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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0년 월간 중앙 11월호에 게재된 것을 전재함-글쓴 이 김석환(초강초등학교 42회>
어떤 힘이 반백이 되어버린 우리네 초등학교 동기생들을 해마다 8월 마지막 주말이면 고향 강기슭으로 불러 모을까. 전국 곳곳에 흩어져 사는 우리들은 모천으로 회귀하는 연어떼처럼 다투어 친구네 농막으로 찾아든다. 일요일 오전 10시에 정기 동기동창회가 열린다는 걸 알면서도 토요일 해거름이면 농막 앞뜰은 이미 주차할 곳이 없다. 가마솥에 보신탕을 끓이고, 토종닭을 삶고, 농장에서 자란 호박과 부추를 썰어 부침개를 부치고... 농막은 해가 기울어갈수록 그 구수한 음식 냄새와 웃음소리에 육담이 뒤섞이며 명절 전날의 종가처럼 부산하기만하다. 동기생들이래야 남녀 모두 합해서 고작 130명 남짓한데 늘 그 절반 정도가 참석을 하여 쌓인 그리움과 삶의 희로애락을 풀어 놓는다.
전야제를 마치고 난 아침이면 잠시 정기총회가 열리지만 10분도 채 못 되어 박수 소리로 끝이 난다. 술잔을 주고받다 취기가 오르기 시작하면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방 기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가무를 즐긴다. 그러다가 지치면 오기종기 모여 앉아 묵혀 둔 이야기를 나누며 웃음꽃을 피우느라 여념이 없다. 그렇게 우리들은 밤을 새우고 하루 낮을 보내며 각박한 세상살이의 신고를 풀어내느라 저녁 해가 기울어도 선뜻 자리를 뜨지 못 하는 것이다. 그 자리는 비록 값비싼 음식이 없고 잠자리가 불편하지만 남녀도 빈부도 없고 너와 나의 구별이 흐릿해지는 별천지다. 욕설이 때로는 높임말보다 더 정겹게 들리고 실수가 더 바르게 보이는 그 순간은 모두가 반세기 전의 소꿉친구로 되돌아가 머물러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대부분 6.25 전쟁 중에 태어나 1960년에 모교 초강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충청북도에서 대표적인 산간 지역으로 꼽히는 영동군 심천면 초강리의 들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당시엔 전교생이 7백여 명에 이르렀으니 농촌 지역 학교 치고는 규모가 비교적 큰 편이었다. 일제시대인 1920년대에 세워진 이 학교는 커다란 나무들과 그것에 둘러싸인 낡은 건물이 오랜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우리가 입학을 하여 처음 배우던 교실은 바닥이 흙이요 비라도 오는 날이면 천정 여기저기에서 빗물이 떨어져 받쳐 놓은 양동이나 대야에 고여 넘치기도 했다. 이른 아침 교실에 들어서면 벽면의 나무판자 사이에 숨어 자다가 놀란 박쥐들이 교실 안에서 날아다니다 쫓겨나기도 했다.
운동장 주변이나 울타리에는 살구나무, 벚나무, 목백일홍나무, 감나무, 느티나무 등이 우거져 철따라 꽃을 피우고 그늘을 드리워 우리의 동심을 키워 주었다. 그 그늘에서 우리는 무용과 노래를 배우고, 한글을 익히고, 구구단을 외우며 꿈을 익혔다. 딱지치기, 고무줄놀이, 구슬치기, 진뺏기, 목마타기 등을 하며 우정을 쌓았다. 일제시대에 심어 놓았을 것 같은 커다란 벚나무 가지마다 꽃이 만개하면 울타리 안은 물론 온 마을이 환해졌다. 아름드리 살구나무에 살구가 노랗게 익어 가며 횟배를 자주 앓던 우리들의 허기를 더욱 깊이 자극하였다. 감나무 가지가 휘어지도록 매달린 감들이 가을 맑은 햇살에 단물이 들며 꽃보다 곱게 익었다.
