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Sakhalin)의 원래 위치를 찾아서
1.
흑하사변(黑河事變)이라 불리우는 자유시참변은 1921년 6월 28일 러시아령 자유시(알렉셰프스크)에서 3마일 떨어진 수라셰프카에 주둔하고 있던 한인 부대인 사할린(Sakhalin) 의용대를 러시아 적군 제29연대와 한인보병자유대대(이하 자유대대)가 무장해제시키는 과정에서 서로 충돌해 다수의 사상자를 낸 사건이며 이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과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파쟁이 불러일으킨 한국 무장독립전쟁사상 최대의 비극적 사건이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민족의 무장독립운동은 큰 타격을 받게 되었고 위대한 조선(朝鮮)의 영웅들이 실행하려 했던 대륙본토의 종남산(終南山)자락에 위치했던 한양(漢陽)의 거대한 성벽위에 태극기를 꽂기 위한 본토 진격작전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결과적으로 서구열강들이 만들어낸 세계적 이념 놀음에 나라가 분할되고 민족이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게 되는 역사적 패륜의 세월 앞에 조선민족 독립세력의 국내진공작전이 멈추어 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사할린 의용대는 이항(니콜라예프스크)에서 러시아 적색 빨치산과 함께 일본군을 대파한 한인(韓人)부대로 이항(尼港)부대라고도 불린다.
이들이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자유시로 들어왔을 때, 당시 자유시에는 자유대대 외에도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최진동의 도독부군 등 간도지방에서 이동해온 한인무장 부대가 집결해 있었고 사할린 의용대의 실력자는 박일리아라는 사람이었다.
1920년 초엽 박일리야(朴一)는 사할린의용대 사령관으로 니콜라옙스크 해방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1920년 3월 적색빨치산의 습격으로 일본군대와 거류민이 몰살당하는 이항사건(尼港事件)이 발생함에 따라 사할린의용대도 이때 일본군을 공격하였던 적색빨치산에 포함되었고 이 사건으로 사할린의용대는 자유시로 도피하여 그 곳의 자유보병대대에 편입되었다고 한다.
2.
그렇다면 사할린의용대는 어디에서 근거지를 두고 탄생한 것인가가 문제점으로 대두된다.
현재의 반도역사 관점에서 보면 일본열도(日本列島)의 북쪽 북해도(北海島)의 위 러시아령 사할린(Sakhalin)섬에 조선의 독립군인 사할린의용대가 조직되었다고 보아야 할 일이다.
그러나 극동아시아의 모든 지명과 강역확정은 1945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미국과 일본에 패(敗)하고 난후에 결정된 사항이라는 점을 명확히 인지한다면 사할린섬 또한 그에서 예외일 수 없음을 우리는 알아들어야 할 일이다.
물론 변조된 역사의 기록에서는 이미 1844년 일본의 마미야 린조가 사할린섬을 다녀간 사실을 기록했다고 하고, 1855년 이후 러일화친조약 이후 사할린이 양국의 공동관할구역이 되었다는 내용 그리고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가라후토-치시마 교환조약)으로 인해 쿠릴열도를 일본이 영유하고 사할린은 러시아 영토가 되었다는 내용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기록에 나오는 사할린과 현재의 사할린이 각각 다른 곳이었다는 논점은 첫 번째로는 상식에 따른 강역기록의 의문과 두 번째로는 다음의 지도 한 장을 통해 우리의 의문을 해소하기에 충분하다 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조선(朝鮮)독립군이 거대한 만주(滿洲)땅을 놓아주고 타타르 해협을 건너 사할린섬에 들어가 부대를 조직하고 다시 대륙으로 건너와 일본군을 공격했다는 사실은 거의 어불성설(語不成說)이라 할 수 있을 일이다.
사할린(Sakhalin)이라는 명칭은 사하리얀누르에서 유래(由來)되었는데 사하리얀(Sahaliyan)은 '검은', 우르(Ule)는 '하천'으로 '검은 하천'이라는 뜻이고 사할린을 일본에서는 가라후토(樺太)라고 부른다. 즉 자작나무가 많이 자생하기에 자작나무 화(樺)자를 써서 화태(樺太)라 했음을 알 수 있다.
