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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상고사를 거명할 학계에서는 위작이라 한단고기의 위작여부를 떠나
1. 한인(桓仁)시대와 구석기문화
[한단고기(桓檀古記)]에 나타난 한인에 대한 기록을 고고학적인 관점에서 검토해 보면 저술의 신빙성을 의심하기 이전에 한인시대의 생활상 반영에 감탄하게 된다. 한인시대를 역사단계에 비정하면 구석기시대 말기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유적(遺跡)과 유물(遺物)로 대표되는 고고학(考古學)에서도 해석의 문제가 뒤따르는 것이다. 해석의 관점이 달라지면 그 당시 문화의 담당주체가 바뀐다든지, 유물상의 주객이 전도되는 사례가 생긴다든지, 역사왜곡에 대한 완벽한 증거가 된다든지 하는 사건이 발생될 소지가 문헌보다 더 높다.
따라서 고고학은 문헌자료와 상호보완적 관계에서 기능을 발휘해야 하며 철저하게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해석이 뒤따라야 한다. 물론 고고학의 기능이란 문화의 본래 모습을 재현하는 것이다. 그 문화의 담당 주체가 누구냐 하는 사실은 두번째 문제이다.
현대인류 역사의 시작을 신석기시대 이후로 보는데, 문명사를 기준으로 했을 때 도시가 세워지고 일정한 제도가 시행되는 등 사회체계의 모습을 보이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유럽에서 구석기문화가 먼저 발생되어 동쪽으로 전파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1960년대이후 시베리아지역을 비롯한 중국내륙에서도 구석기유적지가 다수 발견되어 이제는 인류 생활사에 대한 유럽기원설은 의미를 잃게 되었다. 특히, 남부시베리아지역의 수많은 구석기와 신석기 유적의 발굴로 오히려 문명의 개화가 남부시베리아지역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가 의심될 정도이다.
[한단고기]상의 상고시대 역사전개에 대한 개괄적인 내용으로는,
그리고 고대의 생활상에 대한 서술도 담겨져 있어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우는 정치사위주의 단순한 민족사로 보기 어렵고, 사회 문화를 포괄하는 종합역사서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기록은 한인의 시대가 고고학적으로 보면 시베리아지역에서의 구석기시대에 해당함을 보여주는 내용으로 '돌을 쳐 불을 일으켜서 날음식을 익혀 먹는 법(石發火始敎熟食)'이 그것이다.
[삼성기(三聖紀)]하권에서는 그에 대해 더 구체적인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 [古記]에, 波奈留山 밑에 한인의 나라가 있으니 天海 동쪽의 땅이다... 땅이 넓어 남북 5만리요 동서 2만리니 桓國이요 나누면 비리국,양운국....이니 모두 12국이다. 天海는 지금 北海라 한다. 7세를 전하여 역년이 3,301년 혹은 63,182년이라 하는데 어느 것이 맞는지 알 수 없다 -
[태백일사(太白逸史)] 한국본기(桓國本紀)를 보면, - [朝代記]에, 옛날 한인이 있었는데 天山에 내려와 거하시며 천신에 제사지내고 定命人民, 攝治하시고 '들에 사시매 곤충과 짐승의 해독이 없어지고(群務野處而蟲獸之害)...'[三聖密記]에, 波奈留山밑에 桓仁氏의 國이 있어 天海 동쪽의 땅을 역시 파나류국이라 한다... -
天을 '하늘'이라 하는 우리말에서 '파나류'는 '하날'과 관련된 발음으로 연상된다. 언어학적 연구가 따라야 하겠지만, 실제로 2만년전 구석기문화가 남부시베리아 일대에서 전개되었는데 많은 유적지가 발굴되었다.
'곤충과 짐승의 해를 당한 때'는 구석기시대외에는 거의 없었으므로 이 기사는 매우 타당성있는 표현을 담고 있는 셈이다. 남부시베리아 구석기유적지에서 큰 짐승뼈와 나무가지로 기둥과 지붕을 엮은 반지하식 주거지가 발굴되었는데, 기록의 정황과 매우 유사하다고 하겠다.
이러한 시베리아지역 구석기유적에 대한 발굴이 1960년대이후에 본격화되고 극히 최근에야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한단고기]는 발굴성과이전에 기록된 것이므로 문헌기록이 고고학적 발굴성과와도 일치하고 있음이 놀랍지 않을 수 없다.
