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위서예(현대서예)
전위서가 문제이다. 어느 것을 효시로 볼 것인가. 확고한 철학을 갖지 못하고 급히 달려 왔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버린 전위서 작품들. 일본의 전위서는 일본 외의 주변 국가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으나, 그 역시 예술 철학의 빈곤으로 인하여 크게 환영 받지 못했고, 새로운 붐을 조성하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서예정신이 기둥이 된 가운데 다른 방법이 가지처럼 접목이 되어야 하는데 대부분의 경우 그 접목의 방법이 전도된 느낌을 주고 있다. 서예의 주된 정신이 가지처럼 되어 있고 회화적 방법이 기둥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은 화가가 그린 서예처럼 힘을 싣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눈에 보아도 서예가가 아니면 도저히 표현해낼 수 없는 필묵이 중심이 되어야 하고, 서예 외적 요소가 그 다음 부속 조건으로 결합이 되어야만 한다. 서예적 생명 요소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서, 특히 동양의 시각예술에서는 이 기둥이 먼저 세워져야만 한다. 선의 예술을 줄기차게 지향해 온 동양미학에서 이것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허사이다. 서양의 다양한 미술적 기법을 뛰어넘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동양의 원통형 모필에서 마음대로 구사될 수 있는 필묵의 장점과 생명을 활용하는 길이다.
전위서예의 조건은:
첫째, 과감한 서예적 실험정신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반드시 서예적 정신이 뿌리 내린 서예적 실험정신이어야 한다.
둘째, 서예적 문학성에서 진일보하거나 탈피되어야 한다.
셋째, 문자의 약속성에 대한 과감한 해석력을 지녀야 한다.
넷째, 서예적 필묵정신의 확고한 의지가 자리 잡아야 한다.
그래서 필묵의 장점과 생명을 십분 활용한 작품이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구성법에서 획기적 착안이나 방법이 제시되어야 한다. 이러한 조건을 갖추면서 문자이되 통상적이 아닌 문자 외적 요건이 함께 작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조건들이 검증되어야 전위서로서의 자격 요건을 갖춘 셈이 된다.
『동아시아 문화와 사상』 「한·일 서예의 정체성 비교연구」, 김태정, 열화당, 2001.
요즘 유행하는 현대서예나 또는 calligraphy(캘리그래픽)이란 이름으로 새로운 서예술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작업하는 사람들이 꾀나 늘고 있는 추세에 있습니다. 그러나 예술의 다양성에서는 바람직한 일이나 그 예술의 본질을 벗어난다면 한갓 붓장난에 불과할 뿐이고, 재창조 한다는 예술도 전통을 벗어날 수 없으며 전통의 숨결이 전해질 때에야 비로소 새로운 창조의 예술로 인정된다고 할 것입니다.
어느 분야라도 가장 중요시 되는 건 그 분야의 정신이 함유된 기본기를 충실히 익혀야만 새로운 재창조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이며, 본질을 외면하고 모양만 흉내 내어 새로움의 창조라고 주장한다면 그 생명은 오래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속이는 결과만 초래할 것입니다. 예술의 생명은 俗氣(속기)를 없애는 것이며 俗氣를 탈피하는 길은 전통을 익히고 자신의 역량에 따라 재창조의 길로 나아갈 때 脫俗(탈속)의 예술세계를 개척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達筆(달필)의 서예가의 길보다는 善筆(선필)의 예술가가 되어야 하며, 기본기를 외면하고 겉포장만 화려하게 꾸며 대중들의 눈을 속이는 예술가는 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면 역사 속에서 진리는 남게 됩니다. 참다운 예술가의 길은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만 하는지를 본인만이 결정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예술은 전통의 바탕에서 재창조의 정신이 함유된 예술의 세계로 펼쳐 나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술가라는 이름을 얻게 될 것입니다.
현대서예라는 이름아래 기본기 없는 작품이 남발하는 것을 보며 안타까워....
(우남생각) <2011/06/02/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