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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사의 말씀: 덕분에 어젯밤(10월 14일) Narita를 경유하여 OZ105편으로 미국출장을 끝내고 귀국하였습니다. 기내에서 작성한 제 6 화 '김대중과 나' 를 보내드리오니 애독
하시고 많은 격려의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신 희 석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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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정치권력과 Political Leadership
제 6 화: 내가 본 김대중
나는 김대중 대통령과 여러상황 속에서 7~8 회정도 만났으며, 한국정치는 물론 동북아국제관계, 특히
한미관계와 한일관계에 관하여 다양한 화제를 나누었다. 또한 만날때 마다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특히 대통령선거가 실시되기 직전에 롯데호텔 36층 Bell-Vue 룸에서 개최된 현재 내가 이사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아태정책연구원 (Asia-Pacific Policy Reserch Institute,APPRI)의 개원 리셉션에 임동원 前국가정보원장(당시는 아태평화재단사무총장)을 포함하여 수명의 국회의원을 대동하고 참석, 나를 격려하여 주었던 고마운
순간을 결코 잊지 않고 있다 (별첨사진참조). 김대중씨는 대통령 선거를 목전에 둔 상황이었지만 정말로 어려운 걸음을 하였으며, 약간의 격려축의금도 지참하고 와서 나에게 나에게 직접 전달하여 주었다. 새롭게 출발하는 아태정책연구원의 창립당일 보여준 김대중 대통령 의 그 고마움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내가 김대중 총재를 처음 만난 것은 1964년 봄으로 기억한다. 그 당시 한국의 국내정세는 3·24데모, 6·3사태의 소용돌이 속에서 굴욕적인 한일국교정상화를 반대하는 학생데모와 소요사태가 전국을 휩쓸고 있었다.
연세대학교총학생회가 주최한 시국대강연회는 64 넌 3 월24일. 연세대대강당에서 김대중씨와 함석헌씨를
동시에 초청하여 굴욕적인 한일회담반대 범시국강연회를 개최되었다. 나는 정치외교학과 초년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총학생회선배들의 요청으로 한일회담반대 강연회의 준비과정에 어느 일정한 임무를 맡았다. 나는
강한 전라도액센트를 사용하는 김대중 총재의 달변과 조리있는 강연을 듣고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 그의 강연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었다. 이 시국강연회야말로 3·24데모와 아을러 추후에 6·3사태로 연결되는 귀중한 연결고리가 되어 1965년6월 22일의 한일기본조약체결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학원소요사태의 기폭제가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김대중씨와 함석헌씨의 두 분을 앞세우고 "굴욕적인 한일회담반대" 라는 프래카드를 앞세우고 데모행진을 할때 우리는 연세대정문앞의 굴다리 밑에서 당시의 서대문경찰서장이 직접 진두지휘하는 경찰진압대와 대치하였다(서장 정성준총경, 정보과장 대머리 윤?경정). 신장 160 센치 정도의 보통키에 비교적 뚱뚱한 정성준
서대문경찰서장은 직접 마이크를 들고 육성으로 연대생들의 즉시해산을 요구하였다. 그 당시 경찰관들에게
학생들의 평화적인 시위를 무력으로 막지 말라고 호되게 꾸지람하던 김대중씨와 함석헌씨의 모습을 보고 어린
학생인 나는 적지않은 자극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우리들은 수백명이 한 덩어리가 되어 시커먼 경찰차에 분승하여 무더기로 서대문로타리 옆 화양극장뒤에 있는 서대문경찰서에 연행되었다. 경찰서 마당에서 우리대학의 김대준(?)학생처장이 경찰고위간부들과
옥신각신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뒷편에는 김대중씨와 함석헌씨의 모습도 어렴풋이 창밖으로 보였다. 연행된
학생들의 대부분은 소위 '훈계방면' 되었다. 나도 풀려난 학생무리에 섞여 있었다.
그 후 약 10 년의 세월이 흘렀다.
