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배달한국 시조 커밝한한웅
신사역대기(神市歷代記) 기록에 보면 '배달한웅은 천하를 평정한 분으로 그 도읍지를 신시(神市)라 한다.'
또 삼성기전-하편(三聖記全-下)과 단군고기(檀君古記), 태백일사(太白逸史)의 신시본기 제3(神市本 紀第三) 등에서는 한웅이 3,000명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 신단수(神檀樹)에 도착하여 그 곳에 도읍을 정하니 신시(神市)라 하고 나라 이름을 배달(倍達)이라 하였다. 풍백(風伯) 석제라(釋提羅) 와 우사(雨師) 왕금영(王錦營) 그리고 운사(雲師) 육약비(陸若飛)를 데리고 곡식, 생명, 형벌, 질병, 선악 등 오사(五事)를 주관하고, 무룻 인간사 360 여 가지의 일들을 잘 다스려 세상을 교화하니 인간 세상에 유익함이 있었다.
안함로의 삼성기전-상편을 보면 '한웅씨는 한님의 뜻을 받들어 백산과 흑수사이(白山黑水之間)에 내려왔다.'라고 하였다.
☞한국의 밝달, 배달(朴達, 倍達)...밝은 땅을 뜻하며, "태양의 나라"를 뜻한다.
☞신시(神市)..."신"은 크다라는 뜻이며, "시"은 "치"로 읽어야 하는 것으로 무리의 수장, 사람 등을 뜻한다. 현대어로 "황제", "천자", "천황" 등과 같은 말이다.
☞신시 배달국..."신치가 다스리는 태양의 나라"를 뜻한다.
개천(開天) 원년(元年) BC 3898년, 커발한한웅은 만백성의 추천을 받고 천황에 즉위하면서 배달국의 개천을 만방에 선포하였다. 천왕의 통치 이념은 처음부터 사람들을 크게 유익할 수 있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이었다. 천왕께서는 전국 여러 곳에 수두단(蘇塗壇)을 세우고 홍익인간을 위한 세 가지 교육을 가르쳤는데 ①사랑의 윤리-부모자식간의 사랑 ②예절의 윤리-임검과 백성과의 예법 ③도리의 윤리-스승과 제자간에 지켜야할 도리 등이 그것이다. 천부경과 삼일신고는 백성들 을 교육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신서이다.
천왕은 풍백, 우사, 운사의 세 장관에게 명하여 백성들의 생활에 좀더 유익하도록 하는 기본법을 제정하니 그로부터 분쟁이 없어지고 사회의 질서가 바로 서게 되었다. 이때 만들어진 법들을 보면
운사(雲師) 육약비의 주도로 결혼예물을 짐승가죽으로 하는 혼례법이 있고, 곡식이나 물건을 서로 교환할 수 있는 시장법도 있었다. 공물과 세금도 법으로 정했으며, 부자와 군신, 그리고 남녀의 행동거지도 명확하게 구분 지어 서로의 자리를 지키도록 하였다. 또한 음식, 의복, 주거의 제도도 만들어졌고, 미혼자들은 머리를 땋게 하는 법도 있었다.
나라의 각종 행사엔 백성들이 모여 열을 지어 돌면서 공수(貢壽), 혹은 두열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나라의 번영과 백성들의 행복을 빌었다. 나라에선 농사일을 하도록 하기 위하여 1년을 365일로 하는 달력을 만들었으며 서로의 편한 교역을 위해 산목(算木)이라는 숫자(數字)이라 는 계산법을 보급하였다. 커밝한한웅님은 농사를 주관하는 고시례(高矢禮)로 하여금 새로운 작농법 을 연구 개발하게 되니 이때부터 원시적인 수전법을 버리고 새로운 농사 기술을 사용하기 시작하 여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다.
☞녹도문( 圖文)...녹도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문자로 한국시대부터 전해오는 천부경과 삼일신 고 등을 천문이 아님 인간들의 문자로 기록하여 보급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천왕의 특명을 받은 신지 혁덕(神誌赫德)은 모래 위에 사슴들의 발자국을 본떠서 소위 사슴그림 글자인 녹도문을 완성하였다
2. 제2세 커부리한웅
개천(開天)96년 B.C 3804년 커부리한웅은 시조 커밝한한웅의 뒤룰 이어 배달한국의 제2세 천황에 올랐다. 선왕때부터 신시(神市)를 중심으로 펼쳐온 홍익인간(弘益人間) 이화세계(理化世界)의 기본 정책과 한웅님의 노력에 힘입어 백성들은 사람다운 삶을 누리게 되었다.
