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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박목월
가정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 구문 반(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문 삼(六文三)의 코가 납짝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壁)을 짜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 구문 반(十九文半).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의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 구문 반(十九文半)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청담(晴曇), 일조각, 1964
감람나무 박목월
감람나무
어린 감람나무여.
주께서
몸소 거닐으신
갈릴리
축복받은 땅에
주의
발자국이 살아 있는
바닷가으로
안수를 받으려고
고개를 숙인 나무여
세상에는
감람나무보다
더 많은 어린이들이
자라고 있지만
그들의
뒤통수에
머물어 있는
주의
크고 따뜻한 손.
세상의
모든 수목은
하나님의 뜻으로
자라나지만
어린 감람나무여
어린 감람나무여
주의 말씀으로 태어난
순결한 핏줄로
지금
환하게 웃는
어린이들 입에 물리는
오월의
금빛 열매여!
크고 부드러운 손, 영산출판사, 1979
갑사댕기 박목월
갑사댕기
안개는 피어서
강(江)으로 흐르고
잠꼬대 구구대는
밤 비둘기
이런 밤엔 저절로
머언 처녀들……
갑사댕기 남끝동
삼삼하고나
갑사댕기 남끝동
삼삼하고나
청록집, 을유문화사, 1946
개안 박목월
개안(開眼)
나이 60에 겨우
꽃을 꽃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렸다.
신(神)이 지으신 오묘한
그것을 그것으로
볼 수 있는
흐리지 않은 눈
어설픈 나의 주관적인 감정으로
채색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꽃
불꽃을 불꽃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렸다.
세상은
너무나 아름답고
충만하고 풍부하다.
신(神)이 지으신
있는 그것을 그대로 볼 수 있는
지복(至福)한 눈
이제 내가
무엇을 노래하랴.
신(神)의 옆자리로 살며시
다가가
아름답습니다.
감탄할 뿐
신(神)이 빚은 술잔에
축배의 술을 따를 뿐.
크고 부드러운 손, 영산출판사, 1979
겨울 선자 박목월
겨울 선자(扇子)
오전에는
제자의 주례를 보아 주고
오후에는
벼루에 먹을 간다.
이제
난(蘭)을 칠 것인가, 산수(山水)를 그릴 것인가.
흰 종이에
번지는 먹물은 적막하고.
가슴에 붉은 꽃을 다는 것과
흰 꽃을 꽂는 것이
잠깐 사이다.
겨울 부채에
나의 시(詩),
나의 노래,
진실은 적막하고
번지는 먹물에 겨울해가 기운다.
무순(無順), 삼중당, 1976
구름밭에서 박목월
구름밭에서
비둘기 울듯이
살까보아
해종일 구름밭에
우는 비둘기
다래 머루 넌출은
바위마다 휘감기고
풀섶 둥지에
산새는 알을 까네
비둘기 울듯이
살까보아
해종일 산 넘어서
우는 비둘기
산도화(山桃花), 영웅출판사, 1955
구황룡 박목월
구황룡(九黃龍)
날가지에 오붓한
진달래꽃을
구황룡 산길에
금실 아지랑이
―풀섶 아래 꿈꾸는 옹달샘
―화류장롱 안쪽에 호장저고리
―새색시 속눈썹에 어리는 이슬
날가지에 오붓한
꿈이 피는
구황룡 산길에
은실 아지랑이
산도화(山桃花), 영웅출판사, 1955
귀 밑 사마귀 박목월
귀 밑 사마귀
잠자듯 고운 눈썹 위에
달빛이 나린다
눈이 쌓인다
옛날의 슬픈
피가 맺힌다
어느 강(江)을 건너서
다시 그를 만나랴
살눈섭 길씀한
옛 사람을
산(山)수유꽃 노랗게
흐느끼는 봄마다
도사리고 앉힌 채
도사리고 앉힌 채
울음 우는 사람
귀 밑 사마귀
청록집, 을유문화사, 1946
그저 박목월
그저
어슬어슬한
초봄 해 질 무렵
팔짱을 끼고
주막 툇마루에
입술이 퍼렇게 앉았는 것은
그저 앉았음.
기다릴 것도
안 기다릴 것도 없이
나무 가지는
움을 마련하고
추위에 돌아 앉은 산(山)
골짜기에 살아나는 봄빛
꼭지에 놀.
글썽거려지는 눈물은
그저 글썽거려짐.
譯捉돛Ç 가랑잎, 민중서관, 1968
기계 장날 박목월
기계(杞溪) 장날
아우 보래이.
사람 한평생
이러쿵 살아도
저러쿵 살아도
시큰둥하구나.
누군
왜, 살아 사는 건가.
그렁저렁
그저 살믄
오늘같이 기계(杞溪) 장도 서고.
허연 산뿌리 타고 내려와
아우님도
만나잖는가베.
앙 그렁가잉
이 사람아.
누군
왜 살아 사는 건가.
그저 살믄
오늘 같은 날
지게목발 받쳐놓고
어슬어슬한 산비알 바라보며
한 잔 술로
소회도 풀잖는가.
그게 다
기막히는기라
다 그게
유정한기라.
譯捉돛Ç 가랑잎, 민중서관, 1968
길처럼 박목월
길처럼
머언 산 구비구비 돌아갔기로
산(山)구비마다 구비마다
절로 슬픔은 일어……
뵈일 듯 말 듯한 산길
산울림 멀리 울려 나가다
산울림 홀로 돌아 나가다
……어쩐지 어쩐지 울음이 돌고
생각처럼 그리움처럼……
길은 실낱 같다
청록집, 을유문화사, 1946
나그네 박목월
나그네&
술 익은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지훈(芝薰)
강(江)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南道) 삼백리(三百里)
술 익은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청록집, 을유문화사, 1946
나무 박목월
나무&
유성에서 조치원으로 가는 어느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그루 늙은 나무를 만났다. 수도승일까. 묵중하게 서 있었다.
다음날은 조치원에서 공주로 가는 어느 가난한 마을 어구에 그들은 떼를 져 몰려 있었다. 멍청하게 몰려 있는 그들은 어설픈 과객(過客)일까. 몹시 추워 보였다.
공주에서 온양으로 우회하는 뒷길 어느 산마루에 그들은 멀리 서 있었다. 하늘 문(門)을 지키는 파수병일까, 외로워 보였다.
온양에서 서울로 돌아오자, 놀랍게도 그들은 이미 내 안에 뿌리를 펴고 있었다. 묵중한 그들의. 침울한 그들의. 아아, 고독한 모습. 그 후로 나는 뽑아낼 수 없는 몇 그루의 나무를 기르게 되었다.
청담(晴曇), 일조각, 1964
난 박목월
난(蘭)&
이쯤에서 그만 하직하고 싶다.
좀 여유가 있는 지금, 양손을 들고
나머지 허락 받은 것을 돌려보냈으면.
여유 있는 하직은
얼마나 아름다우랴.
한 포기 난(蘭)을 기르듯
애석하게 버린 것에서
조용히 살아가고,
가지를 뻗고,
그리고 그 섭섭한 뜻이
스스로 꽃망울을 이루어
아아
먼 곳에서 그윽히 향기를
머금고 싶다.
난(蘭).기타(其他), 신구문화사, 1959
난초 잎새 박목월
난초 잎새
난초 잎새에 밤이 무르익는다.
난초의 존재, 잎새의 묵상.
동양적인 정신의 잎새에 무르익는
밤의 심도(深度).
나는 혼자다.
오늘밤 월세계로 달리는 로키트의 궤적이
난초 잎새에 어린다.
난초는 차라리 무료(無聊)하다.
차라리 수묵색(水墨色).
난초는 무엇이냐, 나는 무엇이냐.
허막한 공간. 바람에 씻기는 한 덩이 유성 위에서
나의 내부에 돋아나는 난초
밤을 응시하는 난초의 눈, 잎새의 눈,
난초는 차라리 무료(無聊)하다.
차라리 수묵색(水墨色).
나는 혼자다.
譯捉돛Ç 가랑잎, 민중서관, 1968
노대에서 박목월
노대(露臺)에서
발코니에서 건너다 보는 숲에
밤의 나무는 적막하다.
밑둥까지 볼 수 있는 알몸의
밤의 나무는 고독하다.
밤일수록 떠 보이는
나무와 나무 사이의 간격.
앙상한 팔과 마른 손가락으로
허공을 휘젓는 나무.
죽음보다 깊이 잠든 수녀원의
눈도 내리지 않는, 냉랭한 자정(子正)에
밑둥까지 드러낸 알몸은 차갑다.
나무와 나무 사이의 간격은 두렵다.
무순(無順), 삼중당, 1976
노래 박목월
노래&
고모요,
고모집 울타리에
유달리 기름진 경상도의 뽕잎,
그 뽕잎에 달빛.
가난이 죄라지만
육십 평생을,
삼십리 밖을 모르고
살림에만 쪼들린.
손님 상에
모지러진 숟갈.
고모요,
칠칠한 그 솜씨로도
못 휘어잡은 가난을
산천은 어쩌자고
저리도 기름지고
쑥국새는 아침부터
저리도 우능기요.
고모요,
막내 고모요,
화천(花川)골 진달래는
지천으로 피는데
사람 평생
잘 살믄 별난기요.
그렁
저렁
살믄 사는 보람도 서고,
아들이 컸잖는기요.
저 덩치 보이소.
