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7년 05월호 > 작가 > 표지작가
COVER ARTIST
이두식
Lee, Doo Shik
韓國性 농축한 <生의 起源>부터 <祝祭>까지의
환타지한 色彩의 美學 돋보여
김남수 / 미술평론가
세계의 畵聖들은 각기 자기만의 언어와 예술양식, 주제와 정신주의를 공인 받고 있다. 한마디로 그 누구도 닮지 않은 자기만의 개성과 예술세계를 창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레오나르드 다빈치나 렘브란트, 세잔느, 반 고흐, 피카소, 샤갈 등 세계의 50대 화성들은 그들만의 고유한 자기언어, 개성주의 등 그 누구도 닮거나 대신할 수 없는 창조적인 세계를 가지고 있다. 또한 앤디 워홀이나 제니퍼 죤스, 자 코메티 등 현대작가 등도 그 모두가 자기만의 오리지날리티를 가지고 있다. 탄생도, 노화현상도 질병도 죽음(생노병사) 등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이 실존주의가 주창하는 4대 극한상황이다. 창작의 세계도 그렇다. 모방이나 카피, 이령비령한 모사나 표절 따위는 이미 예술과 창작의 세계를 떠나버린 것이다. 종교와 예술이 위대한 것은 창조적인 진솔하고 절박한 힘의 원천 때문인 것이다.
한국미술은 지난 30년 동안 아무런 여과나 검증없이 무분별하게 수용해 버린 외래문화에 대한 편향된 시각 때문에 의식있는 일부 작가들을 제외하고는 우리 미술이 실종의 위기를 맞기도 했었다. 특히 양화의 경우 그 정도가 심각하여 무국적의 예술, 서구주의 아류, 서구미술의 종속개념으로 신랄한 비판이 가해질 만큼 일부 미술사가나 전문가들의 구설수에 휘말려 膾炙되기도 했다. 지난 88년 올림픽 문화축전 등 미술문화의 국제화 시대를 맞으면서 우리미술은 그 허구성이 노출되었고, 우리는 양화의 종주국인 그들에 의하여 가혹한 비판과 함께 철저한 배척을 받는 등 한 때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 그들의 지적은 “획일적인 서구화에 놀랐다. 왜 한국인의 몸에 서양 옷을 입고 있는가” 등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최근 일련의 세계적 규모의 국제교류전 등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른바 세계시장에서의 한국성의 옳은 평가와 이들 작가들에 대한 인기와 관심의 고조가 바로 이를 말해 주고 있다.
작가 이두식은 표현주의 성향의 한국현대미술의 예술양식에서 가장 인기있는 작가로 부상하고 있다. 많은 평자들에 의하여 높은 평가와 열렬한 찬사가 보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그만의 독자적인 예술양식, 그 누구도 닮을 수 없는 그의 예술성 때문이다. 지난 93년 11월16일 부터 12월 10일 까지 가졌던 묵, 시공, 스타, 이목 등 네 개 화랑의 연작 발표전의 평문 일부에서 평론가 오광수씨는 ‘흔히 드로잉적이면서 표현적인 세계에서 감지되는 음악성은 이두식의 경우에 적절한 예를 만들고 있다. 그의 작품 앞에 서면 세미 클래식을 듣고 있는 듯한 경쾌하면서도 들뜬 분위기를 접하게 된다.
흐르고 맺히는 선의 유동과 응집, 분수처럼 뿜어 오르는 감성의 파열, 펄펄 뛰는 색채의 고동, 자동기술적인 몸짓의 자적,여기서파생 되는 충동적 표현의 절정은 그대로 춤의 광란, 엑스타시스의 경지로 이끌어 간다. 그런 만큼 그의 작품은 본능적이라 할 수 있다. 때때로 에로티시즘을 적용시키는 경우도 같은 문맥에서 일 것이다. 자지러지는 색채의 열기 속에 녹아 흐르는 이미지, 서서히 녹아 흐르다 멈춘 어느 상태, 이미지의 파편들, 그것들은 토막난 여체의 관능적인 부위들, 또는 곤충과 식물의 은유적인 형상들이다. 모든 사물이, 모든 세계가 녹아 흘러 일체가 되는 경지,일러 법신의 영역이다.
화려하지만 단순한 장식적 기능으로 빠지지 않은 것도 어쩌면 이같은 끊임없는 생성현상을 표현의 결구로 이끌어 가기 위한 때문일 것이다. 회화가 갖는 가장 본질적인 요소, 표현의 욕구가 끊임없는 생성현상을 동반하는데 그의 회화가 갖는 참다운 매력을 발견하게 된다’ 라고 격찬하고 있다. 시각적으로 나타나는 감성적인 현상세계를 한치의 틈새를 주지 않고 모자람이 없이 표현한 구절이다.
사실 작가 이두식의 회화세계는 형식이나 규제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조형세계를 연출하고 있다. 마치 신기에 들린 무녀처럼 신명나는 자유의 미학을 구가 하고 있다. 색채의 마술사처럼 판타지한 오방색의 응축과 확산을 동반하면서 종횡무진 화려하게 화면을 수놓고 있다. 그의 화면을 응시하면 속도감 있는 강렬한 붓놀림의 운동감을 머리에 떠올리게 되고 살아 꿈틀거리는 생명력이 轉移해 오는 희열을 만끽할 수가 있다.