이 시기에 들어와 가장 큰 변하는 성내 질서와 치안을 유지할 자경단을 창설한 것이다. 이들 자경 단은 조직적인 활동을 펼쳐서 지금까지 사람들의 생활터전을 유린하던 맹수들을 모조리 쫒아내니 비로소 백성들은 마음 편하게 다리를 뻗고 잘 수가 있었다.
또 선황(先皇)때에 왕금영(王錦營) 우사(雨師)가 개발한 목축기술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다. 이제는 제법 소, 말, 돼지, 곰, 호랑이 등 많은 짐승을 가두면서 본격적인 목장운영의 기술을 발전시켰다.
신시 시절에 칠회제신(七回祭神)의 책력이 있었는데 첫 회날에는 천신(天神)에게 제사지내고, 2회 날엔 월신(月神), 3회의 날엔 수신(水神), 4회의 날엔 화신(火神), 5회의 날엔 목신(木神), 6회의 날 엔 금신(金神), 7회의 날엔 토신(土神)에에 제를 지냈다고 했다.
수두(蘇塗)의 제관들이 나라의 중요한 행사를 논의하고 결정짓는 화백회(和白會)의 단군들이고, 이들의 최고 어른으로 대천제(大天祭)를 모실 수 있는 고유 권한을 가진 대단군(大檀君) 한웅님들 의 국가권력의 최고 통수권자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므로 비로소 절대적인 제정일치를 이해 할 수 있게 된다.
3. 제3세 우야고한웅
개천 182년 B.C 3718년 우야고환웅는 신시배달국의 제3대 천황으로 즉위하여 국력신장의 막중한
책임을 이어 받았다.
요사(遼史) 예지(禮志)에 기록된 요천(繞天)은 '옛날의 제천(祭天의식에 무천(舞天)의 악이 있었다'
라고 하여 제사에는 반드시 먼저 생을 상징시켜 살아있을 때처럼 온갖 정성을 다 들어야 한다고 하였다. 신주를 세우고 상을 차리고 공물을 올리는 것을 친견(親見)을 표시하려는 의식이며 지난 옛 일을 되새겨 훗날까지 교훈을 삼고자 하는 것이다.
신시(神市) 시절의 음악을 공수(貢壽) 또는 두열(頭列)이라고 하는데 사람들은 축제 때 무리를 지 어 합장을 하며 돌면서 삼신께 제사를 지내고 나라가 크게 번영하길 빌었다. 그 내용을 보면 처음 하늘이 열리고 땅이 생기며 우리의 터전을 이야기하고, 역대 조상 임검님들을 노래하며 나라의 태평성대를 비는 것이다. 참여자들은 평안을 기원하면서 온갖 액(厄)과 살(殺)을 불러 어르고 달래서 복을 비는 액풀이, 살풀이 등이 다 그것이다. 비나리 가락 속에서 무한한 시간과 공간에 대한 경외감이 깔려있고, 유한한 삶의 한계를 용서와 화해로 극복하려는 마음이 담겨있는 것이다.
4. 제4세 모사라한웅
개천(開天) 281년 B.C3619년 모사리한웅께서 천황 위에 즉위하였다. 이즈음 나라의 질서를 잡아가 고 백성들은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의 생활이 평안을 누리자 봉황(鳳凰) 이 날아들어 백아강(白牙岡)에서 살았다.
☞봉황은 동방의 동이족을 상징하고, 용은 서방 한족들의 상징물로 삼았다.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에 '나라가 안정되자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사방 멀리서부터 모여 들었 다. 여기저기 산꼭대기에는 사방에서 옮겨온 백성들이 담을 동그랗게 둘러 부락을 이루었고 네 집 이 한 우물을 공동으로 사용했으며 총 수확의 20분의 1을 세금으로 내게 했다. 해마다 풍년이 들고 언덕과 산에는 곡식이 쌓이고 이를 즐기며 태백환무(太白環舞)의 노래를 지어 전했다.'라고 하여 이 시대가 태평성대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5. 제5세 태우의한웅
개천(開天) 288년 B.C 3512년 태우의 환웅께서 천왕위에 즉위하였다. 천황은 주위의 사람들에게 사람의 마음을 맑게(淸心)하고 숨은 고르게(調息), 그리고 정기를 보정(保精)하여 오래 살 수 있게 하는 하늘의 술법을 가르쳐주었다.
