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요즈음 매달린 것은 후한서, 삼국지위서동이전, 진서열전에 등장하는 부여와 북사, 주서, 수서에 등장하는 백제가 같은 나라임을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같은 점을 찾고, 백제왕기의 기년과 비교해 가며 설명해 보려는데 남당유고가 정사로 인정받지 못하는 점에서 설명하기 매우 힘이 들더군요.
우연히 인터넷을 뒤지다가 통전에 백제가 부여왕 위구태의 후손이라는 결정적인 단서를 찾았습니다.
본기신편열전 온조태자의 기사에도, 온조의 후손이 공손씨와 친하게 되자 고구려를 누차로 침략했다는 기사가 있으므로, 심증은 있지만 정사로 인정받지 못하는 한계를 극복하기가 매우 힘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통전을 이미 보신 적들이 있을 터이지만, 혹시 저의 경우처럼 필요한 분들이 계실 것 같아 퍼왔습니다.
라디오선생님과 머털도사님도 중국사서의 원본 자료가 많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혹시 이 부분에 대한 자료를 올려주실 수 있다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또 한가지 아직 못찾은 부분이 있는데, 선비족인 모용황 재위시에 백제인들이 많이 잡혀갔다는 기사가 있다는데, 출전이 어디인지 확인하지 못하였습니다. 확인하여 주시면 대단히 고맙겠습니다.
通典 卷第一百八十五 邊防一 東夷上 百濟
百濟,卽後漢末夫餘王尉仇台之後,後魏時百濟王上表云:「臣與高麗先出夫餘。」初以百家濟海,因號百濟。晉時句麗旣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今柳城、北平之間。自晉以後,呑幷諸國,據有馬韓故地。其國東西四百里,南北九百里,南接新羅,北拒高麗千餘里,西限大海,處小海之南。國西南海中有三島,出黃漆樹,似小檟樹而大。六月取汁,漆器物若黃金,其光奪目。自晉代受蕃爵,自置百濟郡。義熙中,以百濟王夫餘腆佗典反爲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宋、齊並遣使朝貢,授官,封其人。 전
백 제는 즉 후한말 부여왕 위구태의 후손이다. 후위 때에 백제왕이 표를 올려서 말하기를 “신은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일찍이 나왔다”고 했다. 처음 백여가구가 바다를 건넘으로써 국호를 백제라고 했다. 진나라때에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경략하자, 백제 역시 요서와 진평 2군을 점거하였으니, 지금의 유성과 북평의 사이다. 진나라때 이후로 여러 제국들을 병탄하고, 마한의 옛 땅을 점거하였다. 그 나라는 동서로 4백리요, 남북으로 9백리이며, 남쪽에는 신라와 접하고, 북쪽에는 고구려 천리와 대치하고 있다. 서쪽으로는 큰 바다가 경계지어 있고, 소해의 남쪽에 위치하는데, 나라의 서남 바다에는 3개의 섬이 있어서 황칠수가 나오는 흡사 작은 개오동나무와 같으나 크기가 크다. 유월에 그 즙을 채취하여 기물에 칠하는데, 마치 황금을 칠한 것과 같이 그 빛이 사람의 눈을 빼앗는다. 진대이후로 번작을 받았고, 스스로 백제군을 두었다. 의희(405-418)년중에 백제왕 부여(전타전반-전지왕?)을 사지절도독 백제제군사로 삼았다. 송,제 양국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관직을 받았으며, 그 사람을 봉했다.
