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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당벧엘교회 구요셉목사님
교회가 무너지고 있다! 성도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 하는 제목으로 여러분과 함께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제가 어릴 때 우리 엄마가 중풍이 들어서 교회를 다닐 때 부끄러웠습니다. 예수 믿는데 왜 병드냐고 하는 분들이 많은데 예수 믿어도 병들고 사업 실패할 수 있고 많은 일들을 당합니다. 그런데 목사님들이 예수 믿으면 복받고 문제가 해결된다고 하니까 성도들이 오해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잘 되어야 된다는 강박 관념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예수님 믿으면 복 받는 것은 맞는데 그 복은 하늘나라의 복입니다. 이땅에서는 인도함을 받고 좋은 인도함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엄마는 중풍을 13년 앓았기에 천국을 가셨고 복을 받은 것입니다. 현재 상황이 여러분 보시기에는 마음에 안들수 있는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여러분의 마음 상태 때문에 마음에 드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의 집으로 우리가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그게 주님의 뜻이기 때문에 내가 안 가려고 하니까 강제로 돌아오게 만드십니다. 저도 잘되었다면 아내가 몸이 건강했더라면 지금 잘 나가고 원래 놀고 싶었던 대로 놀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를 먼저 죽이셔서 어쩔 수 없이 하나님께 왔다가 많은 세월들을 보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하셨습니다. 십계명의 언약을 늘 기억하고 사는 것인데 하나님께 나아오고자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신 복이 그를 시냇가에 심기우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를 시냇가에 심기우기 전까지 잘 살고 있는데 갑자기 예수 잘 믿었더니 쑥 뽑혀서 공중 부양을 당하는 것입니다. 시련과 환란과 고통들을 당하고 많은 일들을 당하는 게 10년일 수도 있고 어떤 분은 20년일 수도 있고 시냇가에 심겨지기 위해서 고통을 당하다가 어느 순간에 주님이 시냇가에 심어주십니다. 이 시냇가는 바로 예수님의 보좌가 있는 곳에 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음성이 풍부하며 예수님의 사랑과 긍휼이 함께하는 그곳에 심길 때까지 인생의 여정은 고통과 고난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과정 중에서 이제 뽑히는 분도 있고, 공중 부양을 당하고 있는 분도 계시고, 과거에 있던 흙을 터는 과정에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일을 당할 때에 다른 사람들이 잘못 믿는 거 아니냐, 하나님과 전선줄이 끊어진 것 같다, 하나님과 대화가 되냐, 하나님이 이상한 일을 하고 계신데 문제 있는 거 아니냐, 수많은 말을 합니다. 우리 엄마도 중풍이 드셨더니 병이 낫고 싶으니까 교회에서 기도하고 계셨는데 친하던 권사님이 어느 날 와서 우리 어머니를 발로 뻥 차고 교회의 수치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교회 다니면서 그런 일들을 한두 번 본 게 아니고 비일비재 합니다. 각자 자기 생각에 옳은 일들을 하다 보니까 다른 사람이 상처받는다는 생각을 꿈에도 안하고 자기는 잘 믿고 잘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 말이 상대방에게 비수가 되어서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지 않습니다. 우리 엄마가 그 말을 할 때 저도 기겁을 했지만 아버지가 장로니까 교회를 나가지를 못하고 시간이 흘러서 아버지와 엄마가 교회를 옮겼을 때 저도 마음의 짐이 많이 내려졌습니다.
옮긴 교회 목사님은 오직 예수를 전하는 교회였기 때문에 그 교회 성도들은 훨씬 유하고 부드러운데 그 교회 성도들이 문제가 없었을까요? 목사님이 깨어 있고 예수님의 뜻 안에 살아야 된다고 설교해도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죄인들이 오는 곳인데 착각을 하는 게 목사님이 깨어 있으면 교인들이 깨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똑같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생각들이 강하게 있어서 대화하다 보면 서로 부드럽고 좋은 말들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에는’ 이런 말이 가장 많이 나옵니다. 교회에 와서 교인들끼리 상처 주고 받다가 교회를 떠나는 성도가 의외로 많습니다. 상처를 준 사람이 잘못했다고 생각을 안하고 상처받는 사람도 잘못이 반입니다. 좋게 생각하면 넘어갈 수 있는 이야기를 나쁘게 생각해서 성도들끼리 부딪히고 서로 피하는 분들이 왜 생길까요? 요즘 시리즈 설교로 교회의 문제점을 목사님이나 교리 부분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성도분을 위해 있습니다. 성도들이 오셨다가 성도와 서로 부딪히고 상처가 될 때도 있고, 교회에 자기의 사업 영역을 확장시키기 위해서 오기도 합니다. 노동에 의하지 아니하고 버는 돈들은 실패할 때가 많습니다. 교회 안에서 절대로 돈 거래를 하시면 안 되고 성도들은 서로 주의하고 사랑해야 됩니다.