며누리 보고 손자 보믄
사람 일 다 하는 거로
유달리 널찍한
경상도 뽕잎에
밤이슬은 왜 이리도 굵은기요.
譯捉돛Ç 가랑잎, 민중서관, 1968
논두렁길 박목월
논두렁길&
억울하고 원통한 일이야
필설(筆舌)로 다할 수 없었다.
태어나는 그날부터
가슴에 서리기 시작한 것
얼굴을 문지르며
논두렁길을 걷는다.
따지고 보면 밑도 끝도 없는
다만 가슴에 안개같이 서려
늘어나는 주름살을 쓰다듬으며
논두렁길을 걷는다.
아무리 헤아려도 아귀가 맞지 않는
그것을 인생이거니 체념한
씁쓸한 얼굴을 찌푸리고
논두렁길을 걷는다.
논두렁길은 꼬불꼬불 뻗어
마을과 마을을 이어 있다.
때로는 안개에 서려 보름달이 뜨면
실로 허전한 걸음으로
억울하고 원통할 것도 없는 얼굴들이
논두렁길을 걷는다.
譯捉돛Ç 가랑잎, 민중서관, 1968
눈물의 훼어리 박목월
눈물의 훼어리
흐릿한 봄밤을
문득 맺은 인연의 달무리를
타고. 먼 나라에서 나들이 온
눈물의 훼어리.
(손아귀에 쏙 드는 하얗고 가벼운 손)
그도 나를 사랑했다.
옛날에. 흔들리는 나리꽃 한 송이……
긴 목에 울음을 머금고 웃는
눈매. 그 이름
눈물의 훼어리……
사람 세상의
속절없는 그 바람을
무지개 삭아지듯
눈물 젖은 내 볼 위에서
승천(昇天)한 그 이름
눈물의 눈물의 훼어리.
사랑하느냐고
지금도 눈물 어린
눈이 바람에 휩쓸린다.
연한 잎새가 펴 나는 그 편으로 일어오는
그 이름, 눈물의 훼어리
때로는
문득 내 밤 기도 귀절 속에서
그대로 주르르 넘치는
그 이름
눈물의 훼어리.
이제 내 눈은
하얗게 말랐다.
사랑이라는 말의 뜻이 달라졌으므로.
하늘 속에 열린 하늘에
고개 지우고 사는
아아 그 이름
눈물의 훼어리.
난(蘭).기타(其他), 신구문화사, 1959
눈썹 A 박목월
눈썹 A
불안하고 겁에 질린
짐승들의 검은 눈은
우리의 것이다.
타오르는 불길에 깃드는
검은 그늘을
우리는
무직한 눈썹으로
태연하게 놀리고 있을 뿐이다.
짐승들의
태고의 밤보다 어둡고
불안스러운 검은 눈은
우리의 것이다.
눈썹이 없는 짐승들은
겁에 질린 검은 눈을
두리번거리며
방황할 뿐이다.
그들은
무리를 지어,
발자국을 죽이고
숲 그늘로 헤매이지만
우리들은
눈썹 위에 손을 얹고
기우는 햇살의
시각을 가늠해 본다.
무순(無順), 삼중당, 1976
눈썹 B 박목월
눈썹 B
흰 말의 무리가 달려와서는 앞무릎이 팍팍 꿇어지며 순간마다 침몰해 갔다. 해면(海面)에.
억의 억만 필의 흰 말은 천지를 휘몰아 올리는 회오리바람 기둥으로 뻗치며 휘휘 돌며 달리며 몰아치며 침몰해 갔다.
해면(海面)은 설레이지 않았다. 그처럼 장엄한 비극과 좌절을 침착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냉엄한 평온은 심야의 절규보다 전율적인 것이었다.
나는 눈썹에 두텁게 쌓이는 눈의 무게를 느끼며, 흐느끼며, 창마다 불이 환하게 켜진 채 침몰해 가는 에리자베드 퀸 같은 호화 여객선의 화려한 종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눈은 며칠 안으로 멎었다. 그러나 내 눈썹에 쌓인 눈은 영원히 녹지 않았다. 해저에는 가라앉은 선체(船體)의 잔해들이 널렸고, 닫힌 문은 닫힌 대로 녹이 슬었다. 지금도 흰 말의 무리가 침몰한 해면(海面)의 그 냉엄한 평온의 절규는 마른 번개가 되어 땅 끝을 울리고 있었다.
무순(無順), 삼중당, 1976
달 박목월
달&
배꽃 가지
반쯤 가리고
달이 가네.
경주군 내동면
혹은 외동면
불국사 터를 잡은
그 언저리로
배꽃 가지
반쯤 가리고
달이 가네.
산도화(山桃花), 영웅출판사, 1955
당인리 근처 박목월
당인리(唐人里) 근처
당인리(唐人里) 변두리에
터를 마련할까 보아.
나이는 들고……
한 사, 오백 평(돈이 얼만데)
집이야 움막인들.
그야 그렇지. 집이 뭐 대순가.
아쉬운 것은 흙
오곡(五穀)이 여름하는.
보리․수수․감자
때로는 몇 그루 꽃나무.
나이는 들고……
아쉬운 것은 자연.
너그러운 호흡, 가락이 긴
삶과 생활.
흙을 종일,
흙하고 친하고
(아아 그 푸근한 미소)
등어리를
햇볕에 끄실리고
말하자면
정신의 건강이 필요한.
당인리(唐人里) 변두리에
터를 마련할까 보아.
(괜한 소리, 자식들은
어떡하고, 내가 먹여살리는)
참, 그렇군.
한쪽 날개는 죽지째 부러지고
가련한 꿈.
그래도 사, 오백 평
땅을 가지고(돈이 얼만데)
수수․보리․푸성귀
(어림없는 꿈을)
지친 삶, 피로한 인생
두발은 희끗한 눈이 덮이는데.
마음이 허전해서
너무나 허술한 차림새로
(누구나 허술하게 떠나기야 하지만)
길 떠날 채비를.
기도 한 구절 올바르게
못 드리고
아아 땅버들 한 가지만 못하게
(괜찮아, 괜찮아)
아냐. 진정으로 까치새끼 한 마리만 못하게
어이 떠날까보냐.
나이는 들고……
아쉬운 것은 자연.
그 품안에 쉴
한 사, 오백 평.
(돈이 얼만데)
바라보는 당인리(唐人里) 근처를
(자식들은 많고)
잔잔한 것은 아지랑인가(이 겨울에)
나이는 들고.
난(蘭).기타(其他), 신구문화사, 1959
도포 한 자락 박목월
도포 한 자락
임자, 나는 도포자라기
펄렁펄렁 바람에 날려
하늘가로 떠도는
누가 꿈인 줄 알았을락꼬.
임자는 포란 물감.
내 도포자라기의 포란 물감.
바람은 불고
정처 없이 떠도는 도포자라기.
우얄꼬. 물감은 바래지는데
우얄꼬. 도포자라기는 헐어지는데
바람은 불고
지향 없는 인연의 사람 세상.
임자, 나는 도포자라기
임자는 포란 물감.
아직도
펄럭거리는
저 도포자라기.
누가 꿈인 줄 알았을락꼬.
譯捉돛Ç 가랑잎, 민중서관, 1968
동물시초 박목월
동물시초(動物詩抄)
□ 염소
어느 날, 창경원엘 갔었다. 유심히 바라보면 모든 동물의 얼굴은 고독했다. 언어를 못 가진 것의 그 깊은 침잠.
이상(李箱)의 염소
붉은 눈자위
울고 새운 밤의 흔적이 테둘러 있었다.
□ 하마
뚝한 얼굴이 짧은 발을 어기적거리며 내게로 다가온다. 통성명(通姓名)을 하자는 것일까. 인사를 하기에는 내 얼굴 피부가 너무나 투명하고 외면(外面)하기에는 그의 얼굴이 너무나 심정적(心情的)이다. 입을 쩍 벌리는, 사이즈를 초월한 그의 입에 푸짐하게 어울릴 언어를 생각한다. 그 투박한 언어를―얄밉도록 세련된 나의 언어는 혀끝으로 구을리기 알맞을 뿐이다.
□ 타조
너무나 긴 목 위에서 그것은 비지상적(非地上的)인 얼굴이다. 그러므로 늘 의외의 공간에서 그의 얼굴을 발견하고 나는 잠시 경악한다. 다만 비스켓 낱을 주워먹으려고 그것이 천상에서 내려올 때, 나는 다시 당황한다. 먹는다는 것이 동심적인 천진스러운 행위일까. 누추하고 비굴한 본능일까. 확실히 타조는 양면을 가졌다. 소년처럼 순직한 얼굴과 벌건 살덩이가 굳어버린 이기적인 노안(老顔)과……
그리고 이 괴이한 면상(面相)의 주금류(走禽類)가 오늘은 나의 눈을 응시한다.
□ 낙타
진실로 박복한 그 입. 소가 아무리 미련한 짐승이지만 그 든든하고 확고한 턱과 입으로 보아 조반석죽(朝飯夕粥)에 궁할 팔자가 아니다. 하지만 아랫입술이 약간 나온, 엷은 가죽이 민숭하게 처진 약대의 입은 온 얼굴이 입이다. 서러운 면상(面相)아. 물 한 모금 제대로 못 마실 운명에 순응해서, 입과는 거리를 두고, 저 안쪽에 어질고 작은 눈에 찬물이 괸 채……
□ 원(猿)
미간이 한곳으로 몰려, 새까만 두 눈이 새끼를 보둥켜 안고 있다. 그 극진한 육친애. 협량(狹量)하기 때문에 애정이 외곬으로 쏠리는가.
