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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일시: 2012. 5. 11. (金) - 5. 16. (水)
0, 장소: 장흥 천관산 - 보성 제암산 - 일림산 - 지리산
0, 코스: 천관산 연대봉 - 제암산 곰재 - 일림산 큰봉우리 - 반야봉 묘향암
** 전주 2박 (아중리 오케스트라 찜질방)
항상 오케스트라 앞에서 새벽에 이영진님 차를타고 지리산 으로이동
** 천관산 1박 (연대봉 비박 4명)
장흥 관산읍은 직장관계로 82년도에 1년간 살았던 곳이기에 감회가 깊었습니다
우리가 살았던 집터에는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 정읍 2박 (우천관계로 큰형님댁)
내려온김에 궁금하고 그리운곳 지리산에 가보고 올라간다고 정읍으로 갔습니다
영랑생가
장흥 천관산에 가다가 강진 군청옆에있는 영랑 김윤식 시인의
생가를구경 하였습니다
장천재
천관산에 오르다본 장천재앞 입니다
좌로부터 리더 전주 이영진님 하동 김진수님 부산 공용철님 입니다
금강굴
금강굴 설명판
이정표
천주봉
천주봉 설명판
환희대
환희대 설명판
비박지
저녁이되자 찬바람이불고 추워서 큰텐트안에 께스불을 피워놓고
공용철님의 황혼의노래와 비목등 가곡을 들었습니다
6월달 소백산 철쭉꽃 비박 산행후
7월달 그믐밤에는 토끼봉 중턱에 텐트를치고 멀리 반야봉 묘향대의
깜박이는 램프불빛을 보아야 겠습니다
비박지 에서본 아침 (13일 아침인데 카메라 고장으로 7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안개도 약간 끼었지만 실제 바다와섬들 입니다
멀리 보이는 섬은 완도군 금일도와 생일도 입니다
천관산 연대봉
연대봉 설명판
양근암
양근암 설명판
금제산 철쭉
사자산 가는길
지금까지는 지리산 바래봉철쭉이 제일로 좋은줄 알았는데
제암산 - 일림산 30리 철쭉길이 더좋았습니다
교통이 불편해서 그렇지 소백산 황매산 서리산보다 월등 했습니다
앞으로는 매년 와보고 싶었습니다
일림산 가는길 1
일림산 가는길 2
일림산 정상의 묘지
대단한 자손들 같습니다
지리산 덕유산 설악산 곳곳의 정상에서 저런묘를 가끔 보았습니다
저의 고향 정읍 입암 방장산 정상에도 고흥유씨의 묘가 있었습니다
일림산 정상
보성강 발원지
다른강 발원지처럼 잘관리 했으면 좋았을것인데 좀아쉬워 보였습니다
이정표
뱀사골 계곡 1
수달래는 90%가 져버리고 녹음이 우거지고 있었습니다
일기예보에는 날씨가 맑다고 했는데 잠시 굵은비가 내려서
걱정이 되었으나 바로 멎었습니다
뱀사골 계곡 2
제승대
제승대 설명판
뱀사골 계곡 3
뱀사골 계곡 4
이끼폭포 입구
2010. 9.24. 험한 비지정 산길에서 사망사고가 발생했다고 했습니다
통제하는 등산로에 들어가면 50만원씩 벌금을 냈는데 2010.6.부터는
10만원으로 대폭 내렸습니다
벌금이 관리공단으로 입금되는것이 아니고 관할 지방자치단체 수입금으로
입금되기에 내렸다고 합니다
부서진 다리
작년여름 무이파 태풍때 파손된 다리가 아직 그데로 있었습니다
화개재
옛날에 남원 사람들과 하동 사람들이 물물교환 을하던 고개라고 합니다
지금오는 학생들은 영광에서온 고등학교 1학년생 40명이라고 했습니다
06:00시에 노고단에서 출발 했다는데 많이들지쳐 있었습니다
일산에서도 고등학교 1학년 남여학생 60명이 지리산 종주중 이었습니다
얼마나가면 연하천 산장이 나오냐고 묻는학생들이 여러명 있었습니다
7살먹은 유치원생도가고 할머니 할아버지도가니 화이팅 하라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화개재 555계단
경주에서온 20여명의 남여 지리산 종주팀들이 땀흘리며 올라가는
나에게 조금만더 힘내라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안전하고 즐거운산행 하세요 라고 답례를 드렸습니다
555계단 설명판
천왕봉 쪽에서 노고단 쪽으로 올때는 힘빠진 등산객의 군기를 잡는구간 입니다
삼도봉 표지판
전북 전남 경남 3도가 갈라지는 삼도봉 입니다
묘향대 입구
이곳에서 묘향대 까지는 약3km 이지만 퍽험한 산길입니다
비지정 등산로 이기에 관리공단 직원들과 시비가 잦은곳입니다
등산객 : 불교신자인데 묘향대에 불공드리러 갔다옵니다
공단직원 : 불공드리고 오는데 왜 배낭메고 다니는가요?
