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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 남선 교수님과 함께하는 풍수답사입니다. *
정기답사는 홀수 달 둘째 주 일요일에 실시하며 일정에 변동이 생길 시 미리 공지하겠습니다.
'아풍동'이 7번째 생일을 맞이합니다. 초등학교 1학년과 친구인 셈이지요. 무탈하게 잘 자라줘서 고맙고 대견합니다. 토닥토닥 칭찬해주고 더 잘 자라라고 격려도 해줄겸 조촐한 생일상을 마련하오니 꼭 오셔서 맛있게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자장율사'의 걸작품인 정암사 '수마노탑'에서 자연의 경이로움을 느껴보시는 귀한 시간도 함께 가지시길 바랍니다.
올바른 풍수란 '자연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선택'이라는 명제하에 가르침을 주시는 스승님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참 좋은 인연입니다. 고맙습니다.
1. 일시 : 2015년 5월 10일 (일)
2. 장소 및 시간 : 아주대 정문 오전 8시 출발
3. 답사지
1) 난향로원 (蘭香路苑 강원도 정선군 북평면 북평리 산208) 남녀성석이 있는 곳은 옛 부터 이야기 거리가 무수하다. 전설에는 고려 말 박씨 성을 가진 ‘난향’ 이라는 어린색시가 이곳 어느 집안에 시집을 왔다. 어느 날 색시는 시집와 처음 냇가에 빨래를 하러 나갔는데, 때 마침 강물에 떠내려 오는 고리바구니를 발견하고는 호기심에 바구니를 건졌다. 그 속에는 무녀가 쓰는 비단옷, 방울, 부채 등의 물건이 들어 있었다. 난향이는 신기할 정도로 알지 못할 기운이 나타났다. 그녀는 물건을 들고 온 동네에 자랑을 하고 다녔다. 이 소문을 들은 시아버지는 사대부 가문에 출가한 여자가 해괴한 행동을 한다며 심히 꾸짖었다. 그 일로 어린색시는 인근 야산에 올라가 소나무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그 후 원혼이 서린 귀신이 되어 시댁집안 식구들을 괴롭히고 대가 끊어지는 등 후환을 낳게 했다. 화근을 당한 시댁에서는 비단 옷 한 벌을 제물로 놓고 원혼을 달램으로서 후환을 면하게 됐다. 이때부터 이산의 이름을 난향산 으로 부르게 됐으며, 또한 마을에서는 매년 단오 날, 떡과 음식을 준비해 다복과 종족번식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오다가 지금은 중단하고 말았다 1970년대 초, 정선선 철도 개설될 당시 산의 흙을 파내 철길공사에 사용했는데 그때 흙속에 묻혀 있던 음석이 드러난 것이다. 마을사람들은 보기가 민망스러워 이 음석을 흙으로 덮어버렸다. 하지만 그 후부터 마을 부녀자들의 바람기가 발동하는가 하면 인근도로변에서는 교통사고도 빈번했다. 주민들은 크고 작은 사건들이 마을 주변에서 발생하자 다시 음석의 흙을 파내고 원상태로 되돌리자 마을의 액운은 사라졌다고 했다. 마을사람들은 이때부터 난향신의 노여움 때문이라 여기고 음석을 소중히 관리하고 있다. 이 사건을 전해들은 정선군이 2004년 음양의 조화를 위해 공원을 조성하면서 어린나이에 죽은 난향의 혼령을 달래기 위해 숙암리에 개인이 소장하고 있던 남근석을 기증받아 이곳에 옮겨 놓았다. 남근은 음석과 마주보고 있는데, 신비할 정도로 남성의 성기를 빼 닮았다. [출처] 데일리안 2014. 11. 23 2) 이 종후 가옥 (정선군 임계면 봉산리 216번지) 및 이교(李灚)선생 묘
조선 숙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이자가 조부인 택당 이식(李植)과 아버지 외재 이단하(李端夏)의 문집을 정리하면서 지은 집이다. 가옥 구조는 ‘ㅁ’자형의 겹집으로 대문을 사이에 두고 안채, 사랑채로 구분되며 ‘ㄱ’자형으로 배치되었다. 안채는 정면에 안방과 부엌을 두고, 뒤로 도장과 뒷방을 둔 영동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겹집형 이다. 또한 대청과 건넌방이 ‘ㄱ’자형으로 접하여 있는데 대청에는 모두 문을 설치하고 건넌방의 전면 측면과 대청, 안방 부분에도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사랑채는 낮은 축대 위에 세운 겹집으로 전면 방과 방 사이에 대청마루를 설치하고 다시 그 앞으로 뒷마루를 두어 각 방과 연결되도록 했다. 집 좌측에는 별당인 수고당(守孤堂)이 있는데 강원도민속자료 제4호인 이단하 내외의 옷이 보존되어 있다. ‘동막댁’ 이라고도 하며 이자의 11대손 이위(李偉)가 소유하고 있으며, 1985년 1월 17일 강원도유형문화재 제88호로 지정되었다.
