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의 신학
성서·전통·이성
최근 방영한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에서는 동성애가 새삼 화제로 등장한다.
소수자의 인권 혹은 편견에 대한 도전으로 다루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 내에서는 여전히 논쟁적인 주제이다.
2003년 미국 성공회 뉴햄프셔 교구는 동성애자 진 로빈슨 사제를 주교를 임명했고, 2009년 미국 성공회 로스앤젤레스(LA) 교구가 여성 동성애자 사제인 메리 글래스풀을 부주교에 선출했다.
일련의 사건들로 성공회 공동체는 분열의 아픔을 경험했고, 타교파는 물론 타종교와의 관계에서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문제를 두고, 어떻게 권위 있는 방식으로 식별할 수 있을까?
성서로? 전통에서? 이성의 논리로?
여기서 성서, 전통, 이성, 경험은 신학의 중요한 재료이면서 동시에 신학적 판단의 근간을 이룬다.
다시 말해 이 세 가지는 종교적 판단과 진리 판별의 권위 문제와 직결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 세 가지 기준을 이미 자기 판단의 근거로 사용하고 있다.
‘동성애자의 교회 수용’ 문제는 모든 교회가 생각해 봐야 할 문제라는 전제하에, 하나씩 생각해 보자.
첫째로, 동성애 문제를 성서에 비추어 논의하면 어떻게 될까?
성서의 내용을 전부 진리라고 가정하면, 이 문제는 간단히 끝난다.
성서는 너무도 분명하게 동성애를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레위기 18:22, 로마서 1:27)
그러나 성서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계속 해석되어 왔고 앞으로도 해석되어야 하는 점을 생각해 보면, 성서 적용의 해석학적 문제가 여전히 남는다.
예컨대 성서에 “나는 여자가 남을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침묵을 지켜야 합니다.”(디모데 전서 2:1~12)라는 말이 있지만, 오늘날 이렇게 하는 교회는 없을 것이다.
당대의 시대적 한계를 반영한 말로 오늘날에는 그대로 할 수 없다고 이미 ‘해석’하여 ‘적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동성애 문제를 전통의 시각에서만 판별하면 어떻게 될까? 전통은 “전해져 내려오는 어떤 것”이자,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달되는 능동적인 성찰의 과정”(맥 그레이스)이다.
전통은 주로 성서를 해석하는 방법, 믿음의 내용, 의식, 제도, 풍습과 관련된다. 전통은 고정된 박제가 아니라 새롭게 해석되고 새로운 의미가 추가되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전통은 명사적이지 않고 오히려 동사적이다.
전통은 오래된 문제에 대해서는 지혜를 주지만 동성애처럼 새롭게 쟁점이 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즉각적인 답을 주지 못한다.
어쩌면 새로운 문제가 나중에는 새로운 전통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지동설의 시대에 천동설이 그랬던 것처럼.
셋째로, 동성애 문제를 이성의 시각에서 살펴보면 어떻게 될까? 일반적으로 이성이란 경험을 총화하는 인간의 정신 능력을 말한다.
그런데 이른바 ‘해석학적 선이해’가 알려주는 바에 따르면, 인간은 경험하지 않은 사건에 대해서도 미리 일정한 판단을 한다.
또한 이 ‘선이해’는 이해 당사자가 속한 공동체의 문화가 총체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그의 상황에 따라 다르다.
미국인들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는 신체적 특징을 지적하면 불쾌하게 생각한다.
예컨대 작은 키와 대머리 같은 특징을 갖고 놀리는 것은 금기라는 말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성적 지향의 문제도 그런 종류의 범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성적 지향이 동성이라고 해서 무조건 비도덕이라고 윤리적 잣대로 평가하지 않는다.
동성애자를 교회로 받아들이는 문제는, 교회가 권위를 유지하면서도 분열하지 않는 방식으로 해결해야 하는 다중적 성격이 내포되어 있다.
문제의 성격이 복잡하기 때문에, 그 답도 간단히 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교회는 어떤 새로운 난제에 대해서 성서와 전통과 이성이라는 세 가지 권위를 적절히 활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한 가지 권위에만 의지하면 논리적으로는 모순되고 현실적으로는 분열된다.
세 가지 권위의 원천 사이에서, 포기하지 않는 대화를 통해, 각 나라와 문화권이 수용할 수 있는 답을 찾아야 한다.
전 지구적으로 통용되는 단일한 해답을 추구해야 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민감한 사안일수록 유의해야 할 점은 권위주의에 기대어 질문과 토론을 종식시키려는 유혹이다.
하지만 모든 질문과 토론을 허용할 때,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요한 8:32) 할 것이고, 교회의 권위도 유지되리라 생각한다.
이한오 신부 (프란시스, 춘천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