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사로 가는 도중 삼정산 능선에 올랐다. 삼정산은 지리산 조망대로 통하듯 능선 위 어느 곳에서나 웅장한 지리능선을 감상할 수 있다.
지리산 줄기를 바라보며 발길을 돌렸다. 문수암에선 중봉만 보일 뿐 최고봉인 천왕봉은 보이지 않았다. 앞산 줄기가 가린 것인데 상무주암에 가면 모습을 드러낼 터였다. 큰 기대를 품고 산길을 오르니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15분쯤 가니 너른 평지가 나왔다. 이런 곳에서의 숙영을 염려한 것인지 ‘야영금지’ 푯말이 함께 눈에 띄었다. 한쪽 구석엔 또 평상이 있어 예사롭지 않은 장소라 여겨 황급히 위쪽 바위 턱에 올라서보니 과연 기대했던 장관이 눈앞에 펼쳐졌다. 하봉에서 중봉, 천왕봉, 촛대봉, 반야봉, 노고단에 이르기까지 지리산 주능이 거침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조지눌이 말한 ‘천하제일갑지(天下第一甲地)’의 실체를 눈앞에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상무주암은 고려 때 타락한 현세를 벗어나 참된 깨달음을 얻고자 정혜결사 운동을 펼쳤던 보조국사 지눌이 창건했고, 깨침을 얻었던 곳으로 전해진다. 순천 송광사에 세워진 보조국사비에는 “지눌이 옷 세벌과 바리때 하나만 갖고 지리산을 찾아 상무주암에 은거했으니 경치가 그윽하여 천하제일이며 선객이 거주할 만한 곳”이었고 그 후에도 혜암스님을 비롯해 곡성 태안사의 청화스님, ‘가지산 호랑이’로 불렸다는 인홍스님 등이 수행을 위해 머물면서 그 명성이 익히 알려졌다.
문수암 법당 입구에 있는 천인굴. 인근 마을 주민들이 전란을 피한 곳이라고도 한다.
상무주암. 사진 왼쪽 구석에 앉아 있는 사람이 현기스님이다. 20년간 홀로 이곳에서 수행중인 그는 도인이라 칭송받던 선승이다.
바위턱에서 내려와 모퉁이를 돌았더니 이내 상무주암이었다. 출입문에는 두 개의 긴 막대기로 빗장을 걸어 놓았다. ‘사진촬영금지’라고 적은 빨간 표지판이 제법 위압적이라 선뜻 절 안으로 들어서지 못했다. 암자는 의외로 신식 건물이었는데 ‘상무주(上無住 )’라 적힌 깨끗한 현판이 인상적 이었다.
절 입구에 서서 마당 쪽을 빼꼼히 들여다보니 멀리 구석에 밀짚모자를 쓴 스님 한분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눈이 마주쳐 합장을 드렸더니 그도 역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스님의 얼굴을 살폈는데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사진으로만 뵈었던 현기 스님이 아닌가! 1970년대 선방 수좌들 사이에서 도인이라 불리며 칭송받던 선승. 어느 날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상무주암에 은둔해 20여 년 간 홀로 수행하고 있다는! 고고한 그 자태와 마주하자 조무래기가 된 심정이었으며 닳고 헤진 승복 차림의 그가 있는 앞마당에 알록달록한 등산복을 입고서는 부끄러움에 도저히 절 안으로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다. 그대로 줄행랑치듯 밖으로 나와 멀리서 암자를 우러러봤다. 그 경외심 때문에 눈앞에 펼쳐진 지리산 주능의 장쾌한 풍경은 잠시 동안 힘을 잃었다.
칠암자 순례길의 공식적인 마지막 절 영원사. 한때 100칸이 넘는 대찰이었다고.
