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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평동 근대 골목길을 걷다' 답사자료
▶일시 : 2022년 8월 30일(화) 오전 09시 00분~12시 00분
▶주제 : 원평동 근대 골목길을 걷다
▶안내 : 김해규 (평택인문연구소장)
▶답사일정 : 평택역 터 → 평택금융조합 터 → 용잔 터→ 한성공동창고(상업은행) 평택지점 터 → 국도 1호선 터 → 평택우편소 터 → 본정통 입구 → 평택 시가지 제방 → 평화병원 터 → 평택장 터 → 평택상업조합 터 → 평택우시장 터 → 평택군청 및 경찰서 터 → 평택세무서 터(평안수리조합) → 평택소방서 터 → 평택곡물검사소 → 평택곡물회관 터 → 평택읍사무소 및 공회당 터 → 평택전기(주) 터 → 마방 터(평택말마차조합) → 진청학원 터
①평택역 터
경부선 철도는 1905년 1월 1일 전면 개통되었다. 오산-평택 구간은 1902년 일본의 야마구찌(주)에서 시공하여 1년 만에 완공했다. 당시 평택역의 위치 문제는 일본인들에게 초미의 관심사였다. 이시카와(石川)와는 곡물운송과 집산, 서해안 어염의 집산에 편리한 서쪽에 설치하자고 주장했고, 다카사키(高寄) 등은 안성, 장호원과 연결된 동쪽에 설치하자고 주장했다. 평택역은 이시카와의 주장대로 철로 서쪽에 설치되었다. 그곳이 오늘날 ‘평택로 51번길’이다.
일제가 철도 서쪽의 황무지에 철도역을 설치한 것은 이시가와의 주장대로 곡물 및 어염의 수탈에 유리했고, 평택평야의 토지수탈과 간척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1915년에 편찬된 『조선철도여행안내』에도 “(평택)은 진위군청 소재지이며 경기도와 충청도의 경계이고 넓은 평야가 펼쳐져 농산물이 풍부하다. 아산만과 가까워 선박 이용의 편리를 겸하여 이용할 수 있다. 안성 둔포와 가깝고 대로(大路)가 지나 교통이 편리하다. 군청, 경찰서, 우편소, 학교조합, 조선상업은행지점, 소학교 등이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평택역이 설치되면서 철도역 앞에는 근대도시가 발달했다. 근대도시가 발달한 지역은 본래 ‘충청도 평택군 군문리와 통복리 경계’였지만 인구가 증가하면서 ‘병남(파)면 평택리’라는 새로운 마을로 독립했다. 앞서 밝혔듯이 평택리에는 진위군청이 옮겨오고 각종 관공서와 공공기관, 공공시설이 자리 잡았으며, 평택장과 평택역전을 중심으로 상공업적으로도 크게 번영했다. 그러자 일본인들은 병남면을 개칭하자는 운동을 전개하여 1931년 병남면이 ‘평택면’으로 바뀌었다. 1938년에는 진위군의 명칭을 바꾸자는 운동이 전개되어 ‘평택군’으로 바뀌었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평택면이 ‘읍’으로 승격했다.
평택역은 평택지역의 물산이 집산되는 곳이었고, 안성장과 둔포장의 곡물과 물산의 중개지로 각광을 받았다. 심지어 박필병, 박주병처럼 안성장의 대표적인 상인들도 평택역전으로 진출했으며, 각종 언론에도 ‘미곡의 집산지이며 전도유망한 도시’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해방 이듬해 (1946년) 병술년 대홍수 때 물에 잠기면서 평택장 일대가 큰 피해를 입었다. 또 1950년 7월 4일에는 유엔군이 평택역을 폭격하면서 큰 피해를 입었고, 1.4후퇴 때에도 무차별 폭격을 받아 평택군청, 평택경찰서 등 주요 관공서(세무서 제외)와 공공기관이 파괴되었다. 이에 따라 휴전 직후부터 도시의 중심을 동쪽으로 이동하자는 논의가 전개되었다. 이에 따라 1953~54년 사이 관공서와 주요 공공기관이 철로 동쪽(현재의 평택역)으로 옮겼고, 철도역과 관공서 중심으로 신도시가 건설되었다. 이것이 지금의 평택동 시가지다.
