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른 오월
금년 오월에도 중학교 동창들이 모여 학창시절 담임선생님을 모시고 식사를 했습니다.
10여 년 전부터 거의 매년 모시고 식사를 하는데 관동중학교 제1회 졸업 B반으로 금년에는 열 명이 모여 조금 적게 모인 편입니다.
강릉시 강릉농업고등학교(현 강릉중앙고등학교) 병설로 설립되었던 우리 관동(關東)중학교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1963년 2월, 우리 1회 졸업생만 내고 1,2학년은 경포중학교에 흡수되었습니다. 우리는 A, B 두 반이었는데 입학은 각 반 60명씩 120명, 졸업은 A반 45명, B반 50명으로 95명이었고... 바야흐로 졸업 50년이 흘렀으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당시 A반 담임은 김남득 선생님이시고 B반 담임은 정연수 선생님이셨는데 A반 담임 김남득 선생님은 관동대학교 학장을 역임하셨던 그 분인데 돌아가셨고, 우리 B반 담임이셨던 정연수 선생님은 올해 일흔 여덟이신데 몇 년 전부터 건강이 그다지 좋지 않으셔서 안타깝습니다. 당시 두 분은 1학년 입학 때부터 졸업 때까지 줄곧 같은 반 담임을 하셨으니 작은 인연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1960년 대 초, 누구 할 나위 없이 찢어지게 가난했고 10대 초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기, 세상물정 모르는 시골아이들에게 젊은 총각선생님들의 교육열정은 크나 큰 울림으로 가슴에 새겨졌습니다.
‘옳은 일이고 할 가치가 있는 일이고, 할 수 있는 일이면 지금 당장 시작하라’ 등
당시 선생님의 열정어린 말씀들은 지금도 모임이 있을 때 마다 서로 되뇌곤 합니다.
이제 우리도 근 70을 바라보지만 돌이켜 보면 선생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우리들의 인생여정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음은 물론 삶의 길잡이로 되었다고 모임이 있을 때 마다 친구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야기 합니다.
달랑 95명의 졸업생만 내고 문을 닫은 우리 관동중학교지만 선생님들의 열정어린 교육 덕분인지 제법 우리 사회에 두각을 나타낸 인물들이 꽤 있습니다.
현 한국전통문화학교 석좌교수이며 동아시아문화유산보존학회의 회장인 이모 군, 한진 중공업의 전무이사를 지냈고 현재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금산출신의 심모 군, 해양대학을 나와 현대상선 영국 지사장을 지내고 현재 미국 뉴욕에 살고 있는 조모 군, 서울대학교 수학과를 나와 카이스트 수학과 교수를 다년 간 역임하고 정년한 최모 군, 강릉 부시장을 지낸 박모 군, 강원도 역도연맹 고문으로 장미란을 길러 낸 이모 군, 대기업 이사급으로 이름을 날리던 임모 군, 최모 군, 서울에서 고등학교 교편을 잡았으며 등단 시인인 조모 군, 강릉에서 광고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김모 군, 현재 인천에서 사장으로 있는 교동 출신의 정모 군, 현재 대 건설회사의 사장으로 있는 전모 군, 나처럼 초․중등 교원으로 교장을 역임한 다수의 친구들...그 밖에도 굵직굵직한 명함들을 들고 다니던 친구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서울 길음역 앞 채선당(菜鮮堂)으로 선생님을 모셨는데 사모님이 모시고 나왔습니다. 사모님 말씀에 의하면 선생님은 74세에 모든 기억이 멈춰버리셨다고 합니다. 어린아이 같은 해맑은 모습의 선생님은 우리들의 중학 시절은 정확하게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비록 같은 이야기를 몇 번이고 반복하시는 모습이 안타까웠지만 특히 서글펐던 것은 우리들의 이름을 몇 번이고 다시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지금도 항상 기억을 되살리며 놀라워하는 것은 입학한 후 처음으로 교실에 들어오신 선생님은 출석부도 없이 바로 우리들의 이름을 불러나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졸업할 때까지 3년 내내 출석부 없이 우리들의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그 선생님이 우리들의 이름을 다시 물어보시다니....
선생님과의 추억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특히 엄격히 가정방문이 금지되던 시절이었지만 교장선생님을 설득하여 학급 학생 전원의 집을 방문해 주셨던 일입니다.
‘학생의 사는 모습을 직접 보지 않고는 올바른 교육을 할 수 없다’
고 교장선생님을 설득했다고 합니다.
학교에서 6km가 넘는 우리 학산(鶴山)마을은 물론 더 먼 왕산, 언별리, 금광리까지 자전거를 타시거나 직접 걸어서 다니셨으니 그 열정은 어디서 나오셨을까....
또 한 가지는 물리전공이셨던 특기를 살려 우리들에게 광석 라디오 조립을 가르치셨고, 교내에 방송국을 차려 단파방송을 하셨는데 공교롭게도 어선들의 단파 주파수와 겹쳤던 모양으로 경찰서에 신고가 들어와서 선생님이 직접 경찰서에 불려가 고역을 치르시기도 했습니다. 아마추어 단파 주파수가 범위가 있었지만 우리들이 손으로 직접 코일을 감아 만들다보니 그 아마추어 주파수를 넘고 말았던 것이지요.
이런 저런 이야기로 웃고 떠들다보니 점심에 시작한 자리가 저녁 5시 반이 넘고 말았습니다. 주인 눈치도 있고하여 아쉬운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내년에도 건강하신 모습으로 다시 뵐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