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월문학회 제3차 자체특강 용경자 회원
일시: 2010년3월13 토요일 오후3시
장소: 소흘읍사무소 지하회의실
제목: 내안의 나를 찾아서
참석: 안익수 지도교수, 윤순옥, 이영임, 김병기, 김선진, 김영복, 용경자 회원
학습자료: 천상병 시인의 귀천, 봄바람, 열병
욕심, 자존심으로 가득했던 시절
선생님에게 인정받기 위해 학교 대내외적인 활동(붓글씨, 독후감쓰기)을 열심히 했다.
이것은 내가 진정 좋아서 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찾기 위한 돌파구였다. 사람이 항상 똑같은 환경은 아니다. 초등학교 6년동안 칭찬받고 싶었다. 내가 잘 난 줄 알았다. 중 2때까지 공부 잘했는데 중3학년때 고등학교 진학 면담에서 어머니는 상고가서 돈 벌어라고 하셨다. 그 상황이 되니까 유일한 의지였던 공부가 하기 싫었다.
상고를 가야 한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상고를 졸업하면 경리나 은행으로 취직하던 시대였다. 한마디로 자존심이 상했다. 친한 친구와도 떨어지는구나 하는 서글픔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중3 2학기때부터 지식수준은 끝났다. 졸업하고 놀고 또래들과 이별했다. 친구도 사귀기 싫었다. 친구를 만나는 것도 자존심 상해 연락 오는 것도 끊었다.
사람은 항상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엄마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가정의 구심점이 없어졌다. 방황을 했다. 내가 사는 삶의 끈을 잃어버렸다. 엄마가 돌아가시니까, 아빠는 추스르지 못하니까 방황하고 힘들었다.
앞으로 나가야되고 시간이 흐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숭의여전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이 길로 가면 나도 해야 될 길이 있겠다고 생각했다. 다양한 사람-내또래 친구들-직장생활을 하다 온 언니들 재미있었다. 언제든지 선택할 수 있었던 일이다. 그 언니들과 남산가서 놀았고 서울시립대에서 미팅도 하고 놀았다. 노는것은 좋았는데 아빠가 미웠다. 어느날 아빠는 말씀하셨다. 너는 돈도 많이 쓴 것 같은데 돈도 못버느냐? 화가 났다. 그래서 가출했다. 어젯밤에 생각하니 부모가 돼도 자식이 그렇게 한다면 황당했을 것이다. 큰 사고 안치고 살면! 가출해서 친구의 도움으로 잘 살았다. 외로움이라는 것이 그런가? 생각 많이 해봤다.
혼자 외롭고 힘든데 자존심 때문에 아무한테도 이야기 하지 않았다. 결혼은 연애반 중매반 해서했다. 10년동안 너무 힘들었다. 그 이유는 욕심과 자존심으로 30년을 버티고 살았다.신랑을 받아 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능력이 없어서 너무 불행해! 당신이 왜 안해줘! 말 없는 침묵, 신랑도 지치더라. 편안하게 할 수 있는 것-문학이 내 실패를 알게 했던 것이다. 문학으로 서서히 변하는 것에 신랑이 좋아하더라.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옛말에 남의 모습은 잘 보이지만 내 모습은 잘 못본다. 내안에 나의 욕심을 채우지 못한...
대학교 때 언니에게 말했다. 신랑 때문에 답답해서 못살겠다. 그랬더니 언니는 너는 자존심으로 가득차 있으면서 신랑이 너한테 해 준것은 모르느냐? 시부모가 너를 사랑할 수 있도록 신랑이 역할을 해 준 것이라고 말했다. 속으로 맞다고 생각했다.
결혼해서 18년째 되도록 몰랐다. 글을 쓰고 다듬다 보니 노력하다보니까 글이 내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울이었다고 생각한다.
포천신문 주부명예기자로 활동하면서 안쓰고 싶었는데 한번인가 용기를 냈다. 신문에 났다.
문학 나도 힘들었고 신랑도 힘들었다. 상처가 깊어 맞는데도 너무 시원했다.
문학적 토양이 부족하다 보니 화장지로 덧붙이는 행태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솔직한 것을 쓸 수 있다면 가치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훈련하는 것도 중요하다. 문학의 훈련은 자연과의 대화, 사물과 대화다. 자연과 나와의 관계속에서 인간의 스토리가 나오게 되더라! 내안의 나와 대화였다. 그것이 작가 인것 같다.
어떤 식물을 관찰하고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내안의 나와의 대화이지만 공부하고 관찰하고 테크닉(기교)을 알아야지만 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학때 언니가 남편이 빨간 신호등에 나를 만나기 위해 뛰어온다면 너는 어떻게 할 것인가? -숨어버릴 것이다.- 아니다. 너는 남편을 따듯하게 맞이해야 할 것이다.