운동장 옆에 있는 실습지에 뽕나무를 심어 해마다 교실을 비워 마련한 잠실에서 누에를 쳤다. 남자 아이들은 주로 뽕잎을 따고 여자 아이들은 누에에 뽕잎을 먹이는 일을 맡았다. 그런데 늘 뽕잎이 모자라 5,6학년 아이들은 야생 뽕나무 잎을 따오라는 숙제를 하기 위해 마을 뒷산을 뒤져야 했다. 그리고 그것을 자루에 담아 어깨에 메고 2십리 길을 걸어가야 했다. 나중에 담임선생님께서 누에고치를 내다 판 돈으로 사서 나누어 주는 공책 두어 권을 받고도 우리들은 며칠 동안 행복감에 젖었다. 학교 안에 있는 교장선생님 사택 마당에는 꿀벌 통이 여러 개 있었는데 벌들은 철따라 피는 꽃에서 꿀을 물어다 날랐다. 그래서 학교 안 곳곳에 날아다니는 꿀벌을 잡다가 쏘이는 아이들이 많았다. 벌에 쏘인 곳이 부어오르면 아이들은 도시락을 열어 반찬으로 싸온 된장을 발라 응급치료를 했다. 우리들은 그렇게 종일 나무와 꽃, 새와 벌과 나비와 어울려 지내며 온몸으로 자연을 배웠다.
우리 고장은 6,25전쟁 중에 추풍령을 넘는 괴뢰군과 이를 막기 위한 국군들이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었다. 그 포화가 가신 지 10년도 채 되지 않은 그 시절에 우리들은 대부분 궁핍한 가정에서 자랐던 것 같다. 특히 산지가 많고 논밭이 적어 식량이 모자라니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하는 가정이 많았다. 그래서 점심 도시락을 싸 갖고 오지 않은 아이들이 절반쯤 되었다. 그 아이들은 점심시간이 돌아오면 냄비를 들고 나와 학교에서 쑤어 주는 옥수수죽을 타 먹고 허기를 달랬다. 반찬도 없이 매일 옥수수죽을 먹자니 맛이 있을 리가 없었지만 아침 식사도 변변치 않게 하고 먼 길을 온 아이들은 시장기를 반찬 삼아 맛있게 먹었다. 도시락을 싸 온 아이들은 죽을 먹는 옆 자리 아이들과 반반씩 나누어 바꾸어 먹기도 하였다. 그렇게 우정과 눈물을 함께 섞어 꽁보리밥과 죽을 먹는 점심시간은 누구도 부러울 게 없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 시절 선생님들의 가슴은 우리들의 배고픔과 추위를 넉넉하게 품어 줄 만큼 무척 넓고 따뜻했던 것 같다. 특히 두루미 둥지 습격 사건을 벌인 철부지 우리들을 감싸 주던 선생님의 손길을 생각하면 아직도 코끝이 찡해진다. 그 시절엔 날씨가 풀리면 각계리 마을 뒷산 노송 숲에 두루미들이 자욱하게 날아와 살다가 가을이면 떠났다. 아마도 농약을 거의 치지 않고 농사를 지어서 두루미 먹이가 풍부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 몇 명이 어느 여름날 두루미 알을 꺼내어 삶아 먹자고 모의를 하여 습격 작전을 개시했다. 그러나 두루미들이 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깍깍거리며 난리를 쳐서 이를 수상히 여긴 마을 사람들에게 들키고 말았다. 이튿날 학교에 갔더니 이 마을에 사는 선생님께서 작전에 가담한 우리들을 교무실로 오라고 하셨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간이 콩알만큼 작아진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우리들을 나무라지 않고 뜻밖에도 빵을 한 개씩 나누어 주셨다. 그리고 두루미를 해치면 마을에 재앙이 드니 아무리 배가 고파도 두루미 알을 삶아 먹으면 안 된다고 일러 주셨다. 그날 빵을 나누어 주며 우리들 까까머리를 일일이 쓸어 주시던 선생님의 눈가엔 이슬마저 맺혀 있었다.