점심
묘향대 가던중 점심을 준비하는 이영진님 입니다
금방한밥과 돼지고기를넣은 김치찌게는 기막히게 맛낫습니다
묘향대 묘향암 ( 1485m)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곳에있는 절입니다
50대의 虎林스님 혼자서 수행정진 하고있는 가난하고 외로운 암자입니다
오늘은 출타하고 안계시기에 나혼자 법당에 들어가 약소한 시주를하고
부처님께 7배를 드리고 왔습니다
시주금은 조금내고 기원은 많이해서 부처님께 미안 했습니다
이사진 촬영한곳 아래는 반야봉 폭포수골이며 6.25때 전라남도 도당위원장이던
박영발 (1913.-1954.2.22.경북 봉화) 의 은거지가 있습니다
이은거지는 광주출신 소년빨치산으로 박영발의 전령겸 경호원으로 활동하다가
토벌대의 총격에 부상을입고 검거되어 35년 9개월간 전국 각교도소를 돌면서 복역한
김영승이 2007.2월에 찾아낸 곳인데
큰바위 굴속에 사다리를타고 올라가면 장정 3명이 잠잘수있는 공간이있고
그안에는 6.25때 사용하던 약품 건전지 잉크병 고무신 토벌대가 사용하던
전선(일명 삐삐선)등이 지금도 보존되어 있습니다
2007년 처음 발견시는 많은량이 있었는데 광주 시민단체와 기자 다큐멘타리작가
각방송국 관계자들이 기념으로 조금씩 가져가기도 했다고 합니다
박영발은 당시 여고생으로 공산주의가 무엇인줄도 모르고 시대의 조류에 따라서 입산한
어린소녀 이정례를 비서겸 산중처로 만들어 임신하였는데 54.2.22일
군경 토벌대가 도주로를 차단하고 포위하며 공격해오자 21세의 비서를 권총으로
쏴서죽이고 자기도 자살 하였다고 합니다
전북도당 위원장인 방준표 (1906-1954.1.31.경남 거제) 는 철도 노동자였던 박영발과달리
대구사범출신의 인텔리였고 하동에서 중학교 교사도 하였다고하며
여고생 출신의 임신한 어린 산중처와함께 54.1.31일 덕유산에서 수류탄으로 자살 하였습니다
반면 이현상은 (1905.9.27.- 53.9.18.당시 전북 금산 ) 임신8개월의 산중처 하수복 (부산) 에게
백야전사의 자수권유 삐라를 쥐어주면서 하산시켜서 토벌대에 귀순 시겼다고 합니다
하수복은 임신8개월 이기에 구속도 안되고 풀려나 아들을 낳았는데 아들의 장래를위해
이씨가아닌 하씨로 호적에 올렸고 아버지 이현상을 닮아서 공부를잘한 그아들은
90년대초 40대초반에 고등학교 교감선생님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태의 남부군)
이현상은 신민당 당수를 역임한 고유진산 의원과 금산초등학교 동기 동창인데
항상1등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본류와 마주치고 박영발 비트 갈림길 잠시 전 착각을 일으켜 많이 내려 온줄 알고
위쪽으로 비트를 찾다가 돌아내려 비트에 도착하니 먼저 도착한 일행분들이
굴속에서 이야기 하느라 나올 생각을 안하신다.