2. 한웅(桓雄)시대와 신석기문화
[한단고기(桓檀古記)]에는 한웅의 시대가 고고학상의 신석기문화의 단계인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발해북안의 신석기문화중 가장 주목할 문화가 '홍산문화'이다. 홍산문화는 우리민족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는 신석기시대 문화단계인 것이다.
[한단고기]에서의 한웅(桓雄)에 대한 기록을 보자. 학계에서는 우리의 청동기문화에 북방적요소를 인정하고 고조선연구에서 단군신화에 대한 고찰을 통해 시베리아와 연결된 발달된 청동기문화를 지닌 한웅이란 일단의 세력이 신석기문화적 성격에 머무르고 있던 만주지역의 토착세력을 동화시키는 과정으로 설명하려 하거나 혹은 천신족(天神族)과 지신족(地神族)의 융화과정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아뭏든 두 세력의 융합이란 차원에서는 같은데, [한단고기]는 이에 대해 매우 구체적인 기록을 담고 있다.
[三聖記] 상권에 보면, - 한웅은...팔괘를 그어 올 것을 알고 象을 잡아 神을 움직였다. 熊氏의 여인을 거두어 아내로 삼고 '혼인의 예법을 정하여 짐승가죽으로써 패물을 삼고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고 시장을 열어 교환하도록 했다(定婚家之禮以獸皮爲幣耕種有畜市交易)' -
이 말은 가장 구석기시대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즉 구석기시대의 1부1처제가 정착되지 않은 시대의 군혼(群婚)이나 특정배우자가 없었던 시대의 공동체생활의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한웅이 '혼가의 예법을 정했다'는 말은 부계혼이든 모계혼이든 일부일처제이든 구석기시대의 무리중심 사회에서 가족단위 사회에로의 전환을 뜻하는 신석기시대적인 매우 적절한 표현인 것이다.
또한, 시장을 열고 교역이 이루어진 것도 신석기시대부터인데, 이와 같이 한인시대의 자급자족경제와는 다른 생활의 여러 모습들이 기록된 데 대해 우연한 서술이라고 보기에는 저자가 너무 완벽한 고고학적 전문지식을 가지고 이야기를 꾸몄다고 봐야 하는 것인데, 20세기초 조선말기의 학문단계를 고려할 때 도저히 그렇게 보기가 어렵다.
이는 전해져 내려오는 어떤 내용을 그대로 기록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서술이라는 것이다.
[태백일사(太白逸史)] 신시본기(神市本紀)편에 보면,
'신시본기(神市本紀)편'에서 [삼성밀기(三聖密記)]를 인용한 내용에는 한웅이 처음 내려왔을 때 그 지역에 두 족속이 있었다고 한다. 웅족(熊族)과 호족(虎族)인데 '새로 살기 시작한 어리석고 자부심 높은 웅족(熊族)'과 '옛부터 있었던 난폭하고 탐욕스러우며 약탈을 일삼는 호족(虎族)'으로 그려 놓은 것이다.
이 두 종족은 서로 어울리지도 않았고 통혼관계(通婚關係)조차 없었다고 했다. 단군신화에는 곰과 호랑이가 쑥과 마늘을 먹고 동굴 속에서 수련하다가 곰만 여자로 변했다는 내용으로 나타난다. 이는 역시 고대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신화적 표현으로 한웅이 두 종족을 교화시켜 같이 살게 하였는데 호족은 끝내 깨우치지 못하여 이들을 사해(四海)로 쫓아버렸다는 내용의 줄거리이다.
이것은 한웅족에 쉽게 동화되어 두번째 계층의 종족구성을 이루는데 성공한 웅족과 세력을 잃고 오랜 생활을 영위하다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는 호족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을 신화한 내용이라 보아야 한다. 이와 유사한 상황이 전개된 고고학적 사건이 동북아시아지역에 전해지고 있다.
중국북부지역과 발해연안, 요동반도, 남만주 일대는 농경을 주로 하고 후에 가축을 사육하는 대형석기(大形石器)를 사용하는 신석기문화가 B.C.6,000년경 본격적으로 전개되고 있었는데, 차츰 세석기 전통을 융합하면서 신석기시대 주변지역의 중심문화권으로 발전해 가고, 북만주 흑룡강과 연해주지역에만 세석기전통이 부분적으로 남게 된다.