송호열씨의 세계지명유래사전에 나오는 위의 기록을 근거로 분석해 보면 사할린은 <검은 하천> 즉 흑강(黑江)이 되어야 하고 이는 역사상의 흑룡강(黑龍江)과 의미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기록과 아래의 지도를 통해 분석해 보면 <검은 하천>이라는 뜻의 사할린과 화태(樺太)섬이라는 의미의 사할린은 분명 다른 곳이라는 사실이 명확해 진다.
결국 이를 통해 우리는 역사상의 흑룡강(黑龍江-아무르강)이 위치했던 알타이산(백두산)의 위쪽 드넓은 만주뻘에서 북쪽으로 흘러가는 현 오비강(북압록,송화강)에 인입되었던 흑룡강(黑龍江)이라는 이름이 1945년 이후 일제가 패망하고 러시아가 현 만주와 사할린의 영유권을 획득한 후, 새롭게 재편되고 확정되는 강역의 명칭에서 현 만주 북쪽의 사할린강이 사할린섬으로 이동, 둔갑(遁甲)하고 역사의 흑룡강(黑龍江-아무르강)이 원래의 사할린이 있었던-동쪽으로 흘러가는 현 만주(滿洲) 위쪽의 거대한 강(2,824km)에 그 역사마저 옮겨와 자리잡게 되었음을 명확히 인식할수 있게 되었다.
3.
위 지도는 아드리앙 위베르 브뤼(Brué, Adrien-Hubert, 1786-1832)라는 프랑스의 지도제작자가 1816년에 제작,발표한 지도이다.
명확히 현 알타이산에 동남쪽으로 뻗어내리는 산맥을 중심으로 Bogdou라 표시함으로써 이는 <백두>의 발음임을 알 수 있고 따라서 백두산을 표기한 것으로 정확히 인식할 수 있다.
또한 현 반도북쪽의 만주(滿洲)지역에서 몽고의 동쪽에서 발원하여 현 하얼빈을 거친 후 동북으로 흘러나가는 현재의 흑룡강(黑龍江)에 사하리얀(Sahaliyan) R.이라고 표기함으로서 1816년 당시 사할리안강 즉 검은 하천이라고 불리었음을 알 수 있게 해주고 있다. 하지만 이 강은 역사의 흑룡강(黑龍江)처럼 뱀이 똬리를 틀 듯이 구불구불한 모양으로 흘러가고 있지는 않다.
이를 구글지도를 통해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2022.05.04.松溪
첫댓글
고맙습니다!
혹시 타이위안, 신흥무관학교의 정확한 위치도 밝혀졌는지 궁금합니다. 상경용천부나 청산리에서 멀지 않은 곳일 것 같은데요,
..’서북에 흑룡태원..’ 이 가사를 떠올려 보면 거기가 조선의 최북단으로 보는게 맞을까요..?
신흥무관학교는 서간도지역에 세워졌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습니다. 현재로서 정확한 위치 고증은 매우 어렵다고 보이나, 대략적으로 볼때 백두산,장백산의 북서쪽 어느곳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동간도(북간도)가 현 러시아 아바칸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다고 볼때, 이러한 정황을 그려볼수 있을듯 합니다. 태원이란 지명도 백두산을 중심으로 북서쪽을 생각해 봅니다.
좋은 글 항상 감사드립니다
송계님, 좋은 정보 정말 감사합니다. 요즘 공부 많이 하네요.
좋은 정보 고맙습니다~
독립운동가 희산(希山) 김승학(金承學1881∼1964)선생께서 기록한 애국가 가사
김승학 선생의 애국가 가사
1절
백두산하 삼천단부 한데 모여 한배님이 건국하신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화려한 금수강산 배달민족 배달나라 길이 보전하세
2절
높고 둥근 백두산은 우리 민족 기상이며 맑고 깊은 천지물은 우리겨레 정신일세
무궁화 화려한 금수강산 배달민족 배달나라 길이 보전하세
3절
우랄산부터 대마도까지 수륙 수만리 우리 선조 즐기시던 보금자리라
무궁화 화려한 금수강산 배달민족 배달나라 길이 보전하세
4절
이 기상과 이 정신을 모두 합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무궁화 화려한 금수강산 배달민족 배달나라 길이 보전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