그러나 필자는 그의 회화세계에 대한 정신과 주제, 양식상의 문제 등이 평자들에 의해 깊이 언급되지 않고 있는 아쉬움이 항상 여운처럼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한국성 회화를 한국화로만 국한시키려고 하는 전통적인 관행이나 시각, 한국화와 양화를 굳이 차별성을 두고 논의 하려고 하는 선입견 등이 그것이다. 그동안 우리 화단에는 한국성을 추구해 온 양화작가들이 상당 수가 있다. 박수근의 아낙네들이나 이중섭의 황소, 김흥수의 한국 여인, 유화 속에 먹색을 주조로한 字化美術을 전개하는 한봉덕, 향토색 짙은 변시지의 풍경, 아름다운 한국의 산하를 조형화한 이한우의 강산 등 일일이 그 수효를 지적할 수는 없지만 어쨌던 이들 작가들이 세계미술시장에서 인정을 받거나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작가 이두식이 세계적인 작가로 부상한 것은 그 작품 속에 농축된 한국성 때문이다. 얼핏 보기엔 그의 화면이 추상 표현주의 경향의 단순한 색채화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그를 선택한 세계의 화상들은 투자가치에 대한 높은 안목을 가지고 있으며, 작가의 선택에 냉엄한 판단을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그가 외국화랑과 옥션을 맺는다든지 로마 중심의 지하철 역사에 벽화를 그리는 작가로 선정되었다든지 하는 것 등은 단순한 외형적인 미감의 충동만으로는 불가능하며 그들과 접목이 가능한 또다른 차별성(한국성) 이 그들을 매료시켰기 때문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두식의 작품세계가 한국성이 함축된 예술이라는 것을 또 다른 시각에서 관찰을 해보는 것도 흥미있는 일이며, 한국미술의 세계진출을 위한 가교적 지평이 되리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미술평론가 윤진섭씨는 월간미술 93년 8월호에서 ‘전략.... 90년대 들어서 불기 시작한 ‘이두식 신드롬’ 현상을 놓고 봐도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안타깝게 하는 것은 그의 작업에 대한 본질적 이해나 작업의 의미 및 가치에 대한 분석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글은 이와같은 비평적 요구로 부터 비롯된다. 필자가 이두식의 약 20년에 걸친 작업 성과를 검토하면서 얻은 결론은 그야말로 ‘전통의 현대적해석’ 이라는 한국 현대미술의 현안과제에 근접한 작가라는 사실이다. 그의 작업에 대한 기존의 평가와는 각도를 달리 하는 이와같은 견해는 다음 두가지 사항에 기인한다. 색채와 운필이 그것이다. 이 두가지 요소는 이두식 회화세계의 요체라 할 수 있는데, 결과에 따라서는 한국현대미술사의 커다란 분수령을 그을 수 있는 부분으로 여겨진다.- 무속적 내음 물씬 풍기는 초기추상,-<祭 > 68 신상전의 최고상을 수상할 무렵, 그의 추상작품을 관류하는 색조는 오방색< 빨강,파랑(녹색) 노랑, 검정, 흰색> 으로 이루어진 그의 초기 작품들은 추상표현주의적인 양식을 갖추었으며 무속적인 내음을 짙게 풍긴다. 중략...
대략 8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그는 추상표현주의라는 현대적 표현양식에 무속, 단청, 탱화같은 전통적 문화형식을 접목시키는 작업에 몰두했다. 중략.....
문인화적 운필과 여백의 미 -<도시의 축제> - 그는 색을 사용할 때 먼셀 색채계상 채도10 이상의 원색을 이용하는데 이는 기존의 단청이나 무신도에 사용하는 거의 유사한 색이다. 따라서 그의 그림에서 청,적, 녹,황 등 원색의 사용이 극소화 될 수록 개인적인 담론들이 구상의 형태 (얼굴,여체, 잠자리, 계단) 따위를 갖춰 보다 큰 비중으로 나타난다. 90년대 들어와 이두식의 화면은 점점 밝아지며,색채는 보다 경쾌해 진다. 잠자리로 대변되는 그의 비상의 이미지는 화면을 비우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한편으로<생의 기원>인 연작에서 시도했던 묵의 운필을 끄집어 낸다. 그가 보여주는 일필휘지의 운용은 유연함과 회화적 재치를 지니고 있다. 90년대 들어서는 그는 문인화적인 방법론을 차용하고 있다.
포도 그림이나 연꽃, 사군자 가운데 매화와 국화가 그것이다. 그의 운필이 지닌 활달함과 경쾌함, 그리고 분방함은 테레핀유에 묽게 푼 아크릴 안료가 이루어 내는 선염의 번짐과 함께 동양화의 방법론을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한 예가 될 것이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윤진섭씨의 세심한 관찰을 통한 이 비평문은 많은 공감과 설득력이 주어지고 있다. 작가의 작품을 관찰하는 방법은 평자의 주관적 해석이나 시각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이두식의 경우 작품과 관련하여 본말이 전도되거나 잘못 이해되는 부분이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지만 미처 발견되지 못한 부분을 새롭게 조명한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된다.
