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라디오 만들기 홈페이지
카페 가입하기
 
 
 
카페 게시글
정성일氏 글모음란 백제는 부여왕 위구태의 후손이다(통전의 기록)
정성일 추천 0 조회 257 09.03.10 20:00 댓글 24
게시글 본문내용
 
다음검색
댓글
  • 09.03.10 20:22

    첫댓글 위구태는 유정님의 과거 글을 여기 올려 놨는데... 검색으로 찾으셔야 해요. 여기도 800개의 글이 올라가 있는지라..과거글은 검색해야 합니다.

  • 작성자 09.03.10 20:27

    유정님의 글에서 제가 찾고자 하였던 부분들이 검색이 됩니다. 제가 그리도 찾았던 글인데 선생님 덕분에 쉽게 찾게 되었습니다. 사실 부여와 백제를 동일시하여 판단하게 되면 백제의 강역에 큰 지각변동이 생기게 됩니다. 통설의 강역으로는 백제는 절대 선비와 접할 수 없는 위치고, 공손씨와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천히 집중하여 조명하려 합니다.

  • 09.03.10 20:49

    백제 최대 강역을 난하에서~ 의무려산 부근으로 설정한 다음, 여기가 무슨 요서 약유한 곳이 아닐까 생각을 해요. 일종의 절충안인데.. 그렇게 일단 보면 마음이 편합니다.

  • 09.03.10 20:54

    을불대왕전에 나와 있는 즉, 비류왕은 '구수왕의 서자'입니다. 분서왕이 낙랑군의 서변을 먹어 버리죠. 그래서 낙랑왕 자술이 백제에게 보복을 하는데..이때 고구려는 북쪽을 방어하느라..남쪽을 신경 못 썼다고 합니다. 그러니, 백제는 조금 강역이 서쪽으로 치우쳐져 있었던 것입니다. 즉, 200년대말쯤이죠. 汾西王(분서왕) 298~304년

  • 09.03.10 20:23

    위구태는 좀 어렵습니다. 심당전서에도 위구태 기사가 나와 있습니다. 위구태를 구지왕과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라고 보고.. 100년대전후의 또 다른 사람으로 봅니다.

  • 작성자 09.03.10 20:31

    (근)위구태는 구지왕이라는 것을 알지만 100년대 초반을 살았던 위구태는 확인하기 힘듭니다. 부여왕자 위구태가 왕위를 잇는 것이 아니라, 다음왕이 부태라고 나오니까요?

  • 09.03.10 20:55

    위구태는 구지왕과 연결하기가 어려워요. 저도 시도를 해 보았으나 무리라는 판단입니다.

  • 09.03.10 20:56

    님처럼 단정적으로 해서는 비밀을 못 알아 내요.

  • 09.03.10 20:59

    무리해서 가면서 할 필요도 없고..억지로 꿰 맞출 필요가 없습니다. 100년전후의 백제왕들이 사라져 버렸는데..188년대의 구지왕과 위구태를 서로 연결시키기는 어렵죠. 억지 주장입니다. 북사에 나오는 공손도와 연결된 구태만이 구지왕과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 09.03.10 21:00

    이것을 엄격한 잣대를 가지고 시각으로 봐야지.. 이미 북사에 나와 있는 구태는 구지왕과 연대적으로 맞으니까..강하게 주장을 하는 것이고... 위구태는 다릅니다. 연대 편차가 너무 많이 나요.

  • 작성자 09.03.10 21:07

    선생님, 후한서의 부여와 삼국지위서동이전의 부여가 다르다는 의미인지요. 저 또한 그 생각은 안 해본 것 같습니다. 이 부분도 좀 더 검토해 보겠습니다.

  • 09.03.10 21:11

    위구태 [尉仇台, ?~?] 부여의 왕. 120년 왕자로서 한(漢)나라에 조공사(朝貢使)로 갔다. 121년 고구려 태조왕이 현도(玄菟)를 공격하자 2만 군사로 한나라를 도와 고구려군을 격파, 500여 명을 참수하였다. 공손탁의 종녀(宗女)와 결혼하여, 공손씨와의 유대를 강화하였다. 그가 죽은 뒤 아들 간위거(簡位居)가 왕위를 이었다.

  • 09.03.10 21:15

    121년 기사가 자치통감에 올라가 있어요. 121년입니다. 121년. 아시겠어요? 이 기사와 비슷한 기사가 우리쪽 사서에 정확히 나와 있어야... 위구태가 어떤 왕이라 주장할 수 가 있는 것입니다. 121년+ 67년 편차= 188년.입니다. 연대가 차이가 많이 나요.

  • 09.03.10 21:14

    뒤에 공손도와 유대관계..이것도 북사든지,수서든지..개별 중국 사서를 일일이 다시 엄격하게 해석해 가면서 파악해야 하고..단순히 남의 해석을 퍼 와서 할이 아니고..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입니다.