천황은 12명의 황자를 두셨는데 맏 황자는 다음 왕위의 계승권을 가진 황태자 다의발(多儀發)이고
막내 황자는 복희(伏羲)씨였다. 복희씨는 태호(太昊)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큰 햇빛이라는 뜻이다.
일십당주인 이맥(李陌)이 쓴 태백일사(太白逸史)을 보면 '복희가 삼신(三神)이 내리는 꿈을 꾸고 만 가지의 세상이치를 통철하더니 곧 삼신산으로 가서 제천(祭天)하고 천하(天河)에서 괘도를 얻었 다. 괘도(掛圖)는 그 획이 세 번 끊기고 세 번 이어져 있어서 자리를 바꾸면 이치를 나타내는 묘 (妙)가 있고 삼극을 포함하여 무궁한 변화를 읽을 수 있었다. 또 태호 복희는 괘도의 두 괘도로 부터 8괘를 만들었고 여화(女禍)는 복희의 제도를 이어받고 옛 글자의 모양을 참고하여 글자 만드 는 6가지 방법책인 6서(六書)를 전했다 하였다.
밀기(密記)에 의하면 '복희는 신시 배달국에서 태어나 우사(雨師)의 벼슬을 세습하다가 후에 낙랑 (樂浪)와 청구(靑邱)를 거쳐 서방의 진(陳) 땅으로 옮겨가다가 그 곳에서 수인씨(燧人氏)의 뒤를 이 어 임검이 되었다. 복희씨는 아직 가지 원시 부족국가 상태였던 중국인들에게 혼인하는 법을 세우 고, 25줄의 비파를 만들어 전수하는 한편, 목축 기술을 가르치는 등 훌륭한 정치로 백성들을 보살 펴주었으므로 수인씨, 유소씨와 나란히 그 이름을 중국 벌에 빛냈다. 그후 후손들은 그곳에 그대로 주저앉아 풍산(風山)지방에 살면서 풍(風)씨를 성씨로 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후예들이 점점 번성하게 되자 마침내 패(佩)씨, 임(任)씨, 기(己)씨, 포( )씨, 이(理)씨, 사( )씨, 팽(彭)씨의 여덟 가지의 성씨로 나누어졌다. 지금의 산서성 제수(濟水)에 복희족의 옛 거처가 있다. 임 (任), 숙(宿), 수(須), 구(句), 수유(須臾) 등 복희씨의 나라들이 모두 여기에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씨(氏); 옛날에는 임검의 칭호를 씨(氏)라고 불렀다. 나라이름을 구별하는 역할도 했고, 천황을 가르키는 의미도 포함한다. 더 나아가 그 나라의 백성까지도 모두 호칭하는 것이다.
6. 제6세 다의발한웅
개천(開天) 481년 B.C 3419년 배달국의 천왕 다의발천왕이 즉위하여 국정에 참여하였던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천부력을 만들었다. 사실 그 동안 써오던 원시책력이 불완전하여 여러 가지 시행 착오를 발생시킴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좀더 완벽한 책력을 만들도록 한 것이다.
옛 기록에 '신시 배달한국의 초기에 벌써 천부경(天符經)의 듯을 만든 책력이 있었다. 이 때는 계해 (癸亥)를 썼는데 계(癸)는 계(啓)요, 해(亥)는 핵(核)이니, 일출(日出)의 뿌리다.
서정설(徐廷雪)교수의 논문을 인용하여 간단히 소개하기로 한다.
'본시 허공에는 일신(一神, 無極)이 석삼극(析三極)으로 나누어 하늘의 길(天道)을 따라 순환하시며 운행하고 있다. 석삼극은 하늘의 천기(天氣), 땅의 지기(地氣), 사람의 정기(精氣)로 불변의 『천도 순환의 법칙』에 따라 순환하고 있다. ' 이는 태초에 시작도 끝도 없는 하늘의 일신은 태양의 형상 으로 나타났는데, 그 무한한 근본은 무극으로 이것을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작용이라고 한다. 일신 (一神, 無極)은 삼기(三氣)로 변하여, 낮에는 태양의 양기(陽氣), 밤에는 달의 음기(陰氣)에 섞여 천(天), 지(地), 인(人)의 조화를 이루며 천도(天道)를 따라 함께 순환하는 것이다. 천부경의 천도 순환법칙에 의해 사계절의 순환과 24절기 변화법칙을 칠정산내편(七政算內編)에 기록하고 있다.