마태복음 5장 3절에서 7절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4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이 말씀이 성경 전체를 하나의 대주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심령은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고 마음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낮은) 자, 하나님 앞에 마음을 낮추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인데 하나님 앞에 마음을 낮춘다는 뜻이 더 정확하게 해석된 게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4절에서 6절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여기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인데 낮아진다는 뜻이 성령이 나를 낮춘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나를 낮추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잘못 가르친 것이 나의 의지와 행동에 대해서는 말을 안 하고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인도하심에 책임을 넘겨버립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네 마음을 하나님 앞에 낮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낮추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을 낮추면 결과가 나오는데 ‘또’라고 적혀 있습니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는 것이 나으니라. 마음이 하나님 앞에 낮아진 자가 다른 사람에게 갔을 때를 이야기합니다. 예수님 당시는 계급 사회이고 남자가 여자보다 높고 종이 있습니다.
이 소자는 여자나 종 일수도 있고 어린 아이만 아니라 나보다 신분이 낮아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예수의 이름으로 영접한다는 것은 내가 그 사람을 아주 융숭하게 대접한다는 뜻입니다. 나보다 낮은 자인데 도리어 섬기라고 예수님은 당시에 혁명적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아무도 하지 않던 일을 행하고 오히려 섬기며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섬기며 낮아졌듯이 그 마음으로 행동하고 살라는 뜻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낮아진 것으로 끝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실천하고 살라고 ‘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는 마음으로 너보다 낮은 사람에게 섬김으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나는 섬기러 이 땅에 왔노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분이시고 천국은 섬기는 자가 가는 나라입니다.
섬긴다고 하는 것은 존중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다른 사람이 어린 아이 일찌라도 존중하고 손님을 접대하듯 귀하게 여기는 자가 천국에 간다고 하신 것입니다. 교회가 이걸 가르치지 않고 하나님과 나의 관계만 괜찮으면 된다고해서 교회에 오래 나오신 분들이 굉장히 자아가 두터워졌습니다. 교회의 진짜 문제점이 목사와 교리에 대한 말씀을 드렸고 이제 성도분들은 어떻게 해야 될까요? 하나님 앞에 낮아지셔야 되고 여러분이 제일 많이 하는 ‘내 생각에는’ 이 말을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 아래에 두어야 합니다. 노하지 말라,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 아래에 낮추셔야 되는데 내 생각을 낮추지 않는 것은 내가 높은 것입니다. 내 생각을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 아래에 두고 낮아지는 것이 전체의 말씀이고 삶의 행동이 문제인데 다시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8장 7절부터 10절
7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10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 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하셨고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내버리라. 이 말씀을 손이 나쁜 짓 하고 발이 나쁜 데로 가는 것으로 설교하는데 아닙니다. 앞에 문장을 봤더니 손과 발이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하는 것입니다. 소자는 나보다 낮고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어서 손으로 아내나 자식에게 함부로 손찌검을 한다든지 종에게 손찌검을 하여 상대방을 비하하는 행동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그 당시에는 높고 낮음이 있으므로 손과 발로 다른 사람을 비하하고 비난하고 업신 여기는 행동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경을 이어 읽지 않아서 다르게 말하는데 손과 발로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하는 행동을 이야기합니다. 가정 폭력하는 자들은 성경 말씀을 보면 큰일나는 짓입니다. 