(안익수 시인 총평)
신달자 시인의 삶이 문학을 부른다 속편 같았다. 문학은 삶의 산물일 수 밖에 없다. 신달자 시인도 시인으로서 출발했지만 그후로 수필, 에세이 여러권 상재했다. 여성들만이 가질 수 있는 삶을 통한 문학적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남성들은 대개 시인으로 출발해서 에세이, 수필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개 소설로 전향한다. 소설은 그럴법안 이야기를 꾸며내는 것이고 수필은 삶에서 우러나는 것을 대개 표현한다. 삶에서 충격받는 것- 남여간 자존심과 문학적 용기가 다르다. 남자들은 자존심의 구조상 그대로 논픽션으로 갈 수 없다. 그러나 여성들은 논픽션하다. 논픽션 작품 공모가 많았다.(수기) 자기가 살아온 삶을 글로써 감동시키는 장르가 수기다. 픽션은 가상이다. 에세이는 논픽션, 소설은 픽션이다.(꾸며 내야 한다) 문학적 기교, 창작적 수사가 필요하다. 소설은 과거에 있었던 것, 정상적인 질서를 파괴해서 얻는 문학적 쾌감 추구로 시와도 닮아 있다.
수필이나 에세이, 꽁트는 문학이 아니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문학의 주제는 소재를 어디서부터 끌어내고 찾느냐 그 찾이다. 시와는 어떻게 다른가?
시는 기존의 질서의 보편적 도덕성을 깨드려 거기서 새로운 질서(아름다운 질서)를 창출해 내는 것이다. 수필과 시는 어떻게 다른가? 궁긍적 추구하는 것은 같다. 소재를 찾고 어떠한 과정으로 가느냐, 문법적 기교의 차이가 있다. 3월9일 광명문인협회 초청특강을 실시했다. 어떻게 하면 시를 잘 쓸까? 70~80명이 모인 자리에서 원고없이 1시간 특강했다. 그날 강의한 것이 그것과 결부되어 있다. 비슷한 점이 있다.
자기의 삶을 통해 문학을 하게 된다. 내 마음을 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작가라는 것은 고뇌와 아픔과 아름다움에 대한 노예다. 인간이 좀더 정신적인 것이 필요하다.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는 것이다. 문학을 잘해서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사는 사람은 없다. 이름석자 남기고 간다. 베스트셀러 작가는 돈을 벌겠지? 천만의 말씀이다. 문학인은 정신적 양식을 생산하는 사람들이다.
농부를 씨앗을 뿌려서 열매를 얻지만 시인은 언어를 통해서 성경이 왜 수천년전부터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을까요? 그것이 문학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21세기의 화두는 인문학, 정신분석학, 신학이다. 경제가 어려워지고 살기가 힘들어지면 점쟁이가 잘된다. 미아리 고개는 한국 주술가의 집성촌이다. 지금은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되었다. 물론 후진국은 예외다. 과거 20세기에 비하면 먹고사는 문제로 고민하지 않는다.
초등학교 시절 옥수수죽(미국이 준 것이다)을 먹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정신은 어디서부터 출발하고 무엇이 만들어내느냐? 정신이 문화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문학이 새로운 문화를 창출한다.
왜 신종플루에 대해서 매스컴에서 난리법석을 떠는가? 교통사고로 죽는 사라밍 더 많은 사회에서 ..그것은 정치적인 시나리오다.
문학이 추구하는 시나리오는 문인의 양심을 통해서 시나리오를 짜야 한다. 나는 왜 글을 쓰는 가? 나는 무엇을 쓰고 있는가? 양심적으로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정말 문인의 양심을 가지고 새로운 질서, 이상 복지 삶을 위해 얼마만큼 자기를 불태우고 있는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용경자 작가의 가정갈등, 자존심- 그속에서 문학을 통해 자유, 그 속에서 살밍 변화, 결국 그것 가지고는 안된다.
러시아의 대 문호 토스토예프스키는 삶의 갈등, 고뇌, 이상국가를 생각했다. 더 크게 고민하고 했을 것이다. 그래도 자기자신을 발견하지 못했다.
문학을 통해 자기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남긴말이 진정한 내 모습을 보려면 신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죽었다.
어떠한 생각을 갖고 고뇌를 갖고 글을 쓰려 했는가?
문인의 양심으로 자문할 필요가 있다.
엊그게 무소유 법정스님이 입적하셨다. 한국을 대표할만한 최고의 재벌 정주영 회장도 타계했다. 우리 가슴속에 누구의 삶이 더 각인되고 우리 가슴속에 못을 쳤을까요? 법정스님은 정신과 투쟁했고 정주영 회장은 물질과 투쟁한 것이다.
우리 문인은 보편적 상식을 망각할 때가 있다. 모모한 단체에서 옥신각신, 쌈박질을 하고 있는데 이게 문학인의 양심인가?
문학하는 자질이 없다. 문학을 등에 업고 이름값좀 하고 싶어 그따위 행태를 쓰고 있는 것이다.
한국문단이 한국정치보다 더 썩었다. 이것을 바로잡는 것은 문인들의 양심 뿐이다.
한국작가회의 소속 작가들이 촛불시위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지원금을 줄 수 없으니 앞으로 시위 안하겠다고 각서를 쓰면 지원금을 주겠다고 이명박 정부가 비겁하고 비민주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작가라는 비판 시야는 잘못된 것을 먼저 볼줄 알아야 한다. 잘못된 부조리에 대해 항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한국작가회는 총회때 결론을 내렸다. 지원금 받지 말자고... 문인, 시인, 작가는 말하지 말라. 글쓰지 말라고 하는 것은 협박하는 것이다.