두 문화는 지역적으로 뚜렷이 구분되고 있는데 수렵생활위주의 구석기전통의 세석기문화가 새로 등장한 신석기계통의 농경문화에 대체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발해북안, 만주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구체적인 문화면모에 대한 분석은 다음에 기회가 있을 때 거론하기로 한다. 아무튼 수렵생활 습속의 호족과 농경생활 습속의 웅족에 대비하여 이해하여도 하등 이상할 것 없는 내용인 것이다.
2) 신시(神市)의 위치 비정
한웅(桓雄)이 열었다는 신시(神市)는 어디에 있었을까? 한인은 시베리아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신시를 연 한웅은 어디를 근거지로 하였을까?
이 문제는 대단히 복잡하다. 신시시대를 추적하기 위해서는 우선 고대 중국동북지역의 고고학계보를 살펴보아야 한다.
중국과 한반도지역에 구석기유적이 존재한다는 것인 이미 알려져 있다.
지질학에서는 지구에 네 번의 빙하기가 있었고 그 사이사이에 간빙기(間氷期)가 있었다고 하는데, 마지막 빙하기까지를 충적세(Pleistocene期)라 하고 그 이후를 홍적세(Holocene期)라 한다. 홍적세이후 대략 1만2천년전부터 빙하기가 끝나고 기온이 상승하기 시작하면서 해수면도 아울러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그 이전 구석기시대 말기에는 한반도가 중국대륙과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일본열도는 연해주 캄챠카지역과 연결되어 있었던 시기였다. 구석기시대 말기 2만년전부터 남부시베리아 지역에서 신석기문화로 접어들기 전단계의 문화가 전개되고 있었는데, 특히 바이칼호를 중심으로 흑룡강상류와 연해주 캄챠카지역까지 침엽수림이 들어찬 삼림지대여서 비교적 풍부한 동물군(群)이 분포하고 있었다.
따라서 만주의 초원지대 외곽을 둘러싸는 듯한 침엽수림대의 자연환경이 어로와 수렵중심의 구석기시대 말기인들에게는 더없이 훌륭한 삶의 터전이 될 수 있었고 유적 또한 다수 분포하고 있는 것이다.
기후분포를 보면 발해연안은 8천년전부터 현재보다 3~5℃정도 높은 기온과 다습한 난온대기후의 성질을 띠고 있었으므로 일찌기 농경이 발달하기 유리한 지역이었다.
요동반도 남단 대고산(大孤山)지역의 기후변화와 그에 따른 수목(樹木)의 변화 및 발해의 해면변화를 보면, 5천년전(B.C.3,000)부터 3천년전(B.C.1,000)까지에는 비교적 온도가 높았으나 습도가 낮아져 상대적으로 굉장히 건조해 졌고, 3천년전부터 서서히 기온이 내려가 추워지면서 현재와 같은 기후로 변하였다.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기후변화에 따른 인류생활의 변화이다. 기후가 크게 변하는 시기가 홍적세이후 세차례나 있었다. 8천년전과 5천년전, 그리고 3천년전 등인데, 이러한 변화는 이 지역만이 아닌 범세계적인 추세였다.
당시의 요동반도 남부지역 식물분포의 정황을 보더라도 요녕남부지역에는 낙엽활엽수 위주의 삼림에서 기후의 변화로 인해 침엽수가 증가하다가 3천년전이후부터는 건조한 초원형 식물이 다수를 점하게 되어 이에 따른 동물군의 변화, 궁극적으로 인류의 경제형태 또한 변화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대표적인 내몽골 흥륭와(興隆珪), 요녕성 심양 신락(新樂)하층, 요동반도 남단 소주산(小朱山)하층 등의 유적들은 방사성탄소 연대측정에 의해 7천년전의 유적으로 밝혀졌다.
특이한 것은 요동반도지역의 신석기문화 유적에서는 소형의 세석기전통이 보이지 않는데, 내몽골 흥륭와(興隆珪)나 심양의 신락(新樂)하층 유적등 내륙의 산간지대에서는 세석기전통이 혼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보다 더 북쪽인 내몽골 임서(林西), 만주 송화강상류 눈강일대 초원지대에는 세석기유적이 다수를 점하여 하북성북부지역과 요동반도남부, 한반도서북부 일대가 대형석기(金助,金産)위주의 '之'자 '人'자문 토기문화를 이루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신석기시대 문화가 황하유역으로부터 전파된 것이 아닌 발해연안일대에서 동시에 발생하여 각자 특징적인 문화전개를 이룩하였다는 것이다. '之'자 '人'자문을 '연속고선문(延續孤線紋)'이라고도 하는데, 심양이나 내몽골 등지의 연속고선문계 토기문화와 연계하여 발달된 신석기문화를 꽃피우는 단계가 바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홍산문화(紅山文化)'이다.