필자가 주장하는 그의 작품세계는 앞서도 지적했듯이 양화적인 매재를 사용하고 있지만 한국적인 주제와 정신을 담을 때 한국성의 표현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사실을 작가 이두식이 실증으로 보여준 것이며, 또한 양식상의 기법문제까지 한국성에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 그동안 우리가 간과해 버린 점이라는 사실이다.
그의 작품에서 꽃이나 물고기, 곤충류의 영상들이 하나의 이미지로 떠오른다고 해서 한국성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은 온당치 않으며 정신과 소재와 기법을 종합할 때 서양의 것보다는 훨씬 한국성에 접근하고 있다는데서 내린 결론이기도 한 것이다.
그의 작품집의 서문을 쓴 현대미술사가 윤난지씨는
“전략....이같은 효과를 배가 시키는 또하나의 측면은 물감의 자연발생적인 번짐과 빠른 필치라는 극사실 기법과는 이질적인 방법이 병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요소들 또한 서구의 서정적 추상미술과 동양화가 만나는 지점이다. 특히 대담한 생략과 넓은 여백은 문인화에 대한 그의 공감이 지속되고 있음을 반영한다. 치밀한 사실묘사 기법에 의한 구체적 형상과 즉흥적 붓놀림에 의한 추상형상이라는 이질적인 요소들이 결합된 화면은 우리에게 독특한 경험을 유발한다.
보는 이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는 표현적인 효과외에 우리가 주시하여야 할 것은 이 두 요소가 대비 관계일 뿐만 아니라 공통의 기반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씨앗과 잎사귀, 꽃, 열매, 여체의 부분들은 생명체를 묘사한 것 뿐만 아니라 유기체의 탄생과 성장의 과정 자체를 은유한다. 자발적인 필치와 물감이 만나서 이루어내는 번짐과 흐름, 갈필의 효과들 또한 작품의 탄생과정을 자연의 그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한 결과이다.
結 論
훌륭한 작가가 되는 길은 스스로 발견하거나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세계적인 화가가 되는 것은 역사와 시대가 만들고 전문가에 의해서 발굴되는 것이다.
이제 한국미술은 국제성과 따로 떼어 놓고 논의 할 수 없는 상황까지 와 있다. 굳이 내 것이라는 애정과 향수만을 누린다면 세계적인 고아로 버림을 받을 수도 있다. 비록 한국적인 것이지만 그들과 집요한 접목과 공존을 통하여 세계성을 획득해야 한다. 그것이 회화든, 공예든, 디자인이든 차별성을 갖지 않는 것이 세계미술의 추세다.
작가 이두식은 비록 유화로 작업하는 한국 화가이지만 그의 예술이 세계성을 획득하고 있는 것은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 했다는 데서 큰 의미를 갖는다. 그는 지난 95~98년 까지 한국현대미술순회전을 이탈리아, 독일, 헝가리, 터키, 폴란드, 스위스, 영국, 오스트리아, 프랑스, 일본, 벨기에, 아일랜드, 케냐, 남아프리카공화국, 튀니지 등에서 가졌으며 그의 작품은 세계 여러나라에 소장되어 있다. 한마디로 세계적인 미술가로 공인을 받고 있다는 뜻이 된다. 그의 새로운 가능성과 잠재력에 많은 기대를 걸어본다.
삶의 에너지를 응축한 현란한 선의 유희
신항섭 / 미술평론가
인간 삶의 동력은 무엇인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건강한 신체이다. 신체가 강건하면 그를 집으로 삼는 정신 및 감정 또한 건강하게 마련이다. 예술이란 정신 및 신체의 조화로써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그렇다. 예술은 신체적인 행위를 통해 구체화되며, 그 신체적인 행위를 주도하는 것은 정신이고 감정이다. 이렇듯 신체를 사역하는 것은 정신 및 감정이지만 이는 신체를 통해 존재할 수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우리를 감동의 세계로 이끄는 아름다운 예술의 꽃은 강건한 신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두식의 작업은 삶의 에너지로 넘친다. 그러기에 보는 이로 하여금 짜릿한 시각적인 체험을 맛보게 한다. 무엇보다도 활기차게 전개되는 동적인 선과 강력한 원색적인 색채이미지가 한데 어우러지면서 뿜어내는 에너지는 감성을 자극하고 정신을 긴장시킨다. 구상이냐 추상이냐, 혹은 아름다우냐 추하냐, 그리고 그 내용은 무엇이냐의 문제를 떠나 강렬한 시각적인 이미지가 감정을 움직이는 힘으로 작용한다.