7. 제7세 커련한웅
개천(開天)579년 B.C 3321년 한웅커런이 천황위에 올랐다. 그 동안 꾸준한 발전을 계속하던 세계 최고의 배달국은 이제 제법 나라로서의 틀을 완전하게 갖추고 있었다.
온 세상이 아직도 부족사회(部族社會)나 추방사회(酋邦社會)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이지만, 서녁 멀리로 진출해간 12한국 중의 하나인 수밀이국(須密爾國)인들도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장악하 고 한족의 문명을 꽃피우기 시작하였다. 이민족들 중에서는 나일강 유역에서 도시국가를 분립하기 시작한 이집트인들 정도가 제 나름대로 문명의 싹을 피우기 시작했을 정도이다.
지금의 중국남부의 해안지방인 대분항(大 抗)문화의 유물들을 탄소측정 해본 결과 지금으로부터 무려 8,000년 이전까지 올라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 다음은 황화중류 유역의 배리강(裵李崗) 문화와 자산(磁山)문화인데 이 문화는 7,200 전부터 앙소문화(仰韶文化0로 계승되었다. 동부 해안 지방인 산동성(山東省)지역에는 북신(北辛)문화가 있었고 이는 대문구(大汶口)로 연결되는데 대략 6,500여년전 부터이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남만주의 요령성(遼寧省), 심양시에 있는 신락(新樂)문화 유적 역시 6,900년 전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지역들이 한민족 고대사의 주무대였었다.
대릉하(大凌河)유역의 하가점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는 은말주초(殷末周初)시기의 청동기문화 이른바 남산근문화(南山根文化)로 연결되면서, 발해연안식(渤海沿岸式) 청동단검을 출현시켰다.
8. 제8세 안부련한웅
개천(開天)660년 B.C 3240년 안부련한웅은 21살의 나이에 배달한국의 제8세 천황위에 즉위하였다. 이때 태백산의 북녘에 있는 비서갑의 주인인 감씨족의 후손으로 고씨(高氏)씨가 있었다.
명문가문 고시씨의 자손으로 소전(少典)이라는 장군이 있었는데 매사에 책임감이 투철하여 천황의 특별한 신임을 얻고 있었다. B.C 3240년 신유년에 배달한국의 식민지 중 가장 서쪽지역에 강수 (姜水)지방에서 반란의 움직임을 보이자 정부는 곧 소전 장군을 파견하였다.
소전(少典)의 아들 신농씨(神農氏)가 있었다. 신농씨는 일찍이 수백까지의 초목을 연구하여 병 치료 에 필요한 약들을 개발하는데 성공하였다. 신농씨가 신비로운 약들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 서 수많은 백성들이 그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신농을 따르는 백성들이 점점 많아지고 그의 명성이 높아지자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열산(烈山)으로 옮겨갔다. 열산은 복희씨(伏羲氏)의 여동생 여화(女禍)씨의 영토였다. 여화씨는 이미 늙고 기력이 없어 다음의 왕위를 넘겨줄 사람을 찾고 있었 다. 때마침 신농씨가 이주해 오더니 시장을 크게 열어 백성들이 필요한 물건들을 서로 교환할 수 있게 하고, 또 한편으로 갖은 약초를 풀어 아픔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구해줌을 보았다. 여화씨는 신농씨가 동이족(東夷族)인데다가 백성들이 그를 따르는 것을 보고 그에게 다음의 왕위를 넘겨 주었 다.
9. 제9세 양운한웅
개천3,086년 갑술년에 양운한웅이 배달한국 제9세 천왕위에 올랐다.
10. 제10세 갈고한웅
개천(開天) 829년 B.C 3071년 배달한국 제10세 천왕위에 등극하였다.