** 이자 선생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는 중배(仲培), 호는 수고당(守孤堂)이다.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후손으로서, 숙종때 사정공조참의(寺正工曺參議)에 임명되었으나 당파싸움에 실망하여 관직을 거절하고 정선군 임계면 봉산리로 내려와 은거하였다. 이후 수고당(守孤堂), 구미정(九美亭)등을 창건하였고,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
3) 전 훤(全 愃)선생 묘 (강원도 정선군 남면 낙동리 산120-7) 모든 전씨의 시조(始祖) 전섭(全聶)은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의 셋째 아들로 BC 18년 온조(溫祚)가 백제를 개국할 때 오간(烏干), 마려(馬藜), 을음(乙音), 해루(解婁), 흘간(屹干), 곽충(郭忠), 한세기(韓世奇) 등 9사람과 함께 공을 세워 십제공신(十濟功臣)으로 환성군(歡城君)에 봉해졌다. 그 후 고려 때 16관이 분관되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부여 전씨가 분관됨으로써 모두 18개 본관이 되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 정선전씨(旌善全氏)의 시조는 전섭(全聶)의 8세손인 전훤(全愃) 이다. 그는 신라 때 백제의 대광공주(大光公主)를 배행하고 신라에 와 봉익대부(奉翊大夫)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 전법판서(典法判書)에 올랐으며, 정선군(旌善郡)에 봉해졌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후손들이 정선을 본관으로 삼고 전훤을 득관시조(得貫始祖)로 하여 세계를 이어나갔다. 그 후 후손들이 번성하여 18본으로 분적되었다고 한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 한국학중앙연구원
4) 정암사 (淨巖寺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고한리 산214번지)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이다.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寂滅寶宮)의 하나로서 갈래사(葛來寺)라고도 한다. 신라의 대국통(大國統)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한 사찰이다. 사적기(事蹟記)에 의하면 자장율사는 말년에 강릉 수다사(水多寺)에 머물렀는데, 하루는 꿈에 이승(異僧)이 나타나 “내일 대송정(大松汀)에서 보리라.”라고 하였다. 아침에 대송정에 가니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내현하여 “태백산 갈반지(葛磻地)에서 만나자.” 하고 사라졌다. 자장율사는 태백산으로 들어가 갈반지를 찾다가, 어느 날 큰 구렁이가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을 보고 제자에게 ‘이곳이 갈반지’라 이르고 석남원(石南院)을 지었는데, 이 절이 정암사이다. 또 이 절에는 자장율사와 문수보살 사이에 있었던 유명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자장이 이곳에서 문수보살이 오기를 기다리던 어느 날, 떨어진 방포(方袍)를 걸친 늙은 거사가 칡 삼태기에 죽은 강아지를 담아 와서 자장을 만나러 왔다고 하였다. 시자(侍者)가 스승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을 나무라자 거사는 스승에게 아뢰기만 하라고 말하였다. 