이렇듯이 그의 그림은 감상자에게 거기에 반응하고 그림이 담고 있 는 내용을 음미할 수 있는 시각적인 여유를 두지 않을 정도로 직접적이고 직설적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일종의 미적인 쾌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을 통해 그처럼 강렬한 인상을 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원색적인 색채이미지와 활기찬 선의 흐름은 감상자에게는 피할 수 없는 유혹이다. 그러나 미적인 감동은 시각적인 자극만으로는 일어나지 않는다. 여러 가지 조형적인 요소가 적절히 조합되어 조화로운 관계를 형성하고 있을 때 미적 감흥을 유발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튼 그의 그림에는 열정적인 삶의 에너지가 유달리 강하게 느껴진다.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 의식적인 사고 및 행위의 결과인가. 아니면 그 자신의 내부에 잠재된 삶의 열정과 에너지가 무의식적으로 그림을 통해 표출되는 것일까. 그의 일상적인 삶을 지켜보면 결코 의식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선천적으로 열정의 화신과 같은 왕성한 활동력과 체력을 가지고 태어났다. 화가와 대학교수 이외에도 한국미협 이사장을 지냈는가 하면 홍익대 미대학장을 역임하고 있으며 뒤늦게 일본 교토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미술 외적인 다양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하루 수면시간이 4시간을 넘지 않을 만큼 시간을 쪼개어 쓰고 있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지치는 기색이 없다. 하지만 작업량은 그 누구보다도 적지 않다. 화가야말로 본업이라는 직업정신에 투철하다.
그가 그림에 얼마나 투철한지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글씨를 쓰고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즉, 손에서 붓을 놓지 않는 것은 항시 그림을 그릴 태세를 갖추고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의무감에서든 또는 어떤 동기에 의해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충동이나 미적 감흥이 일어날 경우에는 거기에 즉시 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태도이다. 그러고 보면 그는 천상 화가일 수밖에 없다. 직업정신에 투철한 진정한 프로인 것이다. 그의 그림은 바로 이와 같은 타고난 삶의열정과 강인한 체력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어쩌면 그의 작업은 조형적인 아름다움 및 의미내용을 천천히 음미하기보다는 감성적인 접근이 용이한지 모른다. 그의 그림에는 그처럼 자극적인 요소가 많은 까닭이다. 발랄하고 경쾌하게 움직이는 선의 형태 및 흐름이 그러하고, 격정적인 원색 이외에도 다양한 색채가 만들어내는 점이나 색반이나 색면 그리고 여러 가지 자연물상의 형상이 공존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그처럼 다양한 이미지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조형적인 논리는 일목요연하다. 오랜 동안 동일한 패턴의 작업을 지속하면서 단지 조형적인 변주를 통해 표현영역을 확장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이는 그림에 대한 확고한 자기 신념의 증표이다.
그에게 그림은 일상적인 사건의 하나에 불과한지 모른다. 다만 정해진 하루의 일과처럼 기계적인 행위의 결과로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경건한 의식과 같은 무게로 진행된다. 그리고 어떤 일, 어떤 상황에 있거나 항상 열린 감성으로 세상과 마주함으로써 일상적인 사건들이 그림의 내용과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형태로 연관성을 갖는다. 일상적으로 보고 느끼며 생각하는 것들이 작품 제작을 위한 동인이 되고 때로는 제재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와 같은 일상적인 일들에 의해 자극되는 미적 감흥 또는 창작충동은 엄격한 내적 질서를 따른다.
그의 그림에는 인물을 비롯하여 누드 새 물고기 잠자리 자전거 따위의 다양한 물상이 전제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크로키의 이미지를 넘지 않는 최소한의 형태에 한정한다. 그러기에 추상적인 이미지가 주도하는 상황에 아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추상에 대립적인 이미지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화면에 시각적인 긴장과 활기를 불어넣는 미점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가 추구하는 조형세계의 원칙 또는 큰 틀은 생동감을 포함하여 동양사상 그리고 한국적인 정서로 요약된다. 그리고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자연물상에서 받아들이는 형태미와 생기가 넘치는 공간 또는 여백, 그리고 오방정색으로 함축되는 음양오행사상 및 한국적인 정서가 조화를 이루는 세계이다. 그러면서도 시각적인 이해를 별다른 어려움이 없는 보편적인 조형언어 및 어법을 갖추어야 한다는 요구를 충족시킨다. 설령 추상과 구상을 혼합한 형태라는 이중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을지언정 결코 난해하지 않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실제로 그는 감상자에게 일방적으로 창작의 권리만을 내세우는 강압적인 태도는 취하지 않는다. 적어도 그림에는 볼거리와 읽을 거리, 그리고 사유의 문고리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부분적으로 구상적인 이미지를 도입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것은 어쩌면 현대미술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친절이자 배려일 수도 있다. 따라서 그림에 대한 선호도가 높은 대중적인 인기작가로 부각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아니, 대중적인 인기뿐만 아니라 국제무대에서의 활약상과 그에 따른 성과는 단순한 국내용 작가로서의 한계를 벗어나고 있다는 구체적인 증거이다.
그의 작업은 점 선 면 색채 균제 비례 조화 통일 따위의 조형적인 요소 하나 하나가 한결같이 생기 넘치는 이미지로 귀결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는 선명하면서도 명쾌하며 명확한 이미지 및 색채와 무관하지 않다. 다시 말해 모호하거나 애매하게 표현하는 부분이 없을뿐더러 모든 표현적인 이미지에는 자기 확신에 차 있다. 자기 확신은 자신의 작업에 대한 확고한 신념에 근거한다. 실제로 그는 초기부터 일관된 조형적인 사고 및 조형어법을 구사해왔다.