내가 김대중 씨를 두 번째로 만난 것은 1973년 7월말 일본동경 Kamiyacho에 있는 동경한국연구원(원
최서면) 2 층이었다. 나는 연세대 정외과를 졸업한 후 37개월의 병역의무를 완수하였다. 그리고 미국 Harvard 대학의 Extension Semester를 거쳐서 동경에 도착,ICU-GSPA(Graduate School of Public Administration)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한 후 동경대학대학원 국제관계론연구실 박사과정에 도전하였는데, 운좋게도 나 혼자 합격하여 장학생이 되었다. 박사과정을 수료한 후 박사학위청구논문을 쓰면서 지도교수의 소개로 Kamiyacho에 있는 동경한국연구원에서 참고문헌정리,분류, 보관 등의 알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아, 자네는 연세대학의 申군이 아닌가?" 다행히도 김대중 씨는 나를 알아 보았다. 아마 최서면 원장께서
나에 관한 정보를 사전에 전달한것 같았다. 연구원 2 층에서 우리는 700엔짜리 생선초밥 도시락을 사무실에서 시켜 먹으면서 장시간의 대화를 나누었다. 그 당시 나는 동경대학대학원 국제관계론연구실의 박사과정에 재학중인 대학원생이었던 고 로 돈이 별로 없었다. 김대중 씨는 거의 매일 출근 하였으며, 우리느 언제나 점심식사를 함께
하였다. 김대중씨가 당시의 중앙정보부에 의하여 납치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은 바로 그 직후이었다.
아마도 납치 2-3일 전까지 나와 점심을 같이 했던것 같다. 점심식사를 함께 하면서 김대중씨는 한국연구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나에게 연구관심분야, 지도교수, 장래의 희망 등에 관하여 진지한 어조로 물었기에
나도 성실하게 답하였다.
이 당시의 김대중씨는 박정희 대통령과 김종필 국무총리의 이름을 수차례 거론하면서 한국정치의 바람직한 방향에 관하여 열변을 토하였다. 또한 나의 동경에서의 생활 등에 관하여 기탄없이 진지한 대화를 주고 받았다.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이 나가야 할 길에 관해서도 김대중씨 나름의 독특한 어조로 이야기 하던 때가 어렴풋이
생각난다. 바로 2-3일 뒤, 김대중씨가 한국정부관계자들에 의하여 해상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너무나도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가 김대중씨의 부름을 받고 동교동에 있는 서교호텔 2 층 일본식당에 다시금 불려간 것은 그로부터 상당한 세월이 흐른 1996년 가을경으로 생각한다. 나는 아태평화재단 임동원 사무총장(나중에 국가정보원장 및 청와대외교안보수석으로 등장)을 통하여 김대중씨가 오랜만에 나와 점심을 같이 하기를 원한다고 하는 전갈을 받았다.
서교호텔 2층에 있는 일본식당에 도착하니 김대중총재가 먼저 와 있었다. 반갑게 악수를 청하면서
나에게 일본NHK방송국에서 출판한 약 500 페이지 가량 되는 일본어 책을 한권 주면서 이를 한국어로 전문번역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나는 이 요청을 수락할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김대중씨의 자서전 비슷한 그 책은 김대중씨의 인생행로를 기록한 단행본인데 이를 통하여 나는 한국 민주주의발전을 위하여 노력해 온 한 정치인의
사상과 철학,그리고 나아가서는 해방이후의 한국정치과정과 발전사를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임동원 사무총장(전 외교안보연구원장이 나를 적극적으로 김대중총재
에게 P.R.하였다.
하지만 500 페이지가 넘는 커다란 단행본을 한국어로 번역한다는 작업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그때 아태정책연구원 이사장으로 이미 자리를 옮겼기 때문에 우리 연구원의 윤신호 사무국장과 함께
불철주야로 번역작업을 약 5 개월간 걸려서 완료한 후 하얏트호텔 지하의 프랑스식당에서 임동원 사무총장을
통하여 김대중씨에게 전달하였다. 너무나도 힘들고 괴로운 大번역작업이었지만 김대중씨는 나에게 1 원의 번역료도 지급하지 않았다. 또한, 나 역시 번역료나 어떠한 반대급부도 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전후의
대한민국이 낳은 위대한 한 정치인의 자서전 출판에 결정적인 협조를 한것을 오히려 흐뭇하게 생각하였다.