원숭이의 얼굴은 두 개만 포개지면 사뭇 억만(億萬)의 얼굴이 모인 것처럼 슬픔의 강물이 된다.
아 요것아, 요것아. 미개번족(未開蕃族)들의 가슴으로 흘러가는 이 강물이 그들로 하여금 인육(人肉)으로, 번제(燔祭)를 올리게 하는 광란을 불러 일으키는 것인가
그리고 오늘은 내가 원숭이로 화(化)하는가.
청담(晴曇), 일조각, 1964
동정 박목월
동정(冬庭)
뜰을 쓰는 대로 가랑잎이
비오듯 했다.
마른 국화 향기는
차라리 섭섭한 것.
아, 쓸쓸한 뜰에
구름은 한가롭지 않다.
저, 어지러운
구름 그림자.
반생을
덧없이 보내고
나머지 한나절을
바람이 설렌다.
산에는
찬 그늘이 내리고
새들도
멀리 가고 말았다.
난(蘭).기타(其他), 신구문화사, 1959
동행 박목월
동행(同行)&
갈밭 속을 간다.
젊은 시인(詩人)과 함께
가노라면
나는 혼자였다.
누구나
갈밭 속에서는 일쑤
동행(同行)을 놓치기 마련이었다.
성형(成兄)
성형(成兄)
아무리 그를 불러도
나의 음성은
내면으로 되돌아오고
이미
나는
갈대 안에 있었다.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닌데
갈밭은
어석어석 흔들린다.
갈잎에는 갈잎의 바람
백발(白髮)에는 백발(白髮)의 바람
젊은 시인(詩人)은
저편 기슭에서 나를 부른다.
하지만 이미 나는
응답할 수 없었다.
나의 음성은
내면으로 되돌아오고
어쩔 수 없이 나도
흔들리고 있었다.
譯捉돛Ç 가랑잎, 민중서관, 1968
만술 아비의 축문 박목월
만술(萬述) 아비의 축문(祝文)
아배요 아배요
내 눈이 티눈인 걸
아배도 알지러요.
등잔불도 없는 제사상에
축문이 당한기요.
눌러 눌러
소금에 밥이나마 많이 묵고 가이소.
윤사월 보릿고개
아배도 알지러요.
간고등어 한 손이믄
아배 소원 풀어 드리련만
저승길 배고플라요
소금에 밥이나마 많이 묵고 묵고 가이소.
□ *
여보게 만술(萬述) 아비
니 정성이 엄첩다.
이승 저승 다 다녀도
인정보다 귀한 것 있을락꼬,
망령(亡靈)도 응감(應感)하여, 되돌아가는 저승길에
니 정성 느껴 느껴 세상에는 굵은 밤이슬이 온다.
譯捉돛Ç 가랑잎, 민중서관, 1968
매몰 박목월
매몰
통금의 철책 안에서
눈발 속에 묻혀가는
것들을 생각한다.
그
아늑한 매몰과 부드러운
망각으로 세계는
한결 정결해진다.
철책조차 눈에 묻히고
잠이 든다.
모든 루울의 흰 라인은
베일 저편으로
몽롱하게 풀리고
드디어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는
아침이 열린다.
무순(無順), 삼중당, 1976
모과수 유감 박목월
모과수(木瓜樹) 유감
여전히 있군.
그 나무는. 청록집의 내 작품을
쓸 무렵의 모과수(木瓜樹).
지훈(芝薰)을 기다렸다.
저 나무 아래서.
서울서 내려 오는 낯선 시우(詩友)를.
이십 년의 세월이
어제 같구나.
모과수(木瓜樹)는 여전한 그 모습.
늙어서 나만이 이 나무 아래서
오늘은 구름을 쳐다보는가.
덧없는 세월이여.
어제 같건만, 젊음은 갈앉고
머리는 반백(半白).
반평생 경영(經營)이 시구(詩句) 두어 줄.
너를 노래하여 싹튼 박목월(朴木月)도
이제 수피(樹皮)가 굳어졌는데……
오늘은
그 나무 아래서
모과수(木瓜樹)의 묵중한 인종을 배울까부다.
함께 나란히
벗들도 늙고, 환한 이마에
주름이 잡혔는데
늙어서
오히려 태연한 좌정.
잎새는 바람에 맡겨버리고
스스로 열리는 열매를 거둠하고
때가 이르면
환한 눈을 감으려니.
여전히 있군.
그 나무는 박물관 처마에서
두어 자국 뜰로 나와.
산수유와 나란히 어깨를 겨누고.
비스듬히 이마를 하늘에 기댄 채
빛나는 궁창(穹蒼)을
억만 년의 세월을 자랄 듯한 미소로.
난(蘭).기타(其他), 신구문화사, 1959
모성 박목월
모성(母性)
그것을 무엇이라
명명할 것인가.
다만
어린것의 손을 잡고,
앞으로, 보다 높은 세계로.
맹목적으로 달리는,
안으로.
타오르는
이 꺼질 날 없는 불덩이를……
그것은
달리는 것에 열중하고
달리는 것으로 열중하여,
앞으로, 보다 높은 세계로 달리는.
나이 든 줄도 모르는,
다만 그의 손을 잡고,
달리는 달리는
그 인생의 보람.
그 빛나는 모성의 하늘.
이마에 얹은 것은
사과가 아니다.
하늘이 베푸는 스스로의 총명
그것은
다만 어린것의 손을 잡고.
보다 높은 삶의 세계로 줄달음질치는
그것은 회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망설이지 않는다.
다만 줄달음질치는
이 백열적인 질주……
이 아름답고 눈물겨운 본능
크고 부드러운 손, 영산출판사, 1979
목단여정 박목월
목단여정(牧丹餘情)
모란꽃 이우는 하얀 해으름
강을 건너는 청모시 옷고름
선도산(仙桃山)
수정 그늘
어려 보랏빛
모란꽃 해으름 청모시 옷고름
산도화(山桃花), 영웅출판사, 1955
무제 박목월
무제(無題)&
앉는 자리가 나의 자리다.
자갈밭이건 모래톱이건
저 바위에는
갈매기가 앉는다. 혹은
날고 끼룩거리고
어제는
밀려드는 파도를 바라보며
사람을 그리워하고
오늘은
돌아가는 것을 생각한다.
바다에 뜬 구름을 바라보며,
세상의 모든 것은
앉는 자리가 그의 자리다.
벼랑 틈서리에서
풀씨가 움트고
낭떠러지에서도
나무가 뿌리를 편다.
세상의 모든 자리는
떠 버리면 흔적 없다.
풀꽃도 자취 없이 사라지고
저쪽에서는
파도가 바위를 덮쳐
갈매기는 하늘에 끼룩거리고
이편에서는
털고 일어서는 나의 흔적을
바람이 쓰담아 지워버린다.
무순(無順), 삼중당, 1976
박꽃 박목월
박꽃
흰 옷자락 아슴아슴
사라지는 저녁답
썩은 초가지붕에
하얗게 일어서
가난한 살림살이
자근자근 속삭이며
박꽃 아가씨야
박꽃 아가씨야
짧은 저녁답을
말없이 울자
청록집, 을유문화사, 1946
밥상 앞에서 박목월
밥상 앞에서
나는 우리 신규(信奎)가
젤 예뻐.
아암, 문규(文奎)도 예쁘지.
밥 많이 먹는 애가
아버진 젤 예뻐.
낼은 아빠 돈 벌어가지고
이만큼 산물을
사 갖고 오마.
이만큼 벌린 팔에 한아름
비가 변한 눈 오는 공간(空間).
무슨 짓으로 돈을 벌까.
그것은 내일에 걱정할 일.
이만큼 벌린 팔에 한아름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의 하늘.
아빠, 참말이지.
접때처럼 안 까먹지.
아암, 참말이지.
이만큼 선물을
사 갖고 온다는데.
이만큼 벌린 팔에 한아름
바람이 설레는 빈 공간(空間).
어린 것을 내가 키우나.
하느님께서 키워주시지.
가난한 자(者)에게 베푸시는
당신의 뜻을
내야 알지만.
상(床) 위의 찬(饌)은 순식물성.
숟갈은 한죽에 다 차는데
많이 먹는 애가 젤 예뻐.
언제부터 측은한 정(情)으로
인간은 얽매여 살아 왔던가.
이만큼 낼은 선물 사오께.
이만큼 벌린 팔을 들고
신(神)이어. 당신 앞에
육신(肉身)을 벗는 날,
내가 서리다.
청담(晴曇), 일조각, 1964
방문 박목월
방문(訪問)&
백발이 되고, 이승을 하직할 무렵에 한번 더 만나보려니 소원했던 사람을 방문하게 되었다. 덧없이 흐른 세월이여. 끝없이 눈발이 내리는구나.
그를 방문했다.
쓸쓸한 미소가 마련되었다.
그를 방문했다.
내가 가는 길에 눈이 뿌렸다.
집에 있었다.
하얗게 마른 꽃대궁이.
그는
나를 영접했다.
손을 맞아 들이는 응접실에서.
그의 눈에는
영원히 멎지 않을 눈발이 어렸다.