또한 입시를 치루고 중학교 진학을 하던 그 때 진학을 하려는 동급생들은 40명 내외요 그렇지 않는 동급생들이 100명 가까이 되었다. 그래서 6학년 때 오후가 되면 진학반과 비진학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하였다. 비진학반은 다시 여러 반으로 나뉘었는데 양재반은 여자 선생님이, 이발반은 학교내 이발소 주인이, 목공반은 학교 소사 아저씨가, 양봉반은 교감 선생님이 맡아 직업교육을 해 주었다. 나는 담임선생님께서 집까지 방문하여 아버지를 설득하시는 바람에 목공반으로 가려다가 진학반에서 입시 공부를 하였다. 더욱이 2학기가 되니 집이 너무 멀어 공부에 지장이 있다고 당신의 사택에서 머물며 학교를 다니도록 배려해 주셨다. 나는 한 학기 동안 무상으로 먹이고 재우며 개인지도를 해 주신 담임선생님의 덕분에 대전으로 유학까지 할 수 있었다. 후에 내가 교육대학을 나와 5년 동안 초등학교 교사로 청춘을 보낸 것도 담임선생님의 그 뜨거운 사랑 때문이었다.
그렇게 학교엔 선생님들의 사랑이 넘쳤기에 우리들은 매일 산 넘고 물 건너 학교를 오갔으나 힘든 줄 모르고 즐겁기만 했다. 장마철이 되면 강 건너 마을 아이들은 돌다리가 물에 잠겨 학교를 오지 못하여 교실은 절반 가까이 비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공부를 하다가 비가 쏟아지면 강 건너 아이들은 책보를 싸서 일찍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소백산맥 산줄기를 타고 내려온 물은 급격히 불어나기 때문에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앞세우고 강가로 달려가 무사히 건너도록 지도해 주었다. 그 아이들은 비가 그치지 않으면 3,4일씩 학교를 오지 못하고 집에서 강물이 줄어들기를 기다렸다. 다행히 우리 마을은 강을 건너지 않아도 되는 산골에 있었는데 학교에서 가장 멀었다. 어느 날 승용차를 타고 거리를 측정해 보니 7키로미터가 되었는데 당시엔 길이 꼬불꼬불하고 고개를 넘어야 했으니 하루에 왕복 4십리를 걸어서 오갔던 것 같다. 학교 길이 그렇게 멀고 길기에 그 시절의 추억도 아련하고 길게 느껴지는 것 같다.
비좁은 산골에 초가집 마흔 채가 이마를 맞대고 있는 우리 마을의 학생들은 5,6십 명은 족히 되었다. 이른 아침이면 아이들은 마을 어귀 정자나무 밑으로 하나 둘씩 나와 모두 모이기를 기다렸다. 온 마을 학생들이 다 모이면 향우반장의 명령에 따라 1학년이 제일 앞에 서고 학년 순서대로 줄을 맞추어 출발을 하였다. 향우반장은 6학년 남학생이 맡았는데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마을 학생들은 그의 절대적 권력에 복종해야 했다. 걷다가 때로는 하나 둘 셋 넷 구령을 외치거나 노래를 부르라고 하였으나 아무도 '향우반장' 패찰을 늘 자랑스럽게 달고 있던 그의 명령을 어기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마을 아이들이 함께 등교를 하도록 한 것은 먼 등교 길에 안전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학교 선생님들의 묘안에서 비롯된 것 같다.
