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증 태우기를 타울거리자
2008년 7월 최영수 소장
폭염이 대단하다.
8월은 우리말로 ‘타오름’이라는데…
갈증으로 목이 타오르고, 공기의 목마름으로 더위가 타오르고…
물‘한 모금’이 소중함으로 애닯고, 바람 ‘한 줄기’가 반가움으로 그리워진다. 아무렴, 8월은 풍요로운 가을을 맞이하기 위해서 무리할 수밖에 없는 달인 것 같다. 이러한 무리 덕에 우리 인간은 스스로를 시험할 수 있었고 나아가 자신들의 한계를 익힐 수 있었고 그러기에 지혜를 짜낼 수 있었을 테고 그 덕으로 오늘날과 같은 문명을 누리는게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지금은 결사적으로 자신의 한계와 씨름을 해야 하네.
신문을 펼치면 다양한 절규들이 많다. 그 절규들 앞에서 우리들이 하는 일은 대부분 ‘옳다’ 아니면 ‘그르다’로 목청을 돋운다. 그럴 때면 마치 많은 사회문제들이 객관식문제풀이로 쉽게 해결점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아니 절대적으로 옳다고, 만점짜리 해결책인 양, 정해놓은 정답이 있다고 확신하는 대단한 신념을 가진 우리들이 마치 절대 권력자들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 우리들은 마치 휘두를 권리만을 가지고 태어난 듯이 여겨진다. 또한, 다수의 침묵하는 의무 이행자들의 우유부단함이 그런 우리들을 부추기며 뒤에 숨은 탓으로도 여겨진다.
오늘날 인터넷으로 고속정보화시대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O 아니면 X다. 이분법적 사고는 6‧70년대를 살아온 우리들이 부모로부터 배우고 익힌 것인데…지금은 직업도 2만여 가지로 다양하다. 그 다양성에 따른 다양한 선택에 따른 실천을 하기엔 우리의 정보가 너무 많아 식자우환지경으로 용기를 내기가 어려운 것인지…너무나 안타깝다.
세상 어디에도 어떤 선택을 하여도 그 선택으로 인해 아픈 집단은 반드시 있다고 여겨지니 더 더욱 안타깝다.
정녕, 최선의 답, 최소화한 아픔은 만물의 영장인 우리가 수월하게 얻지 못하고 계속 힘의 영역에 머물게 두어야만 하는 것인지 서로에게 자문하는 시간들을 이 여름, 타는 더위에 누렸으면 한다.
부모들은 자녀에게, 선생님들은 제자에게 열심히 가르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본을 보이는 것에는 등한하다. 그들은 대부분 그들이 구한 최선의 답을 정답이라고 열심히 어린 사람들에게 강요하듯 들이댄다. 한편, 어린 사람들은 미성숙한지라 어른들의 가르침대로 일반적 진리를 따르기 위해 치러야 되는 지독한 믿음과 엄청난 실천에 대한 두려움으로 용기조차 낼 수 없는 사람들임을 간과 당한다.
사실, 그들 대부분은 어린이들에게 자신들의 모습을 오버랩 시켜 놓고 그들이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은 덮은 채 그들만이 가진 권위로써 일반적 진리요, 절대적 진실이라고 마구 설파하는 부분도 상당하다.
이렇게 어린 사람들은 그렇게 권리주장 하는 법을 익히고, 큰 목소리에 굴하는 어른들의 모습에서 통함을 배운다. 그래서 우리들 대부분은 의무이행보다는 권리주장으로 목소리를 틔우는 일에 더 능해진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부드러운 물 한 방울이 주춧돌에 구멍을 낸다는 것을 진리라고 서슴없이 말 할 사람들은 부지기수 일텐데…이 사회 어느 곳도 부드러움의 실천으로 문제에 다가가고자 하는 모습이 안 보인다. 부드러움의 실천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따뜻함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 모두 자신의 손(손등+손바닥)을 보자.
우리의 권리 의무도 손과 같다고 본다.
그래서 권리도 의무도 그 키 높이가 손처럼 맞닿아야 된다고 믿는다.
이제, 내 한계속의 절망과 분노를 땀으로 짜내자.
그래, 우리 자녀들의 보다 큰 행복을 생각하면서.
그리고 저마다 모두 타오름을 타울거리는 촛불이 되자.
그렇게 목마름이 내는 저마다의 분노를 먼저 활활 태우자.
그리고 그 재로 저마다의 풍성한 따뜻함의 의무이행잔치를 먼저 준비하자. <행가래로 7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