갈고천왕은 서쪽변경의 주인이 명확하지 않아 항상 충돌이 끊이지 않음을 염려하여 서국에서 자치 권을 염원하는 염제신농(炎帝神農)에게 특사를 보내 국경협상을 진행시켰는데 이때 공상(空桑)을 국경의 거점으로 정하고 그 동쪽을 배달국에 영원히 종속시키기로 합의하였다. 이로서 서쪽의 국경이 안정되니 나라의 평화가 깃 들고 백성들은 행복한 생활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때 맺은 국경 협정은 양측에서 서로 존중하여 배달한국 제14대 자오지(慈烏支)한웅이 천왕위에 오를 때까지 약 350여년 동안 잘 지켜졌다.
11. 제11세 커야밝한웅
개천(開天) 927년 B.C 2971년 배달한국 제11세 천왕위에 즉위하였다. 이 시기에 돌아와 쇠붙이를 다루는 기술이 크게 향상된 듯 보인다. 인간이 쇠붙이를 다루기 시작한 때를 대략 기원전 5천년경 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견해이다. 쇠의 제조기술이 동이족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은 이미 여러 문헌을 통해 잘 하려진 일반적 상식이다. 쇠를 뜻하는 최초의 상형글자가 뜻하는"금(金)"자 에다 다시 우리 민족을 뜻하는 "이(夷)"자를 합성하여 "철( )"자로 씀으로 철의 산지가 동이였음 을 거듭 증명하고 있다. 초기의 쇠는 다루기 쉬운 놋쇠 종류로 구리(CU)와 아연(ZN)을 합금하는 정도였는데 이것이 계속 발전하면 다음단계인 청동기에 들어서게 되었다.
12. 제12세 주무진한웅
개천(開天) 1019년 B.C 2879년 주무진 한웅님은 커야밝 천왕의 뒤를 이어 신시 배달국의 12세 천왕위를 올랐다. 이 시대에는 크고 작은 전쟁이 천지사방에서 항구적으로 진행되는 상황으로 무기 (武器) 무장(武裝)과 군사기술이 원시적인 틀을 벗고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고 있다.
그것들은 각종 공격용 및 방어용 무기가 전문적으로 발전한데서 알 수 있다. 특히 활촉, 장단검(長 短劒), 투창(投槍), 방패(防牌)등은 전투, 전쟁행위가 단순한 종족단위로 진행되었던데 비해 같은 이해관계를 공유한 집단적 행위로 의미가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전투력 향상은 국가 경영의 가장 중요한 정책중에 하나가 되었다. 최상의 전투력은 전투를 수 행하는 병사들을 강인한 체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전국 각지에 있는 수두(蘇塗)의 무예 교육과정을 철저히 강화하고 병사의 체력을 연마시키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아마도 지금까지 전수되어 오고 있는 많은 한국의 전통 무예의 원형들 즉 수박도, 택견, 기천, 원화 도, 현무도 등이 이 시점에서 개발되었을 것이다.
13. 제13세사와라한웅
개천(開天)1124년 B.C 2744 사와라한웅께서 천왕위에 즉위하시다.
삼한관경본기에 이르기를 '천왕은 즉위초에 웅여군(熊女君)의 후손을 여(黎)라 하여 단허(檀墟)의 왕으로 봉한다는 칙명을 내리셨다. 여씨(黎氏)는 임지의 백성들을 덕으로 다스리니 영토가 점점 넓어지고 주위의 소왕국들이 감동하여 스스로 찾아와 방물을 바쳤다. 이때 천 여명의 사람들이 귀화하여 왔다.
☞여(黎)...산서성(山西省) 장치현(長治縣)의 서남에 여주(黎州)의 옛날 대쥬신제국(大朝鮮帝國)의 색부루(索弗婁)단군(檀君) 때에도 여파달(黎巴達)장군을 보내 장군을 진압하고 다시 여국을 일으켜 세웠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쥬신의 변방지역으로 항상 많은 문제 점을 가지고 있던 곳으로 보인다.