우리는 그대로 능선을 탔다. 도중에 삼정산까지 다녀오니 시간은 오후 4시. 쉼없이 산길을 타고 내려와 30분만에 영원사에 닿았다. 영원사는 <조실안록>에 의하면 신라 경문왕 3년에 영원조사에 의해 창건됐고 고려 예종 때 무기선사가 중창. 조선 중종 때 부용대사에 의해 새롭게 세워졌고 조선 현종 당시 가람은 또 다시 일신된 것으로 전한다. 그렇게 100칸이 넘는 대찰에서 불법을 닦는 스님들이 가득했을 당시의 풍경은 얼마나 장엄했을까. 그 흔적은 영원사 옆 숲속에 숨어있는 부도밭에 남아있다. 영원사에서 임도를 타고 내려오는 길. 여기가 지리산이었던가. 극락정토였던가. 터벅터벅 발길에 새로이 정신이 들며 다시 속세로 돌아왔다.
(영원사~도솔암~연하천 코스는 2017년 2월 28일까지 출입제한 구간임을 알려드립니다.)
실상사에서 출발하면 7시간쯤 걸려, 가파른 오르막 각오해야
문수암에서 지리산절경을 감상 중인 백가훈, 윤정미씨. 둘은 연인사이로 오붓하게 칠암자 순례길을 돌고 있었다.
칠암자길은 함양군 마천면과 전북 남원시 산내면에 걸쳐진 삼정산(1261m) 어깨쯤을 오르내리며 걷는 길이다. 그 길에는 다섯 암자와 소박한 두 절집을 만나는데, 도솔암, 영원사, 상무주암, 문수암, 삼불사, 약수암을 거쳐 남원 실상사까지. 산자락 턱밑에 아슬아슬하게 들어선 손바닥만한 암자들은 작고 초라하지만, 구도자들이 머물면서 깨달음을 얻었거나 얻기 위해 수행 중인 곳이다.
작년 초 약수암~영원사 구간이 개방되면서 많은 등산객들이 드나들고 있다. 실상사와 약수암, 영원사를 제외한 나머지 암자는 차를 타고는 당도할 수 없다. 절집을 만나러 가는 도중에는 한적한 숲의 정취와 지리산 주능선을 내다보는 호쾌한 전망도 있다. 그리고 고즈넉한 암자에 서려 있는 맑은 정신을 만난다. 오르막길의 땀은 찬물 한 바가지로 닦아내는 그런 길이다. 그런데 거리가 만만치 않다. 실상사 입구에서 양정마을까지 걷는다면 15킬로미터가 넘는 거리에 7시간 정도 걸린다. 도솔암을 제외하더라도 삼정산 정상을 들르거나 스님과 주고받는 이야기가 길어지기라도 한다면 한 두 시간은 더 잡아야 한다. 이 때문에 가장 많이 택하는 것이 마천 쪽에서 출발하되 도솔암을 빼고, 차가 닿는 영원사에서 출발해 상무주암과 문수암, 삼불사를 둘러보고 도마마을 쪽으로 하산하는 것인데 5~6시간 걸린다.
지리산 살래국수의 열무국수 도시락. 국수와 김치 국물을 따로 싸준다.
밤이면 게스트하우스로 변하는 지리산 살래국수집.
교통
경남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에서 시작할 수 있고 반대로 전북 남원시 산내면을 들머리로 삼을 수도 있다. 함양 쪽에서 하겠다면 88고속도로 지리산 나들목으로 나와 백무동 방향으로 향하다가 삼정마을로 들면 된다. 삼정마을에서 영원사까지 시멘트 도로가 나있다. 길이 거칠지만 조심조심 운전하면 승용차로도 가 닿을 수 있다. 반대쪽 남원에서 시작한다면 산내면의 실상사를 찾아가면 된다. 원점회귀 코스가 아니므로 어느 쪽에서 출발하든 돌아올 때는 택시(인월개인콜택시, 011-680-5123)을 이용해야 한다. 대중교통은 인월이 기점이다. 인월시외버스터미널(063-636-2000)에서 반선행 버스가 1일 15회(08:50~20:30) 운행한다.