②평택금융조합 터
원평로 185번길 일대는 일제강점기 평택역전의 주요 회사들이 밀집되었고 상공업도 크게 발달했다. 이에 따라 금융기관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평택금융조합은 1912년 김준식이 성환금융조합의 지원을 받아 창립했다. 1914년에는 일본인 우에노(上野進一郞)와 윤종민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분리 독립했다. 1920년대 초에는 조합원이 1천 명이 넘었고 장안동의 지주 윤종민이 조합장을 했고, 1930년대는 평택역전의 유지(有志) 안종철이 오랫동안 조합장을 지냈다. 금융조합은 일제강점기 농민들의 생활 안정과 농업생산안정을 위해 설립되었지만 실제로는 농민을 통제하고 수탈하기 위한 식민지 수탈기관이었다. 기존의 건물은 한국전쟁 때 폭격을 받아 모두 부서졌고 전후 통복동으로 이전했지만 금고만큼은 남아 있다가 2009년 평택역 신축과정에서 사라졌다. 금융조합은 1956년 농업은행이 설립되면서 해산되어 평택중앙농협이 되었다.
③용잔 터
192~3년 사이 경부선 철도를 건설하다가 평택역 좌우에 남겨진 땅을 말한다. 철로 좌우로 넓고 긴 공터가 형성되어 1920~30년대에는 평택군 대운동회를 비롯한 각종 체육대회와 정치집회가 이곳에서 개최되었다. 평택지역 근대체육의 발상지이며, 소사벌레포츠공원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④한성공동창고(구 상업은행, 현 우리은행) 평택지점 터
한성공동창고 주식회사는 1905년 9월 ‘공동창고주식회사 장정’ 이후 고종 황제의 내탕금 30만환 가운데 15만환으로 설립됐다. 이 회사는 창고업무와 보세 창고업무, 대출업무를 담당했다. 초기에는 인천과 강경에 출장소를 설치했고, 1907년 8월 1일에는 유망한 근대도시로 주목받던 원평동 평택정차장(평택역)에 세 번째로 출장소를 설치했다. 1912년 2월 1일 대한천일은행의 후신인 조선상업은행에 합병됐으며, 1950년 한국상업은행으로 이름을 바꿨으며 지금은 우리은행으로 개명되었다.
⑤국도 1호선 터
평택역이 설치되면서 역(驛)을 중심으로 국도 1호선, 국도 45호선, 국도 38호선과 같은 근대도로망이 구축되었다. 국도1호선을 비롯한 근대도로는 1902년경 철도건설과정에서 함께 건설이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평택지역에 분포한 하천교량의 부족으로 완전 개통되는 데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1918년 작성된 1:5만 근대 지도에도 국도 1호선은 북쪽으로는 오산까지 연결되었지만 남쪽으로는 유천동 부근까지만 건설되었고, 국도45호선이나 38호선도 완전하지 못했다. 국도1호선이 완전 개통된 것은 1920년대 평택교(군문교)와 대평택교(안성천교, 유천교)가 건설되면서부터다. 그러다가 한국전쟁 뒤 철도역이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평택동 신평택역 앞으로 옮겼으며, 1990년대 초 우회도로를 건설하면서 현재와 같은 형태가 되었다.
⑥평택우편소 터
갑오개혁(1894~5) 때 평택지역에도 봉남리와 객사리에 우체사가 설치됐다. 그러다가 1906년 우편국과 전신국 양사(兩司)를 일본인이 접수하면서 평택지역 우체사도 일본인들에게 접수되어 우편국이 되었다. 평택지역에서 가장 먼저 설치된 것은 1907년 설치된 진위우편국이다.