손과 발에 대해서 찍어 내버리라고 강력하게 말씀하시며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는 것과 업신 여기는 것을 미워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자녀이고 온 세상의 모든 인류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계셔서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감히 내 자식에게 상처 줄 수 있느냐고 분노한다는 말씀입니다.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이 눈은 업신 여기는 눈입니다. 요즘 사회는 눈치를 잘 주고 상처를 받습니다. 말은 의도를 표현하는 데 8% 밖에 안되고 행동을 보고 알 때가 많습니다. 손과 발로 해도 다 알고 언어보다 잘 눈치채는 바디 랭기지(몸짓 언어)를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말하지 않으면 법정에 안 가고 아주 교묘하게 행동으로 상처주는 일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이 남에게 상처 주는 자는 지옥 불에 떨어지리라 무섭게 말씀하십니다. 교회의 문제는 내가 심령이 가난해지지 않아서 생기는 일들입니다. 상처를 서로 주고 받아서 힘들어하고, 자기가 준 상처는 생각도 안하고, 받은 것만 생각하는 것은 마음이 낮아지지 않아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생각 위에 있어야 되고 다른 사람을 영접하고 사셔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 귀한 자녀들을 서로 영접하고 서로 존중해야 합니다. 영접보다 와닿는 말이 존중이고 어린아이나 어떤 분에게도 존중하고 사시는 여러분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그런 분들이 천국에 들어갈 자들이고 예수님은 다른 사람에게 대하는 것을 보십니다. 천국은 첫째는 내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낮은 자, 두 번째는 내 행동이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존중하는 자가 가는 나라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성경의 대강령인 이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구원받는 과정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를 슬퍼 울고 회개하면 위로해 주신다는 뜻인 줄 알았는데 그런 뜻이 아닙니다. 애통한다는 것은 히브리어 〔페사흐〕로 ‘유월절’이라는 뜻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을 애통해하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내 마음속에 들어와 있고 십자가를 향해 내 마음이 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생각할 때 감사하여 눈물을 흘리는 자는 나 때문에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음이 믿어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가르친 것은 택함 받은 자는 구원이 정해졌고 누구는 택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느라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성령만 이야기했는데 물은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내 죄 때문에 돌아가심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내 죄를 용서해 주심을 감사하는 낮아진 마음일때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위로는 헬라어로 ‘파라칼레오’ 뜻은 위로 ,격려, 훈계입니다. ‘파라칼레오’에서 파생된 ‘파라클레토스’는 위로자, 돕는 자 곧 성령을 말하고 있습니다. 위로를 받는다는 것은 성령께서 위로해 주신다는 것으로 십자가 앞에 감사하여 나가면 거듭난다는 뜻입니다. 애통을 히브리어 〔페사흐:유월절〕로 말씀드렸는데 헬라어는 ‘호펜테오’라고 합니다. 이것은 가까운 사람이 죽었을 때 터져 나오는 능동적인 슬픔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가장 가까운 분으로 여기고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을 애통해하고 슬퍼하는 것인데 놀랍게도 일회성이 아닙니다. 능동적이고 반복적으로 애통하는 행위이고 십자가를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일회성 고백이 아니라 항상 십자가 은혜가 감사하여 늘 마음속에 있는 자에게 성령이 들어오셔서 거듭나게 하시는 구원에 대한 설명입니다.
온유는 구원받은 자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성화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온유는 히브리어 〔아나와〕로 ‘종의 신분으로 대답한다, 억눌린 상태에서 대답하다’이고 헬라어로는 ‘길들여진 야생마’라는 뜻입니다. 종이 된 상태에서 대답하는 것은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온유를 한문으로 풀이하다 보니까 마음이 부드럽고 유순한 자로 생각하는데 순종이라는 뜻입니다. 모세가 지상에서 가장 온유하다는 것은 순종하는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는 삶 속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자를 얘기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와서 배우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성도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예수님이 살아가신 그 발자취를 따라가야되고 십자가를 만나겠습니다.