급변하는 현대미술의 흐름에도 초연한 태도를 지키며, 동양적인 사상 및 철학을 중심에 두고 한국적인 정서의 발현을 최고의 가치로 받아들였다.그 결과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독자적인 조형세계를 일구었다. 모노크롬이나 미니멀리즘으로 상징되는 현대회화의 속성에 비추어 볼 때 그의 그림은 복잡하다. 그 만큼 전혀 다른 길을 택한 것이다. 그의 그림은 복잡다단한 현대인의 의식구조 및 생활방식에서 벗어나지 않는 그 자신의 개인적인 일상에 대한 진솔한 기술인 것이다. 그러기에 그림을 만들어 가는 조형언어가 현란하다고 할 만큼 다채롭고 개성적이다.
빠르고 경쾌하게 구사하는 선과 짐짓 시각적인 호소력이 강한 오방정색으로 요약되는 화려한 원색과 점 그리고 면이 뒤섞이는 복잡한 구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난해하다거나 불친절하다는 인상은 아니다. 오히려 마치 관현악의 장중하고 일사불란한 화음의 연결처럼 현란한 이미지를 거침없이 쏟아내면서도 시각적인 혼란스러움이 없다. 무엇보다도 청황적백흑이라는 오방정색을 중심으로하는 색채배열은 한국인의 오랜 전통습속(관혼상제 및 민속기물 따위)에서 가장 중요시 여기는 색채패턴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는 익숙하다. 그러기에 오방정색을 기본으로 하는 색채배열은 정서적인 친근성으로 다가온다.
그의 그림은 구상과 추상의 대립과 조화라는 커다란 틀 속에서 방법적으로는 음과 양, 강과 약, 명과 암, 빠름과 느림, 긴장과 이완 따위의 상반되는 이미지 및 개념을 따른다. 이러한 방법적인 패턴은 긋고 지우고 덮고 뿌리고 흘리고 찍고 뭉개는 따위의 다채로운 표현방법으로 구체화된다. 이렇듯이 극단적이고 대립적이며 상반적인 형식논리에 의해 구축되는 화면은 복합적인 구성으로 이루어진다. 그런 가운데서도 추상적인 미지가 지배하는 상황이지만 간간이 모양을 드러내는 구상적인 이미지는 그림의 구성요소로서 뿐만 아니라 제재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작품에서나 구상적인 이미지가 제재가 되거나 내용을 주도 하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그는 구상과 추상의 대립 및 조화라는 단순논리로는 설명되지 않는 다변적인 세계를 거느리고 있는 것이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다양한 형태의 표현적인 이미지는 처음부터 면밀하게 계획되었거나 의도된 것이 아니라, 작업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심인과 감흥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순발력과 즉흥성이 강하다. 구체적인 형태를 지향한다거나 또는 절제되고 금욕적인 화면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므로 작업하는 과정의 감정을 크게 좌우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모든 형태의 이미지는 그의 상반되는 다른 이미지와의 대립 및 조화 그리고 통일이라는 원칙에 순응한다.
그의 작품은 강렬한 시가적인 인상과 함께 감상자의 감정을 뒤흔드는 생동감으로 넘치는데, 이는 격렬한 제스처를 수반하는 선의 이미지와 무관하지 않다. 그의 선은 날이 선 듯하다 못해 살기가 느껴질 정도이다. 이러한 느낌은 아마도 모필이 만들어내는 힘의 표현에서 비롯되는지 모른다. 한글이나 한자의 서체를 연마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골기가 다름 아닌 생동감을 주도하는 것이다. 모필을 사용하는 서체는 서양화의 소묘와 유사한 개념이면서도 간결한 선으로 형태를 요약하고 함축하는데 아주 효과적이다. 이러한 과정을 지나면서 추상적인 이미지로 바뀌었을 때 모필 선은 즉흥성과 만나 한층 자유롭고도 폭발적인 힘을 구사하게 되는 것이다. 그 힘이야말로 다름 아닌 살기의 진원지인 셈이다. 그의 작품은 어쩌면 자기 표현에 솔직한 한국인의 기질적인 특징을 대변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한국의 경제를 상징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의 그림에는 그런 다이내믹한 한국인의 기질 및 정서와 일치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 그렇다. 그는 그림을 통해 한국인의 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삶의 열정을 자극하는 것이다. 적어도 그처럼 현란하고 경쾌하면서도 세련된 멋을 지닌 선을 일찍이 본 일이 없다.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고 그 누구의 조형세계에도 저촉되지 않는 그 자유로운 선의 유희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그가 제시하는 선의 유희와 자극적인 색채미는 한국적인 아름다움의 본질이 무엇인지 일깨워준다.
- 전시서문중에서
생의 기원, 축제 그리고 새로운 깃발을 내릴 때까지
김종근 / 미술평론가
이두식의 화가로서의 출발은 60년대 앵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 열기와 함께 한다. 그러나 畵題적으로 볼 때 서구 회화의 인식에 빠지기 쉬운 즈음에 전통적인 세계인 ‘만다라’ 또는 ‘단청의 색상을 연상시키는 시리즈’ 등 무속적인 세계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는 것은 그의 회화세계를 통시적으로 볼 때 예사스러운 일이 아니다. 한때 이두식 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이 작품들은 대부분 종이 위에 연필 드로잉을 한 후 수채화로 작업을 완결하는 형식으로 당시 분위기로서는 이채로운 작업으로 불려졌다. 그 기법은 드로잉적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감각적으로 에스키스의 속성들을 전면적으로 드러내는데 있다. 이름하여 ‘생의기원’;이라고 불리는 이 작업들은 먼저 불명확한 외형의 이미지들을 중심에 놓는 고도의 장치와 기법을 자유롭게 구사하고 있다.