1905년 평택역전에도 ‘평택임시우체소’가 설치되었으며 1907년 ‘평택우편소’로 승격되었다. 1917년 11월에는 원평로 39번길에 신축하여 1920년 개소했다. 당시 우편국에서는 우편사무와 함께 우택(郵宅)이라고 해서 소포와 전신전화도 취급했다. 평택우편소는 1950년 7월 유엔군의 평택역 폭격으로 전파되었다. 수복 후에는 임시우편소를 운영하다가 1954년경 평택시 중앙로 63번길로 신축 이전했다.
⑦본정통
일제강점기 평택역전 일본인 거주지 일대에 형성된 중심가로다. 일본인 상업지역과 거주지, 조선인 거주지와 상업지역, 각종 사회단체 회관, 여관, 요정이 밀집되었다. 동아일보 평택지국을 비롯한 신문사 지국, 진위청년회, 진위소년회, 평택기자구락부 등 각종 사회단체들도 이곳에 사무실을 두었다. 1931년 2월 조선신문 광고란에 실린 주요 기관과 상점은, 강호옥(江戶屋), 가납여관(加納旅館), 제3북일루(일본 요정), 환서여관(丸西旅館), 희락간이식당, 강전무길(岡田武吉)상점, 원내항태랑(垣內恒太郞商店) 상점, 삼현길(森賢吉) 상점, 판정상점(坂井商店), 중협원장상점(中脇源藏商店)과 같은 일본인 여관 및 요정, 상점과, 평화의원, 평택의원, 조선관(朝鮮館), 공주여관, 금택여관, 화신연쇄점 같은 조선인 병원, 요정, 여관, 상점이 있었다.
⑧평택시가지제방
평택역전에 형성된 ‘평택리’는 안성천과 가까워 수해(水害)에 취약했다. 1920년 안성천이 범람해서 수해를 입으면서 진위군청을 중심으로 수해 대책이 추진되었다. 이에 따라 평택의 유지(有志)들이 진위군청에 모여 제방축조를 결의했고, 1922년 지역사회의 기부와 진위군청의 노력으로 철로를 중심으로 시가지를 ㄷ자로 둘러싼 제방을 축조했다.
⑨평화병원 터
평택역전에는 의료기관이 많았다. 1935년 기준으로는 본정통의 평화의원(권태동-김병룡), 평택의원, 안정(安井)의원, 평택장의 동아의원(최용준), 대동의원과 국도 1호선 변의 산야(山野)치과의원(光野周吉), 평택역 의료센터 등이 있었다.
평화병원은 본정통에 있었던 조선인을 위한 의원이었다. 1920년에도 있었지만 중간에 문을 닫았던 것으로 보이며 1926년 권태동이 재개업했다. 1930년대에는 김병룡이 의사로 일했으며 2층 양옥 형태의 병원을 신축했고 빈민진료를 해서 칭송받았다. 해방 직후부터는 진위면 출신으로 경성의전을 졸업한 이인제가 의사로 일했고 한국전쟁 때에도 파괴되지 않아서 한동안 임시 평택경찰서로 사용되었다. 1968년 이인제가 사망하면서 폐업했다.
⑩평택장 터
평택장은 1906년 개장했다. 초기에는 안성장이나 둔포장보다 거래액이 적었지만 편리한 철도와 근대교통의 발달, 안성천 수로 교통을 배경으로 급속히 성장하여 1930년대 중반에는 둔포장을 크게 누르고 안성장에 근접한 만큼 규모가 커졌다. 평택장의 주요 품목은 평택과 안성, 아산 일대의 미곡(米穀)과 서해안의 어염(魚鹽), 농우(農牛)였다. 평택장은 한국전쟁 때 유엔군의 폭격을 받아 일부 파손되었고, 휴전 후 주요 관공서가 철도 동쪽으로 이전하면서 함께 통복동으로 옮겨갔다. 장날은 5일과 10일이다.