이 뒤를 잇는 것이 앙소문화(仰韶文化) 단계로 물고기와 기타 문양을 채색한 채도(彩陶)를 특징으로 하는 홍산문화와 같은 시기의 문화단계이다.
홍산문화는 앙소문화의 채도와 이전단계의 연속고선문계 토기와 세석기등을 융합하여 한단계 발전하여 전개되었는데, 정교한 옥기(玉器)의 사용, 석묘(石墓)계통의 돌을 사용한 무덤, 주거유적 등이 특징적으로 이러한 홍산문화의 유산은 후에 이 지역 하가점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에 계승되고 중국 황하유역과 산동반도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동이족(東夷族)'의 활동지역을 문헌상으로 보면, 하북성동북부와 산동일대, 양자강하류유역등이다. 산동지역에서 가장 앞서는 신석기문화유적은 북신문화(北辛文化)인데, 북신문화는 7천년전까지 소급되어지고 황하의 자산,배리강문화와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또한 B.C.4500년경의 이 지역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와도 직접적인 연원관계에 있다.
황하유역의 이리두문화(二里頭文化)의 주인공으로는 하(夏)나라와 은(殷)나라를 비정한다. 이리두문화는 앙소문화를 계승하여 대문구문화의 요소도 받아들인 초기청동기 문화단계로 인식된다. 이점은 산동지역 용산문화와 요녕지역 하가점하층문화도 마찬가지이다.
여인상은 비중국적인 특징으로 남부시베리아의 바이칼호 말타(Malta)유적등에서 다량 발견되고 유럽지역에서도 발견되었는데 지모신(地母神) 숭상의 전거로 인식한다.
역사상에서 홍산문화와 동일한 석묘계의 묘장법을 채용하고 있는 나라가 고조선이므로 고조선의 전단계인 홍산문화는 고조선의 선조들이 이룩한 문화로 보지 않을 수 없다.
돌을 이용하여 구조물을 축조하는 방식이 고조선이후 부여, 고구려에도 계속하여 전승되는 한민족 고유의 산물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3) 한웅시대의 거점 검토
그렇다면 홍산문화가 바로 한웅시대와 연결될 수 있는가? 앞단에서 잠깐 언급하고 넘어왔었는데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연대상으로 볼 때, 홍산문화가 B.C.3500~B.C.2200년까지로 여겨지고 있고, 한웅시대가 B.C.3898~B.C.2333년까지 이므로 서로 비슷하게 일치하고 있지만, 위치상의 문제로 한웅의 신시가 태백산 신단수아래라는 사실이 혼동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태백산을 지금의 백두산으로만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현실로는 홍산문화지역과는 거리가 엄청 멀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백두산근처에 신석기시대 발전된 문화유적의 흔적이 다수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옛문헌 사료의 착오를 짚고 넘어가야겠다.
민족사적 입장에서 태백산을 백두산이라 하고 이곳을 한웅의 거점으로 본 것은 분명 잘못이다.
이것은 결국 역사적 사실을 신화로 만드는데 동조한 셈이 되었고 다분히 민족종교적인 분위기마저 표출하게 된 결과를 낳았다. 이는 스스로가 역사를 왜곡시키는 행위를 저지른 것이 되어 버린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한웅이 '三危太白이 弘益할만하여 神壇樹下에 하강했다'고 전하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태백산이라 하지 않고 '삼위태백'이라 한 표현이 주목된다.
'삼위태백'은 '삼위산과 태백산의 (사이)지역'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이 지역은 일찍부터 신석기문화가 꽃피운 곳이고 한웅이 바이칼호 남부시베리아 지역에서 이동해 내려왔다고 보아도 지리적 여건상 위치설정이 타당한 곳이다.