80년대 중반부터의 그의 작품들은 보다 강렬하고 폭발적인 인상으로 다가온다. 왜냐하면 ‘생의 기원’에 중심적인 지법이 드로잉과 수채화에 의존한 극사실 묘사에서 강력하고 폭발적인 색채가 화면 속에 뛰어들어 왔기 때문이다. 그의 예술세계는 손이 주무기인 시대로 화단에서도 가볍게 치부하거나 인식해왔던 드로잉의 아름다움을 띄우는데 기여했다. 그것은 두말할 나위없이 그의 공로이다. 이후 연필 드로잉과 수채로 대표되는 그의 화풍은 커다란 전환을 맞아 ‘도시의 축제’ 시리즈로 변신을 한다. 이 시리즈는 대부분 캔버스 작업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다만 사실적으로 처리되던 극사실의 정적인 묘사는 사라지고 다이나믹하며 거칠은 자유분방한 필선과 격정적인 감정을 일으키는 색채의 구사가 화면을 압도하고 있다.
오광수는 이것을“생명에 넘치는 내면의 에너지 구현”이라고 평가했다. 드러나 이어지는 그의 세계는 대단히 앵포르멜적인 요소와 사실적인 요소가 간헐적으로 ‘생의 기원’에서 보이는 여체에 대한 묘사가 기묘하게 자리한다. 뿐만 아니라 새롭게 나비, 불고기, 잠자리, 계단 등의 이미지가 색채와 조형성과 결합하여 조화를 이루는 양식을 구축하게 된다. 이는 마치 추상과 구상과의 만남, 자연의 이미지의 새로운 조형화로 이해되기에 부족하지 않다. 그의 이런 기술적 화면구성 속에는 색채들이 빚어내는 음악성 넘치는 붓질과 함께 이두식 회화의 독창적인 조형성과 마크 형성에 크게 공헌하고 있다.
특별히 그의 회화에서 보이는 드로잉적 붓터치와 속성들은 종이 작업은 물론 캔버스 작업의 전편에서 지속적으로 그리고 영향력 있게 나타난다. 때로는 동양화의 농담의 극치를 보는듯한 즉흥적이고 직접적인 기법으로 열정과 관능이 뒤엉켜 빚어내는 오케스트라 같은 감성을 열어보이고 있다. 또한 우리는 그의 회화에 중요한 특징으로 보여지는 색채의 의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의 그림의 특징은 색채회화라고 할만큼 원색적이고 강렬하다. 이미 그러한 그의 회화적 색채의 인식은 1972년 ‘축제(祝祭)’ 라고 붙여진 작품에서 그 원형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그러한 특성은 적, 청, 황, 흑, 백색을 기조로 전통적인 오방색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이두식의 화면에서 오방 색은 이미 평론가 윤진섭이 그의 작가론에서 명료하게 집어내듯이 단청이나 불화, 무속도 그리고 민예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본적인 생활의 색채이다. 그는 이러한 창의를 기조로 한 풍부한 색채의 사용과 즉흥적이며 비정형적인 구성으로 그 회화의 장을 펼치고 있다. 물론 색채의 사용과 그러한 기법에는 일반적으로 작가들이 취했던 패턴과 초기의 앵포르멜적인 제스쳐, 생의 기원에서 보이는 아주 정숙한 톤 그리고 도시의 축제로 이어지는 격정적인 색채와 조형적인 하모니가 그의 회화적인 발걸음에 큰 대조를 보이면서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
이제 이두식의총체적으로 엮어 놓은 그 힘으로 이제 새로운 땅에 그의 깃발을 꼽는다. 나는 최근 회화는 많은 평자들이 분류했던 화려했던 이두식의 전성시대를 상징하는3시기를 지나 제4시기의 원숙미 넘치는 계절로 들어서 있다. 그러한 징후를 우리는 최근 작업하고 있는 ‘무제’(?)로 지칭되는 페스티발 연작에서 명확하게 발견한다. 특히 원색적이며 자유분방하게 풀어 해치던 색채의 향연에서 그는 보다 절제된 색채를 동경하며, 거침없는 형태의 열정에서 이성적으로 통제된 새로운 도상 학을 찾아내고 있다.
거기에는 그린다는 것과 서체적인 드로잉의 개념에 기대인 붓질 샘프란시스처럼 던져진 색채의 혼합과 하모니의 세계를 그가 가는 길이 대단히 확신에 찬 걸음걸이 임을 느낀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가 가는 길에 또 다른 커다란 세계를 위해서 보다 천천히 그의 화폭 속에 좀 더 머물러 있어야 하며 드리고 한 손을 비워둘 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 가다가 더 아름다운 일들을 손에 잡기 위해서 한 손을 비워두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 전시서문중에서 -
전시포커스
제4회 문신미술상 수상작가 초대전
이두식 Lee, Doo-Shik
2006. 5. 1 - 5. 31 마산시립문신미술관
그의 그림의 특징은
색채회화라고 할만큼 원색적이고 강렬하다. 이미 그러한 그의 회화적 색채의 인식은 1972년 ‘축제(祝祭)' 라고 붙여진 작품에서 그 원형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그러한 특성은 적, 청, 황, 흑, 백색을 기조로 전통적인 오방색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이두식의 화면에서 오방 색은 이미 평론가 윤진섭이 그의 작가론에서 명료하게 집어내듯이 단청이나 불화, 무속도 그리고 민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본적인 생활의 색채이다. 그는 이러한 창의를 기조로 한
풍부한 색채의 사용과 즉흥적이며 비정형적인 구성으로 그 회화의 장을 펼치고 있다.