⑪평택상업조합 터
1920, 30년대 평택역 앞에 근대도시가 발달하고 근대교통망이 정비되면서 일본인과 조선인이 경영하는 근대회사가 설립되었다. 근대회사는 주식회사(조합), 합명회사 등 다양했다. 그 가운데 주식회사의 형태로 조선인이 설립한 최초의 회사가 ‘평택상업조합’이다.
평택상업조합은 1917년 이성열, 안종철, 유창식이 자본금 3만 원으로 설립했다. 설립 초기에는 대부업을 했지만 자본이 축적되자 1921년에는 자본금을 5만 원으로 증자하고 곡물, 비단, 삼베, 포목, 종이로 취급 품목을 확대하고 무역업까지 했다. 1940년 1월 27일 총회에서는 이성열(조합장), 이사 안종철, 이하선(이상 이사), 주시택, 주익상, 이민훤, 이명환, 유진, 조봉행, 홍순옥, 김형수(이상 평의원), 신순호, 안종옥(이상 감사)였다.
해방 전후에는 이성열의 아들 이삼규, 이삼호가 물려받아 평택곡물검사소를 대행하고 정미업과 방학소주라는 주류공장까지 운영했다.
⑫평택우시장 터
평택우시장은 1906년 경 평택장의 개장 때 개설되었다. 초기 우시장의 위치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우시장은 특유의 냄새와 규모 때문에 일반 시장과 떨어진 하천 변에 형성되는 경우가 많아서 통복천변이나 안성천변에 있었을 것이다.
우시장은 1917년 「경기도 고시 제55호」에 따라 현재 위치로 이전했다. 1922년 원평동 둘레에 시가지 제방이 축조되고 1933년 시구 개정이 완료되면서 자리를 잡았다. 평택 우시장은 규모가 크고 소의 품질이 우수하여 평택뿐 아니라 아산, 천안, 안성, 오산 일대의 소들이 거래되었다. 1946년 5월에는 좌익단체 평택군 군민위원회가 ‘신탁통치지지 군민 총궐기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뒤 평택장이 통복동으로 이전하면서 함께 옮겼고 우시장 자리에는 1969년 평택초등학교가 개교했다.
⑬평택군청 및 경찰서 터
일제강점기 전반 원평동은 진위군 병남면 평택리였다. 평택역 설치 초기 진위군청은 ‘진위군 북면 봉남리’에 있었다. 그러자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맞춰 ‘진위군청 평택역전 이전운동’이 전개되었다. 진위군청 이전운동은 평택역전의 일본인들이 주도하고 조선인 유지층이 참여하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평택리에 거주하는 이시카와 타이조(石川耐藏) 외 7명은 1913년 3월 경기도지사에게 진정서를 냈고 이것이 조선총독에게 상신되어 이것이 1914년 행정구역개편 과정에서 반영되었다. 군청이전 초기 군(郡) 청사는 군문리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곧 현재의 위치로 신축 이전하였다. 진위군청은 1938년 평택군으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평택군청’으로 바뀌었고 1950년까지 존속되었다가 유엔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어 1954년 2월 비전동 632-4번지로 신축 이전하였다.
평택경찰서는 진위군청(평택군청) 서쪽에 등을 맞대고 있었다. 평택경찰서가 설치된 것은 1914년 8월 27일 경찰제도가 개편되면서부터다. 설치 초기의 명칭은 ‘진위경찰서’였지만 1919년 8월 20일 ‘평택경찰서’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20년대 초 평택경찰서 산하에는 백봉리, 안중리, 봉남리, 서정리, 해창리에 주재소가 있었다. 평택경찰서 위치는 본래 평택리에 있었다가 1938년경 진위군청 옆으로 신축 이전한 것으로 보인다. 평택경찰서도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래서 수복 후 평화병원을 임시 청사로 사용하다가 1953년 11월 비전동 619-2번지에 신축 이전하였다.