나의 눈에도
눈발이 내린다.
사람의 인연이란
꿈이 오가는 통로에
가볍게 울리는 응답.
차가 나왔다.
손님으로서 조용히 드는 잔.
담담하고 향기로운 것이
팔분(八分)쯤 잔에 차 있다.
그를 방문했다.
쓸쓸한 미소가 마련되었다.
겨우
그를 하직했다.
하직 맙시다.
이것은 동양적인 하직의 인사.
청담(晴曇), 일조각, 1964
볼 일 없이 박목월
볼 일 없이
슬슬 거닐어 볼까 하고
내외가 함께 나선 걸음이 종로 뒤.
여긴 어딘가,
남의 문패를 기웃거리니 복룡동(伏龍洞).
걸어가도 걸어가도 긴 골목.
서울에 이런 골목도 있었구나
아내는 사뭇 놀라지만
어쩌면 나는 꿈에서 본 듯한.
무슨 볼 일이 있어서가 아닐세.
그냥 슬슬 내외가 동반하여
아무도 다니지 않는 빈 골목을
우리는 너무 오래 걸었구나.
가을 그늘에 잠긴 복룡동(伏龍洞).
무순(無順), 삼중당, 1976
불국사 박목월
불국사(佛國寺)
흰 달빛
자하문(紫霞門)
달안개
물 소리
대웅전(大雄殿)
큰 보살
바람 소리
솔 소리
범영루(泛影樓)
뜬 그림자
흐는히
젖는데
흰 달빛
자하문(紫霞門)
바람 소리
물 소리.
산도화(山桃花), 영웅출판사, 1955
비유의 물 박목월
비유(比喩)의 물
물이 된다. 자기의 중량(重量)으로 물은 포복(匍匐)할 도리 밖에 없다. 한 사람에게 오십여 년(五十餘年)은 긴 것이 아니라 무거운 것이다.
땅에 배를 붙이고 낮은 곳으로 기어가는 물은 눈이 없다. 그것은 순리(順理). 채우면 넘쳐 흐르고 차면 기우는 물의 진로(進路). 눈이 없는 투명한 물의 머리는 온통 눈이다.
□ *
물은 땅으로 스며든다. 흐르는 동안에 잦아져 버리는 물줄기를 나는 알고 있다. 그 자연스러운 잠적(潛跡)은 배울 만하다. 하지만 이튿날 아침에는 꽃잎에 현신(現身)하는 이슬 방울.
나의 시(詩).
나의 죽음.
하늘로 피어 오른다. 그 날개를 가진 현란한 비천(飛天). 그것은 헷세의 시(詩)에서 은빛 빛나는 구름으로 인생(人生)의 무상(無常)을 현현(顯現)하고 안개로 화(化)하여 서울 거리를 덮는다. 이 전신(轉身)과 윤회(輪廻)를 나는 알지만 또한 모르지만.
□ *
하지만 나도, 내가 노래할 시(詩)도 물이 된다. 오늘은 자기의 무게로 기어가는 물이지만 내일은 어린 것의 눈썹에 맺히고 목마른 자의 가슴 속을 지나 당신의 처마에 궂은 가을 빗줄기로 걸리는 기나긴 역정(歷程)과 순회(巡廻)에 나는 순리(順理)와 전신(轉身)을 깨달을 뿐이다.
譯捉돛Ç 가랑잎, 민중서관, 1968
뻐꾹새 박목월
뻐꾹새
잠이 오지 않는 밤이 잦다.
이른 새벽에 깨어 울곤 했다.
나이는 들수록
한(恨)은 짙고
새삼스러이 허무한 것이
또한 많다.
이런 새벽에는
차라리 기도가 서글프다.
먼 산마루의 한 그루 수목처럼
잠잠히 앉았을 뿐……
눈물이 기도처럼 흐른다.
뻐꾹새는
새벽부터 운다.
효자동(孝子洞) 종점 가까운 하숙집
창(窓)에는
창(窓)에 가득한 뻐꾹새 울음……
모든 것이 안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도
혹은 사람의 목숨도
아아 새벽 골짜기에 엷게 어린
청보랏빛 아른한 실오리
그것은 이내 하늘로 피어오른다.
그것은 이내 소멸한다.
이 안개에 어려
뻐꾹새는
운다.
난(蘭).기타(其他), 신구문화사, 1959
사력질 박목월
사력질(砂礫質)
□ Ⅰ. 하나
시멘트 바닥에
그것은 바싹 깨어졌다.
중심일수록 가루가 된 접시.
정결한 옥쇄(玉碎)(터지는 매화포(梅花砲))
받드는 것은
한 번은 가루가 된다.
외곽일수록 원형(原形)을 의지(意志)하는
그 싸늘한 질서.
파편은 저만치
하나.
냉엄한 절규.
모가 날카롭게 빛난다.
□ Ⅱ. 얼굴
어제는
눈시울을 적시며
마리린 몬로의 생애를
텔레비전에서 보았다.
허용되지 않는
그녀의
인간적인 몸부림.
죽음의 밤의 불빛 새는 방문 밑으로
기어간 배암.
절단된 세계의
꿈틀거리는 전화 코오드
는 늘어지고,
절벽에서 추락하는
한 여인의
산발(散髮)과 절규는 굳어진 채
오늘은
지구의 이편.
한국의 담벼락에 나붙은
인쇄된 얼굴.
웃는 채로
찢겨져 있었다.
□ Ⅲ. 틀
하나의 틀에 끼워진다.
액자 속의 얼굴,
수염도 자라지 않는다.
하나의 틀에 끼워진다.
뜨겁지 않는 불,
흔들리지 않는 꽃.
사각의 권위 속에
흰 눈자위의 샤머니즘.
하나의 틀에 끼워진다.
시(詩)는 죽고
존재가 탈색되고
죽음조차
틀에 끼워진다.
검은 리봉에 잠긴 채.
들판에 흩어진 뼈다귀만
퍼렇게 살아 있다.
□ Ⅳ. 시간
녹다 남은 눈.
소공동 공사장 구석이나
청파동 후미진 뒷골목이나
망우리 응달 그늘에
퍼렇게 살아 있는 한 줌의 눈.
돌아가는 시민들의
무거운 눈길에
고독한 응결, 한 덩이의 눈.
내일이면 사라진다.
사라질 때까지의
허락받은 시간을
어린것들의 부르짖음 같은 눈.
오늘을 더럽히지 말라.
□ Ⅴ. 봄
걸음을 멈추고 바람 속에서 시계소리를 듣는다.
세컨드* 세컨드 귀에 울리는, 시청 지붕이 부옇게 바람에 불리운다.
인사한 저 사람이 누구더라. 아지랑이가 피어 오르는, 의문 그것조차 흔들리는 바람 속에서
세컨드 세컨드 게으른 슬리퍼를 끌며, 분홍빛 자실상태(自失狀態) 속에 어리석어지는 생명의 한때를
오냐, 오냐, 종잡을 수 없는 대답을 바람 속에서 시계소리를 듣는다.
□ Ⅵ. 몬스테리아
그냥 헤어질 순 없지.
서로 오랜만인데
술이라도 한 잔 나누자는군.
그야 그렇지.
월평선(月平線)으로 떠오르는
지구의 이편 구석에서
아는 사람끼리 만나
그냥 헤어질 순 없지.
어느 술집으로 들어가면
혀가 갈라진
저것은
몬스테리아
□ Ⅶ. 맨발
경주에는
발이 가벼워야 한다.
골짜기로 달리는 물의 맨발.
어디서 어디로 달릴까.
그것은 나도 모른다.
그 맹목적 경주에서
환하게 눈을 뜨고
콸콸콸 가슴을 울리는
돌개울의 물소리.
무엇 때문에 달릴까.
그것은 나도 모른다.
까닭 없이 열중하는 경주에
속잎 뿜어오르는 가로수로
달리는
희고 신선한 맨발.
시간(時間)의 물보래.
□ Ⅷ. 수국색(水菊色)
그것이 나를
당황하게 한다.
거울 같은 오월의
사금(砂金)으로 빛나는 햇빛.
거울 같은 오월의
수국색(水菊色) 시간 속에서
수염을 깎는다.
무심하게 자라난 것을
깨끗하게 밀어버리면
거울 속에
멀끔한 얼굴.
그것이 나를
당황하게 한다.
□ Ⅸ. 회색의 새
한 번 돌아 누우면
고무신 뒤축 닳듯
모지러지는
인간관계를.
오늘은
낙원동 뒷골목의 통용문(通用門)처럼
무심한 우리 사이.
다만
지구의
저편 경사면으로 떠가는
달빛 샨데리아,
밤 구름의 그림자.
회색의 새.
□ Ⅹ. 오늘
바람이 불고 있다.
날리는 구름조각
하늘을 덮고
아이는 군(軍)으로 나갔다.
오늘
이
흔들리는 것은 무엇일까.
오는 것과 가는 것이
엇갈리며 부글거리는 물기슭.
밑바닥에서
끓어오르는 소용돌이,
가는 자는 가고
물결처럼 밀리는 군중 틈에서도
없는 자는 없다.
□ *
결국 지구도
하나의 돌덩이,
절대 공간의 점 하나.
그것을
샨데리아로 불 밝힌
구름이 에워싸고 있다.
소멸의 치마폭으로 싸 안은 구슬.
