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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눈은 성한가?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여러분 혹시 메두사(Medusa)라는 이름을 들어보셨습니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로 대단히 위험한 여인입니다. 메두사는 신의 저주로 인해 고왔던 머리카락은 모두 뱀으로 변하고, 이는 멧돼지의 엄니처럼 변해버렸습니다. 저주는 외모를 변모시키는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메두사와 눈이 마주치는 사람은 누구나 돌로 변했습니다. 그러니 그는 기피 대상이었습니다. 자기 처지에 대한 비관과 외로움은 점점 그녀를 괴물로 만들었습니다. 세상의 누구와도 눈을 마주할 수 없다는 사실처럼 큰 벌이 없는 것 같습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두려움이나 거짓, 사심이나 거리낌이 없을 때 우리는 편안하게 상대방의 눈을 바라봅니다. 하지만 관계에 이상이 생길 때마다 우리 눈은 살짝 흔들립니다. 핏발 선 눈, 섬뜩한 눈, 이글거리는 눈, 흐릿한 눈, 초점을 잃은 눈과 마주하는 일은 늘 고통입니다. 반면 넉넉하지만 깊고, 깊지만 따뜻하고, 따뜻하지만 진실한 눈을 보면 저절로 마음이 맑아집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말과 유사하면서도 다른 표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몸은 육체를 가리키는 말이라기보다는 유한한 인간의 삶 전체를 이르는 말입니다. 눈이 몸의 등불이라는 말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네 눈이 성하면 네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네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라는 말씀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우리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라는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외적 정보를 조합해 세상과 만나고 소통합니다. 오감 가운데서 어떤 감각에 유난히 예민한 이들도 있지만, 보통사람들에게는 시각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우리 시대는 특히 시각이 독주하는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다’는 뜻의 영어 단어 ‘look’에다가 ‘주의’를 뜻하는 ‘ism’을 덧붙여 외모지상주의라는 뜻의 루키즘lookism이라는 말을 만들어냈습니다. 사람들은 ‘외모가 경쟁력’이라느니 ‘예쁘면 다 용서된다’는 말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사용합니다. 학생들에게 여름방학 동안 하고 싶은 일이 뭐냐고 묻자 많은 학생들이 ‘외모 업그레이드’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왜 세상이 이렇게 되었지요? 눈이 성치 않아 온 몸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옛 사람들은 밖으로 향한 눈보다는 안으로 열린 눈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자기를 살피고 또 살피는 성찰省察이야말로 사람됨의 기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찰은 물론 고독의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늘 누군가와 접속 중인 이들은 성찰적 존재가 되기 어렵습니다. 어쩌면 성찰의 시간을 견딜 수 없어 누군가와 접속을 갈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자기 속에 있는 약함, 상처, 그림자, 부끄러움 등을 살필 용기가 없는 사람일수록 남들에게 가혹한 법입니다. 그들은 늘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을 찾아내기 위해 두리번거립니다. 작은 티끌이라도 찾아내면 그것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집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자기 허물을 가리려는 가련한 시도일 뿐입니다. 하나님께 늘 기도를 바치며 사는 이들조차 성찰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이 제게는 늘 아픔입니다. 기도란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거울삼아 자기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 예수의 눈