깊은 산속 춥고 어둡고 축축한 굴속에서 숨죽인 시간을 보냈을 빨치산들의
모습이 생생히 느껴져 잠시 시공을 초월하여 대화를 나누어본다.
“무엇이 이 깊은 곳에서 웅크리고 앉아 생을 불사르게 하였냐고?”
“이 골짜기에 산꾼들의 발길이 잦아지기 시작한 것은 한국동란 당시
조선노동당 전남도당위원장인 박영발의 비트가 세상에 다시 회자되면서
관심을 갖게 된 최근 일이다.
5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이곳을 찾아낸 이는 빨치산으로 활동하다
1954년 체포돼 36년을 감옥에서 보낸 뒤 1989년 가석방 출소한
비전향장기수 김영승씨다.
비트를 증언한 박남진의 증언에 따라 반야봉 아래 함박골 일대를 수색하여
2004.11월 답사를 완료하고 2005.2월과 5월 언론기관과 뜻을 같이하는
일행들을 통해 지상에 공개했던 것이다.
어떤 의미의 가치가 붙여질지는 역사가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만
슬픈 역사로만 치부하기엔 피아의 상처가 너무나 깊어 보듬어야할 편을
나눈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것처럼 느껴진다.
문득 반도통일을 꿈꾸다가 쫒기는 신세로 전락해 버린 박영발이 떠오른다.
항일빨치산으로 한때는 영웅이었지만 역사의 아이러니 앞에 당시 그는 섬멸해야할
적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나마 세력은 고갈되고 이 좁은 골짜기에 숨어들었으니 저 좁은 틈새를
흘러나오는 물소리는 그가 가슴에 지니고 있던 고뇌에 쌓인 심정과
돌려놓을 수 없는 대세에 흘러나오는 긴 탄식이 아니었을까?.
험한 바위아래 좁다란 입구로 들어서면 박영발 일행이 불을 지피고
추위를 피했던 곳이며, 북쪽의 방송을 청취하여
인쇄물을 제작 보급하는 조국출판사의 마지막 장소이다.
비트란 한국동란시 천연동굴이나 지상에 위치한 은신처를 말하며,
원래 지하본부라는 뜻의 아지트(agit, agitpunkt러)는 지하에 만든
은신처라는 말로 서로 구분해 부른다.
포개어진 틈 사이에 놓인 나무사다리를 올라서면 좁은 굴 입구가 나오고,
내부는 한 덩어리처럼 보이나 용도는 둘로 나누어 져있다.
당시 증언에 의한 남한의 빨치산 활동상황을 보면 인민군이 후퇴한
51년 북상을 시도하지만 중앙당의 지시에 의하여 다시 남하하게 된다.
51년 5월 덕유산에서 6개 도당회의를 열어 지리산에 통일적인 지휘 본부를
설치하기로 결정하고 이현상이 총지휘하는 남부군이 결성된다.
하지만 전남도당의 박영발은 이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투쟁을 벌이게 되고,
남부군은 지리산 조개골로 들어와 빨치산 활동을 전개한다.
그러나 이후 유엔과 국군의 소탕작전과 빨치산의 중앙당과 연락이
여의치 못해 효과적인 투쟁을 할 수 없게 되자 51년8월 중앙당지시(94호 결정서)에
의하여 52년 중반에 5개 지구당으로 개편이 이루어지게 되나,
이마저도 제5지구당인 지리산 지역에는 10월이 되서야 전달이 된다.