  • 09.03.10 21:19

    간위거(簡位居), 삼국지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 간위거는 아버지 위구태(尉仇台)가 죽자 왕이 되었다는 기록이 나와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아버지가 위구태인 듯하지만 분명하지는 않다. 동이전에 나와 있는 간위거에 관한 기록을 보면, 그는 240∼248년에 위(魏)의 유주자사(幽州刺使) 관구검(丘儉)이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 고구려에 군량을 제공하였고, 또 막내 삼촌인 우가(牛加)가 딴마음을 품자 그 부자를 죽이고 재물을 몰수했다.

  • 작성자 09.03.11 11:25

    사실 후한서에 등장하는 위구태 때문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픕니다. 먼저, 삼국지의 위구태만 이야기 하자면, 통전이나, 본기신편열전, 북사, 주서, 수서에 등장하는 백제의 중시조인 것은 맞습니다만, 간위거 조차도 위구태의 자손이라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삼국지는 당대의 사서인 만큼 위구태와 간위거가 다른 나라사람인데도 연결하여 기록했을까 의문이 듭니다. 일단은 이쯤해서 접어 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 작성자 09.03.11 20:32

    간위거가 누구이냐가 꽤 골치아픈 문제입니다. 우가의 형의 아들이름이 위거입니다. 보통 위거 앞에 (또한)이라는 말을 해석에 집어 넣는데, 원문에는 (또한)이라는 해석을 집어넣을 한자가 사실상 부재합니다. 그런데 우가의 조카의 이름이 위거라는 기사가 하필 마여의 기사 다음에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문장의 순서상 우가의 조카의 이름 또한 위거라는 해석을 자연스럽게 합니다.

  • 작성자 09.03.11 21:02

    그러나 위거의 기사에 상당히 이상이 있는 부분이, 위거가 나라의 인심을 얻었고,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했을 때 군량을 제공하고, 막내 아버지가 배신하자 부자를 죽이고 재산을 몰수하여 관에 바쳤다고 합니다. 사실상 위거는 대사라는 직책이지만, 왕 자신이거나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최고 재상의 권력을 누리고 있는 셈입니다. 우가의 재산을 몰수하여 바친 관부는 위나라의 관부입니다. 왕과 재상은 사실상 최고의 관부입니다. 위거가 바쳐야 하는 관부란 위나라밖에 없는 것입니다.

  • 작성자 09.03.11 20:50

    위거는 군량을 제공하며 위나라를 돕는 척하며, 동천왕이 궁지에 몰리자 위나라의 뒤통수를 치는 것입니다. 위나라가 그 문제를 따지자 우가를 목을 베고 그 재산을 몰수하여 바칩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가를 죽이지는 않지요. 우가는 그 뒤로 몇년을 더 살다가 자연사했습니다. 왜냐하면 우가는 고시이고, 위거는 초고왕이니까요. 실제로 몇년뒤 고시가 죽었을 때, 나라를 위해 재산을 헌납하였기에 남겨진 것이 없으므로 초고왕이 고시의 아들에게 다시 봉지를 내려줍니다. 우가의 죽임만으로 믿음이 부족했던지 위나라가 백제왕의 책임을 재촉하자, 초고왕은 아들 구수에게 선위하는 중요한 결심을 하게 됩니다.

  • 작성자 09.03.11 20:59

    백제가 사서를 기록한 시기가 근초고왕이라 합니다. 백제가 사서를 기록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서를 정리하였을 때 뒤에 이어지는 후폭풍이 무서웠던 것입니다. 공손씨와 인근에서 가까이 지냈으면서도, 뒤로는 위나라와 손을 잡는 이중외교를 펼치기도 하였습니다. 또, 위나라가 고구려를 치자 위나라를 도왔으면서도, 결국엔 뒤통수를 쳐 버립니다.

  • 09.03.11 12:20

    제 생각에 후한서 동이열전은 "서론"만 제외하면 대부분 가치없는 사료라고 생각됩니다. 대부분 삼국지를 임의로 해석하여 없는 사실을 더하였죠.

  • 작성자 09.03.11 20:23

    후한서의 부여전과 삼국지의 부여전에 나오는 부여가 서로 다르다고 생각이 듭니다. 고구려사초에 보면 122년 기사엔가 위구태의 기사가 등장하며 위구태가 서부여라고 자칭하였다 나옵니다. 그리고 중간에 왕들은 아무말이 없다가 마지막으로 285-287년 기사에 비리국왕 의려와 의라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즉, 후한서와 진서에는 백제(남부여)+서부여의 기사가 짬뽕된 듯 합니다. 뭐, 이런말 해봤자 저만 병신되기 십상이라 차마 다른 곳에서는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 09.03.12 15:52

    정성일님 말에 동감합니다. 고구려사초 보면 서부여(비려국)의 왕인 위구태, 의려, 의라가 나오고 부태, 간위거, 마여의 출자는 나오지 않습니다.

  • 09.03.12 15:53

    그리고 자세히 보자면, 고구려사초에 의하면 대무신왕에게 망한 금와의 부여, 광개토대왕에게 망한 동부여(고구려사초는 분명 망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문자명왕에게 망한 북부여 등이 혼재하고 있습니다..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