다만
오늘이
바람의 신을 신게 하고
바람의 회오리바람의 휘파람의
채찍이 울리는
지상에서
나는
진한 피 한 방울이 된다.
□ Ⅺ. 자갈빛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역(驛)의 자갈빛.
호옥 목월 선생 아니신가요.
그러세요. 그렇지 싶어 물어본 거예요.
진주로 강연 가시는 길이시지요.
라디오로 들었어요.
저요, 선생님 모르실 거예요.
스치는 겨를에 두어 마디 나누고
헤어진 그 사람과의 만남과 헤어짐,
금동리(金東里)의 다솔사(多率寺)의 다음 다음쯤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역(驛)의
구름 그림자와 황토와 자갈빛.
□ Ⅻ. 여행중
지난 이른 여름
나의 내면을 스치고
살픈 비늘진 금빛 구름.
순천으로 가는 새벽길.
그것은 지리산 모롱이에
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물며 구례 개울물에
잠겨 있는 것도 아니다.
나의 내면의
영원으로 휘어진 공간에
살픈 비늘진 불꽃 구름.
그것은 그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의
오늘의 있음.
그 현현(顯現)됨.
새벽빛에 불꽃으로 타는
살픈 비늘진 금빛 구름.
□ ⅩⅢ. 순색영원(純色永遠)
구두끈이 풀린다.
귀가 쩡 울리는 시월 상달에.
잡문 같은 행간(行間)에서
구두끈이 풀린다.
잡문 같을 수 없는
삶의 물길이
철철 샘솟는
하늘 아래서
어느 것은
구름이 되고
어느 것은
돌이 되는데
어떻게 살아도 충만할 수 없는
시월 상달의 순색영원(純色永遠) 속에서
구두끈이 풀린다.
어느 것은
비석이 된다,
돌 중에서.
어느 것은
돌이 된다,
비석 중에서.
* 세컨드(Second): 초시(秒時).
무순(無順), 삼중당, 1976
사투리 박목월
사투리
우리 고장에서는
오빠를
오라베라 했다.
그 무뚝뚝하고 왁살스런 악센트로
오오라베 부르면
나는
앞이 칵 막히도록 좋았다.
나는 머루처럼 투명한
밤하늘을 사랑했다.
그리고 오디가 샛까만
뽕나무를 사랑했다.
혹은 울타리 섶에 피는
이슬마꽃 같은 것을……
그런 것은
나무나 하늘이나 꽃이기보다
내 고장의 그 사투리라 싶었다.
참말로
경상도 사투리에는
약간 풀 냄새가 난다.
약간 이슬 냄새가 난다.
그리고 입 안이 마르는
황토 흙 타는 냄새가 난다.
난(蘭).기타(其他), 신구문화사, 1959
산․소묘 1 박목월
산(山)․소묘 1
한 자락은 햇빛에 빛났다. 다른 자락은 그늘에 묻힌 채…… 이 길씀한 산(山)자락에 은은한 웃음과 그윽한 눈물을 눈동자에 모으고 아아 당신은 영원한 모성.
그의 음양의 따뜻한 회임(懷姙) 안에 나는 눈을 뜨고 감았다. 다만 한 오리 안개가 그의 신비를 살픈 가리고 있었다. 어머니라는 말씀이 풀리지 않게 또한 굳지 않게.
□ *
선녀는 늘 승천했다. 우의(羽衣) 한 자락이 하얗게 빛났다. 또 한 자락은 어둠에 젖은 채…… 어둠에 젖은 채 선녀는 또한 늘 하강했다.
초록빛 깊은 하늘에는 은두레박 오르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난(蘭).기타(其他), 신구문화사, 1959
산․소묘 2 박목월
산(山)․소묘 2
갈기가 휘날렸다. 말발굽 아래 가로 눕는 이슬밭. 패랭이 꽃빛으로 돈다. 무지개가 감기고 풀리고 하얗게 끓는 질주. 태고의 아침을, 창조의 숨가쁜 시간을. 출렁거리는 생명. 마악 눈을 뜬, 더운 피가 금시에 돈, 그것의 질주. 달리는 그것으로 달리게 되고, 달리게 하는 그것으로 달리게 하는 말굽 아래 척척 가로눕는 구름. 새로 빚은 구름 엉키고 풀리고 휘휘 도는 무지개…… 달리는 것 옆에서 달리는 것이 목덜미를 물고, 출렁거리는 엉덩이, 불을 뿜는 입, 생명의 고동을. 비등을. 뿜는 숨결, 끓는 박자. 발굽의 말발굽의 날개를……
팍 앞무릎이 꼬꾸라진 채
영영
산(山)이 된.
산(山) 위에 은은한 천개(天蓋).
난(蘭).기타(其他), 신구문화사, 1959
산․소묘 3 박목월
산(山)․소묘 3
산(山)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바다에서 갓 솟은 어리고 애띤 산(山). 주름진 긴 치맛자락을 꽂아 쥐고, 이슬이 굵은 태초의 칠색(七色)이 영롱한 풀밭을. 그 깊은 고요를 밟고……
빨래 나온 아낙네가 산(山)이 걸어오시네, 그 한마디에 산(山)은 무안해서 엉거주춤 주저앉아 버렸다. 치맛자락을 고쳐 지를 겨를도 없이. 너무나 수줍은 이 창조의 신(神)의 이마를 한 자락의 안개가 가려주었다.
흘러내린 그 자락에 바람은 영원히 희롱했다. 아아 두 치만 감아 꽂았더면, 우리 마을은 아늑한 골짜길 것을, 그리고 어린 나는 별빛처럼 빛나는 바다로 눈길을 돌리지 않고, 아아(峨峨)한 산꼭지에 조용히 동경(憧憬)을 묻었을 것을.
난(蘭).기타(其他), 신구문화사, 1959
산․소묘 4 박목월
산(山)․소묘 4
어느 것은 웅크리고 앉아, 이마를 맞대고 수군거리듯, 어느 것은 힐끗이 돌아보고, 말쑥히 물러서고, 또한 어느 것은 어깨를 추스리고 서서 고개를 젖혀 하늘을 우러러 오불관(吾不關)의 태(態), 다만 어느 하나는 얌전히 동구(洞口) 앞에 이르러, 너붓이 절을 드리듯. 그것은 문안 온 외손자뻘.
□ *
나붓이 나들이 온 선녀련 듯 열두 폭 치맛자락을 사려 꽂았다. 다만 한 자락은 천연스럽게 바람에 맡기고…… 그 자락을 타고 사월달 긴긴 해를 두릅, 휘휘초, 취, 범벅궁이, 달래, 돌미나리, 산나물을 광우리마다 채운다.
난(蘭).기타(其他), 신구문화사, 1959
산그늘 박목월
산그늘
장독 뒤 울밑에
목단(牧丹)꽃 오무는 저녁답
모과목(木果木) 새순밭에
산그늘이 내려왔다
워어어임아 워어어임*
길 잃은 송아지
구름만 보며
초저녁 별만 보며
밟고 갔나베
무질레밭 약초(藥草)길
워어어임아 워어어임
휘휘휘 비탈길에
저녁놀 곱게 탄다
황토 먼 산길이사
피 먹은 허리띠
워어어임아 워어어임
젊음도 안타까움도
흐르는 꿈일다
애달픔처럼 애달픔처럼 아득히
상기 산그늘은 나려간다
워어어임아 워어어임
* 워어어임: 경상도 지방에서 멀리 송아지 부르는 소리
청록집, 을유문화사, 1946
산도화 1 박목월
산도화(山桃花) 1
산(山)은
구강산(九江山)
보랏빛 석산(石山)
산도화(山桃花)
두어 송이
송이 버는데
봄눈 녹아 흐르는
옥 같은
물에
사슴은
암사슴
발을 씻는다
산도화(山桃花), 영웅출판사, 1955
산도화 2 박목월
산도화(山桃花) 2
석산(石山)에는
보랏빛 은은한 기운이 돌고
조용한
진종일
그런 날에
산도화(山桃花)
산마을에
물 소리
지저귀는 새 소리 묏새 소리
산록을 내려가면 잦아지는데
삼월을 건너가는
햇살 아씨.
산도화(山桃花), 영웅출판사, 1955
산도화 3 박목월
산도화(山桃花) 3
청석(靑石)에 어리는
찬물 소리
반은 눈이 녹은
산마을의 새 소리
청전(靑田)* 산수도에
삼월 한나절
산도화(山桃花)
두어 송이
늠름한
품(品)을
산이 환하게
틔어 뵈는데
한머리 아롱진
운시(韻詩) 한 구(句).
* 청전(靑田): 동양화가 이상범(李象範) 선생의 호(號).
산도화(山桃花), 영웅출판사, 1955
산색 박목월
산색(山色)
산빛은
제대로 풀리고
꾀꼬리 목청은
티어 오는데
달빛에 목선(木船) 가듯
조는 보살(菩薩)
꽃그늘 환한 물
조는 보살(菩薩)
산도화(山桃花), 영웅출판사, 1955
산이 날 에워싸고 박목월
산이 날 에워싸고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며 살아라 한다
밭이나 갈며 살아라 한다
어느 짧은 산(山)자락에 집을 모아
아들 낳고 딸을 낳고
흙담 안팎에 호박 심고
들찔레처럼 살아라 한다
쑥대밭처럼 살아라 한다
산이 날 에워싸고
그믐달처럼 사위어지는 목숨
그믐달처럼 살아라 한다
그믐달처럼 살아라 한다
청록집, 을유문화사, 1946
삼월 박목월
삼월
방초봉(芳草峰) 한나절
고운 암노루
아랫마을 골짝에
홀로 와서
흐르는 냇물에
목을 축이고
흐르는 구름에
눈을 씻고
하얗게 떠 가는
달을 보네
청록집, 을유문화사, 1946
생토 박목월
생토(生土)
울산 접경(蔚山接境)에서도 영일(迎日)에서도
그들을 만났다.