하나님 앞에서 성찰적인 삶을 사는 이들은 남들의 허물을 찾고 또 지적하는 저열한 쾌락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준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 당신의 의로움을 드러내려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들이 쓰고 있던 위선의 탈을 벗기시려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상처와 나약함을 지적하고 정죄하기보다는 그것을 사랑으로 부둥켜안으셨습니다. 때로는 몰아치는 강풍으로, 때로는 따스한 사랑으로 사람들을 참 삶의 길로 이끄셨다는 말입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사람들 속에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고, 또 호명해주셨습니다. 시몬이라는 갈릴리의 어부에게서 베드로를 보시고,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던 우국지사 나다나엘에게서 간사한 것이 없는 참 사람을 보셨습니다. 마치 미켈란젤로가 돌 속에 갇힌 형상을 해방시켰던 것처럼, 사람들 속에 있지만 아직 실체를 얻지 못한 참 사람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꿈에 형태를 부여하셨습니다. 어부들과 세리, 그리고 열심당원 등 사회의 주변인들, 주류 세계로부터 소외된 이들을 한 데 엮어 아롱진 새 세상의 꿈을 자아내셨습니다. 눈이 밝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철학자인 박이문 선생님은 철학을 ‘둥지’로 설명합니다. 새들은 마른 풀, 지푸라기, 작은 나뭇가지들을 부리로 물어다가 정교하게 엮어 포근한 보금자리를 만들고 그 속에 알을 낳은 후 생명을 품습니다. 철학도 이질적인 것들을 그러모아 튼실한 사유의 집을 짓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뜻일 겁니다. 그렇다면 신앙은 더욱 그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예수님이야말로 둥지를 짓는 새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출신 배경도 지향도 성격도 각각인 이들을 불러 모아 모두가 형제자매로 살아가는 새로운 공동체를 빚으셨으니 말입니다.
제1성서에서 예언자를 가리키는 말 가운데 하나는 ‘선견자’입니다. ‘먼저 선先’ 자가 있어서 앞날을 예견하는 것이 그들의 주특기처럼 생각되지만 그들은 제대로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굳이 다르게 표현하자면 ‘깨달은 사람’ 즉 ‘각자覺者’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과 역사를 보는 이들이었습니다. 성도들은 신문이나 언론보도를 통해 정보를 얻지만, 세상이나 사건에 대한 판단은 성경 말씀에 근거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이라는 렌즈를 통해 세상을 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감찰하시는 분’으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땅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하나님은 주인 사라에게 쫓겨나 광야를 배회하고 있던 하갈의 억울한 사정을 보셨고, 히브리인들이 겪고 있는 고난의 현실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의 보심은 사건을 일으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 위해 개입하십니다. 프란치스꼬 교황께서 브라질에 가서 젊은이들에게 교회 밖으로 나가 정의를 위한 투쟁을 하라고 촉구했습니다. 놀라운 변화입니다. 히브리의 시인들은 "하나님, 일어나십시오. 주님의 소송을 이기십시오. 날마다 주님을 모욕하는 어리석은 자들을 버려두지 마십시오."(시74:22) 하고 기도합니다.
제대로 보는 사람이라야 삶이 비루해지지 않습니다. 마음의 빛이 흐려져 제대로 보지 못할 때 우리는 세상에 휘둘리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평가에 연연합니다. 자유인이 아니라 노예가 되어 삽니다. 눈이 밝아야, 제대로 볼 줄 알아야 세상의 인력에 속절없이 끌려 다니지 않습니다.
• 예속된 삶
본문은 눈이 성하지 않으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라고 말합니다. 온 몸이 어둡다는 말은 자기 인생의 때를 분별하지 못하고 산다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철이 없다는 말입니다. 전도서 기자가 말하듯이 모든 일에는 때가 있습니다. 심을 때가 있으면 거둘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면 허물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면 울 때가 있고, 나아갈 때가 있으면 물러서야 할 때도 있습니다. 때를 알고 살면 무의미한 순간은 없습니다. 쓰라림이야 없을 수 없지만 그 때문에 절망하지는 않습니다. 어둠이 지극하면 빛이 다가옴을 알기 때문입니다.
