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시대 영천의 '청못'이라는 저수지를 축조, 중수한 내용을 기록한 비석으로 보물 517호.
신라시대의 기록으로 이두와 관련 있는 내용이어서 완전 해독이 어렵다나...
수원이 될만한 계곡이 없다. 땅밑에서 용출되어 수위를 유지하여 물이 깨끗해서 여기서 건져올린 말이 별미란다.
정철, 윤선도와 더불어 조선 3대 시가인으로 꼽히는 노계 박인로(朴仁老) 선생의 위패를 모신 곳이 도계서원(도 유형문화재 68호). 박노계집 판목이 이 서원에 보관되어 있다.
노계시가비
박인로 선생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
서원 뒤란에 화사하게 만개한 백매화
앞뜰에 세워진 노계시비
앞산에 잠들고 있는 노계선생
영천시 금호강가에 있는 조양각(앞면에는 서세루라 적혀 있음)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와 함께 영남 3루 중의 하나. 고려 공민왕 17년(1368년)에 성리학의 원조 포은 정몽주와 당시 부사 이용, 향내 유림들이 합심해서 지은 건물. 누각 안에는 포은의 청계석벽, 율곡, 사가, 노계 등 명현들의 현액 80여 편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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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옛터'의 노랫말을 영천 출신 왕평 이응호 선생이 지었다 해서 세워진
노래비
조선 세종 원년(1419년) 대마도와 여진 정벌에 공적을 남긴 복장군이라 불리어진 이순몽(李順夢)장군이 기거햇던 집. 세종 15년에 건립된 중국식 건물. 현재는 장군의 위패를 받들고 봄, 가을 제사를 행하고 있다.
병와유고(甁窩遺稿, 보물 652호.영천시 성내동) 이 저서는 조선 영조시대 문인인 병와 이형상(李衡祥)은 청주, 제주 목사 를 지낸 청백리요, 국학자이며 실학의 선구자. 이 호연정(浩然亭)에는 유고, 유품 등이 중요 민속자료로 지정 보관
되고 있다
李大田 遺墟碑(문화재 자료24호)
대전 이보흠(李甫欽)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생장지 대전동에 세운 유허비(1629년). 세종 때 사헌부 감사로 명나라와 외교 일선에서 활약. 문종 때 장령. 세조 때 순흥 부사 재임 시 순흥에 유배되어 있던 금성대군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처형. 유허비 근처 연못이 있었는데 처형되던 날 피로 물들었다 함.
임진왜란 시 영천지역 의병장 호수 정세아의 장손 호례가 광해군 5년(1613년)에 지은 집. 건물 배치를 '工'자로 하여 자손들이 공부(학문)를 열심히 하도록
권학의 뜻이 내포되었다 함. 영일 정씨 중 이 댁 후손이 지금은 1만3천명을 넘도록 번성하고 있다는 그 종친(정병극 전 교장)의 설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