이사야 53장 2절부터 4절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여기에서 예수님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신 겸손을 말씀하십니다. 온 세상의 창조주가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셔서 사람의 죄를 대신 지기 위해서 고난 당하고 멸시 천대를 받으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섬기는 방법입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싫어할 정도로 죄인의 취급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겸손해짐에서 다시 온유함 곧 순종하심을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순종하기 위해 얼마나 고통이 심했는지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셔야 되어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모세의 순종을 넘어가시는 순종이었고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것은 십자가의 순종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십자가를 스스로 지고 가실 정도로 낮아지셨고 말씀에 순종하여 가신 예수를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53장 5절부터 6절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예수님이 살 찢고 피 흘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것을 하나님은 미리 말씀하시고 예수님의 죽기까지 순종하신 순종과 온유하심을 말씀하십니다. 예수가 주인이신 멍에를 메고(마11:29) 주인이 이끌면 다같이 함께 (with) 가야 됩니다. 한국의 멍에는 소가 한 마리인데 이스라엘은 두 마리 이상입니다. 땅이 돌밭이고 물이 없어 단단해서 소가 두 마리에서 네 마리까지 한 멍에를 메야 됩니다. 순종하여 끌려가는 소 중에 목사는 우두머리 소가 되어 같이 가면서 예수님이 의도하시는 것을 알려드리고 성도들이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할 일입니다. 제사장이나 선지자가 아니고 예수님이 너는 무익한 종이니 뒤로 물러가라 하십니다. 예수님이 앞에 서시고 목사는 옆에서 똑같이 멍에를 메고 같이 가는 소인데 다만 음성을 들려드려서 다른 소들이 같이 갈 수 있게 도와드리는 것입니다. 하나의 무리가 되어서 같이 가는데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라(마11:30)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지신 짐은 십자가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문제가 많이 발생할까요? 교회가 성도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안 가르칩니다.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하는 오래되신 권사가 어떤 집사한테 상처를 주면 목사는 집사한테 가서 십사가를 지라고 하면서 권사한테는 안 갑니다. 교회의 기득권을 가진 분에게 교회가 재정적으로 어려울까 봐 말을 안 하는 것은 교회를 망치는 일입니다. 병원에 잘 아는 단골 환자가 한 분 계신데 그분이 교회를 다니다가 안 다닙니다. 시어머니가 교회를 오래 다니신 분인데 들어보니까 세상에 못된 사람이고 돈밖에 아는게 없습니다. 며느리들한테 인격적 모욕을 많이 하고 성공한 둘째 아들의 며느리는 금이야 옥이야 하고 첫째 며느리한테는 막 해버리니까 첫째 아들과 며느리가 상처를 받았습니다. 이 분이 시댁을 가고 있었던 차에서 화가 나서 뛰어내려 다쳐가지고 머리에 큰 혹이 나서 병원에 오셨고 절대로 교회를 안간다고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제가 교회에 좋은 사람도 많다고 말을 했지만 십자가가 마음의 주인이 되지 못해서 그런 일들이 발생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주인 되면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갑시다.
이사야 53장 10절부터 11절
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11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여호와께서 예수님을 상하게 하셨고 질고를 당하게 하셨습니다.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속건 제물은 성전의 성물이 손상되었을 때 돈으로 대신 갚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성전의 성물로 여기고 아버지의 집에 소중한 물품으로 여기는데 손상 당했습니다. 인류는 죄로 인하여 손상 당한 성전의 성물이라서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 자기 영혼으로 배상하시고 이들을 내가 찾겠다고 하십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이 배상하셔서 돌려받은 물건이고 성경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라고 합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이므로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다른 사람보다 내 속이 더 고약하니까 용서하라 하시고 허물을 덮어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귀한 성물들이고 한 분 한 분이 다 귀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귀한 내가 나를 보호하셔야 됩니다.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는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이 지식이라는 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지식은 우리가 알고 있는 무엇을 안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은 히브리어 〔야다〕로 ‘완전히 친밀히 알다, 속속들이 안다’는 것과 ‘연합’이라는 뜻이 같이 있습니다. 이 속속들이 안다는 뜻이 더 심오한데 가장 잘 아는 것은 부부를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이 성도 한 분 한 분을 아내로 맞이하겠다는 뜻입니다. 내가 너를 속속들이 다 안다, 너는 내 아내가 될 것이다, 내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은 너를 아내로 삼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야다〕는 창세기 4장 1절에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매 〔야다〕로 ‘하나 된다’ 부부가 진짜로 하나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지식으로 우리와 하나가 된다. 너는 내 아내, 언약의 관계 곧 지금은 약혼의 관계가 되고 천국에 가면 결혼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혼인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보혈로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포도주를 주시면서 너희와 맺는 새 언약이니(눅 22:20) 말씀하십니다. 결혼하자고 주는 혼인 예물로 죄와 허물을 덮어라, 그리고 나에게 시집오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온 천하의 주인의 아내로 자부심을 가지고 아내답게 살아야 됩니다.