마른 논바닥 같은 얼굴들.
봉화(奉化)에서도 춘양(春陽)에서도
그들을 만났다.
억만 년(億萬年)을 산 듯한 얼굴들.
인삼(人蔘)이 명물(名物)인 풍기(豊基)에서도
그들을 만났다.
척척한 금이 간 얼굴들.
다만 문경(聞慶) 새재를 넘는 길목에서
히죽이 웃는 그 얼굴은
시뻘건 생토(生土) 같았다.
譯捉돛Ç 가랑잎, 민중서관, 1968
서가 박목월
서가(書架)&
친구들이 서가(書架)에 나란하다.
외로운 서재(書齋)
등불 앞에서
나와 속삭이려고 이런 밤을 기다렸나 보다.
반쯤 비에 젖은
그들의 영혼(靈魂)……
나도 외롭다.
한 권을 뽑아들면
커피점(店)에서 만난 그분과는
사뭇 다른
다정(多情)한 눈짓.
외로울 때는 누구나 정(情)다워지나 보다.
따뜻한 영혼의 미소(微笑).
때로 말씨가 서투른 구절(句節)도 있군.
그것이야 대수롭지 않은 겉치레
벗기고 보면
아아 놀라운 그 분의 하늘
―가만히
나는 책을 덮는다. (얘기에
싫증이 나서가 아닐세)
돌아 앉아
그 분의 말을 생각해 보려고 그래.
과연 인생은 이처럼 서러운가, 하고.
때로는 긴 밤을 생각에 잠겨 밝히면
새벽 찬 기운에
서가(書架)는 아아(峨峨)한 산맥(山脈).
친구는 없고……
골짜기에 만년설(萬年雪) 눈부신 빙하(氷河).
난(蘭).기타(其他), 신구문화사, 1959
소묘 A 박목월
소묘 A
비닐 우산을 받쳐들고
사람들은
일자리로 나가고 있었다.
생활을 근심하며
인사를 하며.
우산 속
모든 얼굴은 젖어 있었다.
그들의 눈에
우산이 보일까.
보이지 않는
호젓한 심령의 둘레.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들이 사는 동안
끊임없이 내리게 될
이슬비.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비닐 우산을
하나씩 받쳐들고
지하로(地下路)로 향하고 있다.
세종로에서.
지상에서.
무순(無順), 삼중당, 1976
소묘 B 박목월
소묘 B
200여 킬로를 달려도
빈 가지뿐이었다.
서울에서 청주까지 청주에서 수안보까지
새 한 마리 볼 수 없었다.
언제부터일까.
조국의 자연은 이처럼 허하고
어린 날의
그 귀여운 것들은
어디로 가 버렸을까.
썰렁한 멧부리를 돌면
눈이 박힌 골짜기에 눈발이 치고
빈 손을 치켜든 나무
혹은
금이 간 백밀러에 클로즈업되는
어린 여차장의 갈라진 얼굴.
참으로 새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들은 책상보자기나
커틴 자락에
은실로 수놓아 장식되었을 뿐.
망각의 여울가에
지저귀는 귀여운 입부리
혹은
금이 간 백밀러에 일그러진 채 축소된
어린 여차장의 발갛게 언 얼굴.
무순(無順), 삼중당, 1976
소찬 박목월
소찬(素饌)
오늘 나의 밥상에는
냉이국 한 그릇.
풋나물 무침에
신태(新苔).
미나리 김치.
투박한 보시기에 끓는 장 찌개.
실보다 가는 목숨이 타고난 복록(福祿)을.
가난한 자의 성찬(盛饌)을.
묵도(黙禱)를 드리고
젓가락을 잡으니
혀에 그득한
자연의 쓰고도 향깃한 것이여.
경건한 봄의 말씀의 맛이여.
난(蘭).기타(其他), 신구문화사, 1959
순지 박목월
순지(純紙)
순지(純紙) 같은 사람을 생각한다.
구수하게 푸짐한 인간성(人間性).
그런 사람이 쉽사리
있을 것 같지 않지만
어리숙한 나무를 생각한다.
나무는 다 어리숙하지만
하다못해 넉넉한 신발을 생각한다.
발이 죄이지 않는
편안한 신발도 쉽지 않지만
큼직한 그릇을 생각한다.
아무렇게나 주물러
소박하게 구어낸
그런 그릇은 쓸모 없지만
순지(純紙)를 생각한다.
순지(純紙)로
안을 바른
은근하게 내명(內明)한
사람을 생각한다.
그런 사람이 쉽지 않지만
말 오줌 냄새 찌릿한
투박하고 푸짐한
한국(韓國)의 순지(純紙).
譯捉돛Ç 가랑잎, 민중서관, 1968
시 박목월
시(詩)&
나는
흔들리는 저울대(臺).
시(詩)는
그것을 고누려는 추(錘).
겨우 균형(均衡)이 잡히는 위치(位置)에
한 가락의 미소(微笑).
한 줌의 위안(慰安).
한 줄기의 운율(韻律).
이내 무너진다.
하늘 끝과 끝을 일렁대는 해와 달.
아득한 진폭(振幅).
생활(生活)이라는 그것.
난(蘭).기타(其他), 신구문화사, 1959
아가 박목월
아가(雅歌)&
나는 당신을 잉태했습니다.
나직한 푸른 핏줄……
성모 마리아가 인자(人子)를 잉태하듯
내가 마리아를 잉태했습니다.
그의 조용한 음성
그의 가는 목
그리고 설핏한 구름의 눈매
도란도란 귀에 익은 말씨의
그 서러운 이슬 하늘.
□ *
도화(桃花)가 만발했습니다.
그 충만한 가지
당신을 향한
내 모습을 보십시오.
오롯한 누리에 하얀 대낮에
피어오른 환한 촛불 암꽃술
저윽히 꽃잎 하나 이우는데
비로소 마음 한 모 기도로 풀리는데
□ *
무성한 당신의 모발
그 풍족한 여유
청결한 당신의 피부
그 청아한 유혹
바람에 불꽃이 깃드는
동굴은 툭 틔어서
크낙한 말씀을
나는 잉태했습니다.
난(蘭).기타(其他), 신구문화사, 1959
야반음 박목월
야반음(夜半吟)
소나기가 비롯하는 야반(夜半)의
깊은 침묵을
홀연히 두두둑
파초(芭蕉) 잎새.
두발은 희끗이
서리가 덮히고
비로소
한밤에 잠도 깨이고.
저
자욱하게 아득한 것을
마음은
화운(和韻)하고.
멀고 가까운 것을
새삼스러이 헤아리노니
침상(枕上)에는
오롯하게 조으는 불빛.
이 밤을
밤만큼 넓은 잎새를 펼치고
파초(芭蕉)는 차라리
외롭지 않다.
난(蘭).기타(其他), 신구문화사, 1959
여운 박목월
여운(餘韻)
산(山)은 산(山)인 양 의연하고
강(江)은 흘러 끝이 없다
댓잎에 별빛 초가삼간
이슬 젖은 돌다리 모과수(木果樹) 그늘
하늘 밖 달빛에 바람은 자고
댓잎에 그윽한 바람소리
산도화(山桃花), 영웅출판사, 1955
영탄조 박목월
영탄조(詠嘆調)
나이 오십(五十) 가까우면
기운 내의는 안 입어야지.
그것이 쉬울세 말이지.
성한 것은
자식들 주고
기운 것만 내 차례구나.
겉만 멀끔 차리고 나니,
눈가림만 하자는 것이네.
설사 남이야 알 리 없지만
내가 나를 못 속이는걸.
내가 나를 못 속이는걸.
뭘, 그러세요. 기운 것이나마
따스면 됐지. 아내의 말일세.
얼마나, 사람이 억만 년 살면
등만 따스면
살 것인가.
지금은 엄동.
눈이 얼어, 빙판이구나.
등만 따스면
그만이라, 겉치레도 벗어버릴까.
안팎이 여일(如一)하고
표리없이 살자는데
어라, 바로
너로구나.
누더기 걸친 우리 내외
보고 빙긋 마주 빙긋
겨울 삼동을 지내는구나.
청담(晴曇), 일조각, 1964
오른편 박목월
오른편
궁핍하고 어려울 때마다
오른편을 살펴본다.
주께서 일러주신
말씀의 방향을.
괴롭고 답답할 때마다
오른편을 살펴본다.
주께서 일러주신
믿음의 방향을.
진실로
믿는 자에게는
오른편이 있다.
신앙의 그물만 던지면
미어지게 고기를 잡을 수 있다.
설사 그것이
비린내가 풍기는
현실의 고기가 아닐지라도
굶주린 영을
충만하게 채울 수 있는
비늘이 싱싱하게 빛나는
말씀의 생선.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는 자만이
믿음과 신뢰의
그물을 던지는 자만이
말씀 안에
그물을 던지는 자만이
위로와 축복으로 가득한
때로는 베드로처럼
펄펄 살아 있는 고기를
그물이 미어지게
건져 올릴 수 있다.