1998년 초가을 어느날, 나는 임동원 사무총장으로부터 또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김대중씨가 오랜만에
일본을 방문할 예정인고로, 일본정치외교를 연구하는 정치학교수의 관점에서 한·일 관계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정세일반에 관하여 긴급브리핑을 해 달라고 하는 요청이었다. 약속한 장소인 동교동소재 상기 서교호텔
2층 중국식당에 도착하니 김대중씨, 임총장, 국회의원 2명, 박금옥 비서관 등 7~8명의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준비한 자료를 배부한 후 학자의 입장에서 동북아국제관계의 변용과정에 관하여 미·일·중·러의 한반도
정책을 중심으로 하여 브리핑을 하였다. 또한 정부 (외무부)의 입장에서는 유병우 아주국장(나중에 주터키대사), 그리고 역사문화의 입장에서 김용운 한양대교수가 각각 발표하였고 상당히 장시간의 의견교환을 하였다.
물론, 나는 발표수당· 또는 사례금을 전혀 받지도 않았지만 상대방측도 전혀 줄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야당총재의 해외출장과 관련하여 국가공무원으로서 필요한 브리핑을 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고 판단되었다. 정치학자로서도 흥미있는 연구작업이었다.
이보다 앞서 김대중씨는 앞서 말한바와 같이, 현재 내가 근무하고 있는 아태정책연구원(APPRI)의 개원식에 상기 임동원 사무총장과 수명의 국회의원을 동반하고 롯데호텔 3 층 벨뷰룸에서 개최된 개원식에 참석하여주었다. 대통령선거가 가까워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석하여 내빈들은 물론 우리가족들과도 일일이 악수하고 아태정책연구원의 무궁한 발전을 축하해 주면서 격려해 준 것을 나는 잊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은 김대중씨와의 만남을 주선하고 중간에서 교량적 역할을 해 준 사람은 다름아닌 박금옥 비서관(여, 50대 후반?)이다. 박금옥씨는 김대중씨가 대통령으로 취임함과 동시에 청와대로 입성, 총무비서관으로 근무하면서 청와대살림을 전부 도맡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박 비서관이 청와대 입성하기 전까지는 타워호텔 등지에서 수차례 만나면서 한국정치발전과 김대중씨의 향후의 정치행보 등에 관하여 진지한 의견교환을 자주 나누었지만, 청와대 입성 후에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말하자면 안면을 바꾼 것이다.
여자의 마음은 꼭 갈대와 같다. 나의 인덕부족에서 기인된 것으로 사료된다.
김대중 대통령과 나와의 만남을 주선해준 박금옥 여사의 역할은 매우 큰 것이었다. 1995년 어느 날 나는 미국 포틀란드대학이 주최하는 아태지역의 안전보장에 관한 국제심포지움에 참석하여 동북아국제환경과 한국의 외교정책에 관하여 영어로 연구발표를 한 적이 있다. 同심포지움은 Portland대학에서 오랫동안 교편을 잡고 있던
하만경 교수가 실무준비역할을 담당하였다.
우연히도 이 국제 심포지움의 패키지 속에는 김대중씨에 대한 명예박사학위 수여식이 있었기에 나는 김대중씨 일행과 비슷한 타이밍에 시애틀과 포틀란드를 거의 동시에 방문하였다. 주시애틀 한국총영사가(총영사:김 균) 주최한 김대중씨 환영만찬석상에는 부인 이희호 여사도 동석하여 같은 테이블에 앉았던 것이 기억난다.