⑭평택세무서 터
‘평택세무서’는 1934년 5월 원평로 75번길에 설치됐다. 주요 업무는 내국세의 부과·감면·징수를 담당했다. 한국전쟁 때 유엔군의 폭격으로 원평동 구 시가지가 크게 훼손되고 주요 관공서와 공공시설이 폭격 될 때에도 무사했다. 그래서 수복 후부터 1954년 2월 평택군청이 비전동으로 이전할 때까지 임시 평택군청사로 사용됐다. 휴전 뒤에는 통복시장로 16번길로 청사를 이전하고 구청사는 기호수리조합 사무실로 사용했다.(기호수리조합은 1962년 ‘토지개량조합’
으로 바꾸었고, 1970년 농지개량조합으로 개칭되어 ‘기호농지개량조합(일명 기호농조)가 되었다.)
평택세무서는 1970년 8월 2급 지서로 승격됐고 1982년 2월 중부지방 국세청에 편입됐다. 1986년에는 평택시통복시장로 16번길 21에신청사를 신축했으며, 1996년 7월에는 1급 지서로 승격했다. 2014년 비전2동 배다리생태공원 북쪽에 신청사를 신축해서 이전했다.
⑮평택곡물검사소 터
개항 후 일본으로의 미곡 수출이 확대됐다. 쌀 수출이 증가하자 미곡검사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목표상업회의소는 독자적으로 수출 현미검사를 실시했으며, 조선총독부도 1913년 6월 각도 장관(도지사)에게 ‘행정기관이나 곡물동업조합의 감독 하에 수출 미곡의 검사를 실시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1913년부터 현미를 검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검사 절차가 통일되지 않았고 미곡에 대한 부정행위가 끊이지 않아서 일본미곡시장에서 조선 쌀의 상품 가치가 떨어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러자 조선총독부는 1932년 9월 24일 「조선곡물검사령」을 반포하여 같은 해 10월부터 국가에서 직접 곡물검사를 실시했다.
평택지역은 1914년 평택미상조합이 설치된 것으로 볼 때 이 해부터 미곡검사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미시장은 인천에 있어 상인들은 열차로 인천까지 미곡을 싣고 가서 정미를 한 뒤 인천곡물검사소에서 미곡검사를 받는 불편함을 감수했다. 그래서 1921년 평택정미시장 설치 인가를 요청했지만 인천의 반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1932년에는 총독부의 결정에 따라 평택역 앞에 국영 곡물검사소가 설치되었다. 평택곡물검사소는 평택평야의 미곡 뿐 아니라 안성, 둔포지역의 미곡까지 정미한 뒤 검사를 실시했다. 평택장이 미곡시장으로 크게 성장한 것도 곡물검사소의 영향이 크다.
⑯평택읍사무소 및 공회당 터
일제강점기 평택역전은 ‘진위군 병남면 평택리’였다. 그러다가 일본인 유지들의 주장으로 1931년 4월 ‘평택면’이 되었다. 병남면사무소는 본래 다른 곳에 위치했다가 1926년 현재 위치로 이전한 것으로 보인다. 면(읍)사무소는 1930년 신축했다. 면사무소 옆에는 ‘공회당’이 있었다. 공회당에서는 평택면(읍)의 각종 회의와 대회가 개최되었다.
평택면은 1938년 읍(邑)으로 승격됐다. 초대 읍장은 1934년부터 평택면장을 역임한 안종순이었다. 평택읍사무소는 1950년 7월 4일 평택역 폭격 과정에서 파괴되었다. 전쟁 중에는 임시사무실을 사용하다가 1954년 2월 평택군청 이전과 함께 ‘평택1로 12번길 46’으로 이전했다. 1986년에는 평택읍이 시(市) 로 승격되면서 한동안 ‘평택시청’으로 사용했고, 지금은 매각되어 환타지아 빌딩이 들어섰다.