土著地多下濕,率皆山居。其都理建居拔城。王號「於羅瑕」,百姓呼爲「■■吉支」,■■音乾。夏言並王也。王妻號「於陸」,夏言妃也。官有十六品:左平一品,達率二品,恩率三品,德率四品,扞率五品,柰率六品,以上冠飾銀花;將德七品,紫帶;施德八品,皁帶;固德九品,赤帶;季德十品,靑帶;對德十一品,文督十二品,皆黃帶;武督十三品,佐軍十四品,振武十五品,克虞十六品,皆白帶。統兵以達率、德率、扞率爲之,人庶及餘小城咸分隷焉。其衣服,男子略同於高麗,拜謁之禮以兩手據地爲敬。婦人衣似袍而袖微大,在室者編髮盤於首,後垂一道爲飾,出嫁者乃分爲兩道焉。兵有弓、箭、刀、槊。俗重騎射,兼愛墳史。其秀異者頗解屬文,又解陰陽五行。用宋元嘉曆,以建寅月爲歲首。亦解醫藥、卜筮、占相之術。有投壺、樗蒲等雜戱,然尤尙弈碁。僧尼寺塔甚多,而無道士。賦稅以布、絹、麻、米等。婚娶之禮略同華俗。父母及夫死者三年持服,餘親則葬訖除之。氣候溫暖,五穀、雜果、菜蔬及酒醴、餚饌、樂器之屬多同於內地,唯無駝、騾、驢、羊、鵝、鴨等云。其王以四仲之月祭天,又每歲四祠其始祖仇台之廟。大姓有八族:沙氏、燕氏、劦氏、劦音俠。解氏、眞氏、國氏、木氏、■■音白氏。國西南人島居者十五所,皆有城邑。
사 람들은 토착생활을 하는데, 땅이 낮고 습하여, 모두들 산에서 산다. 그 도읍은 거발성이라고 하며, 왕은 어하라라고 하는데, 백성들은 건질지라고 부른다. 중국말로 왕이란 뜻이다. 왕의 아내는 어륙이라 하는데, 중국 말로 왕비라 말이다. 벼슬은 16품게가 있다. 좌평은 1품, 달솔 2품, 은솔 3품, 덕솔 4품, 한솔 5품, 내솔 6품인데, 이상은 관에 은화로 장식한다. 장덕은 7품인데 자색 허리띠를, 시덕은 8품은 검은 허리띠를 한다. 고덕은 9품으로 적색 허리띠를 계덕은 10품으로 청색 허리때를 하며, 대덕 11품과 문독 12품은 모두 황색 허리띠를 무덕 13품과 좌군 14품, 진무 15품과 극려 16품은 모두 백색 허리띠를 한다. 군대를 통솔하는 것은 달솔, 덕솔, 한솔 들이 하며, 도성 내에 사람들과 여러 작은 성이 함께 모두 여기에 예속되었다.
그 들의 의복은 남자는 대개 고구려와 동일하며, 높은 분을 뵙는 의례에서는 양손을 땅을 집어서 공경을 나타냈다. 부인의 의복은 도포와 흡사하지만, 소매가 약간 크다. 시집가자 않은 여자는 편발로 머리ㅟ에 또아리를 틀고, 뒤로 한 가닥을 늘어드려 꾸미기도 한다. 출가한 여자는 두 갈래로 늘어뜨렸다.
무 기로는 활, 화살, 칼, 창이 있고, 그들의 습속은 말타고 활 쏘는 것을 중하게 여겼고, 아울러 경전과 사서릉 래옥하니, 뛰어난 사람은 제법 문장을 이해하기도 했다. 또 음양, 오행도 이해했다. 송나라 원가력을 사용하여 인월(3월)로 한 해의 머리를 삼았다. 또한 의약, 점치기, 관상학 등도 알고 있었다. 투호와 저포 등의 여러 놀이들이 있으나, 특히 바둑, 장기를 좋아한다. 중과 승려 탑은 심히 많지만, 도사는 없다.
세 금은 베, 비단, 삼베, 살 등으로 하며, 혼인의 예는 중화의 풍속과 대개 같다. 부모 및 남편이 죽으면 3년간 상복을 입고, 그 나머지 친족은 장례가 끝나면 상복을 벋는다. 기후는 온화하고 따스하며, 오곡과 여러 과일과 채소 및 술, 음식, 악기 등의 풍속은 거의 내지(중화)와 같다. 오직 낙타, 당나귀, 노새, 양, 거위, 오리 등이 없다. 기 나라의 왕은 매 계절의 중월(2,5, 8,11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또 매년 4번 그의 시조인 구태의 사당에서 제사드린다. 나라에는 8 씨족의 대성이 있는데, 사씨, 연시, 협시, 해씨, 진시, 국시, 목씨, 백(묘)씨가 있다. 나라의 서남쪽에는 사람이 거처하는 15개의 섬이 있는데 모두 성읍이 있다.
後魏孝文遣衆征破之。後其王牟大爲高句麗所破,衰弱累年,遷居南韓地。隋文開皇初,其王夫餘昌遣使貢方物,拜爲帶方郡公、百濟王。大唐武德、貞觀中,頻遣使朝貢。顯慶五年,遣蘇定方討平之。舊有五部,分統三十七郡、二百城、七十六萬戶,至是以其地分置熊津、馬韓、東明等五都督府,仍以其酋渠爲都督府刺史。其舊地沒於新羅,城傍餘衆後漸寡弱,散投突厥及靺鞨。其主夫餘崇竟不敢還舊國,土地盡沒於新羅、靺鞨,夫餘氏君長遂絶。
후 위 효문제(471-499)가 무리를 보내 정복하여 깨뜨렸다. 후에 그 왕 모대가 고구려에게 여러번 패한 바가 되어 차차 쇠약한지 오래되어 남한의 땅으로 옮겨갔다. 수문제 개황(581-600)초에 그 왕 부여창이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기에 대방군공 백제왕으로 삼았다. 대당 무덕(618-6260, 정관(626-649) 시기에도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해왔다. 현경 5년(660)에 소정방을 보내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예전에는 5부와 37개군, 200성을 나누어 76만호로 통치했었다. 이때에 이르러 그땅에 웅진, 마한, 동명 등 5도독부를 나누어 두게 된 것이다. 이에 그 추장 거수를 도독부자사로 삼았다. 그 옛 땅은 신라에게 편입되었으며, 성과 주변의 남은 무리들은 후에 점점 적어지고 약해졌으며, 흩어져서 돌궐 및 말갈에 투항을 했다. 백제의 주인인 부여숭은 마침내 옛 나라로 돌아가지 못했으며, 토지는 신라, 말갈에 모두 흡수되고 말았으므로, 부여씨 왕가는 마침내 끝어지고 말았다.