잘 데와 먹을 데
마천 삼정리에는 지리산 벽소령 쪽으로 오르는 등산코스가 나있어 인근에 숙소들이 많다. 그러나 칠암자길에서는 삼정리에서 영원사로 오르는 시멘트도로변에 있는 봉우리산장(055-964-0486)을 추천한다. 실상사를 들머리로 삼는다면 템플스테이(silsangsa.or.kr)를 이용할 수도 있다. 입석리 실상사 부근에는 만만한 민박(010-8250-6230)이 있다. 먹을 데는 산내면 매동마을 근처에 유성식당(063-636-3046)과 산내식당(636-3734), 함양마천면 소재지의 월산식육식당(055-962-5025)에서는 비계가 없고 육질이 쫄깃하며 고소한 지리산 흙돼지구이를 맛볼 수 있다. 인월면에는 어탕과 어탕국수 전문 두꺼비집(636-2979), 인월장터에 전라도식 파순대집 시장식당(634-2353)이 소문난 맛집이다.
실상사 (40분) → 약수암 (30분) → 도마마을 (1시간) → 삼불사 (20분) → 문수암 (30분) → 상무주암 (20분) → 삼정산 (1시간 10분) → 영원사 (40분) → 양정마을 총거리_ 12.7km
칠암자길 주변 놀 데
실상사 입구, 해탈교 건너기 전에 위치한 전통찻집 소풍. 팥빙수가 인기 메뉴다.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에 소개된 바 있다.
전통찻집 소풍 조각가가 만드는 팥빙수, “맛있다!” 실상사로 가기 전 ‘해탈교’ 바로 앞에 있다. 도솔암에서 시작하는 칠암자길의 마무리를 이곳에서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다.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에도 실려 유명세를 탄 이 카페는 조각가인 조항우씨가 운영하고 있으며 독특한 차 맛으로도 유명하지만 지리산 마니아들의 베이스캠프로도 꽤나 알려져 있다. 주인장의 성격이 좋아 카페는 늘 산꾼들로 북적인다. 장사가 잘 된 날은 일찍 문을 닫을 수도 있으니 미리 연락하고 갈 것! 전북 남원시 산내면 백일리 070-7778-2431
지리산 살래국수 밤에는 게스트하우스로 변신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파출소 앞에 있는 이 국수집은 밤이면 게스트하우스로 변한다. 식당 옆에 딸린 작은 방에서 20명 정도 잘 수 있다. 대학교 때 산악부 활동을 통해 산을 접한 주인 한승명(42세)씨가 지리산에 반한 뒤 2006년부터 이곳에 머물며 운영하고 있다. 누가 뭐래도 이 집의 특징은 깔끔한 국수 맛에 있겠다. 남해안에서 잡히는 최상품 멸치를 이용해 우려낸 국물이 진품이다. 물론 인공조미료는 일체 사용하지 않았다. 또 지리산길 탐방객이나 등산객들을 위한 도시락용 국수주문도 가능하다. 게스트하우스 이용료는 하루에 단돈 만원이다. 전북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643-6 070-7795-6080
좌)무인민박집을 운영하는 김찬연, 김인자 부부. 우)도마마을 무인민박집 앞에 놓인 캠핑 카. 여기서도 묵을 수 있다.
도마마을 무인민박 개조한 캠핑카에서 하룻밤 도마마을에서 도마1교를 건넌 후 삼불사로 가는 임도를 타고 길이 끝나는 곳까지 직진하면 요상한 집이 나온다. 그 아래는 오색찬란한 캠핑카까지 있다. 이들의 정체는 김찬연(32세), 김인자(35세) 부부가 운영하는 무인민박집이다. 집은 원래 이들 부부가 3년간 묵었던 곳이며 캠핑카는 지리산 기슭에 정착하기 전 부부가 전국을 떠돌며 여행할 때 타던 차다. 그런데 올해 초 부부가 일을 위해 지방에 내려가 있은 후부터 집이 비게 됐는데 처분하기 아까워 무인민박으로 용도를 바꿨다. 칠암자길 베이스캠프로도 손색이 없다. 010-2138-8562
발행2012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