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떠나면 일하는 시간을 빼곤 오로지 피시방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곳은 내 생활의 오아시스와 같은 곳이다. 일상의 사막을 건너게 하는 오아시스다. 전주에 와서도 제일 먼저 찾은 건 피시방이다. 피시방이 없는 동네는 왠지 숨쉴 곳이 없는 동네처럼 답답해 보인다. 나는 상산고등학교 주변 효자비뇨기과 앞 길에서 한참이나 피시방을 찾았지만 착기는 쉽지가 않았다. 그처럼 흔한 피시방이 또 찾으려면 없으니 말이다. 어떤 이는 목포 유달산의 피시방을 보고 반가운 마음을 피력한 글을 적어놓기도 했지만 나는 곳곳의 피시방이 주는 그 시원한 그늘이 참으로 맛깔스럽다. 자립형 사립고등학교인 상산고 교문 앞에 있는 피시방은 지하철 표시처럼 되어 있어 독특했다. 서양잔디가 언덕을 꾸미고 있는 학교 계단과 숲 사이로 벌써 매미가 울고 있었다.
피시방, 그건 현대도시 속의 모세혈관을 이어주는 통로다. 그곳을 통해 숨을 쉴 수도 있고 나 자신을 거울에 비쳐볼 수도 있다. 자신을 성찰하는 통로로서 피시방은 마음의 숨통을 터준다. 더운 날 아스팔트와 보도를 걷다 나무 그늘이 있는 벤치를 만났을 때의 기분처럼 피시방 시원한 의자에 앉아서 지난 날을 돌이켜 보거나 꿈의 씨알들을 세어보는 일은 새로운 힘을 낳게 한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이던 세상이 온갖 모순된 일로 가득한 걸 보듯, 피시방에 들어오면 내 자신의 생활속으로 굴러들어온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은 지를 새삼 알게 된다.
서산에 갔을 때 가격이 조금 더 싼 피시방을 찾아 서산 동부시장 주변을 돌아다녔던 적이 있다. 매일 피시를 사용하는 처지로 시간당 천 오백원을 지불하는 일은 만만치 않은 돈이다. 부산에서는 세 시간에 이천원을 약정으로 끊어 사용할 수가 있었다. 서산에서도 시간당 천 오백원의 가격을 흥정해 천 이백 원까지 내리기로 임시 합의를 한 바 있지만 그 작은 가격까지도 신경이 쓰인다. 촌으로 갈 수록 피시방 가격이 강남보다 비싸진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요즘 충청도 인심이 말이 아니게 각박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행정수도가 옮겨가게 되면 세상의 인심도 더 각박해지고 물가도 더 오르게 되는 걸까. 땅값도 오르고 물가도 오르고 삭막함도 더해지는 변화는 왠지 청풍명월의 느긋함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게임을 하는 아이들, 포로노 사이트를 보는 어른들 사이에서 나는 열심이 피시 자판을 두드린다. 그 안에서 나는 길게 자란 손톱 끝에 톡톡 닿아 스프링처럼 튀쳐나가는 자판의 탄력을 느낀다. 그건 일상의 도전과 응전이 만들어내는 움직임처럼이나 글쓰기의 맛깔스러움을 더하게 한다. 살아가는 이야기, 심경의 고백, 그리고 문학에 대한 거경궁리적인 접근, 그 안에서 조금씩 열려지는 세상의 풍경과 인생의 물결이라니, 그건 가히 문학이 줄 수 있는 음미의 깊이란 생각이 든다. 다른 어떤 만족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모순 속의 궁리, 글쓰기는 그런 새로운 모색의 공간이다. 모든 걸 다 알아서 적는 것이 아니라 모르기 때문에 찾아나서는 걸음처럼, 오늘도 나는 세상의 피시방을 징검다리 삼아 쉬기도 하고 또 명상에 잠기기도 한다. 그 안에서 만나는 길동무와 말벗을 하면서 또 길을 찾아가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