생의 기원, 축제 그리고
새로운 깃발을 내릴 때 까지
김종근 / 미술평론가
이두식의 화가로서의 출발은 60년대 앵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 열기와 함께 한다. 그러나 畵題적으로 볼 때 서구 회화의 인식에 빠지기 쉬운 즈음에 전통적인 세계인 ‘만다라' 또는 ‘단청의 색상을 연상시키는 시리즈' 등 무속적인 세계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는 것은 그의 회화세계를 통시적으로 볼 때 예사스러운 일이 아니다. 한때 이두식 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이 작품들은 대부분 종이 위에 연필 드로잉을 한 후 수채화로 작업을 완결하는 형식으로 당시 분위기로서는 이채로운 작업으로 불려졌다.
그 기법은 드로잉적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감각적으로 에스키스의 속성들을 전면적으로 드러내는데 있다. 이름하여 ‘생의기원';이라고 불리는 이 작업들은 먼저 불명확한 외형의 이미지들을 중심에 놓는 고도의 장치와 기법을 자유롭게 구사하고 있다.
80년대 중반부터의 그의 작품들은 보다 강렬하고 폭발적인 인상으로 다가온다. 왜냐하면 ‘생의 기원'에 중심적인 지법이 드로잉과 수채화에 의존한 극사실 묘사에서 강력하고 폭발적인 색채가 화면 속에 뛰어들어 왔기 때문이다. 그의 예술세계는 손이 주무기인 시대로 화단에서도 가볍게 치부하거나 인식해왔던 드로잉의 아름다움을 띄우는데 기여했다. 그것은 두말할 나위없이 그의 공로이다. 이후 연필 드로잉과 수채로 대표되는 그의 화풍은 커다란 전환을 맞아 ‘도시의 축제' 시리즈로 변신을 한다. 이 시리즈는 대부분 캔버스 작업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다만 사실적으로 처리되던 극사실의 정적인 묘사는 사라지고 다이나믹하며 거칠은 자유분방한 필선과 격정적인 감정을 일으키는 색채의 구사가 화면을 압도하고 있다. 오광수는 이것을 “생명에 넘치는 내면의 에너지 구현" 이라고 평가했다. 드러나 이어지는 그의 세계는 대단히 앵포르멜적인 요소와 사실적인 요소가 간헐적으로 ‘생의 기원'에서 보이는 여체에 대한 묘사가 기묘하게 자리한다. 뿐만 아니라 새롭게 나비, 불고기, 잠자리, 계단 등의 이미지가 색채와 조형성과 결합하여 조화를 이루는 양식을 구축하게 된다. 이는 마치 추상과 구상과의 만남, 자연의 이미지의 새로운 조형화로 이해되기에 부족하지 않다. 그의 이런 기술적 화면구성 속에는 색채들이 빚어내는 음악성 넘치는 붓질과 함께 이두식 회화의 독창적인 조형성과 마크 형성에 크게 공헌하고 있다.
특별히 그의 회화에서 보이는 드로잉적 붓터치와 속성들은 종이 작업은 물론 캔버스 작업의 전편에서 지속적으로 그리고 영향력 있게 나타난다. 때로는 동양화의 농담의 극치를 보는듯한 즉흥적이고 직접적인 기법으로 열정과 관능이 뒤엉켜 빚어내는 오케스트라 같은 감성을 열어보이고 있다. 또한 우리는 그의 회화에 중요한 특징으로 보여지는 색채의 의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의 그림의 특징은 색채회화라고 할만큼 원색적이고 강렬하다. 이미 그러한 그의 회화적 색채의 인식은 1972년 ‘축제(祝祭)' 라고 붙여진 작품에서 그 원형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그러한 특성은 적, 청, 황, 흑, 백색을 기조로 전통적인 오방색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이두식의 화면에서 오방 색은 이미 평론가 윤진섭이 그의 작가론에서 명료하게 집어내듯이 단청이나 불화, 무속도 그리고 민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본적인 생활의 색채이다. 그는 이러한 창의를 기조로 한 풍부한 색채의 사용과 즉흥적이며 비정형적인 구성으로 그 회화의 장을 펼치고 있다. 물론 색채의 사용과 그러한 기법에는 일반적으로 작가들이 취했던 패턴과 초기의 앵포르멜적인 제스쳐, 생의 기원에서 보이는 아주 정숙한 톤 그리고 도시의 축제로 이어지는 격정적인 색채와 조형적인 하모니가 그의 회화적인 발걸음에 큰 대조를 보이면서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
이제 이두식의 총체적으로 엮어 놓은 그 힘으로 이제 새로운 땅에 그의 깃발을 꼽는다. 나는 최근 회화는 많은 평자들이 분류했던 화려했던 이두식의 전성시대를 상징하는 3시기를 지나 제4시기의 원숙미 넘치는 계절로 들어서 있다. 그러한 징후를 우리는 최근 작업하고 있는 ‘무제'(?)로 지칭되는 페스티발 연작에서 명확하게 발견한다. 특히 원색적이며 자유분방하게 풀어 해치던 색채의 향연에서 그는 보다 절제된 색채를 동경하며, 거침없는 형태의 열정에서 이성적으로 통제된 새로운 도상 학을 찾아내고 있다. 거기에는 그린다는 것과 서체적인 드로잉의 개념에 기대인 붓질 샘프란시스처럼 던져진 색채의 혼합과 하모니의 세계를 그가 가는 길이 대단히 확신에 찬 걸음걸이 임을 느낀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가 가는 길에 또 다른 커다란 세계를 위해서 보다 천천히 그의 화폭! 속에 좀 더 머물러 있어야 하며 드리고 한 손을 비워둘 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 가다가 더 아름다운 일들을 손에 잡기 위해서 한 손을 비워두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축 제
나의 작품은 무정형의 얼룩과 즉흥적인 필치가 원형과 사각형 등 기하학적 형상들로 이루어진 화면의 전체 구조 속에 통합 되고 있다. 색채에 있어서도 전 시대의 작가들이 주로 사용 하였던 어둡고 침침한 색조 대신 빨강, 파랑, 초록, 노랑 등의 원색을 주로 사용한다.
