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9장 1 - 7절
“성령을 받았느냐”
에베소에 있으면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교육을 받았던 아볼로는 아가야 지역, 고린도 교회 쪽으로 이동을 하게 되고 그러고 나서 바울은 3차 전도 여행을 시작하는데 윗지방으르 다녀 에베소 지역에 다시 오는 모습을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더 있어 달라는 에베소 교인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약속을 하며 떠났는데 하나님의 뜻에 따라 결국 에베소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와서 보니까 지난주에 봤던 아볼로만 요한의 세례밖에 모르는 것이 아니라 에베소에 사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요한의 세례, 회개의 세례는 받았는데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세례에 대해서는 몰라서 받지 못한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런 무지한 사람들에게 바울이 4절에 보면 이렇게 가르쳤던 것입니다.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바울이 지어낸 말이 아니라 실제 세례 요한이 이와 같은 말을 했습니다. 마태복음 3장 11절에 보면 “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이렇게 말했던 것을 토대로 4절과 같은 가르침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가르치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성령의 세례를 받아서 성령의 은사를 받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볼로만 몰랐던 것이 아니라 “어떤 제자들”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제자는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길을 가겠다고 작정을 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이 이미 예언을 했고 예수님도 약속을 하셨던 성령 세례의 실체를 모른 채 예수님을 믿고 있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볼로나 에베소 교인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요즘 시대에도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는 사람들 중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성경에 대해서 오해를 하며 무지한 상태에서 믿음의 생활을 하는 경우들이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도 전도사 초창기 시절에 학생부 설교를 하면서 고린도전서 13장 13절 말씀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를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하면서 이 말씀은 고린도 교회라는 특수적인 상황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라고 설교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파가 나눠져서 서로 사랑할 수 없었던 특별한 상황인지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라고 강력하게 외쳤던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생각으로는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다는 말씀이 제 뇌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믿음보다 사랑이 더 우선될 수 있다는 고린도전서 13장 13절 말씀을 곧이곧대로 받아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목회를 계속하면서 성경을 보고 연구를 하다 보니 하나님을 믿음의 대상으로만 보고 살면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기도를 하는데 때로는 우리의 믿음대로 이루어주시지 않는 하나님의 모습들이 보이게 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 수일 내에 우리 교회가 차고 넘치게 해 주세요. 누구 병을 고쳐 주세요. 우리 성도들 부유하게 해 주세요.” 이렇게 기도를 해도 그대로 되지 않는 것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오로지 믿음의 대상으로만 생각을 하고 살면 이런 문제들 때문에 결국 믿음에 금이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의 대상으로 보면 조금 실망스럽고 답답해도 사랑하기 때문에 조금 더 참을 수 있고, 조금 더 기다릴 수 있고, 조금 더 신뢰를 하면서 믿음을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이 그 중에 제일이라고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 성도님들도 적지 않은 오해를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 속에 나타나고 있는 성령 세례도 만만치 않은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모두 다 방언을 해야 하는 것처럼, 예언을 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을 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의 은사는 그 종류가 많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7 - 11절에 보면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어떤 사람들에게는 방언을 주실 수도 있는 것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의 능력을 주실 수 있는 것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믿음을 주실 수 있는 것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병 고치는 능력을 주실 수 있는 것이지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서 “저는 이것 주세요.”라고 요구한다고 받을 수 있는 것이지는 않습니다.
성령의 은사가 고린도전서 12장뿐만 아니라 로마서 12장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섬기는 것도 성령의 은사 중 하나이고 가르치는 것도 마찬가지이고, 위로를 잘 하는 것도 성령의 은사 중 하나입니다. 구제하는 것도 마찬가지이고 다스리는 것이나 긍휼을 베푸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성령의 은사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는 방언이나 방언의 통역이나, 예언이나, 병 고치는 은사나, 능력을 행하는 은사에만 너무 초점을 맞추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 은사를 골고루 주셔서 다양한 방법으로 건강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고 싶어 하시는데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살 수 있는 몇 가지 은사에만 주목을 하고 선호를 하는 적지 않은 오해와 무지함 때문에 지금 한국 교회가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는 우스운 꼴이 되고 만 것입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으면 은사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좌지우지될 수 있는 것이지만 성령의 열매는 성령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맺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성령의 은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성령의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 23절에 보면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런 열매들을 맺으면서 살아가야 우리가 성령의 세례를 받았다는 명백한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았는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고 영혼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성령의 세례를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희락은 풀어서 말하면 기쁨이잖아요? 성령의 세례를 받았는데 기쁨이 없으면 그것 또한 거짓말입니다. 성령 세례를 받는 사람은 평안해야죠! 여전히 걱정, 근심 속에 살아가고 있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온유 절제도 웃어넘기시면 안 되고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바로미터이기 때문에 항상 점검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 말고도 성경을 보면서 또는 어떤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감동을 주시고 생각을 주시고 마음을 열어 주시는 많은 경우들이 있습니다. 이런 일들을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에 보면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우리가 적어도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면 이런 경험들을 하면서 살아야 마땅한 것이지 보혜사의 역할을 하시는 성령님에 대한 이런 경험 없이 살아가는 것은 심각한 문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보혜사(保惠師)라는 어려운 한자가 사용이 되어서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성령님을 잘 이해 못하는 분들이 계실 수 있는데 ‘보’자는 보호할 보자이고, ‘혜’자는 은혜 혜자입니다. ‘사’는 스승 사자입니다. 풀어서 해석을 하면 “보호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스승” 같은 분이 바로 성령님이시라는 의미입니다. 그런 분이 우리를 이끄시면 순종하면 되는데 때로는 우리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로 인도하시는 경우들이 있기 때문에 순종하지 못하고 그릇 행하여 제 갈길로 가는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눈으로 뒤덮인 에베레스트를 올라가기 위해서는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이 필요한데 그 외에 필요한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셰르파'라는 사람입니다. 셰르파를 짐을 날라주는 보조인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1953년 5월 29일,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정상에 첫발을 디딘 사람은 뉴질랜드인 '에드먼드 힐러리'와 셰르파였던 '텐징 노르가이'였습니다. 이처럼 히말라야의 위대한 산악인 곁에는 항상 위대한 셰르파가 함께 있었는데 셰르파라는 단어는 짐꾼이라는 뜻이 아니라 네팔 고산 지대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의 이름입니다. 아무리 험하고 가파른 곳이라도 그들이 가면 길이 열린다고 합니다. 정상으로 향하는 새로운 길을 뚫고 개척하는 사람들인데 이들의 정신을 '패스브레이킹'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패스'(Path, 사람들이 지나다녀 생긴 작은 길)와 '브레이킹'(Breaking, 깨뜨리다)의 합성어로 기존의 틀을 과감히 벗어나 남들이 가지 않는 새로운 길을 내는 개척자를 뜻합니다. 보혜사 성령님께서 동행해 주시면 우리 인생 가운데 이런 역할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서 깨어 근신하는 영혼이 되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 말씀에 보면 술 취하지 말고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술 취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신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술을 마시게 됩니다. 성령 충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려면 성령에 미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절대 지금 상태에 만족해서는 안 되고 지금보다 더 갈급한 마음을 가지고 성령님과 교제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했을 때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성령 충만함을 허락해 주실 수 있습니다. 누군가 성령을 받았느냐 물었을 때 은사와 열매와 보혜사 성령님을 통해 경험한 일들을 토대로 자신 있게 성령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고, 예수님 오시는 그 날까지 성령님의 인치심을 받아 살다가 우리와 늘 교제하시는 성령님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넉넉하게 들어가는 기쁨을 나누는 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