테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고 싶어서 그런다, 그동안 고생만 시켜서 미안하다, 내가 이제 살면 얼마나 살겠나 하시며 두서 없이 하는 말씀에 정신이 번쩍 들어 몸을 곧추 세웠다.
“엄마 무슨 소리 하노, 갑자기.”
정말 갑자기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최근 들어 밤마다 누가 데리러 온다는 소리를 자주 하셨기에 어머니가 영영 떠나버릴 것만 같았다. 어머니의 말씀은 계속됐지만, 나는 “무슨 소리 하노.”만 되풀이 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어머니의 일생과 나의 현실이 교차되면서 설명되지 않는 복잡한 심정이 삼킬 수 없는 울음으로 토해졌는지 모를 일이다.
어머니는 올해 여든 한 살의 연세에 비해 훨씬 더 늙어 보인다. 분명한 것은 여든 두 살인 시어머니보다 대여섯 살은 더 많아 보이니 말이다. 온통 얼굴을 덮은 주름은 지난한 세월만큼 깊이 파였고, 무릎은 더 이상 걸음조차 뗄 수 없을 만큼 짓눌려 버렸다. 손자들이 걸음마를 배우고부터 쓰지 않게 된 유모차가 어머니의 두 다리를 대신하고 있다. 무릎 연골이 다 닳아서 통증에 시달리는 어머니에게 수술을 권해도, 건넛마을 아무개 엄마는 수술이 잘못되는 바람에 앉은뱅이가 됐다는 얘기를 하시며 한사코 마다하신다. 그마저도 움직이지 못하면 자식들한테 짐이 될까 두려운 까닭이리라.
나는 4남 2녀 중에 네 번째로 태어났다. 위로 아들만 셋을 낳고 딸을 낳아서인지 아버지는 매우 기뻐하셨다고 한다. 얼마나 귀한 딸이었는지 내 또 다른 이름은 ‘귓딸’이었다. 그런 귀한 딸이었는데도 오빠만 셋이라 집안 잔일은 모두 내 차지였다. 요즘과 달리 그 때는 왜 아들은 집안일을 하면 안됐는지, 꼭 불문율 같았다. 아버지는 내가 어릴 때부터 병약해서 방안에만 계셨다. 신문을 읽거나 동네 아이들에게 한자를 가르치는 일, 동네 이장 일도 보시느라 농사일 거드는 걸 거의 못 보고 자랐다. 그래서 농사일은 언제나 어머니의 몫이어서 집안일은 딸인 내가 해야만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부터 어머니의 노동시간은 더 길어졌다. 새벽에 들일을 나가면 거의 밤이 돼서야 집으로 돌아 오셨다. 밤낮으로 짐을 이고 지고 다닌 탓도 있겠지만, 가족들의 생계와 꿈이 그 연약한 무릎에 매달렸으니 성할 리가 있었겠는가. 여섯 남매를 키워내기 위해 당신 자신의 인생은 아예 없었고, 여유를 부릴 겨를도 없이 하루하루 가쁘게 내달리느라 어머니의 목소리는 크고 거칠어졌다.
어린 나는, 마당 가장자리에 예쁜 꽃을 가꾸고, 비가 오면 학교 앞까지 우산을 가지고 오는 고상하고 다정한 친구의 어머니가 부러웠다. 비를 쫄딱 맞고 집에 가도 아무렇지 않게 바느질을 하고 계시는 모습에 짜증을 내면, “가죽 밑에 비 안 들어간다.”는 괴상한 말씀만 하시는 어머니 앞에 절망으로 무너져 내리는 어린 영혼이 있었다. 열 살 때 봤던 어머니와 스무 살, 서른 살에 봤던 어머니 또한 내 눈높이에 따라 달라졌을 뿐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남편의 사업이 어려워져 하소연할 때조차 산다는 건 꽃밭만 있는 게 아니라며 말허리를 뚝 잘라버릴 정도로 냉정했다.