마을을 떠나 산기슭의 굽은 길을 따라 5리쯤 걷다 보면 산골짜기를 벗어나 왼쪽의 시냇물과 오른쪽의 경부선 철길 사이에 이어진 너른 길을 만나게 된다. 책보를 어깨와 허리를 가로질러 매거나 허리에 동여매고 마치 고지를 향해 진군하는 용사들처럼 나아가던 우리들.... 거의 모두가 검정 고무신을 신고 무채색 무명옷을 입었으나 가슴에 품은 꿈은 길가에 철 따라 새롭게 피어나던 들꽃들보다 더욱 고왔다. 십리쯤 걸어가면 일제시대에 뚫었으나 광복 이후에 그 곁에 새 터널을 뚫어서 기차가 다니지 않게 된 낡은 터널을 지나가야 했다. 그런데 거기쯤에서 향우반장은 잠시 쉬었다가 가라는 명령을 내렸으니 여자애들은 밀밭이나 콩밭 이랑으로 들어가고 사내아이들은 돌아서서 아무 곳에나 오줌을 갈겼다. 날이 추울 때면 그 터널 안에서 마른 풀을 뜯고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불을 지펴 언 손발을 녹이기도 했다. 천정 곳곳에서 늘 물방울이 떨어지고 겨울이면 고드름이 길어 내리는 그 터널은 우리들에게 눈비를 피하고 더위를 식힐 수 있는 참으로 유용한 휴식처였다. 그러나 가끔은 거지들이 머물고 있어 어린 우리들은 발자국 소리를 죽이며 그 곁을 지나기도 하는 두려운 곳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늘 그곳에서 발생했으니 이따금 몇 아이들이 소변을 보러 간답시고는 강가로 내려가거나 산 위로 올라가 오지를 않았다. 그리고는 그 근처 어디에서 놀다가 도시락을 먹고 다른 아이들이 돌아올 때를 용케 알고 나타나 함께 귀가를 했으니 부모님들은 그들이 학교에 다녀온 줄로만 알았을 것이다. 그렇게 '중간학교'를 하는 아이들은 숙제를 미처 해오지 않아 선생님께 받을 꾸지람을 걱정하는 아이들이었다. 부모님들은 모두 농사에 바쁘고 형제들이 많으니 숙제를 하도록 지도해 줄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귀가 후에도 소를 뜯기거나 풀을 베는 일이라도 도와야 하는 형편이었으니 숙제를 못하는 아이들이 많은 것은 당연하였다. 나의 이웃에 살던 동급생 녀석은 7남매 중 막내였는데 자주 '중간학교'를 하더니 결국 5학년을 다 마치지 못하고 말았다. 그렇게 일찍부터 책과 담을 쌓은 그 녀석은 부모님으로부터 논밭을 물려받아 친환경 과수원을 경작하며 성실한 농부가 되어 살고 있다. 못 생긴 나무가 숲을 지키듯 그 녀석은 부모님을 극진히 모시며 평생 고향을 곧게 지켜 왔다.
터널 안에서 잠시 쉬면서 전력(?)을 가다듬은 우리들은 이전에 터널을 지나는 철길이었던 농로를 따라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겨울철이면 들판 끝에서 얼어붙은 강을 건너오는 칼바람을 이기지 못한 저학년 아이들은 종종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구멍 난 목양말과 고무신을 신고 돌부리에 채여 넘어지며 가는 그 고행 길은 엊그제까지 재롱이나 피우고 놀던 저학년들에게 너무 버거웠던 것이다. 그럴 때면 고학년 언니들은 아이들 눈물을 닦아 주며 책보를 대신 들어 주고 함께 손을 잡고 걸어갔다. 그렇게 학교를 오가며 우리들은 어려움을 당하면 참고 이겨야 한다는 것과 서로 도우며 살아야 한다는 걸 몸으로 배우고 익혔던 것이다. 아무튼 가장 먼 산골에서 살던 우리 마을 아이들은 해마다 열린 향우반 체육대회에서 늘 종합우승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여러 아이들이 씨름이나 육상 분야의 학교 대표 선수로 뽑혀 대회에 나가 상을 타 오곤 하였다.