첫댓글 위구태는 유정님의 과거 글을 여기 올려 놨는데... 검색으로 찾으셔야 해요. 여기도 800개의 글이 올라가 있는지라..과거글은 검색해야 합니다.
유정님의 글에서 제가 찾고자 하였던 부분들이 검색이 됩니다. 제가 그리도 찾았던 글인데 선생님 덕분에 쉽게 찾게 되었습니다. 사실 부여와 백제를 동일시하여 판단하게 되면 백제의 강역에 큰 지각변동이 생기게 됩니다. 통설의 강역으로는 백제는 절대 선비와 접할 수 없는 위치고, 공손씨와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천히 집중하여 조명하려 합니다.
백제 최대 강역을 난하에서~ 의무려산 부근으로 설정한 다음, 여기가 무슨 요서 약유한 곳이 아닐까 생각을 해요. 일종의 절충안인데.. 그렇게 일단 보면 마음이 편합니다.
을불대왕전에 나와 있는 즉, 비류왕은 '구수왕의 서자'입니다. 분서왕이 낙랑군의 서변을 먹어 버리죠. 그래서 낙랑왕 자술이 백제에게 보복을 하는데..이때 고구려는 북쪽을 방어하느라..남쪽을 신경 못 썼다고 합니다. 그러니, 백제는 조금 강역이 서쪽으로 치우쳐져 있었던 것입니다. 즉, 200년대말쯤이죠. 汾西王(분서왕) 298~304년
위구태는 좀 어렵습니다. 심당전서에도 위구태 기사가 나와 있습니다. 위구태를 구지왕과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라고 보고.. 100년대전후의 또 다른 사람으로 봅니다.
(근)위구태는 구지왕이라는 것을 알지만 100년대 초반을 살았던 위구태는 확인하기 힘듭니다. 부여왕자 위구태가 왕위를 잇는 것이 아니라, 다음왕이 부태라고 나오니까요?
위구태는 구지왕과 연결하기가 어려워요. 저도 시도를 해 보았으나 무리라는 판단입니다.
님처럼 단정적으로 해서는 비밀을 못 알아 내요.
무리해서 가면서 할 필요도 없고..억지로 꿰 맞출 필요가 없습니다. 100년전후의 백제왕들이 사라져 버렸는데..188년대의 구지왕과 위구태를 서로 연결시키기는 어렵죠. 억지 주장입니다. 북사에 나오는 공손도와 연결된 구태만이 구지왕과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엄격한 잣대를 가지고 시각으로 봐야지.. 이미 북사에 나와 있는 구태는 구지왕과 연대적으로 맞으니까..강하게 주장을 하는 것이고... 위구태는 다릅니다. 연대 편차가 너무 많이 나요.
선생님, 후한서의 부여와 삼국지위서동이전의 부여가 다르다는 의미인지요. 저 또한 그 생각은 안 해본 것 같습니다. 이 부분도 좀 더 검토해 보겠습니다.
위구태 [尉仇台, ?~?] 부여의 왕. 120년 왕자로서 한(漢)나라에 조공사(朝貢使)로 갔다. 121년 고구려 태조왕이 현도(玄菟)를 공격하자 2만 군사로 한나라를 도와 고구려군을 격파, 500여 명을 참수하였다. 공손탁의 종녀(宗女)와 결혼하여, 공손씨와의 유대를 강화하였다. 그가 죽은 뒤 아들 간위거(簡位居)가 왕위를 이었다.
121년 기사가 자치통감에 올라가 있어요. 121년입니다. 121년. 아시겠어요? 이 기사와 비슷한 기사가 우리쪽 사서에 정확히 나와 있어야... 위구태가 어떤 왕이라 주장할 수 가 있는 것입니다. 121년+ 67년 편차= 188년.입니다. 연대가 차이가 많이 나요.
뒤에 공손도와 유대관계..이것도 북사든지,수서든지..개별 중국 사서를 일일이 다시 엄격하게 해석해 가면서 파악해야 하고..단순히 남의 해석을 퍼 와서 할이 아니고..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입니다.