마태복음 16장 21절부터 27절
21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것을 말씀하시고 베드로는 그리하지 말라고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하는데 문제가 인간적 사랑이고 내 생각이 하나님 뜻보다 위로 올라가있습니다. 심령이 높은 것이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꾸중하십니다. 내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특심하다 보면 의인이 되어버리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가 되기 쉬운 것을 굉장히 유의하셔야 됩니다. 잘못하면 베드로와 같은 행동을 하기 쉽고 예수를 위해서 하였다고 해도 사람의 생각이 하나님의 뜻 위에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분노하십니다. 하나님을 위해 일할 때 내 생각을 낮추고 하나님의 말씀이 내 생각보다 위에 있으셔야 됩니다.
예수님이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이것을 정말 유의하셔야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시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생각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생명을 드리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짐은 내 생각을 내려놓고 예수 따라 나도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뜻이 밑에 나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놀랍게도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예수를 믿으면 핍박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던 시대입니다. 이 십자가는 예수를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생명을 각오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신 짐입니다.
여러분 자기 생각을 내려놓으셔야 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은 첫째는 내 생각보다 하나님의 뜻이 크고 두 번째는 예수님 따라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환란에 들어갔을 때 예수를 부인하면 안 됩니다. 북한이 왜 완전히 복음이 못 들어가는 곳이 됐습니까? 평양이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기독교가 가장 부흥한 곳에서 일제 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신사참배를 했습니다. 다만 몇 명의 목사님과 몇 명의 성도만 신사참배하지 않았고 끝까지 예수를 위하여 우상숭배하지 않았습니다. 우상숭배했더니 북한 땅에 복음이 완전히 망가지고 다 죽었습니다. 남한을 살리셔서 피난오게 하셔서 살리고 6.25를 겪게하시고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죽게 하셨습니다.
목사들이 십자가를 지라고 가르치지 않고 국가 의례라고 변명했고 6.25 끝나고 회개한다는 한마디 하고 다시 목회하는 뿌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배도한 뿌리위에 있는 한국교회가 십자가를 안 가르치고 피하는 것만 가르칩니다. 성도는 십자가 앞에 생명을 내놓으셔야 되고 십자가를 따라가야 됩니다. 예수가 저주를 당했기 때문에 나는 복받았다는 사탕 발림은 성경에 없는 것이며 예수님이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오늘날 교회가 성도들의 눈치를 보느라고 십자가를 지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목사와 성도가 다 십자가에서 죽어야 되고 십자가를 따라가야 됩니다.
마태복음 10장 28절부터 33절
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31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놀랍게도 예수님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를 믿으면 목숨을 보장할 수 없는 시대에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핍박을 받고 죽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먼저 죽을 것이니 너희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고 참새 한 마리도 내 허락 없이 떨어지지 않으니 내가 데려갈 수도 있고 안 데려갈 수도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오늘날 이 말씀 앞에 교인들이 서 있지 않습니다. 구원론을 얘기할 때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말한 것은 사람앞에 법정에서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사자 밥이 되었고 화형을 당했고 목숨을 내놓고 시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면 핍박 받습니까? 한마디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핍박은 목숨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은 예수님 당시에는 법정에 서서 예수를 시인하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것이고 목숨을 내어놓는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고백으로 바꿔버려서 성도에게 현대판 면죄부를 파는 것이고 다 죽이는 것입니다. 목사들이 회개해야 되고 성도들도 회개하셔야 됩니다. 다들 십자가를 지고 갈 각오를 해야 되고 언젠가 이 땅이 환란에 들어갈 때, 십자가를 진 자와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자는 살 것이요,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자는 죽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 34절 39절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을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5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6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37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오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환란이 없는 우리 시대에 십자가를 지는 건 무엇일까요? 내 생각이 하나님의 뜻 아래에 있는 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내려놓으시고 말씀 안에 순종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갑시다. 예수님이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는 하루하루가 되기를 축원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은 애통하는 자가 어떤 복을 받는가 가르쳐주시니 감사합니다.
거듭남을 말씀하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거듭난 자는 예수의 십자가를 만난 자이고, 예수의 십자가를 따라 나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우리 시대 아직 환란의 시대가 아니므로 우리는 먼저 예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 아래 내 생각을 내려놓겠습니다.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마음이 낮아진 자가 되며 또한 사람 앞에 섬기는 삶을 살겠습니다.
존중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주님 우리 성도 한 명 한 명을 지켜주옵소서.
살아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