눈과 몸의 상관관계를 가르치던 본문은 느닷없이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눈이 어두우면 참 주인을 모시기 어렵습니다.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섬김의 대상은 둘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이고, 다른 하나는 재물입니다. ‘섬기다’로 번역된 헬라어 둘류오δουλευω는 봉사와 섬김을 뜻하는 디아코네오와는 조금 달리 쓰이는 단어입니다. 둘류오는 뭔가에 예속된 상태를 이르는 말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똑같은 예속 상태가 하나는 자유를 주고 다른 하나는 부자유를 야기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이 하나님과 접속되어 있을 때 우리는 깊은 자유와 안식과 기쁨을 누립니다. 우리가 느끼는 불안과 공포는 하나님과의 접속이 단절된 데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재물을 섬기는 사람은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물론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습니다. 돈은 우리에게 무엇이나 할 수 있는 자유를 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허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바닷물을 들이키면 목마름이 심해지듯 돈에 집착하는 이들은 노예입니다. 집착은 내가 붙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로잡힌 상태입니다. 그렇기에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욕망과 집착의 뿌리는 결핍감입니다. 결핍감에 시달리는 사람은 그것을 채우기 위해 이웃의 삶에 무관심해집니다. 이웃과의 관계가 단절되면 고독이 찾아옵니다. 고독하기 때문에 더욱 소유에 집착하게 됩니다. 악순환입니다.
지금 제 귀에는 여호수아의 외침이 우렁우렁하게 들려옵니다. 치열한 전투 끝에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각 지파에게 땅을 분배해준 여호수아는 그들이 함께 해 온 시간을 반추합니다. 삶의 고비마다 함께 하시고, 그들이 일구지 않은 땅에 살게 하시고, 세우지 않은 성읍에서 살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주님을 경외하면서 성실하고 진실하게 주님을 섬겨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선택은 언제나 그들의 몫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말합니다.
"당신들이 어떤 신들을 섬길 것인지를 오늘 선택하십시오. 나와 나의 집안은 주님을 섬길 것입니다."(수24:15)
• 날마다 새롭게
신앙은 결단입니다. 결단은 버릴 것은 버리고, 붙들 것을 확고하게 붙드는 것입니다. 한번 정하면 굳건히 지키는 것입니다(主一無適).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 재물을 섬길 것인가? 우리는 양자택일 앞에 서 있습니다. 사람들이 재물의 신인 맘몬에게 속절없이 끌려 다니는 이유는 자기 내면이 헛헛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속이 든든한 사람은 어지간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저는 신앙인이란 ‘일상의 신비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일상 속에 깃든 하나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영적 예민함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꾸만 일상의 흐름을 끊고 멈춰 서야 합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짧은 시가 전 국민의 애송시가 되었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단순하지만 울림이 큰 시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 보아야 비로소 사물이나 사람의 진면목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대충, 흘낏 바라봅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두리번거리며 삽니다. 시간의 향기를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 일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하나님의 숨결과 만나는 사람의 얼굴은 환하고 마음은 관대합니다. 말끝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영광’을 달고 살면서도 얼굴빛이 어둡고 속 좁은 이들이 많습니다. 이제는 ‘언제나 어디서나 기독교인’으로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섬마을 콘서트를 열어 도서 지역의 주민들에게 고전 음악을 즐길 기회를 만들고 있는 피아니스트 백건우 선생께 어느 기자가 지금도 열심히 연습하시느냐고 물었습니다. 백건우 선생은 그렇다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연주자라면 당연히 연습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나는 매일 꾸준히 5-6시간 연습한다. 그 이유는 수준을 유지하려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음악이 새로워져야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대가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음악이 늘 새로워져야하기 때문에 하루에 5-6시간 연습을 한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 하루에 몇 시간이나 노력하고 계십니까? 지금 여러분의 눈은 어둡지 않습니까? 보아야 할 것은 보지 않고, 보지 않아도 괜찮은 것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도 메두사처럼 눈빛으로 누군가를 돌로 만들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지금 우리 삶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여러분은 마땅히 버려야 할 것을 버렸습니까? 버릴 것을 버려야 꼭 붙들어야 하는 것을 붙들 수 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이 눈빛 맑은 자유인이 되어,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상기시키는 이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김기석 (청파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