이에 52년 10월 지리산 빗점골에서 이현상, 박영발, 방준표, 김삼홍 등이 모여
제5지구당 구성을 위한 회의를 열게 되는데 이 회의에서
이현상, 김삼홍과 박영발, 방준표 사이에 심한 의견대립이 있어
결국 의견통일을 보지 못하고 중앙당의 지시와는 달리 도당해체 없이
제5지구당을 구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경찰에 의존하던 토벌대가 군경합동 작전으로 바뀌고,
특히 백선엽, 송요찬사단 등에 의하여 빨치산은 그 세력이 빠른 속도로
쇠락의 길을 거듭한다.
53년7월 휴전협정이 맺어지자 새로운 활로를 개척해야했던 이들은
53년9월6일 전남도당위원장 박영발의 주재 하에 지구당을 해체할 것을 결정한다.
이때 이현상은 사령관에서 평당원으로 강등되고 12일후 빗점골에서 최후를 맞는다.
이 사건으로 박영발, 방준표 등은 교조주의자들이란 오명을 쓰게 된다.
그 후 사실상 총수가 사라진 이들은 비트를 토끼봉으로 옮겼다가 반야비트로
들어오지만 그들도 4개월 후인 54년2월 추운 겨울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반야비트는 일부러 찾아들어가도 찾기가 어려운 은밀한 곳에 있다.
내부는 두어 평쯤 되는 공간에 4~5명이 좁게 누울 수 있는 자리와
두 명 정도가 겨우 누울 수 있는 통신용 공간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음침한 내부에 렌턴을 비춰보니 당시의 아비규환을 말해주듯
몇 조각 잔해들이 보인다.
이곳엔 박영발을 비롯한 여비서, 무전사, 주치의등 8명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주 임무는 무선으로 북의 지령을 전달받아 등사잉크로
인쇄를 하여 전달해 주던 ‘조국출판사’ 일을 했던 곳이다.
박영발은 만주에서 항일투쟁도중 잡혀 일제의 고문으로 다리를 절게 된 탓에
이현상의 활동적인 투쟁과는 달리 비트에 은신하여 활동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50여년이 지난 지금 반공세대를 거쳐 왔던 나도 왠지 모를 숙연함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 그들이 목숨까지 내놓고 이 좁은 동굴에까지 쫒겨 와서도
무장투쟁을 해야 했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외세에 의하지 않은 자주적 통일이었을까.
아니면 항일빨치산의 이념처럼 해방 후 최고수준의 대립으로 나타나는
지배적 계급세력과 상대적 약자인 민중들 사이에 나타난 적대적 형태가
폭력으로 나타난 것일까.
도덕적 윤리적인 가치관에서라면 희생의 대가는 치유하기 힘들만치 크다 하겠지만
역사적인 관점에서는 그들의 물리력을 정당한 방법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동굴 속 어둠을 헤집으며 지난 역사를 반추해 보지만 내 역사의식이
증명하듯 아무것도 판가름하지 못한다.
박영발의 죽음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기록으로는 전세가 불리해저
54년1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자살설(이태의 남부군,
한국사회주의인명사전, 백과사전)이 있고, 또 하나는 54년 4월 12일자[동아일보]
보도인데 54년3월 모부대 박상옥 중사 일행이 반야봉부근 수색작업을 벌이던 중
밟힌 인분에 의해 비트가 발견돼 3명을 사살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박영발이었다는 것이고, 마지막 하나가 최근 이 비트를 증언한
박남진옹이 밝힌 내용으로 조국출판사의 필경사일을 보았던 장본인이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조국출판사의 첫 출발은 반야봉 아래 계곡에 온돌식 비트가 시작이었으나,
53년 12월 15일 반야봉에 대규모 토벌대가 진주하는 바람에 바위비트로 옮겨진다.
여기에 무전사, 의사, 여성비서, 박영발 등 4명이 은거하고 박 옹 등을 포함한
나머지 7명은 보급투쟁 등으로 수시로 출입을 하였다.
한편 박영발과 함께 동굴에서 은신하고 있던 주치의 박모씨는
1953년 5월 토벌대와의 전투에서 다리에 총상을 당해 이동이 매우 힘겨운 상태였다.