☞삼족오(三族烏); 우리 민족은 민족의 상징인 해(태양)속에 발이 세 개 달린 까마귀가 살고 있다 고 믿고 있다. 이 모든 것을 주술적인 의미로 간단하게 생각하여 버리기엔 민족 의 전통과 문화적 정서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 커서 좀더 그 뜻하는 바를 풀어 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옛 고분들을 발굴해보면 무덤 속의 장식을 통하여 일월성신과 동서남북 방위의 청룡(靑龍), 백호(白虎), 주작(朱雀), 현무(玄武)의 사신도 그리고 성신의 별자리인 28수(二十八宿)등은 벽화에 그려놓았다. 이런 그림들 중 해(太陽)의 모습은 삼족오가 해 속에 모습이다. 태양 속의 흑점이 검 은 빛으로 나타나서 마치 까마귀의 모양으로 보일 수도 있다. 마치 달 속의 옥 토끼와 같은 이치다.
14. 제14세 자오지한웅
개천(開天)1191년 B.C 2707년 자오지한웅님은 배달한국 제14세 천황위에 즉위하시니 이분이 불세 출의 대영웅 치우천왕(蚩尤天皇)이시다. 이제 천하의 지존에 오르신 천황은 곧 백성들을 추스리고 그 동안 해이해졌던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 신시(神市)의 전통을 굳건히 계승하여 제국의 위용 을 만방에 떨치셨다. 삼한비기에 의하면 "때마침 고명하신 나라의 대 선인(仙人) 자부선인(紫府先 人)이 삼황내문경(三皇內文經)을 완성하여 천황께 바쳤다. 임검이 너무 기뻐서 이를 가상히 여기고 자부선생을 청구(靑丘)의 대풍산(大風山)에 삼청궁(三淸宮)을 지어 살게 하였다. 선생은 해와 달의 운행을 측정하고 오행(五行)의 수리를 고찰하여 칠정운천도(七政運天圖)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칠성력(七星力)의 시작이다."
☞삼황내문경...원래는 녹서(鹿書)로 세편으로 나누어 쓰여졌는데 후세 사람들이 여기에 주(注)를 달 고 신선음부설(神仙陰符說)이라 하였다. 이것이 후세에 도교의 기초가 되었다. 황제가 썼다고 알려 진 음부경(陰符經)도 삼황내문경의 뜻을 풀어쓴 것이다.
☞청구(靑丘)...청구의 대풍산은 풍산(風山)이라고 하는데, 그곳이 지금의 산동반도의 동래(東萊)지역 이라는 것은 너무나 많은 문헌을 통하여 이미 증명되었다. 중국의 사마천이 쓴 25사의 기록에 '황 제가 청구에 이르러 풍산을 지나 자부진인을 만나다,(黃帝東到靑丘 過風山 見紫府眞人)'라 한 것 은, 황제(헌원을 말함)가 치우천왕의 명령을 받고 청구의 삼청궁에 있는 자부선생을 진인(眞人) 즉 신선을 모셨다는 것을 적은 것이다.
☞삼성기-하편의 기록중에 ' 헌원이 자부선생을 찾아 뵙고 『삼황내경문』을 받았다. 이밖에도 창힐 (倉 ), 공공(共工), 대요(大橈) 등의 무리들이 배워갔다.'라고 하여 자부선생이 동이의 문학과 철학 을 중국에 전수하여 엄청난 영향을 끼쳤음을 알려준다.
☞중국의 기록들은 황제를 중국의 시조 조상으로 모시면서 황제가 사실은 동이족이었음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 결국 황제는 조국을 배반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아직까지 노예 생활에 길들여진 그 들을 선동하여 민족심을 고취시킨 후, 독립까지 성취시킬 목적으로 감히 배달국의 임검이신 치우 천왕에게 도전한 인물인 것이다.
15. 제15세 천황 치액특 한웅
16. 제16세 천황 축다리 한웅
17. 제17세 천황 혁다세 한웅
개천(開天) 1455년 B.C 2453년 혁다세한웅이 배달국의 제17세 황위에 즉위하였다. 커밝한한웅님이 신시(神市)배달국을 개천한지 어언 1,455년의 긴 세월이 흘렀다.