귀가를 할 때는 학년마다 끝나는 시각이 다르기 때문에 아이들이 모두 모여 등교하던 아침과 달리 동급생들만 함께 귀가하였다. 우리 마을에 사는 동급생들은 남자가 6명이요 여자가 10명 남짓 되었으니 여자 아이들이 남자들보다 더 많았다. 전쟁 중에 태어난 여자 아이들 몇 명이 취학 연령이 되어도 입학을 않고 있다가 뒤늦게 한꺼번에 입학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여자 아이들 중에는 남자들보다 서너 살 많은 아이도 있었고 심지어 동급생이 되어 한 교실에서 공부하는 자매들도 있었다. 그렇게 우리들은 나이와 성이 다르지만 6년 동안 늘 함께 생활을 하다 보니 형제나 오누이처럼 깊은 정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함께 웃고 울면서 만든 추억을 원형질처럼 간직하고 있기에 언제 만나도 반갑고 쉽게 그 시절로 되돌아 갈 수 있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갈 때는 모두 하루 일과로 지치고 허기가 졌으나 학교 시작 시간에 맞추느라 걸음을 재촉하던 등교 때보다 마음이 여유로웠다. 우리들은 냇가 모래밭에 앉아서 소꿉놀이를 하거나 물놀이를 하였으니 냇물과 산이 모두 놀이터요 자연학습장이었다. 운이 좋은 날은 중간 마을에 사는 친구네 집에 들러 고구마나 밤 또는 과일 등을 얻어먹기도 했다. 2십리 길을 왔다가 옥수수 죽이나 꽁보리밥으로 점심을 먹고 다시 먼 길을 가는 우리들에게 길 주변의 풀과 나무들은 모두 맛있는 먹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철이 바뀔 때마다 진달래꽃, 아카시아꽃, 찔레순, 삘기, 개암나무 열매, 산밤, 오디, 산딸기 등이 우리들의 빈 배를 채워 주었다. 그것들이 먹거리가 된다는 것을 누가 특별히 가르쳐 주지 않았으나 산골에서 나고 자라는 동안 자연히 알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학습은 완전하지만은 않았다. 4학년이 된 어느 날 우리는 터널을 빠져 나가는 큰길로 가지 않고 산길로 가기로 했다. 그 길은 중간에 있는 마을에서 갈라져 '가막재'라는 산고개를 넘어 산기슭으로 꼬불꼬불 이어지는 좁은 오솔길이었다. 그리고 고개를 넘어야 하고 험하지만 옛날에 숯을 굽는 가마가 있었다 하여 '숯가마골'이라 불리는 곳에 사는 동급생 둘에게는 지름길이었다. 그래서 가끔씩 그 아이들의 의사에 따라 가막재를 넘어 산길로 가기도 하였다. 산기슭으로 이어지는 그 길 주변에는 큰길에서 볼 수 없는 것들이 많았는데 제법 큰 야생 복숭아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이른 봄에 연분홍 꽃이 곱게 피었다가 진 가지엔 복숭아가 주렁주렁 매달려 우리의 입맛을 돋우었다. 그 날은 유달리 배가 고픈 탓이었을까. 두어 명이 나무에 올라가 풋내가 채 가시지도 않은 야생 복숭아를 따 내렸다. 그리고 산골 개울물에 씻는 둥 마는 둥 하여 배가 부르도록 먹었다. 나 역시 그것을 맛있게 먹고 집에 돌아왔는데 갑자기 뱃속이 부글거리더니 창자가 끊어질 듯 아프기 시작했다.
