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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대리운전 협동조합 원문보기 글쓴이: 행복나눔
▲ 진수희 보건복지부 장관이 지난 5월 19일 스웨덴을 방문에 고란 하그룬드 스웨덴 보건사회부 장관과 면담하고 있다. ⓒ보건복지부 |
스웨덴의 복지는 솔직히 말하면 '부도덕한 돼지'들이 벌이는 찰나의 잔치일 뿐이다. 우리는 세계 최빈국이면서도 행복지수는 최고로 높은 방글라데시와 달리 스웨덴의 청소년 자살률이 왜 그렇게 높은지 국가와 공동체의 관점에서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더구나 스웨덴 노동자들이 재벌과의 타협을 통해 이룩한 복지국가 체제 자체도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와해되고 있는 중이다. 스웨덴은 1991년까지 국내총생산의 20%에 달하는 복지지출비를 감당하면서도 흑자재정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국제금융 마피아의 공격은 스웨덴이라고 해서 예외를 두는 것이 아니었고, 스웨덴은 1990년대 초 이들 환투기꾼들의 농간으로 심각한 금융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1995년 스웨덴의 실업률이 13%로 올라갔다. 이른바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으로도 더 이상 실업자들을 흡수할 수 없는 상황으로 변하고 만 것이다. 때문에 복지수혜층의 증가와 함께 정부의 복지지출비가 급속히 증대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정부재정도 적자상태로 돌아섰다. 결국 사민당은 복지지출비 삭감을 단행하였고, 1994년 이후 현재까지 스웨덴의 복지지출은 지속적으로 삭감되고 있는 중이다. 지금 스웨덴 모델은 복지삭감, 완전고용 포기, 조세개혁 등 자신의 복지국가 원칙을 폐기하면서 신자유주의를 대폭 수용하는 조류에 편승하고 있을 뿐이다.
근대 조세국가 체제는 근본에서부터 자본주의의 무한 성장에 대응한 체제이다. 복지국가 또한 경제성장 시기에는 잘 유지 작동되지만 경제성장이 멈추면 금방 와해될 수밖에 없다. 이런 사실을 똑똑히 알고 국가 복지를 주장해야 한다.
해고와 비정규직 대책 없는 복지국가론은 헛구호이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유행했던 거의 대부분의 사회이론이 그러하듯 복지국가론 또한 거의 모두가 수입품이다. 도대체가 자신의 가슴과 머리로는 스스로 사고할 수 없는 이른바 식민지 지식 수입상들의 철지난 상품이 복지국가론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리고 물론 여전히 자본주의 근대화론이다.
복지국가론을 주장하기에 앞서 지금 여기 이땅에서 살아가면서 적어도 이웃의 아픔에 공명할 수 있는 뜨거운 가슴을 가진 사람이라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와 사회를 밑에서부터 허무는 해고와 비정규직에 대한 대책부터 먼저 말해야 한다.
강부자 정당인 한나라당과 이명박정권, 재벌들이 해고와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주범이라면, 화려한 복지 무지개를 그리기에 앞서 당장 그 주범들과는 전혀 다른 해고와 비정규직 대책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자본가들의 처분에 맡기거나 구걸하는 해고와 비정규직 대책이란 얼마나 허망한 사기의 언어인지는 이미 지겹도록 들어왔다.
사실 지금까지 제기된 복지국가론이나 해고와 비정규직 대책 등을 찬찬히 살펴보면 진보를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 이른바 진보언론도 거의 예외없이 국가와 기업이라는 사고 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를 않으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이 국가와 기업을 비판하는 것은 나쁜 국가, 나쁜 기업, 즉 권위주의 정부나 노조를 인정하지 않는 삼성같은 재벌과 기업들이다. 이들의 주장과 목표는 좋은 국가, 좋은 기업이다.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좋은 정부, 노조도 인정하고 요즘 유행하는 이른바 사회책임투자를 하는 좋은 기업, 좋은 자본주의, 따뜻한 자본주의, 유연한 자본주의, 사회 자본주의이다.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사회주의자들이 집권하는 사회주의 국가와 사회주의적인 기업, 국가기업의 다른 표현인 공기업이 이들의 청사진이다. 사회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서구의 사민주의가 철저한 국가주의라는 비판에 대해서는 아예 외면한다.