간위거(簡位居), 삼국지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 간위거는 아버지 위구태(尉仇台)가 죽자 왕이 되었다는 기록이 나와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아버지가 위구태인 듯하지만 분명하지는 않다. 동이전에 나와 있는 간위거에 관한 기록을 보면, 그는 240∼248년에 위(魏)의 유주자사(幽州刺使) 관구검(丘儉)이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 고구려에 군량을 제공하였고, 또 막내 삼촌인 우가(牛加)가 딴마음을 품자 그 부자를 죽이고 재물을 몰수했다.
사실 후한서에 등장하는 위구태 때문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픕니다. 먼저, 삼국지의 위구태만 이야기 하자면, 통전이나, 본기신편열전, 북사, 주서, 수서에 등장하는 백제의 중시조인 것은 맞습니다만, 간위거 조차도 위구태의 자손이라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삼국지는 당대의 사서인 만큼 위구태와 간위거가 다른 나라사람인데도 연결하여 기록했을까 의문이 듭니다. 일단은 이쯤해서 접어 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간위거가 누구이냐가 꽤 골치아픈 문제입니다. 우가의 형의 아들이름이 위거입니다. 보통 위거 앞에 (또한)이라는 말을 해석에 집어 넣는데, 원문에는 (또한)이라는 해석을 집어넣을 한자가 사실상 부재합니다. 그런데 우가의 조카의 이름이 위거라는 기사가 하필 마여의 기사 다음에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문장의 순서상 우가의 조카의 이름 또한 위거라는 해석을 자연스럽게 합니다.
그러나 위거의 기사에 상당히 이상이 있는 부분이, 위거가 나라의 인심을 얻었고,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했을 때 군량을 제공하고, 막내 아버지가 배신하자 부자를 죽이고 재산을 몰수하여 관에 바쳤다고 합니다. 사실상 위거는 대사라는 직책이지만, 왕 자신이거나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최고 재상의 권력을 누리고 있는 셈입니다. 우가의 재산을 몰수하여 바친 관부는 위나라의 관부입니다. 왕과 재상은 사실상 최고의 관부입니다. 위거가 바쳐야 하는 관부란 위나라밖에 없는 것입니다.
위거는 군량을 제공하며 위나라를 돕는 척하며, 동천왕이 궁지에 몰리자 위나라의 뒤통수를 치는 것입니다. 위나라가 그 문제를 따지자 우가를 목을 베고 그 재산을 몰수하여 바칩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가를 죽이지는 않지요. 우가는 그 뒤로 몇년을 더 살다가 자연사했습니다. 왜냐하면 우가는 고시이고, 위거는 초고왕이니까요. 실제로 몇년뒤 고시가 죽었을 때, 나라를 위해 재산을 헌납하였기에 남겨진 것이 없으므로 초고왕이 고시의 아들에게 다시 봉지를 내려줍니다. 우가의 죽임만으로 믿음이 부족했던지 위나라가 백제왕의 책임을 재촉하자, 초고왕은 아들 구수에게 선위하는 중요한 결심을 하게 됩니다.
백제가 사서를 기록한 시기가 근초고왕이라 합니다. 백제가 사서를 기록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서를 정리하였을 때 뒤에 이어지는 후폭풍이 무서웠던 것입니다. 공손씨와 인근에서 가까이 지냈으면서도, 뒤로는 위나라와 손을 잡는 이중외교를 펼치기도 하였습니다. 또, 위나라가 고구려를 치자 위나라를 도왔으면서도, 결국엔 뒤통수를 쳐 버립니다.
제 생각에 후한서 동이열전은 "서론"만 제외하면 대부분 가치없는 사료라고 생각됩니다. 대부분 삼국지를 임의로 해석하여 없는 사실을 더하였죠.
후한서의 부여전과 삼국지의 부여전에 나오는 부여가 서로 다르다고 생각이 듭니다. 고구려사초에 보면 122년 기사엔가 위구태의 기사가 등장하며 위구태가 서부여라고 자칭하였다 나옵니다. 그리고 중간에 왕들은 아무말이 없다가 마지막으로 285-287년 기사에 비리국왕 의려와 의라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즉, 후한서와 진서에는 백제(남부여)+서부여의 기사가 짬뽕된 듯 합니다. 뭐, 이런말 해봤자 저만 병신되기 십상이라 차마 다른 곳에서는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정성일님 말에 동감합니다. 고구려사초 보면 서부여(비려국)의 왕인 위구태, 의려, 의라가 나오고 부태, 간위거, 마여의 출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세히 보자면, 고구려사초에 의하면 대무신왕에게 망한 금와의 부여, 광개토대왕에게 망한 동부여(고구려사초는 분명 망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문자명왕에게 망한 북부여 등이 혼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