⑰평택전기(주) 터
1920년대 후반 평택지역에도 전기가설이 이뤄졌다. 전기는 우선 도시지역과 일본인 거주지역 및 상공업 지역을 중심으로 가설되었다. 전기 도입 노력은 1920년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쉽게 성사되지 못하다가 1927년에서야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평택지역에는 1926년 9월 천안전등주식회사 평택출장소가 설치되었다. 천안전등은 전기가설과 운영을 담당하는 회사였다. 1927년 3월에는 평택전기(주)가 설립됐다. 전기회사 설립은 삼현길, 서촌절태랑과 같은 평택의 일본인 유지들과 구창근, 안종철, 이성열, 성주한 등이 주도했다. 그러다가 1927년 일본 도쿄의 전기회사가 투자 의향을 보이면서 급물살을 탔다. 이들은 도쿄 전기회사가 자본금 20만 원 대부분을 부담하고 회사의 위치는 근대도시 평택에 두기로 했다. 회사설립 인가를 받은 뒤에도 발동기 구입과 운전, 전기가설 등의 문제로 운영이 미뤄지다가 1929년 일본인 신정영길(新井榮吉)을 사장으로 선임하고 가동되었다.
평택전기는 전등 전력공급 및 부대사업을 했다. 1930년에는 남선전기(주)가 통복동에 설립되었고, 1937년 10월에는 남선전기주식회사가 천안천등을 통합하여 남선전기 천안지점 평택출장소, 그 뒤에는 남선전기 평택지점으로 개편되었다.
평택전기(주)는 해방 후 남선전기와 통합된 것으로 보인다. 또 남선전기는 1961년 조선전업, 경성전기, 남선전기가 통합되어 한국전력주식회사를 발족하면서 한국전력의 모체가 되었다. 한국전력이 설립되면서 평택에는 한국전력 충남지점 평택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이것에 현재 한국전력공사 평택지점이다.
⑱마방터(평택말마차조합)
해방 전후 평택역은 각종 물산의 집산지이며 중계지였다. 물줄기를 따라 배에 실려 들어온 서해안의 어염은 평택장에서 소비되거나 평택역을 통해 실려나갔고, 평택장에 집산된 미곡(米穀)도 철도를 통해 서울과 인천으로 운반되었다. 철도를 통해 실려온 상품은 우마차와 말마차에 실려 시장과 상회, 주변농촌으로 운반되었다. 그래서 평택역 주변에는 말마차를 운영하는 사람이 많았다. 해방 후 말마차들은 대한통운을 통해 들어온 물산을 운반하였다. 평택장에서 사들인 물건을 철도역이나 주변 지역으로 운반할 때도 말마차가 이용되었다. 말마차들은 자신의 마차를 갖고 들어와 조합을 조직했다. 말마차조합은 교통로가 발달했던 통복동 삼거리(땡땡거리) 부근에 위치했다. 현재 말마차조합 자리에는 조합장의 후손이었던 박씨의 주택이 있다. 박씨는 중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할 때 말을 타고 출퇴근한 것으로 유명하다. 삼거리 주변에는 철공소나 대장간도 많았다. 대장간에서는 말의 굽에 징을 박아주거나 마차를 수리하는 일을 했다. 말마차조합은 1970년대 대중교통과 트럭이 보급되면서 사라졌다.
⑲평택 진청학원 터
진청학원은 1928년 5월 1일 진위청년회가 설립한 무산아동대상 야학이었다. 진위청년회는 가난해서 학업에서 소외된 아이들의 문맹퇴치를 위해 청년회관 내에 진청학원을 설립했다. 진청학원은 진위청년회 회원으로 서울로 통학하던 박상만(보성전문 재학), 김준석(양정고보 재학) 등 전문대생과 중학생 45명이 학비를 절약한 돈으로 설립했다. 설립 당시 학생은 82명이었지만 곧 갑·을·병 3개 학급 120명으로 늘어났으며, 1929년에는 학생 수가 500명 정도로 증가했다.