동굴생활이 장기간 지속되면서 식량이 떨어지고 토벌대의 수색작전이
비트를 압박해오자 일행 중에서 자연스럽게 비트를 옮겨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된다.
이에 총상으로 이동이 어려웠던 주치의가 '장소를 옮기게 되면
혼자 버려지게 될 것'이라는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리다 '혼자 버려지느니
같이 죽자'는 심정으로 1954년 2월 21일 비트 보초를 보는 중 박 위원장 등
총 3명에게 30연발 칼빈소총을 난사했다.
갑작스런 총기난사로 동굴에 있던 박 위원장과 무전사가 그 자리에서 숨지고
이모 여성비서가 몸에 지니고 있던 수류탄을 던져 의사도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둔다. 이 여성비서는 부상과 허기로 동굴에서
힘겹게 버티다가 다음날 22일 식량을 전해주러 온 대원에게 발견되어
목숨을 건진다.(발췌, 시민의소리)
이와 같은 증언이 사실이라면 아마도 자살설은 실질적인 2인자의 죽음이
내부자에 의한 사고라는 것이 알려질 경우 심리적인 타격이 컷을 것을
감안한 소문 퍼뜨리기로 생각되며, 토벌대에 의한 사살설은
이현상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경찰과 군인의 성과주의 사고방식에 의한
전공부풀리기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 듯 박영발이
죽은 날짜는 각각 다르다.“]
묘향대의 우물
수십길 바위아래서 나오는 석간수 입니다
몇년전 관리공단에서 방사한곰이 이곳에와서 20kg짜리 쌀포대를
훔쳐갖고 산속에가서 다먹고 저우물속에 넣어둔 스텐으로된 열무김치통을
꺼냈으나 4군데의 잠금창치를 못끌러서 바위에 부딛쳐 찌그러트리고 갔다고 했습니다
지리산 반달곰이 초식동물 이라고 하지만 우는소리를 들으면 소름이 끼친답니다
무명폭포
비지정 등산로인 묘향대에서 이끼폭포까지 내려오는길은 참으로
험하고 급경사길 이었습니다
오늘 110번째 지리산에 가보았지만 이길은 처음이고 이렇게 험한곳은
처음 이었습니다
칠선계곡 동부능선 소년대일대 한신지계곡 큰새개골 작은새개골 자빠진골 대성골등
어느곳도 이렇게까지 위험한 등산로는 없었습니다
오늘 정말로 고생했고 땀도많이 흘렸습니다
이끼폭포
수십m 바위절벽에 온통이끼가 자라는 이끼폭포 입니다
뱀사골 등산로에서 약2km정도 험한 계곡으로 들어오기에
사진작가들이 가끔씩 몰래 들어다니는 곳이기도 합니다
재작년 사망사고 발생후 휴일에는 단속을 강화하는곳 입니다
뱀사골 계곡 5
전에는 이런시설이 없었으나 2007년부터 이렇게 만들어 놨습니다
우리의 영원한리더 이영진님등 등산을 잘하는 사람들은 관리공단이
산을 버려놨다고 하지만 나는 이런 안전시설이 좋기만 했습니다.
첫댓글 젊은이 따라 댕기느라 고생하셨슈!! ㅎㅎ
입술 부르터 감시롱 그게 먼 짝이대유?
인자 집에서 목침 베고 누워 수박 잡수시면서 텔레비나 보시랑게요.
그리고
오늘 세차 했는디 꼬뿌는 없던듀.
ㅎㅎㅎ 글쎄 말입니다
2000년부터 갖고다닌 일산 티타늄컵인데 아쉽네요.
두루~두루~멋진산행 잘하고 오셨네요...
덕분에 설명과 사진으로~둘러보고 갑니다...^^
후리지아님 격려글 고맙습니다
방태산갈때 뵙겠습니다.
사진으로나마 이렇게 뵙고 가네요.
연세가 있으심에도 젊은이들 능가하는 산행을 하시니 그게 바로
건강을 증명해 주는것이나 다름없겠지요?
서울마님 격려에 감사 드림니다
건강히 잘 계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