밤새 앓던 나는 이튿날 날이 새기도 전에 아버지 등에 업혀 읍내에 있는 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받았다. 통증이 가시지 않아 사흘 동안 입원을 하고 돌아왔으나 워낙 심하게 앓아 한 주일쯤 학교를 가지 못하였다. 그런데 숯가마골에 사는 친구는 나보다 더 심하여 읍내 병원에서 치료를 하다가 대전에 있는 큰 병원으로 옮겨 입원을 했다. 그리고 보름이 넘어도 돌아오지 않더니 끝내 먼 길을 떠나고 말았다. 나중에 소문으로 알았는데 아직 익지 않아 독기가 남아 있는 야생 복숭아를 먹자 배 안에 있는 회충이 놀라 한꺼번에 요동을 쳤다는 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들 때문에 창자가 막혔다가 터져 끝내 치료를 못하고 운명을 달리 했다니 함께 그걸 먹은 나는 천운을 맞은 셈이었다. 아무튼 6.25전쟁 때 참전하였다가 오른 팔을 잃은 아버지를 돕는다고 늘 귀가를 서두르던 착한 친구는 우리 곁을 그렇게 떠나고 말았다. 그 후로 우리들은 한 동안 가막재를 넘어가지 않았으며 친구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몇 해가 지나도록 우리들을 보면 붙잡고 울음을 감추지 못하였다.
위험한 것들은 그 산길에만 도사리고 있는 게 아니었다. 6.25전쟁이 남긴 여러 가지 폭발물들이 곳곳에 묻혀 있다가 모습을 드러냈다. 선생님들께서는 늘 폭발물을 보면 절대 만지지 말고 학교나 경찰서로 급히 연락을 하라고 누누이 일러 주었다. 그러나 한창 새로운 것에 눈을 뜨기 시작한 철없는 우리들의 호기심을 막기에 역부족이었나 보다. 가끔씩 아이들이 폭발물 사고로 크게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듣곤 했다. 특히 높은 산에 둘러싸인 우리 마을 주변의 계곡이나 전쟁 때 파 놓은 참호 주변에는 아직도 탄피나 수류탄 또는 그 파편이 많이 남아 있었다. 우리들은 휴일이나 학교에서 일찍 돌아오는 날이면 자루를 들고 그것을 주우러 다녔다. 과자나 사탕이 귀하던 시절에 우리 입을 즐겁게 해 주던 최대의 먹거리인 엿과 바꾸어 먹기 위해서였다. 그것들을 주우러 다니다 보면 간혹 흙속에 묻혀 있다가 장맛비에 떠내려 온 이름도 모를 수류탄이 눈에 띄곤 하였다. 대부분 줍지 않고 내버려 두었으나 겁 없는 아이들은 그걸 주워 오다 부모님들께 들켜 혼이 나곤하였다.
그런데 어느 여름 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냇물에서 목욕을 하다 물 속 모래에 절반쯤 묻혀 있는 수류탄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길이가 한 자쯤 되고 다듬이 방망이 모양처럼 생겨 우리가 방망이 수류탄이라 불렀다. 그리고 학교 길이나 마을 근처에서 흔히 발견되곤 했기에 눈에 익은 것이었다. 그 때는 여러 학년 아이들이 함께 물놀이를 하는 중이었는데 의협심이 강하고 말썽꾸러기로 소문난 6학년 형이 그것을 보고 그냥 두지를 않았다. 녹이 슬고 조금 쭈그러진 그 방망이 수류탄을 돌 위에 올려놓고 작은 돌로 두드렸다. 나머지 아이들도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 궁금하여 빙 둘러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몇 차례 두드렸을까. 한 쪽이 약간 쭈그러지고 작은 구멍이 나더니 잿빛 액체가 흘러나왔다. 한 아이가 겁먹은 목소리로 화약 냄새가 난다고 하자 두드리던 형이 그것을 냇물로 던졌다. 지켜보던 아이들이 반사적으로 모래밭에 엎드려 그것이 가라앉은 냇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과 눈 깜짝할 사이에 엄청난 폭발음이 나면서 물기둥이 건너편 산 높이만큼 치솟아 오르고 물 속에 있던 돌들이 함께 날아올라 여기저기 떨어졌다. 혹시 누가 다쳤을까 싶어 둘러보니 모두들 숨을 죽이고 엎드려 있을 뿐 다행히 모두 무사하였다.