또한, 포틀란드에서도 같은 호텔에 숙박하게 되었는데 상기 박금옥 비서관이 김대중씨의 또 다른 만남을 주선하여 주었다. 소량의 맥주와 와인을 함께 마시면서 김대중씨 호텔방에서 이루어진 와인 회동은 1 시간이상 계속되는 두사람만의 독대이었다. 김대중씨는 80 년대초 하버드대학국제문제연구소(CFIA)에 2 년간 객원연구원으로 방문하였을 당시를 회고하면서 84년부터 2년간 CFIA에서 객원교수로 근무하였던 나와 비교하면서 Harvard동문이라고 기뻐하였다. 또한 한국외교와 남북한관계에 관한 자신의 철학을 갈파하였다.
그리고 진지한 어조로 최근의 한반도정세와 한미일 관계에 관하여 그의 신념과 소신을 피력하였다.
“언젠가 申 교수와 함께 일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라고 말하면서 굳은 악수를 나누었던 김대중씨의
모습을 나는 결코 잊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김대중씨가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5년간 재임하는 동안 나를 한번도 청와대로 부른 적이 없다.
좋게 말하면 주위에 너무나도 많은 대선캼프참모들이 마치 인의 장막처럼 포진 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또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김대중대통령의 정권창출과정에 나는 아무런 기여를 한 것도 없었거니와 대통령선거캠프에도
전혀 관여하지도 않았던 별 볼일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사료된다.
김대중대통령의 취임초기. 국민들은 김대중씨야말로 철저한 야당출신이고 한국민주주의 발전을 위하여
투쟁한 정치인 인고로 김영삼씨보다는 한걸음 앞서갈것으로 기대하였다. 하지만 소위 햋볕정책의 추진을
통하여 북한을 감싸고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정상회담을 통하여 국내정치기반의 강화를 시도한 결과 소위 진보세력과 종북좌파세력이 확장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하였다는 비판도 부정할수 없다. 또한, 김대통령 아들들의 각종부정비리는 치명적 타격이었으며 정당의 권위마저 훼손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요컨대 나는 김대중씨와 대통령 취임하기 전까지는 500 페이지의 책번역, 한일관계에 관한 특별 브리핑. 당원의 개원식 참석 등, Portland 에서의 독대 등,일련의 정책협조 등으로 비교적 가까이 지냈지만 대통령 재임기간동안에는 별도로 만난적이 없다. 이에 대하여 아무런 미련도, 아쉬움도 후회도 없다. 다만 한국이 낳은 위대한
한 정치인의 생애를 바라보면서 나는 오로지 국책연구활동에만 조용히몰두하였음을 오히려 자랑스럽게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두번다시 대한민국최고통치권자 즉 대통령의 ‘지적노예’가 되어서는 아니 되겠다는 중대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다음호에 계속....제 7 화 노무현·이명박과 나⑦).
첫댓글 독서하고 간다 .
다음호를 기대하며 ...
철세야! 고맙다. 너 금요일(19 일) 대전모임에 같이 안갈래? 희석이가!
다음날, 20일(토) 복잡한 날인데...
19일(금) / 저녁에 대전방문하고, 서울로 돌아온다면...
우리 들이 범접할수 없는 일들을 소상히 피력해주어 흥미롭게 읽기도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이 국제정세를 옳게 판단하려는 노력은 인정해줘야 할것 같은데 지적했듯이 그중 종북세력들이 세를 확장하도록 빌미를 준건지 아님 도모한건지는 역사가 말하겠지만 국민들의 반공의식은 확실하게 무뎌지고 동부연합같은 종북세력들이 득세하게된것은 두고 두고 과일것이라고 생각되어짐은 나만의 좁은 생각일까?
동감이네. 김대중 대통령이 다른대통령에 비하여 국제정세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인식할려고 하였던 노력은
평가할만하네. 하지만 소위 햇볕정책의 과도한 추구는 결과적으로 국내의 종복세력들이 세력을 확장하여
대한민국의 국시인 자유민주주의를 도전한 측면은 아쉽다고 볼 수 있네. 홍동문의 애국심을 높이 평가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