시자가 자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으나 미처 깨닫지 못하고 미친 사람으로 생각하여 만나지 않겠다고 하였다. 거사는 “아상(我相)을 가진 자가 어찌 나를 알아보겠는가.” 하고 삼태기를 쏟자 죽은 강아지가 사자보좌(獅子寶座)로 바뀌었으며, 그 보좌에 올라 앉아 빛을 발하면서 가 버렸다. 이 말을 들은 자장이 황급히 쫓아가 고개에 올랐으나 벌써 멀리 사라져 도저히 따를 수 없었다. 자장은 그 자리에 쓰러진 채 죽었는데, 뼈를 석혈(石穴)에 안치했다고 전한다. 또, 창건에 관한 일설에는 자장이 처음 사북리 불소(佛沼) 위의 산정에다 불사리탑(佛舍利塔)을 세우려 하였으나, 세울 때마다 붕괴되므로 간절히 기도했다. 그랬더니 하룻밤 사이에 칡 세 줄기가 설상(雪上)으로 뻗어 지금의 수마노탑(水瑪瑙塔)·적멸보궁·사찰터에 멈추었으므로 그 자리에 탑과 법당과 본당(本堂)을 세우고, 이 절을 갈래사라 하고 지명을 갈래라고 했다고 전한다. 정암사 적멸보궁은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석가모니불의 사리를 수마노탑에 봉안하고 이를 지키기 위하여 건립한 것으로, 수마노탑에 불사리가 봉안되어 있기 때문에 법당에는 불상을 모시지 않고 있다. 이 보궁 안에는 선덕여왕이 자장율사에게 하사했다는 금란가사(錦襴袈裟)가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적멸보궁 뒤쪽의 수마노탑은 보물 제410호로 지정되어 있다. 자장율사가 643년(선덕여왕 12) 당나라에서 돌아올 때 서해 용왕이 자장율사의 신심에 감화되어 마노석(瑪瑙石)을 배에 싣고 동해 울진포를 지나 신력으로 갈래산에 비장해 두었다가, 자장율사가 이 절을 창건할 때 이 돌로써 탑을 건조하게 했다고 하여 마노탑이라 하였다 한다. 또한, 물길을 따라 이 돌이 반입되었다고 해서 수(水)자를 앞에 붙여 수마노탑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 탑을 세운 목적은 전란이 없고 날씨가 고르며, 나라가 복되고 백성이 편안하게 살기를 염원하는 데 있다고 한다. 또 이 절에는 금탑과 은탑의 전설이 있다. 정암사의 북쪽으로 금대봉이 있고 남쪽으로 은대봉이 있는데, 그 가운데 금탑·은탑·마노탑의 3보탑이 있다고 한다. 마노탑은 사람이 세웠으므로 세인들이 볼 수 있으나, 금탑과 은탑은 자장율사가 후세 중생들의 탐심(貪心)을 우려하여 불심이 없는 중생들이 육안으로 볼 수 없도록 비장(秘藏)하여 버렸다고 전해진다. 자장율사는 그의 어머니에게 금탑과 은탑을 구경시키기 위하여 동구에 연못을 파서 보게 했는데, 지금의 못골이 그 유지이며 지상에는 삼지암(三池庵)이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 밖에도 적멸보궁 입구의 석단에는 선장단(禪杖壇)이라는 고목이 있다. 이 나무는 자장율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심은 뒤 수백 년 동안 자랐으나 지금은 고목으로 남아 있다. 신기한 점은 고목이 옛날 그대로 손상된 곳이 없다는 것인데, 다시 이 나무에 잎이 피면 자장율사가 재생한다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4. 회비 : 4만원 (차량 대여비 및 중식 석식 기타 비용 포함) (당일 총무에게 납부)
5. 연락처 : 총무 김 은 희 (010 - 3228 - 6489) 회장 김 종 대 (010 - 4234 - 70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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