나의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화려한 원색의 병치는 불화나 단청의 색채(오방색) 구성에 그 근원을 두고 있는 것으로 비록 서양의 조형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 근본은 우리의 동양정신에 있다고 하겠다. 채도가 높은 강렬한 원색은 전통적 색채의 부활로 볼 수 있다. 때로는 빠르고 힘차게, 때로는 느리게, 또는 율동하듯 움직이는 검은 선들 또한 동양성에 있다.
묽게 푼 아크릴과 동양화용 모필을 사용함으로써 이같은 측면은 더욱 강조된다. 흰색의 배경은 뒤로부터 배어나는 광선 또는 무한한 공간을 암시함으로써, 정신의 반영으로 이해되는 동양회화의 여백의 개념과 상통하고 힘과 호흡을 조절하며 그리는 방법 자체가 동양회화를 발상의 근원으로 삼고 있다. 이 `잔칫날`도 작품을 제작하면서 서양의 파티와 다른 우리의 아름답고 화려한 잔칫날을 생각하며 작품을 제작하였다.
1997년 01월호 > 작가 > 작가탐구 > 이두식 - 한국성 농축한 생의 기원부터 축제까지의 언어들
이두식 / Lee, Doo Shik
• 서울예술고등학교 졸업
•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및 동 대학원 회화과 졸업
• 일본 교토 조형예술대학 박사 (예술학)
• 개인전 55회 (2007년 현재 : 갤러리 아트도롬 초대 개인전)
• 1974 제1회 서울 비엔날레 (국립현대미술관)
• 1983 한국현대미술전 (동경미술관 외 4개 도시 순회전)
• 1984 CAGNES 국제회화제 (Cagnes, 프랑스)
• 1987 상파울로 비엔날레 (브라질)
• 1988 한중 현대회화전 (국립역사박물관, 대만)
• 1995-98 한국현대미술순회전
(이탈리아, 독일, 헝가리, 터키, 폴란드, 스위스, 루마니아, 영국,
오스트리아, 프랑스, 벨기에, 케냐, 남아프리카공화국, 튀니지, 아일랜드)
• 1996 FIAC (프랑스)
• 2000-01 아시아 평화미술전 (동경)
• 2001 MANIF SEOUL 2001 (예술의 전당)
• 2002 이두식, Okano Koji 2인전 (동경)
• 2003 제1회 북경 비엔날레 (중국)
• 2003 중국 항주 금채화랑 초대전(金彩畵廊, 中國 杭州)
• 2004 SFAF전 (예술의 전당)
• 2005 KCAF (예술의 전당)
• 2006 문신미술상 수상작가 초대전(문신미술관)
• 2007 갤러리 아트도롬 초대 개인전 (독일 포르세하임)
수 상
• 1968 신상전 최고상
• 1988 선 미술상
• 1995 대한민국 보관문화훈장 (寶冠文化勳章)
• 2001 MANIF (서울국제아트페어) 대상
• 2005 제4회 문신 미술상
• 2007 제4회 한국미술공로대상
소 장
• 국립현대미술관
• 연세 세브란스 빌딩 (서울)
• 일은증권 빌딩 (서울)
• 힐튼 호텔 (서울)
• Jimmy Carter Foundation (USA)
• Olando City Hall (USA)
• Flaminio 지하철역 벽화(모자이크) (Rome, Italy)
• 롯데 호텔
• 매리어트 호텔
• 힐튼 호텔
• 불가리아 국립미술관
• 중국 북경미술관
• 제17대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역임
• 외교통상부 자문위원 역임
• 홍익대학교 미술대 학장 역임
현재
• 대학배구연맹 회장, 서울미술협회 이사장, 홍익대학교 미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