크고 부드러운 손, 영산출판사, 1979
왕십리 박목월
왕십리
내일 모레가 육십인데
나는 너무 무겁다.
나는 너무 느리다.
나는 외도(外道)가 지나쳤다.
가도
가도
바람이 입을 막는 왕십리.
譯捉돛Ç 가랑잎, 민중서관, 1968
용인행 박목월
용인행(龍人行)
목사님의 소개로
용인엘 갔었다. 내외가
고속버스를 타고.
평당 3,000원이면 싼값이지요.
산기슭에서 소개업자가 말했다.
나는 양지바른 터전을
눈으로 더듬고,
서녘 하늘 같은 눈으로
아내는 나를 쳐다보았다.
뫼뿌리가 어두워 들자,
먼 마을에 등불 하나 둘 켜지고
그럴수록 황량해 보이는 산하.
여보, 그만 가요.
울먹이는 아내의 목소리가
가슴에 젖어들었다.
돌아오는 길에도
고속버스를 탔다.
무덤 속으로 달리는 차창에
비치는 내외의 모습.
바람과 모래의 손이
마음을 쓰담아주었다.
우리에게 이미 토지는
이승의 것이 아니었다.
가즈런한 한 쌍의 묘와
한 덩이의 돌이 떠오르는
흘러가는 차창의 스크린에
울부짖는 것은
바람소리도 짐승소리도 아니었다.
무순(無順), 삼중당, 1976
우슬초 박목월
우슬초
우슬초가 무슨 풀일까
나는 모르지만
퍼렇게 돋아나는
기름진 잎새
우슬초가 무슨 풀일까
나는 모르지만
안다는 것의
그 허황한 오만.
주여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옵소서.
정한 마음을
당신이 창조해 주심으로
나는
새롭게 눈을 뜨고
내 안에 돋아나는
기름진 잎새.
진실로
우슬초가 무슨 풀일까.
모름으로 더듬는
나의
믿음의 촉각에
살아나는 풀.
안다는 것의
그 새까만 장님의 세계에서
주여
당신이 마련해 주신
오늘의 광명
어린 아기의 마음으로
쌓아 올리는 예루살렘 성
믿음의 주춧돌에
돋아나는 우슬초.
크고 부드러운 손, 영산출판사, 1979
운복령 박목월
운복령(雲伏嶺)
심산(深山) 고사리, 바람에 도르르 말리는 꽃고사리.
고사리 순에사 산짐승 내음새, 암수컷 다소곳이 밤을 새운 꽃고사리.
도롯이 숨이 죽은 고사리밭에, 바람에 말리는 구름길 팔십리(八十里).
산도화(山桃花), 영웅출판사, 1955
윤사월 박목월
윤사월(閏四月)
송화(松花)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이고
엿듣고 있다
청록집, 을유문화사, 1946
은행동 박목월
은행동(銀杏洞)
아,
나는 지도를, 지도 위의
은행동(銀杏洞)을
더듬어간다.
옛날의
번지를.
그 집 주인을.
다, 친숙하고 어질고, 따뜻한 분들을.
문등(門燈)이 환한 그 집 밤을
착각처럼
확실한 은행동(銀杏洞)을.
이슬비는
온다. 자옥한 달빛처럼
다음 네거리는
그 집 골목.
여기였는데
여기는 잿더미
은행동(銀杏洞)은 하얀
재가 되었다.
보얗게 삭은 옛날의
번지를
그 집 주인을.
이슬비는
온다. 달빛처럼
망각의 은은한 베일을 짜며
저기였을까.
저기는 잿더미.
예배당 자리만
까맣게 삭고,
다만 벽이 한 폭(幅)
올연히 남았다.
은행동(銀杏洞)을
간다. 불이 환한 은행동(銀杏洞).
그것은 옛날의
골목인 것을.
발자국이 남는다.
잿더미 위에.
망각에서 살아오는 나의 발자국을
아무런 감동도
느낀 바 없음.
난(蘭).기타(其他), 신구문화사, 1959
이별가 박목월
이별가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뭐락카노, 바람에 불려서
이승 아니믄 저승으로 떠나는 뱃머리에서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뭐락카노 뭐락카노
썩어서 동아밧줄은 삭아 내리는데
하직을 말자 하직 말자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뭐락카노 뭐락카노
니 흰 옷자라기만 펄럭거리고……
오냐. 오냐. 오냐.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음성은 바람에 불려서
오냐. 오냐. 오냐.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譯捉돛Ç 가랑잎, 민중서관, 1968
일박 박목월
일박(一泊)
□ 1
어린것들 옆에
잠자리를 펴고
나는 하룻밤을 지낸다.
어린것들 옆에
나의 하룻밤의
서글프고 허전한 꿈.
얼마나 지속될 것인가
그것은 허황한 위구심(危懼心).
다만 지금은
어린것들 옆에
잠자리를 펴고
이부자리 자락으로
귀를 덮는다.
□ 2
내일은
내일. 내일의 아침은
신(神)의 영역.
봉(封)해진 세계.
내일 근심은
내일의 근심. 오늘은 오늘로서 족한.
다만 지금은
어린것들 옆에
잠자리를 펴고. 찬란한 성진(星辰)의
허허로운 공간에.
어린것들 옆에 바람과 구름의
허허로운 공간에.
다만 지금은
어린것들 옆에. 흐르는 강물……
귀를 잠그고.
어린것들 옆에
잠자리를 펴고. 찌걱거리는 뗏목 위에
다만 지금은
찌걱거리는 뗏목 위에
잠자리를 펴고
이부자리 자락으로
귀를 덮는다.
청담(晴曇), 일조각, 1964
임 박목월
임&
내사 애달픈 꿈꾸는 사람
내사 어리석은 꿈꾸는 사람
밤마다 홀로
눈물로 가는 바위가 있기로
기인 한밤을
눈물로 가는 바위가 있기로
어느 날에사
어둡고 아득한 바위에
절로 임과 하늘이 비치리오
청록집, 을유문화사, 1946
임에게 박목월
임에게
안타까운
마음은
은은히 흔들리는
강 나룻배
누구를 사모하는
까닭도 없이
문득 흔들리는
강 나룻배
산도화(山桃花), 영웅출판사, 1955
자수정 환상 박목월
자수정(紫水晶) 환상
돌 안에 바다가 있다.
라고 말하지 않는다.
혹은
자줏빛 치맛자락이
나부낀다.
라고 말하지 않는다.
눈을 감은 것은 감고
뜬 자는 뜨고 있다.
돌 안에 구름이 핀다.
라고 말하지 않는다.
혹은
원시의 불길이 타고 있다.
라고 말하지 않는다.
치렁치렁한
성좌 아래서
땅 끝으로 사라져 가는 새떼
해면(海面)에 흩어지는 울음소리
눈을 감는 자는 감고
뜨는 자는 뜨면
돌조차 투명해지는
돌 안에 바다가 넘실거린다.
라고 말하지 않는다.
원시의 불길이
활활 타오른다.
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운거리는 자줏빛 치맛자락이
영원에서 살아난다.
라고 말하지 않는다.
무순(無順), 삼중당, 1976
적막한 식욕 박목월
적막한 식욕
모밀묵이 먹고 싶다.
그 싱겁고 구수하고
못나고도 소박하게 점잖은
촌 잔칫날 팔모상(床)에 올라
새사돈을 대접하는 것.
그것은 저문 봄날 해질 무렵에
허전한 마음이
마음을 달래는
쓸쓸한 식욕이 꿈꾸는 음식.
또한 인생의 참뜻을 짐작한 자의
너그럽고 넉넉한
눈물이 갈구하는 쓸쓸한 식성(食性).
아버지와 아들이 겸상을 하고
손과 주인이 겸상을 하고
산나물을
곁들여 놓고
어수룩한 산기슭의 허술한 물방아처럼
슬금슬금 세상 얘기를 하며
먹는 음식.
그리고 마디가 굵은 사투리로
은은하게 서로 사랑하며 어여삐 여기며
그렇게 이웃끼리
이 세상을 건너고
저승을 갈 때,
보이소 아는 양반 앙인기요
보이소 웃마을 이생원 앙인기요
서로 불러 길을 가며 쉬며 그 마지막 주막에서
걸걸한 막걸리 잔을 나눌 때
절로 젓가락이 가는
쓸쓸한 음식.
난(蘭).기타(其他), 신구문화사, 1959
중심부에서 박목월
중심부에서
호텔의 오전은
호밀밭처럼 조용했다.
간간이 문이 닫히고
또한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먼 복도 끝에서.
나의
노우트의 흰 스페이스는
눈부시게 정결했다.
그
중심부에서
쩔렁쩔렁 울리는
지팡이 소리가 들렸다.
순은(純銀)의 고리를 단,
세례 요한의, 사도 바울의.
성애가 녹아내리는
유리창 밖으로 세상은
고기비늘처럼 찬란했다.
눈에 덮힌 기왓골에서
만세를 부르는
묵시록(黙示錄)의 아침 햇빛.