우리는 모두 기가 질려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주섬주섬 옷을 입고 마을로 달려왔다. 그런데 그 폭발음이 읍내까지 들렸는지 뒤늦게 달려온 경찰이 우리들의 행방을 좇아 마을로 왔다. 그리고 그것을 두드리던 형은 물론 함께 있던 아이들이 모두 부모님 손에 이끌리어 마을 입구로 불려 나왔다. 경찰관 아저씨는 어디에서 누가 주웠는지, 누가 두드렸는지, 그리고 터지던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물었다. 그리고는 호된 꾸지람을 하고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당부하고 떠났다. 하마터면 마을 아이들 여럿이 떼죽음을 당할 뻔했던 그 사건의 자초지종을 들은 부모님들은 모두 놀라움과 안도감을 감추지 못하였다. 집으로 돌아오자 어머니와 아버지께서는 아직도 떨고 있는 내 손을 잡고 거듭거듭 주의를 주셨다. 그 날 이후 며칠 동안 나는 자다가 헛소리를 하는가 하면 몸에 열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래서 어머니께서 급히 읍내로 달려가 사다 주신 약을 먹고 놀란 가슴을 달래며 잠이 들곤 하였다.
그런데 그 수류탄 폭발 사건이 일어난 냇가는 한편으로는 늘 우리들의 즐거운 놀이터였다. 낡은 터널이 있는 산자락 끝의 절벽 아래로 흐르던 그 냇물엔 초강리의 넓은 들에 물을 대기 위해 보가 막혀 있었다. 그래서 제법 깊은 곳도 있었고 건너편에는 넓은 모래밭이 있어 여러 모로 놀기에 편리하였다. 돌을 쌓아 만든 보를 밟고 건너가 옷을 벗어 놓고 물놀이를 하였다. 우리들은 그곳에서 물놀이를 하는 중에 자연스럽게 걸음마 익히듯 헤엄치는 법을 배웠다. 뿐만 아니라 그 물에는 갖가지 물고기들은 물론 조개, 다슬기, 새우 등이 살고 있었다. 물 속에 들어가 가만히 잠겨 있으면 고기떼들이 살 냄새를 맡고 주변으로 몰려와 맨손으로도 잡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발로 물 밑바닥의 모래에 이랑을 내면 숨어 있던 조개들이 나와 손쉽게 많이 주울 수가 있었다. 그리고 물 깊이가 얕은 곳에서 몇 명이 모여 피라미떼를 쫓으면 물풀 속으로 숨어들어 두 손으로 더듬어 그걸 잡곤 하였다. 그렇게 우리들은 물과 그 속에 깃들어 사는 여러 생물들과 하나가 되어 물처럼 맑고 피라미처럼 여린 동심을 키웠는지도 모른다.
그곳에서 누리는 것은 물놀이의 즐거움만이 아니었다. 매주 토요일 오후면 읍내에 주둔해 있던 미군통신부대 트럭이 모래밭 구석에 쓰레기를 버리고 갔다. 우리 마을 아이들은 그런 토요일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학교가 파하는 대로 다투어 쓰레기장으로 달려갔다. 남보다 먼저 도착해야 좋은 쓰레기 보물(?)을 주울 수 있기 때문에 그날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쓰레기 더미엔 노다지를 찾으려는 아이들이 꼬챙이를 들고 뒤적거리느라 붐비고 있었다. 오렌지 껍질, 우유 팩, 빈 깡통, 화장지, 커피, 잡지, 면도날 등..... 그곳에서 발굴하는 것들은 당시의 우리들에게 무척 생소하고 귀하기만 했다. 어쩌다가 껍질도 까지 않은 채 버려진 오렌지나 쵸콜릿이라도 찾으면 큰 횡재라도 한 것처럼 자랑을 하며 나누어 먹었다. 그렇게 대를 이어 산촌에 갇혀 살던 무지렁이 후예들은 바다를 건너 온 외국의 선진 문물을 미군이 버리고 간 쓰레기 더미에서 처음 만나고 맛을 보았던 것이다.