한국도 내가 아는 정치적 상식으로 볼 때는 통일이 된다. 그러나 강대국들이 자신의 이권을 위해서 반대한 것이다.
독일은 누가 통일시켰는가? 스스로 통일했다. 힘이 강해지면 된다. 민주주의에서는 경제다. 돈이 많아지면 힘이 세지게 되어 있다. 강대국에서 핵확산금지조약을 만들었다. 강대국은 핵을 갖고 있고 합당화시키는 것이 정치다.
인가사회는 항상 강자가 약자를 먹게 되어 있는 것이다.
용경자 작가는 내가 왜 문학을 하게 되었는가? 나는 무엇을 쓰는가? 그런면에 있어서 앞으로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글을 쓰면서 나를 발견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늘 반성하고 회개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런 삶속에서 인간의 정신을 평화롭고 따듯하고 아름답게 하는 글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좋은 글 쓰려면 자기자신을 먼저보고 자기자신을 속이지말라!
문인은 남을 속일지언정 자기는 속이지 않는다. 자기를 속이는 시인은 좋은 글 쓰지 못한다.
괴테는 시인은 언어의 사기꾼이라고 했다. 시인은 아름다운 사기꾼이다. 그 사기를 어떻게 봐야 하나?
언어를 조탁할 수 있는 언어의 변용을 통해서 인간의 가슴을 울리는 것이다. 또 사람을 속이고 사기치고 하는 사기꾼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진정한 문인은 자신을 속여서는 안된다.
자신의 정직한 것을 언어로 사기쳐야 한다. 가장 위대한 시는 인간의 눈물이다. 눈물이야말로 인간이 토해내는 가장 위대한 시다. 자기양심을 들여다볼때 뜨거운 눈물이 나는 것이다. 내가 모 시인을 추천하는 추천사에서 시인은 꽃이 되는 아름다운 노래하기에 앞서 꽃이 지는 아픔을 말할 줄 알아야 한다.
진정한 작가(시인)는 자기를 속여서 글을 쓰면 안된다. 소설가도 있을 법한 이야기를 쓰지만 자기를 속이지는 않는다.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한 메시지를 주는 것이다.
시를 쓰는 시인은 자신을 속이면 안된다. 적어도 글을 쓸 때는 정말 양심껏 글을 써야 한다.
인간의 눈물이 왜 짠가? 바닷물이 왜 짠가? 온땅의 아픔을 갖고 시냇물은 강물이 되고 강물은 바다로 흘러간다. 그래서 바덧물이 짠 것이다.
자연의 물로 하늘까지 갔다 온다. 자연으로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자연도 하늘에 올라가서 구름으로 떠돌다가 땅으로, 바다로, 숲에, 꽃에,인간의 머리에 떨어지는 법이다.
수목원에서 생활하면서 수목원을 시적대상으로 글을 쓰고 있다. 되지못한 교만함, 되지도 않는 언어의 사기를 쳤구나! 나는 정말 비겁한 사기를 쳤다. 자연의 이치, 섭리, 하늘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짤막한 지식 하나를 최고로 생각하며 울궈낸 것이 내 시였구나! 그래서 요즘에는 내가 양심적인 자연과의 소통을 하면서 글을 써야겠구나! 자연처럼 정직하고 양심적인 것이 없다. 교육철학자 루소는 그래서 자연으로 돌아가라 고 말했다. 인간의 교육을 자연에서 다시 시작해라.
너무 자연을 도외시한다. 인간의 짧은 지식과 지성만 갖고 살아왔다. 그래서 만든게 대안학교다. 다 자연으로 돌아가고 있다.
자연을 본면 자연으로부터 스스로 깨닫는 삶이 되고 교육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지식과 지성이 필요없다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문인의 양심으로 글을 쓰려고 해야 한다.
용경자 작가는 글쓰는 동기, 글을 통해 인생을 변화시키고 내 삶을 정화, 다시 부언해서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자연의 오묘한 이치와 섭리를 통해서 진정한 내 지식과 지성과 양심을 잘 소통시킬때 거기서 최고의 걸작을 건져낼 수 있다.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나? 에 대한 답변이다.
시인은 하늘이 선택한다. 그런 양심으로 시 쓰는 놈이 몇 놈인가? 저 자신도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모 문협의 싸움박질! 그게 뭡니까?
진정한 투쟁과 답변을 얻어내지 못한 소치다. 물론 그것을 보고 문단정치라고 한다. 글 같지 않은 글 문단정치를 통해 이름 석자 남기고 권위찾고 자리찾는 문단정치가 한국의 정치판보다 더 썩었다. 그런데 현혹되지 말라. 정말 열심히 문단정치에 뛰어들던가?
용경자 작가의 삶이 문학을 하게 만들었다. 문인은 자신을 속이지 않는 인간의 선한 양심으로 정직한 글을 써야 한다. 그래야 역사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