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해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던 것 같다.
시어머니와 가끔, 대구역에서 만나 점심도 먹고 쇼핑도 하곤 했었다.
그 때마다 어머니는 빛바랜 보따리를 싸 들고 나오셨는데 어느 날은 비닐끈으로 묶은 계란판을, 또 어떤 때는 양파망에 햇마늘을 눌러 담아 오신 적도 있었다.
정말이지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모처럼 원피스 입고 빼딱구두를 신었는데 이걸 어째야 할까...
그 때마다 어머니는“와카노, 가꼬가서 해 묵으면 되지.” 하신다.
사실, 이제사 털어놓지만 그 때 그 마늘자루는 지하도 식당 옆에 살짝 놓고 돌아선 적도 있다.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은 알겠는데 그 놈의 계란판 사건 때문이었다.
주말이라 무궁화호 좌석도 없고 바닥에 놓기도 그래서 들고 있었는데 그만, 계란 하나가 열차바닥에 툭 떨어져 버린 것이다. 그 다음 일은 말하기도 싫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전화기를 붙들고 “웬 계란이냐, 제발 좀 다음엔 그냥 나오세요.” 했더니 노인들 불러 모아 안마기 파는데 갔었는데 공짜로 얻어왔다고 하신다.
아무것도 줄게 없어 손자 주려고 아꼈다 하시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자기 이름 석 자도 모르고 한평생 가난하게 산 시어머니 사랑이 분명했다.
어느새 그 시간들이 훌쩍 지나 어머니도 아흔이 다 되셨다.
맨날 살갑게 대하지 못한 며느리라 이맘때가 되면 괜히 짠해진다.
‘어버이 살아계실 제 섬김을 다 하여라. 지나간 후에 애닳다 어찌하리.’라고 정철은 말했었는데...
퇴근길에 색종이 한 묶음을 사서 카네이션을 만들었다.
한 송이는 낳아주신 어머니, 또 한 송이는 시어머니, 그리고 마지막 한 송이는 아버지의 둘째 부인인 작은 어머니 것이다.
딸 하나 낳고 소박맞을 뻔한 엄마가 쫓겨나지 않으려고 둘째 엄마를 집으로 모셨고, 스무 살 갓 넘긴 젊은 엄마는 아들 둘을 순풍 낳았다.
근데 그만, 아이들이 국민학교 입학도 하기 전에 아버지는 고혈압으로 돌아가시고 말았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 했던가.’
세상이 모두 드라마와 같다.
그 젊은 엄마는 가진 것도 없이 어린 동생 둘을 데리고 억척같이 살으셨지.
지금은 모두가 옛일이니 밉고 고운일 온데간데없고 두 어머니는 언니 동생처럼 잘도 지낸다.
엊그제는 식당에서 설거지하고 번 물 묻은 만 원권을 손자 용돈 하라며 삼십 장을 가져 오셨다.
항상 코끝을 찡하게 만드시는 분이다.
어버이날이다. 세 분 어머니들의 날이다.
나도 새끼를 길러보니 자식은 그냥 크는 게 아니라 어미의 애간장을 끓인 만큼 자란다는 걸 알았다.
올해는 세 분 모시고 직지사 쪽으로 살살 드라이브한 다음 씹기 좋은 음식으로 모셔야겠다. 지팡이도 싣고 휠체어도 실어야 하니 찬찬히 해 보리라.
내년, 또 내년 오래오래 내 곁에 있어주기만 한다면 더 할 나위 없을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