그 귀한 보물들을 정성껏 싸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날은 지친 우리들의 발걸음도 가볍기만 했다. 어머니는 오렌지 껍질을 실에 꿰어 처마 밑에 걸어 말려 두고서 감기에 걸릴 때면 끓여 그 국물을 마시라고 하였다. 우유 팩과 잡지의 종이는 무엇보다 훌륭한 딱지가 되고, 면도날은 연필을 깎는 칼로 쓰였다. 총천연색 사진과 알 수 없는 문자들이 인쇄된 두툼한 잡지의 종이로 사랑방 벽에 도배를 하기도 하였다. 빈 깡통은 연필꽂이나 재떨이로 쓰거나 끈을 달고 구멍을 뚫어 불놀이 할 때 사용하였다. 병 바닥에 조금 남아 있던 커피는 무엇인지 그 이름조차 몰랐지만 쓴 게 약이 된다고 몸에 부스럼이 생기면 발랐다. 심지어 머리가 아프면 물을 끓여 그것을 타서 먹었으니 약이 귀하던 그 시절에 만병통치약으로 쓰인 셈이었다. 그게 미군들이 즐겨 마시는 차의 일종인 커피였으리란 것을 비로소 짐작한 때는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였던 것 같다. 요즘도 커피를 마시다가 쓰기만 하던 그 커피 두통약(?)을 펄펄 끓여 복용하던 게 생각나서 홀로 미소를 지어 보곤 한다.
운동회 날이 되면 만국기가 휘날리고 응원가 소리가 높푸른 가을 하늘을 울리던 그 초등학교엔 이제 5,6십 명이 남아 있다고 한다. 각계리 뒷산을 찾아와 둥지를 틀고 알을 낳던 그 많던 두루미 떼는 어디로 가서 찾아오지를 않는지.... 늘 오가던 학교 길엔 늙은 농부가 경운기를 몰고 이따금 다닐 뿐 아이들의 행렬은 사라졌다. 장맛비가 조금만 내려도 건너지 못하던 그 냇물에는 튼튼한 시멘트 다리가 4곳이나 놓였다. 커피가루로 부스럼을 다스리던 나는 요즘 하루에도 커피를 몇 잔씩 습관처럼 마시곤 한다. 그런데 아카시아꽃으로 주린 배를 채우고 찢어진 검정 고무신을 기워 신고 눈길을 걸어 학교를 가던 그 시절이 다시 그리운 것은 무슨 까닭일까. 까까머리와 단발머리가 반백이 되었으나 가슴 밑바닥에 깊이 새겨진 그 반세기 전의 흑백 영상들은 총천연색으로 되살아난다. 부족하고 아쉬운 게 많아 더 풍요롭고 행복했던 시간 속에 오래 머물게 한다.
우리들은 춥고 배고프던 그 시절을 함께 울고 웃으며 적은 것으로도 행복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익혔다. 학교 길에 지천으로 핀 꽃들을 보며 화려한 것들이 아니어도 삶을 아름답게 엮어 갈 수 있다는 것을 체득했다. 갑자기 귓전에 거센 방망이 수류탄의 폭발음이 들리고 높이 치솟던 물기둥이 어른거린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동기생 몇 명이 서둘러 우리 곁을 떠났다. 그때마다 우리들은 피붙이들처럼 누구보다 먼저 빈소로 달려가고 눈물을 흘리며 고향 선산까지 동행하였다. 박쥐가 날아다니던 교실에서 맺어진 우리들의 질긴 인연이 오늘까지 이어졌으니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고향 강기슭의 친구네 농막엔 오래오래 흘러간 옛 노래가 울려 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