[한단고기]에도 [삼국유사]와 유사한 기록이 있다. [삼성기]하권에 보면,
[태백일사(太白逸史)]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편을 보자. - 태백산은 북쪽을 달리는 산으로 높고 높게 斐西甲의 경내에 우뚝 서 있다. 水를 뒤로 업고 山을 안고 있는데 크고 둥그렇게 돌아가는 곳(四焉之處)이 있는데 大日王이 祭天하는 곳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한웅천왕'이 이곳까지 순수하시어 사냥하시고 제사를 지낸 곳'이라 한다. 風伯은 天符를 거울에 새겨 앞서가고 雨師는 북을 치면서 환무하고 雲師는 佰劒으로 호위하였으니 대저 천제가 산에 임하실 때 의식은 장중하고 위엄있었다. -
황제헌원과 결전을 벌이며 하북과 산동일대를 개척하여 청구국을 세웠다는 기록은 [사기]에 더 자세히 전해지는데 도읍을 옮긴다는 차원에서 볼 때, 발해북안 일대가 위치상 근사할 수밖에 없는데 더구나 이 지역에 홍산문화라는 발달된 문화가 전개되고 있었고 시기적으로도 일치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3. 단군(檀君)시대와 청동기문화 단군조선(檀君朝鮮)시대는 청동기를 본격적으로 사용한 청동기문화(靑銅器文化)단계였다. 역사상에서 '고조선(古朝鮮)'이라 하는 시기에 해당한다.
단군조선시대는 신석기문화를 계승하면서 본격적으로 청동기문화로 돌입하여 초기철기문화에 이르기까지 장구한 기간동안 역년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러한 단군조선을 왕조사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위험하다. 단군조선은 고대국가로서의 왕조사로 이해하기 보다는 연맹체로서의 문화권역으로 이해하는 것이 현명한 해석일 것이다.
발해북안의 하가점하층문화(夏家占下層文化:B.C.2000~B.C.1300)란 내몽골 적봉(赤峰) 하가점촌에서 발굴된 두개의 퇴적층중 하층에서 발견된 유적층이다. 이 문화단계는 홍산문화(紅山文化)를 계승하는 소하연문화(小河沿文化)에 이어서 나타나는 청동기유적을 포함하는 문화이다.
소하연문화는 홍산문화의 지류로 보기도 하는데 이러한 양상은 자오지한웅 즉 치우천황이 중심지를 산동지역으로 옮기고 나서의 변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하가점상층문화란 이른바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으로 대표되는 고조선(古朝鮮)의 청동기 문화단계에 속한다.
유적발굴 또한 1980년대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시행되었고 그 이전에는 간헐적으로 조사되었을 뿐이었으므로 정확한 문화의 면모를 살피기에는 아직 이르다. 하지만, 기원전 3천년대 후반경에 송화강중류와 눈강하류 일대에 세석기전통에 접목하여 다양한 기하학문을 시문한 토기문화가 전개되고 있었는데 '백금보문화(白金寶文化)'가 대표적이다.
백금보문화는 기원전 2천년대말기와 기원전 1천년대전기에 속하는 문화로 보아지는데 초기청동기 문화단계에 진입하였던 흔적이 있다. 이 지역에서는 특이하게도 홍산문화 계통과 하가점하층문화 계통의 토기가 나와서 문화적 지역전파의 양상을 보여주는데 단군조선의 건국과 관련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확신할 수가 없다.
이러한 양상은 홍산문화나 하가점하층문화의 토기문양과 매우 다른 독특한 요소이지만, 기본적으로는 홍산문화계통과 하가점하층문화계통의 토기와 유사한 점이 많다. 이지역은 길림·장춘지역의 순수 비파형동검문화보다 확실히 이른 시기의 단계에 전개되었던 문화이고 길림장춘지역의 문화발전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음이 틀림없다.
[한단고기]의 단군조선시대 기록을 보면,
- 경자93년(B.C.2241) 제께서 柳闕에 계셨는데 흙계단이 절로 생기고 풀숲은 사라지지 않으니 檀木이 무성한 곳에서 熊虎族과 함께 노닐며 牛羊을 살피셨다. 도랑을 파고 밭길을 내고 누에를 치도록 권장하며 고기잡이를 가르치니 백성들은 남는 물건을 나라살림에 보태었다. -
'밭을 개간하고 누에를 치도록 권장하며'는 농경문화를 지칭하는 기사인데 누에를 치기 시작했다는 것이 놀랍다. 더구나 '백성들은 餘物을 備補國했다'는 기록은 고대국가의 기틀인 조세제도의 시행과 관련이 있다.