세계에서 가장 일찍 건립된 배달한국은 이집트나 슈메르 등의 고대 도시국가들이 모두 신석기 말 엽에 해당하는 석동기 시대를 배경으로 형성되었던 것과는 달리 이미 청동기문화를 찬란하게 꽃피 우며 발전해왔던 것이다. 배달한국의 번영을 몇 가지 측면에서 조명해 볼 수 있는데, 그 첫째로는 모든 백성들이 하늘의 자손이라는 소위 천손사상(天孫思想)을 믿어 단일민족의 혈연의식이 있었던 것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종교적인 역사관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점은 세계의 타종교들이 모두 전도와 설득 혹은 정복에 의하여 강제적으로 자기들의 종교를 강요하여 강제적으로 자기들의 종교를 강요하여 전파시켜 왔던 것과는 달리, 오랜 세월동안 한국 시절을 지내오면서 하늘과 땅과 사람을 하나로 보는 천, 지, 인(天地人) 삼위일체(三位一體)사상이 종교적인 사상으로 승화하여 수두(蘇塗)를 중심으로 하는 천제와 교육 등으로 자연스럽게 단합하는 분위기가 백성들의 마음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민족문화의 전통은 지금까지도 시베리아와 몽골, 만주에 고스란히 남아있어 이들 모두가 한반도와 일본을 포함하여 한민족의 한가족 한문화 권임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샤마니즘적인 종교의 의식행위나 오보(서낭당), 입석신앙(立石信仰), 복식(服飾) 그리고 다 같은 어원에 뿌리를 두고 가가 발전해온 알타이권의 언어사용 등으로 증명될 수 있다. 특히 샤먼, 무당들의 복장과 글 그리고 복장에 단 방울들, 신목 (神木)에 걸어놓은 울굿불굿한 천조각, 산위나 동네입구에 세워두는 입석이나 짐승들은 더 이상 의심의 여지를 없애버리는 결정적인 증거들이다.
18. 제18세 커불단한웅
개천(開天) 1518년 B.C 2380년 커불단 태자는 배달한국 제18세 한웅으로 제위에 올랐다. 그 동안 배달한국은 천해(天海)로부터 동쪽으로 옮겨와 븨류호로부터 영고탑까지의 넓은 북만주로를 정복하 며 정착에 성공했고, 또 산동성일대에 대한 중화족들과의 마찰도 안정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커밝단한웅은 지금까지 고수해왔던 정책을 바꾸어 서서히 남쪽만주(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남만주와 함경도일대)일대를 욕심내기 시작한 듯 보인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하는 남만주일대는 기마민족인 한민족이 서쪽으로부터 이동하여오기 훨씬 전부터 먼저 정착하여 살고 있던 농경토족들이 있었으니 바로 우리 고기(古記)에 보이는 웅족(熊族)이 그들이다. 옛 기록들의 행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웅족의 이웃에 또 다른 종족이 보이는데 고기(古記)는 이들은 호족(虎族)이라고 쓰고 있다. 호(虎)는 호랑이를 뜻하므로 곰(熊)족으로 쓰고 있는 상태에서 이들과 분쟁상태에 있는 그들을 호(虎)족으로 호칭한 것으로 보인다. 호(虎)족과 싸움에서 밀리게 된 곰(熊)족들은 북쪽의 강국(强國)인 배달한국 과 협상을 제의하고, 곰(熊)족의 공주를 커불단한웅에게 시집보내면서 동맹을 요청한다. 이에 커불단 한웅은 지신(地神)의 지위에 있는 곰녀(熊女)를 황후(皇后)로 맞아들이고 동맹을 받아들인 후 군대 를 파견하여 곰(熊)족의 위기에서 구해냈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배달한국의 황후가 된 황비는 B.C 2370년 5월2일, 인시(寅時)에 대쥬신제국(大朝鮮帝國)의 시조가 되실 단군성조를 생산하였다.
옛 기록에 의하면 '그븐의 덕망이 천인(天人)과 같아 많은 사람들이 따랐다. 그의 나니 14살 웅족의 임검 웅씨(熊氏)왕이 그의 신성(神聖)함을 듣고, 그를 부왕(副王)으로 삼아 임검을 대신하여 나라일 을 행하게 하였다.' 단군세기(檀君世紀)에는 '개천 1565년 상달(上月) 10월3일에 이르러 신인(神人) 임검(任儉)이 오가(五加)의 우두머리로서 800인의 무리를 이끌고 와서 단목(檀木)의 터에 자리를 잡았다.'고 적고 있다.
단군께서 무려 24년간을 곰(熊)족을 이끌면서 그 동안 곰(熊)족을 괴롭혔던 호(虎)족을 멸망시키고 부황(父皇)의 나라 배달한국에 버금가는 막강한 세력을 떨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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