자라면서 내 시간과 꿈을 포기하고 어머니처럼 변해갔다. 가랑비에 옷 젖듯 내게 닥친 상황을 원망할 새도 없이 어머니의 무게를 덜어 드리고 있는 자신을 보았다. 공부하는 오빠와 남동생을 뒷바라지하느라 내 이십대 청춘은 덧없이 흘렀다. 막내인 여동생은 대학교 입학할 때부터 서른이 넘어 결혼할 때까지 함께 살았다. 심지어 내가 결혼할 때도 동생을 혼수처럼 데리고 갔다. 동생조차도 어머니는 기댈 언덕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고달픈 삶으로 인해 앞뒤 돌아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어머니가 아버지를 잃은 나이가 되고부터였다. 마흔 셋이라는 나이에 여섯 남매를 데리고 살아갈 날이 얼마나 아득했을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쉰이 된 지금에 바라보는 어머니는 애잔하고 안쓰럽기까지 하다. 어릴 적 내가 알던 강하고 목소리 큰 어머니는 사라지고 한없이 가녀린 여인만이 옹송거리고 있을 뿐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머니의 속은 피눈물로 얼룩졌지만, 애써 들키지 않으려고 자신을 더욱 강하게 무장했던 게 아닌가 싶다.
이제는 망가져서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이끌고 그래도 자식들 준다고 간장이며 된장, 고추장을 담그시는 모습은 차라리 슬픔이다. 작년에는 참기름, 들기름을 큰 음료수병에 가득 짜주시며 내년을 기약할 수 있겠냐던 모습은 고여서 흐르지 않는 우물이 되어 버렸다. 내 어머니 마음 속 우물의 깊이는 얼마나 될까. 오랜 세월 고단한 삶을 내색하지 않고 살아오신 어머니의 일생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이 아니었을까. 퍼내도 퍼내도 줄어들지 않고 솟아나는 샘물처럼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어머니의 사랑을 언제쯤이나 헤아릴 수 있을 것인지.
어머니는 기어이 생일 선물이라고 하시며, 내 통장에 거금 일백만 원을 입금해 주셨다. 어떤 이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돈일 수도 있지만, 이 돈은 어쩌면 어머니의 일생이 녹아있는 전부일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사랑으로 짜인 부드러운 융단인 동시에 피눈물의 결정체일 테니까.
내게 일생을 두고도 대체할 수 없을, 가장 가치 있고 눈물겨운 ‘생일 선물’이다.
첫댓글 1학기 때 글을 수정해서 올려 보았는데요. 글은 쓰면 쓸수록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준점샘 다시 읽어봐도 시작하는 오늘을 바쁘다고 내 뱉는 현실을 반성하게 되네요~멋진글 잘 읽었습니다.
이렇게 한편 한편 모아가면 큰작가가 되는거지^^
열심히 노력하시는 준점샘
글도 나날이 좋아지고 있는듯 합니다
생일선물속에 녹아 있는 어머니의 애틋한 사랑이 느껴집니다
애잔한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등단작이 실린 어느 책에서 또
읽게 될것 같습니다.
'동생을 혼수처럼 데리고 갔다.'에서
선생님의 좋은 심성이 느껴집니다.
아릿한 글입니다.
우리 어머니도 생전에 마실갈때마다 유모차를 앞세우고 다니셨는데~~~
옛 생각을 돌이키게 하는 짠한 글 잘 읽었습니다.
추석을 앞둔 시점에
어머님에 대한 생각을
다잡아 보게 됩니다
읽을수록 애잔함이
전해옵니다~~
정말 잘 쓰셨어요
진솔한 이야기속에 가족의 따스한 정이 느껴집니다.
또한 옛추억의 아련함도 함께 느껴지네요.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송샘
이런 글 있는 줄 몰랐슴미
걍 눈물이 날라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