무순(無順), 삼중당, 1976
청노루 박목월
청(靑)노루
머언 산 청운사(靑雲寺)
낡은 기와집
산(山)은 자하산(紫霞山)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가는 열두 구비를
청(靑)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청록집, 을유문화사, 1946
춘분 박목월
춘분(春分)&
자하문
동대문
문(門) 밖으로 나가는 길에
달아오르는 해.
앞산머리의 부끄러운 이마.
오오냐.
자하문
동대문
문 안으로 들어오는 길에
기우는 햇발.
앞산머리의 어두운 이마.
오오냐 오냐.
譯捉돛Ç 가랑잎, 민중서관, 1968
층층계 박목월
층층계
적산가옥(敵産家屋) 구석에 짤막한 층층계……
그 이층(二層)에서
나는 밤이 깊도록 글을 쓴다.
써도 써도 가랑잎처럼 쌓이는
공허감(空虛感).
이것은 내일(來日)이면
지폐(紙幣)가 된다.
어느 것은 어린것의 공납금(公納金).
어느 것은 가난한 시량대(柴糧代).
어느 것은 늘 가벼운 나의 용전(用錢).
밤 한 시, 혹은
두 시. 용변(用便)을 하려고
아랫층으로 내려가면
아랫층은 단칸방(單間房).
온 가족(家族)은 잠이 깊다.
서글픈 것의
저 무심(無心)한 평안(平安)함.
아아 나는 다시
층층계를 밟고
이층(二層)으로 올라간다.
(사닥다리를 밟고 원고지(原稿紙) 위에서
곡예사(曲藝師)들은 지쳐 내려오는데……)
나는 날마다
생활(生活)의 막다른 골목 끝에 놓인
이 짤막한 층층계를 올라와서
샛까만 유리창에
수척한 얼굴을 만난다.
그것은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아버지라는 것이다.
□ *
나의 어린것들은
왜(倭)놈들이 남기고 간 다다미 방에서
날무처럼 포름쪽쪽 얼어 있구나.
난(蘭).기타(其他), 신구문화사, 1959
침상 박목월
침상(枕上)
그를 두고 옛날에는
시(詩)를 써 보려고 무척 애를 썼다.
머리맡에 조는 한밤의 램프여.
당시에 나는
그를 외로운 신부(新婦)라고 생각했다.
쓸쓸한 나의 자는 얼굴을
지켜주며 밤을 새우는.
그러나
이제 나는 단념했다.
나의 자는 얼굴을 지켜 줄
측은하게 어진 신부가
이 세상에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의 고독은 그의 것.
나는 외로운 얼굴을 하고
자다 깨다 혼자서
지낼 만큼 지내다 가는 것이다.
나의 베갯머리의 허전한 자리는
태어나는 그날부터 나의 것.
램프여,
누구로 말미암은 것은 아니다.
청담(晴曇), 일조각, 1964
크고 부드러운 손 박목월
크고 부드러운 손
크고 부드러운 손이
내게로 뻗쳐온다.
다섯 손가락을
활짝 펴고
거득한 바다가
내게로 밀려온다.
인간의 종말이
이처럼 충만한 것임을
나는 미처 몰랐다.
허무의 저편에서
살아나는 팔.
치렁치렁한
성좌가 빛난다.
멀끔한
목 언저리쯤
가슴 언저리쯤
손가락 마디 마디마다
그것은 보석
그것은
눈짓의 신호
그것은 부활의 조짐
하얗게 삭은
뼈들이 살아나서
바람과 빛 속에서
풀잎처럼 수런거린다.
다섯 손가락마다
하얗게 떼를 지어서
맴도는 새.
날개와 울음.
치렁치렁한
성좌의
둘레 안에서.
크고 부드러운 손, 영산출판사, 1979
폐원 박목월
폐원(廢園)
그는
앉아서
그의 그림자가 앉아서
내가
피리를 부는데
실은 그의
흐느끼는 비오롱 솔로
눈이
오는데
옛날의 나직한 종이 우는데
아아
여기는
명동(明洞)
사원(寺院) 가까이
하얀
돌층계에 앉아서
추억의 조용한 그네 위에 앉아서
눈이 오는데
눈 속에
돌 층계가
잠드는데
눈이 오는데
눈 속에
여윈 장미 가난한 가지가
속삭이는데
옛날에
하고
내가 웃는데
하얀 길 위에 내가 우는데
옛날에
하고
그가 웃는데
서늘한 눈매가 이우는데
눈 위에
발자국이 곱게 남는다
망각의 먼
지평선이 저문다.
난蘭).기타(其他), 신구문화사, 1959
푸성귀 박목월
푸성귀
수질(水質) 좋은 경상도에,
연한 푸성귀
나와
나의 형제와
마디 고운 수너리반죽(斑竹).
사람 사는 세상에
완전낙토(完全樂土)야 있으랴마는
목기(木器) 같은 사투리에
푸짐한 시루떡.
처녀얘.
처녀얘.
통하는 처녀얘.
니 마음의 잔물결과
햇살싸라기.
譯捉돛Ç 가랑잎, 민중서관, 1968
피지 박목월
피지(皮紙)
낸들 아나.
목숨이 뭔지
이랑 짧은 돌밭머리
모진 뽕나무
아베요
어매요
받들어 모시고
피지(皮紙) 같은 얼굴들이
히죽히죽 웃는
경상남북도 가로질러
물을 모아 흐르는 낙동강.
譯捉돛Ç 가랑잎, 민중서관, 1968
하관 박목월
하관(下棺)
관(棺)을 내렸다.
깊은 가슴 안에 밧줄로 달아 내리듯
주여
용납하옵소서
머리맡에 성경을 얹어주고
나는 옷자락에 흙을 받아
좌르르 하직했다.
□ *
그 후로
그를 꿈에서 만났다.
턱이 긴 얼굴이 나를 알아보고
형(兄)님!
불렀다.
오오냐 나는 전신으로 대답했다.
그래도 그는 못 들었으리라
이제
네 음성을
나만 듣는 여기는 눈과 비가 오는 세상.
□ *
너는 어디로 갔느냐
그 어질고 안쓰럽고 다정한 눈짓을 하고
형님!
부르는 목소리는 들리는데
내 목소리는 미치지 못하는
다만 여기는
열매가 떨어지면
툭하고 소리가 들리는 세상.
난(蘭).기타(其他), 신구문화사, 1959
회귀심 박목월
회귀심(回歸心)
어딜 가나,
나는 원효로행(元曉路行) 버스를 기다린다.
어디서나 나는
원효로행(元曉路行) 버스를 타고
돌아온다.
릴케의 시구(詩句)를 빌리면,
깊은 밤
별이 찬란하게 빛나는 누리 안에서
고독한 공간(空間)으로
혼자 떨어져 가는
그 땅덩이에서
나는
호구책(糊口策)을 마련하기 위하여
하루 종일 거리를 서성거렸고
때로는
사람을 방문(訪問)하고
외로운 친구와 더불어
잔(盞)을 나누고
밤이 되면
어디서나 나는
원효로행(元曉路行) 버스를 기다린다.
이 갸륵하고 측은한 회귀심(回歸心).
원효로(元曉路)에는
종점(終點) 가까이
가족(家族)이 있다.
서로 등을 붙이고
하룻밤을 지내는 측은한 화목(和睦)들.
어둑한 버스 안에서
나는 늘 마음이 가라앉았다.
릴케의 시구(詩句)를 빌리면,
이처럼 떨어지는 모든 것을
소중하게 받아 주시는
끝없이 부드러운 그 손을
내가 느끼기 때문이다.
청담(晴曇), 일조각, 1964
회전 박목월
회전
자갈돌은 제자리에서
얼어붙고, 지구는
돌면서 밤이 된다.
검은 말을 몰고
달리는 것은 바람.
흰 말을 몰고
달리는 것은 하늘의 말몰이꾼.
그
방향에서
마른 번개는 치고
푸른 서치라이트에
떠오르는 것은 북극곰.
끓어오르는 바다의
빙산 위에서. 꺼져가는 것은
울부짖는 북극곰.
지구는 돌면서 밤이 되고
가볍게 뿌려진 것은
하늘의 은모래…….
큰곰자리의 성운.
자갈돌은 제자리에서
얼어붙고, 지구는
돌면서 밤이 된다.
무순(無順), 삼중당, 1976
효자동 박목월
효자동(孝子洞)
숨어서 한 철을 효자동(孝子洞)에서
살았다. 종점 근처(終點近處)의 쓸쓸한
하숙(下宿)집.
이른 아침에 일어나
꾀꼬리 울음을 듣기도 하고
간혹 성경(聖經)을 읽기도 했다.
마태복음(福音) 오장(五章)을, 고린도전서(前書) 십 삼장(十三章)을.
인왕산(人旺山)은 해 질 무렵이 좋았다.
보랏빛 산외(山巍) 어둠이 갈앉고
램프에 불을 켜면
등피(燈皮)에 흐릿한 무리가 잡혔다.
마음이 가난한 자(者)는 복(福)이 있나니 ……아아 그 말씀. 그 위로(慰勞). 그런 밤일수록 눈물은 베개를 적시고, 한밤중에 줄기찬 비가 왔다.
이제 두 번 생각하지 않으리라.
효자동(孝子洞)을 밤비를 그 기도(祈禱)를
아아 강물 같은 그 많은 눈물이 마른 하상(河床)에
달빛이 어리고
서글픈 평안(平安)이
끝없다.
난(蘭).기타(其他), 신구문화사, 19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