학생 수가 급증하자 야학(夜學)에서 출발했던 진청학원은 주학(晝學)으로 전환했다. 학생 수가 너무 많아 남자는 1,2,3부로 나눠서 가르쳤고 여자부도 있었다. 여름과 겨울 방학을 이용해서는 부인교실을 개설했으며 신대동에 분교실까지 운영했다. 하지만 새벽 4시에 일어나 서울로 등교해서 종일 공부하고 저녁 7시에 내려와 야학수업을 병행하면서 교사(敎師)들은 과로와 수면부족에 시달렸다. 결국 교사 3명이 과로로 사망하면서 위기에 봉착했고 재정적 어려움도 닥쳤다. 어려움 속에서 교원들이 십시일반 모금하고 지역 유지들의 후원하면서 1928년 8월에는 평택리에 교사(校舍)를 신축할 수 있었다. 1932년 3년제로 재편성하여 남녀 학생 3백여 명을 5학급으로 나누어 가르쳤고 월 20전의 수업료를 받았다. 하지만 수업료를 징수하면서 가난한 학생들이 수업료를 납부하지 못해 퇴학당하는 학생이 속출했으며 재정적으로도 어려움에 봉창했다. 그래서 진위청년회원들이 진위군 일원을 순회하며 소인극 공연으로 모금운동을 전개했지만 재정문제는 크게 개선되지 못했고 결국 1933년 문을 닫았다.
진청학원의 폐교소식은 지역사회를 안타깝게 했다. 그러던 중 평택지역의 유지였던 이민훤이 학교를 인수하여 폐교 2년만인 1935년 5월 6일 재개교했다. 이민훤의 역할과 지역사회의 후원으로 진청학원은 1939년 원평로 105번길 48에 초가로 교실 7동을 신축이전했다. 학제도 1936년에는 4년제였지만 1940년에는 6년제로 승격했으며 재학생이 300여 명에 달했다. 1942년에는 학생 수가 700여 명에 달했고 제반 시설과 교육내용이 일반 공립국민학교에 비해 손색이 없었다. 이민훤은 진청학원을 기반으로 사회적 신망을 얻어 정치계로 진출한 뒤 학생들을 일제의 침략전쟁에 동원하였다. 이 같은 친일적 행위로 진청학원은 1945년 4월 진청공립국민학교로 승격되었다.
해방 후 1946년 대홍수로 흙벽돌 건물이 무너져 내린 뒤에는 통복교 옆 일본인 심상소학교 터로 이전했다. 하지만 1950년 7월 4일 유엔군이 평택역과 통복교 일대를 폭격하면서 학교 건물이 크게 파손되어 다시 세교동 186-1에 교사를 신축해서 이전했으며 교명(校名)도 ‘평택중앙초등학교’로 바꿨다.
⑳평택곡물회관 터
일제강점기 평택은 대표적인 미곡(米穀) 산지였다. 안성과 둔포의 곡물들도 평택역을 통해 유통되었다. 일제는 양질의 곡물 수탈을 위해 곡물검사소를 설치했고, 곡물상들은 진위군 미상조합, 평택곡물상조합, 곡물협회를 조직하여 이익을 도모했다. 평택곡물협회는 1932년 4월 조직되었다. 1935년에는 원평로 55번지에 ‘평택곡물회관’을 신축했고, 1939년 임원진은 회장 이민훤, 부회장 신순호, 정우범이었다. 해방 후에는 주요 단체의 집회가 개최되었으며 소인극 공연이나 영화 상영도 하였다.
⓴평택소방서 터
1909년 설치된 평택소방조가 효시다. 1914년 11월 병남면 의용소방대가 발족했다. 소방조원은 일본인과 조선인으로 구성되었으며 민간인들이 자원봉사를 했다. 1939년 10월 1일 평택경방단이 발족하면서 해산되어 경방단 산하 소방조에 편입되었다. 해방 후 평택소방서가 되었고 한국전쟁 때 크게 파괴되어 1954년 중앙로 46으로 이전했다. 1989년 1월 1일 평택소방서로 설치 승인받았고, 1994년에는 중앙로 273으로 다시 이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