이런 서구 근대 자본주의의 국가주의와 기업주의, 시장주의 시각에 갇혀 있는 한, 절대로 해고와 비정규직의 완전한 해결은 불가능하다. 물론 한 가지 해결책이 있었다. 파시즘과 현실 사회주의 국가가 그것이다. 복지국가론의 극단은 파시즘과 현실사회주의였다.
현실 사회주의는 마르크스가 주창한 바 자유인들의 연합체 사회로서의 사회주의 이론과는 정반대로 철저한 국가주의의 파시즘 체제였고, 해고와 비정규직 대신 대규모 숙청이 이어지고 있었다. 파시즘 또한 국가 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 경제성장을 통해 국가복지를 대폭 확대하였고 인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경제성장이 멈추거나 국가가 붕괴하면 복지 자체도 붕괴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파시즘과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 북한과 쿠바의 사례에서 익히 경험했다. 파시즘이나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처럼 강력한 국가주의는 인민을 국가의 노예로 만들 뿐이다. 민주주의 없는 국가 복지의 실상은 결국 조지 오웰식 동물농장의 복지인 것이다.
노예의 복지는 진정한 복지가 아니다. 그리고 지금 신자유주의를 추종하는 자들이 주장하는 강력한 복지국가론은 인민을 국가 복지의 노예, 정확하게 말하면 기업의 노예로 양산하는 복지국가론일 위험성이 너무나 크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지속가능한 복지는 국가 복지가 아니라 공동체 복지임을 알아야 한다. 국가 복지의 확대도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우애와 협동의 공동체를 재건하고 인민들이 스스로 강력한 사회안전망을 만드는 것이 선결과제인 것이다.
지속가능한 복지는 인민 스스로의 공동체 복지이다
이는 서구 역사에서 협동조합운동의 역사와 국가와의 관계를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스웨덴의 국가복지 발전은 정확하게 협동조합을 비롯한 공동체 경제, 사회경제의 위축 해체를 가져왔다. 이탈리아 파시즘의 국가복지 확대는 협동조합운동의 강력한 탄압과 해체를 대체하는 것이었다.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스웨덴의 소비자협동조합운동은 기초 생필품에 대한 독점자본의 지배력을 깨뜨리면서 확대되고 있었다. 스웨덴에서는 19세기 말부터 자본가와 관료, 사제, 귀족 등 지배계급에 대항하여 노동조합운동과 소비자협동조합운동, 주택-세입자협동조합운동, 농업협동조합운동 등등의 다양한 대중운동이 민간단체의 시대라고 명명될 만큼 강력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1930년대 사민당의 '역사적 대타협' 이래 복지국가 모델이 확대되기 시작하면서 인민들의 민간단체들은 교육과 레크리에이션, 레저활동, 스포츠 등의 문화 분야로 축소되고 말았다. 소비자협동조합들은 1960년대 시작된 광범위한 합병 과정을 통해 대규모 도소매 체인으로 변질되었으며 이윽고 1992년에는 아예 유한회사로 전환하고 말았다. 스웨덴의 농업협동조합 또한 대기업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오늘날 스웨덴의 협동조합들은 협동조합 정체성을 잃어버린 관료조직이 되어 버렸다.
▲ 이탈리아 볼로냐의 대형 소비자협동조합 아드리아티카(Coop Adriatica) 매장 ⓒ한살림(김태열) |
이탈리아에서도 19세기까지 상호공제조합과 협동조합 등 사회경제가 활발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말부터 국가가 공공복지 시스템을 구축하고 각종의 복지제도를 확대 발전시키면서 협동조합운동은 급속히 위축되고 해체되기 시작한다.
특히 20세기 들어 파시즘 체제의 중앙집권화된 사회정책이 강제로 실업보험을 도입하면서 상호공제조직들이 소멸되고 말았고 모든 형태의 민간 자치 결사체들이 제거되고 말았다. 파시스트 국가는 20세기 초반까지 증가하고 있던 협동조합운동, 특히 노동운동에 기반을 두고 있던 노동자 협동조합들과 연합조직들을 공격했고, 그 공백을 국가와 파시스트 당에 의해 완벽하게 통제되는 온정주의 복지 기구로 대체해 나갔다. 이로부터 이탈리아 인민들도 사회복지의 책임기관은 국가라는 확신을 내면화시키게 된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이탈리아 경제가 침체되고 경제성장이 멈추면서 복지국가의 재정위기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이탈리아 협동조합운동은 인민 스스로의 자구책으로 다시 부활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학생운동의 일부 활동가들과 새로운 시민운동 세력, 가톨릭 일부 교회의 지원 아래 이루어진 성과였다.
