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소시집|김려
떠나는 동백에게 웃어주기 외 4편
침을 세게 뱉습니다 흙이 파입니다 흙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괴롭히지 마세요 나는 뱉을 땐 뱉는 사람이요 그는 나마저 복종시키려는 듯 주먹을 지르면서 고함칩니다 내 몸은 끄떡없습니다 그는 손바닥에 침을 발라 머리를 쓸어 넘깁니다 나를 흘겨봅니다 내가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믿기 어렵습니다 노려볼 때마다 ‘잘못했습니다’ 하다 보니 정말 잘못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또 걸려들었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납니다 나를 좀 가만 놔두세요 내가 뭘 알겠습니까 나는 흘길 땐 흘기는 성미요 그가 침울하게 말합니다 구름을 먹고 사는 머저리들에게 진저리가 쳐져 도대체 언제 겨울이 오겠소 그의 목소리가 어찌나 축축했는지 비가 내릴 뻔합니다 그는 나를 밟아 납작하게 만들어 누군가 뱉어둔 가래침 옆에 두고 가버립니다 겨울은 다시 올 것이므로 기다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철 지난 꽃들은 웃음이 고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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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부
밥이 자꾸 미끄러진다 젓가락을 집어넣어 한곳으로 모은다 잘 지내니 요즘 뭐 하고 지내니 어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어 전부 날아갔어 밥 먹는 게 어디야
혀를 잘랐지 팔뚝 살을 잘라 혀를 깁고 허벅지를 오른팔에 붙였지 입속이 피눈물로 사죄하자 팔은 혀가 되었다 예전보다 진중해졌다고 허벅지가 울었다
네가 내 말을 가져가서 오른팔도 아파서 왼손으로 글을 썼지 여보, 문 앞에서 기다리지 말고 집에 가서 쉬어요 선생님, 나는 여기서 끝나는가요 다음 주에 끝나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 아마 이곳에서 끝날지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선생님 당신은 겪어 보셨나요 꼭 겪어봐야 아는 것은 아니죠
주름 잡히고 백발 성성해 보는 게 소원인데 늙기도 어려워 꿈이라고 믿고 싶은 현실 내 몸아 오늘도 산다고 고생했다 있어야 할 것이 없어서 없어야 할 것이 있어서 고맙다고 말하는 게 뭐가 어려워서 미안하다 말하는 게 뭐가 어려워서
혀는 잘라 누구 줬니 내가 입꼬리 비틀며 웃지 말라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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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나를 먹여 살려야 한다
강과 바다는 더럽고 냄새가 나요 많은 달이 떠 있지만 내 달은 하나도 없어요 서민들이 몰려오지요 숯가마 30분 넘길 즈음처럼 정말 더운 여름이에요 청정지역에 사는 1%는 훌라후프를 못 돌려요 돌릴 필요가 없어요 기계가 알아서 돌아가니
아, 그 아이는 얼마나 사랑스럽던지 당신의 아이가 정말 귀엽군요 나는 모든 아이를 너무나 사랑해요 나는 아이들을 정말 사랑한답니다 사랑하면 사랑이나 하지 왜 이렇게 강조하는지 잘 모르겠군요
오우, 굿! 과히 천재적이군요 좋아요 정말 좋군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을 거예요 존경합니다 나는 이런 말을 자주 해요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줄도 안답니다 고마운지 안 고마운지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죠 실속 있는 사람에겐
앗, 들킨 거 아닐까요? 그런 상황에 부닥치면 그럴 수밖에 없는 거예요 함부로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마음을 비우려 꽤 노력 중이에요 어차피 남의 몸을 먹고 살잖아요 채식주의자냐고요? 식물은 몸이 없는 줄 아시나 봐요 걱정해도 달라지는 거 없다는 거 알잖아요 우리, 같이 열심히 해요
에라이, 사각팬티는 반바지로 입으면 안 되나 혼자 있을 땐 이렇게 중얼거리죠 누구든 내 얘기 좀 들어줘요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이라면 그 어떤 사람이라도 우린 뒷담화하죠, 유리 파편 같은 침을 튀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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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되도록 행동하라*
어느 날 갑자기 그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어디서 감히’를 입에 달고 살던 기분이 상하면 방문 잠그고 3개월을 들어앉던 그가 평소답지 않게 다나까체를 쓰며 그에게 다정하게 굴기 시작했다
각방 쓴 지 10년이 된 그가 매일 베개를 안고 그의 방에 들어가 새로운 체위를 개발하기도 했다 일이 끝나면 여태 만난 사람 중 당신이 최고라고, 아내가 알아서는 절대 안 되니 무덤까지 비밀을 지켜달라고 귀에 홍어 냄새나는 입김을 불어 넣으며 속삭였다
갱년기도 참 독특하게 겪는다 하지만, 그를 목적 그 자체로 대해야 한다는 생각 그는 잠깐 지켜보기로 했다
아침 먹으면 점심 메뉴 걱정, 점심 먹으면 저녁 뭐 먹을까 1차원적 아메바 그가 문득 꽃다발을 주문하거나 귀걸이나 반지 등을 선물하기도 했다 음악을 듣고 오페라를 보러 가자고, 드라이브하자고. 마침내 맛이 완전히 간 것 같아
심란했다
하지만 어떤가 그에게 별 손실은 없어서 모른 척 새 연애를 시작했다 대충 알고 있어서 편하기도 했다
*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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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자기 속 나비 두 마리
설거지 솜씨에 홀딱 반하고, 시시는 아프지도 않을 거라 믿는 나르,시시는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지 시시에겐 나르만 있으면 된다는 나르 생각
갑자기 죽더라도 대접받고 싶어 나르가 에르메스 팬티만 입는 이유 에르메스 팬티 모르는 사람도 있을 텐데 혹시 누가 팬티만 벗겨가면 어쩌려고 하는 시시 걱정
엄마와 시시가 물에 빠지면 엄마를 구하고 장미와 시시가 물에 빠지면 장미를 살릴 거야 천진난만하게 말하는 나르 나르, 걱정하지 말아 시시는 용왕의 딸 물에 빠지지 않아 빠지더라도 시시의 아빠가 건져 줄걸
왜 얘는 꽃이 안 피나 얘는 왜 꽃을 안 피우나 어째서 얘는 꽃도 못 피우나 시시가 겨우 살려놓은 호접란 앞에 전지가위를 들고 앉은 나르, 흙 위로 뻗은 뿌리 정리한다면서 꽃대를 싹둑싹둑 잘라놓고는
꿈속까지 따라와 아무 데도 못 가게 하고 아무것도 못 하게 하고
대문 앞에 모르는 나르시스가 서 있는데 그걸 보고도 질투하데 화장실까지 따라와 어디든 함께 가자 하고 힘들어서 죽을 뻔 미치는 줄,징징거리는 나르 나르는 알고 있다 우리는 금세 늙어버릴 거라고 죽은 뒤에도 꼭 붙어 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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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려(본명 김광희)
1957년 부산 영도 출생.
2016년 계간 《사이펀》 제1회 신인상으로 등단
‘사이펀의 시인들’, ‘나비시회’ 회원
시집 『어떤 것은 밑이 희고 어떤 것은 밑이 붉었다』(파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