이 기사는 2세단군 부루(夫婁)조에도 등장하고 있어 기록의 시대적 일치성을 증가시켜 준다. 4세단군 오사구조에는, '무자5년(B.C.2133) 鑄圓孔貝錢'이라 하여, 둥근 구멍뚫린 조개돈(?)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명도전이라 하는 것과 패전과의 관계도 주목해볼만한 내용으로 '패(貝)'자는 '조개'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붕(朋)'자와 관련이 있고 이는 '명(明)'자와도 관련이 있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이것 또한 고고학적 증거로 나타나는데 만주지역에서 신석기시대 중기가 되면 원시농경에 가축으로 소(牛), 양(羊), 개(狗), 돼지(猪) 등이 길러졌으며, 청동기시대로 진입하는 단계에 본격적인 목축의 흔적이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양상이 [단군세기]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10대단군 노을(魯乙) 조를 보면,
[단군세기]에서 가장 중요한 고고학적 기록은 금속기의 사용에 관한 것이다. [삼성기]나 [태백일사] ‘신시본기’에는
현재까지 밝혀진 중국에서의 금속기 사용시기는 기원전 2천년경부터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연대는 본격적으로 청동기가 용구로 사용되어진 시기가 아니고 청동기가 묻힌 유적의 연대를 의미한다. 청동기가 예기화되어 무덤에 안장되기 시작한 연대와 발명되어 사용되어지기 시작한 연대와는 상당한 시기적 차이가 존재한다고 보아야 한다.
홍산문화에서와 같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동물형상의 옥기(玉器)같은 것은 금속공구를 사용하지 않고서는 대단히 어려운 작업의 산물로 여겨지고 있다. 따라서 중국학계에서는 동석병용시대(銅石倂用時代)라 하여 이미 기원전 3천년이전에 극히 일부나마 동기(銅器)의 사용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이는 문헌기록이 철기(鐵器)의 본격적인 사용이후의 것이므로 기록상의 혼동이 야기될 수 있음을 감안하여, 기록상으로는 동양에서는 동이족(東夷族)의 수장 치우천왕이 최초로 금속기를 사용한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 병오16년(B.C.1935) 발해연안에서 金塊가 노출되었는데 수량이 13石이었다. - 라고 되어 있어, 여기서 노출된 금괴가 황금을 뜻하는 것인지 일반적인 금속덩어리를 뜻하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발해연안에서 나왔다는 것이 중요한데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발해연안은 하가점하층문화의 전개지이고 하가점하층문화 유적중 하북성(河北省) 당산시(唐山市) 대성산(大城山) 유적에서 구리와 주석의 합금인 청동(靑銅:Bronze)의 전단계에 나타나는 순동(純銅:Copper)으로 만든 패식 2점이 발견되었다.
붉은 색을 띤 순동이 약해서 주석과 같은 광물질을 첨가하여 경도가 높은 청동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초기단계의 순동이 대성산유적에서 발견된 것이다.
대성산은 이보다 더 이른 시기일 것이므로 기원전 2천년대로 추정되고 있고 이것은 중국내륙의 청동기 유적인 하남성(河南省) 언사현(偃師縣) 이리두(二里頭)유적의 기원전 1천7백년경보다 훨씬 빠른 연대이다.
이렇게 보면, 청동기의 개시에 대해서는 중원중심이 아닌 오히려 주변지역에서 먼저 시작한 것으로 보아야 함이 옳다. 다만, 중원의 큰 잠재력에 의해 청동기문화가 만개하였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청동문화를 꽃피운 이들이 바로 이주해 간 동이(東夷) 계통의 은민족(殷民族인) 것이다.
치우천왕의 본거지가 이 일대를 포함하는 청구국이므로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고 하겠다. [단군세기]의 ‘발해연안’은 어느 곳인지 지칭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발해서북안 일대의 기원전 2천년전후의 청동유적이 시기적으로 기록과 일치하고 있음을 주목한다.
[단군세기] 15대단군 벌음(伐音) 조(條)에 보면, - 기축10년(B.C.1652) 帝께서는 西쪽으로 弱水에 가시더니 신지 우속에게 명하여 金鐵 및 膏油를 채취하도록 했다. -
단군이 아사달이 있는 만주 송화강지역에 있었다고 본다면 약수는 북쪽에 있지 않고 이 당시 서쪽에 있었던 것이다. 약수의 위치에 대해서는 [한단고기]상에서도 두 곳을 혼용하고 있어 주의를 요한다.
구리(銅)를 채광하고 제련, 주조까지 행한 흔적이 남아 있는 하가점하층문화단계의 청동기시대 유적지이다. 이 유적지에서 상당히 오랜 기간 동기를 제작한 것으로 드러났는데, 이후의 하가점상층문화단계까지 연결되고 있다.
B.C.1652년 벌음(伐音) 단군 때 행하여진 구리의 채광기사는 시기적으로나 위치상으로나 도저히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고고학적 발굴자료와 일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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