오늘날 이탈리아 협동조합운동의 재등장은 눈부시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여기에는 지방정부의 리더쉽과 협동조합운동의 거버넌스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공동체 복지야말로 애국의 길이다
국가복지와 공동체 복지는 서로 대립된 개념이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공동체 복지야말로 흔들리면 안되는 인민 복지의 기초이며, 공동체 복지가 전제되지 않는 국가 복지는 허상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아무리 끔찍한 위기가 닥쳐도 살 길을 모색할 수 있고 서로 도우며 사회안전망을 이루고 있는 것은 국가가 아니라 스스로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는 자립 자치의 지역공동체이다. 상부상조의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 지역공동체, 협동조합과 다양한 공제조합, 생협 등의 조직이야말로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는 자유인들의 연합체이다.
이런 자유로운 노동과 노동공동체를 토대로 민주주의는 꽃을 피울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공동체 민주주의 사회라야만 모든 인민들이 민병으로서 애향심을 바탕으로 애국심에 불타 나라를 지킬 수 있다. 강제로 군대로 끌려가는 노예군대로는 절대로 나라를 지킬 수 없다.
남북한 전쟁세력들이 마치 전쟁이 애국인 양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결국 독재와 파시즘과 맞닿아 있는 국가주의의 폐해이다. 복지국가론이 이 국가주의에 뿌리를 대고 있는 것은 위험하다. 복지 담론은 불가피하게 국가의 확대와 팽창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공동체 복지의 뿌리깊은 나무들을 바탕으로 평화와 정의가 넘치는 국가로 전환해야 한다. 자립자치의 지역공동체를 바탕으로 한 지방의 연합으로서의 연방주의가 관철되면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민주주의와 평화, 해고도 비정규직도 없는 우애와 협동의 공동체 경제 국가를 만드는 일이 애국하는 길이다. 무수한 인민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전쟁과 남북 갈등은 애국이 아니라 매국노들의 짓이다.
대한민국 헌법을 들먹이면서 위장전입, 부동산투기, 세금탈루, 병역기피 등 이른바 4대 필수과목을 이수해야만 장관이 되고 권력의 자리를 꿰어차는 이명박 정권이 애국을 말하는 것은 보면 기가 찰 따름이다.
기업의 노예가 될 것인가, 협동조합의 자유인이 될 것인가
우리는 지금 복지국가를 주장하기에 앞서 국가 복지수요를 만드는 구조악, 실업과 빈곤과 불평등 그 자체를 더 이상 악화되지 않게 하거나 근본에서부터 없애는 투쟁을 해야 한다. 그런 공동체 경제의 기초가 협동조합운동이다.
더우기 복지국가론은 진보의 전유물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실제로 내년 총선이나 대선에서 복지국가론을 주장하면 할수록 어떤 측면에서는 다른 종류의 복지국가론을 들고 나온 한나라당의 대선후보를 돕는 역설에 빠질 수 있다.
인민은 국가의 노예가 아니라 주권을 갖고 있는 주인이다. 주인들 스스로 국가와 기업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자유인으로서 우애와 협동의 공동체 복지를 선택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이른바 진보개혁세력이 할 일이 아닐까.
한겨레두레공제조합연합회 한겨레두레공제조합연합회는 2010년 2월 12개 지역공제조합이 모여 출범하였으며, 2009년부터 2년의 준비기간을 거쳐 2010년 2010년 12월 5일, 고 리영희 선생님 장례식을 주관하면서 공식 활동을 시작했다. 한겨레두레공제조합은 바가지와 덤터기, 폭리와 리베이트로 복마전이 되어버린 상조회사의 주식회사 영업을 협동조합 방식으로 대체하는 직거래 공동구매의 상포계를 운영하고 있다. 현재는 전국에 걸쳐 16개 지역공제조합이 활동하고 있다. 조만간 장례산업과 비슷한 구조의 예식산업을 협동조합 방식으로 바꾸어 혼인계를 시작할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