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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아웃도어 시장의 최강자' 성기학 영원무역·골드윈코리아 회장 | |
"남들이 하기 싫은걸 한 덕에… 올 매출 1조원 넘을 듯"
전세계 직원 5만5000여명… 직원 뽑을 때 세 가지 봐요…
첫째 담배 피우지 말 것… 둘째 영어 잘해야 할 것… 셋째 정직해야 할 것
35년간 적자낸 적 없어… 새털처럼 가볍게 날다
美軍야전점퍼에 군화 신고… 1967년 설악산 올라갔더니… 다운재킷 입은 日本人등장…
모두가 부러워서 "와~"… 그후 40년… 모두 날보고 "와"
1967년 설악산 추위는 매서웠다. 그곳에서 서울대 상대 산악부가 동계훈련을 하고 있었다. 설악동~양폭산장~대청봉을 4박5일간 도는 코스였다. 무역학과 2학년생 성기학(成耆鶴·62·영원무역·골드윈코리아 회장)도 그 속에 있었다.
장비(裝備)가 형편없던 시절이다. 등짐 지고 산을 오르다 보면 묵직한 미군 야전 점퍼와 군화 속에 땀이 흥건하게 괬다. 대학생들이 불도 잘 붙지 않는 휘발유 버너와 씨름하고 있을 때 맞은편에 일본 등반팀이 나타났다.
그들은 새털 같은 다운 재킷 차림이었다. 처음 보는 옷이었다. 속에는 얇은 내의만 입고 있었다. 석유 버너는 강풍 속에서도 금세 강력한 화력을 뿜어댔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부러움 섞인 신음이 터졌다. '오~!'
42년이 지난 지금 성기학은 아웃도어 업계의 황제(皇帝)가 됐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 그 누구도 얕잡아볼 수 없는 강자(强者)가 된 것이다. 올 예상 매출은 1조1000억원, 국내 시장 규모(2조)의 절반을 넘는다.
18일 저녁 서울 중구 만리동 영원무역 전시장에 들어섰을 때였다. 직원들에게 뭔가를 훈시하는 그가 보였다.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한참 구경하다 인사를 건네자 "3분만 기다려주겠느냐"고 하더니 옆방으로 사라졌다.
혈당 관리를 위해 배달시켜 온 칼국수를 진짜 3분 만에 해치우고 온 그는 입맛을 다시며 기자의 낡은 점퍼를 후식(後食)인 양 바라봤다. '아닌 거 같은데?….' 혼자 중얼대더니 마침내 궁금해 못 견디겠다는 표정으로 변했다.
"그 옷 이리 줘 보세요." 점퍼를 받아든 그가 안감에 콧김을 휙 뿜자 '삑' 소리가 났다. "역시, 우리 게 아니네. 안감에 방수(防水) 처리하면 안 되는데. 세탁해도 잘 안 마르거든요. 땀도 잘 배출되지 않고. 음~ 그럴 줄 알았어."
독수리같이 매서운 눈이 다시 청색 남방으로 향했다. "어깨선이 쭈글쭈글한 게 워시드 가먼트(washed garment)구먼. 잘 만들어진 옷은 아닙니다. 뭐, 편하긴 하겠지만." 멀뚱멀뚱하다 순식간에 무장을 해제당한 느낌이 들었다.
■유전자
사업은 성기학에게 운명이었다. 아버지(成在景·81년 작고)는 고향 경남 창녕에 넓은 땅을 가지고 있었다. 농산물 가공업체 '협성농산'과 대성출판사도 그의 소유였다. 아버지는 네 아들이 어릴 때부터 노동의 '맛'을 가르쳤다.
한 해 수확이 끝나면 분배가 이뤄졌다. 아버지는 10대 중반이었던 둘째 기학에게 5만원을 줬다. "사람은 돈도 쓸 줄 알아야 해. 안 써보다 돈 생기면 쓸 줄도 모른다." 서울 미아리의 집 한 채 값이 10만원 하던 시절이었다.
―그 돈으로 뭘 했습니까.
"당시 라이카 카메라 한 대가 제일 비쌌어요. 그것 대신 독일제 콘탁스 카메라를 샀지요. 제가 고1 때였어요. (직원이 가져온 박스를 열더니) 이게 콘탁스 1954년 모델이지요. 제 나이와 비슷한 겁니다. 고교시절 썼던 것과 똑같은 모델을 얼마 전 충무로를 지나다 발견했어요."
―사진을 잘 찍습니까?
"잘 찍는 기술은 알지요. 누구처럼 대놓고 자랑은 안 하지만. 수집도 하고요."
―부친이 대단한 분이었던 모양입니다.
"굉장히 과묵한 어른이었습니다만 가르칠 건 정확히 가르쳐 주셨어요. 술도 아버지께 배웠어요. 제사 지낼 때면 한 잔씩 건넸고, 심부름 다녀오면 다시 한 잔을 권하는 식이었지요. 지금은 끊었지만 한때 위스키 한 병 정도는 거뜬했습니다."
―부친이 창녕에 처음 양파를 재배했지요.
"지금 전남 무안과 경남 창녕이 서로 첫 양파 재배지라고 다투지만…, 그때 양파는 기른 곳이 없었어요. 양파도 그냥 키운 게 아닙니다. 안목이 있었지요. '먹으려고 농산물을 재배하면 장래가 없다, 환금(換金)작물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농촌에서 주민들이 서로 도와 함께 잘살자는 경화회(耕和會)도 조직했어요. 새마을운동의 전신(前身) 격인데 지금도 있습니다."
―대학 졸업 후 1년 반 동안 회사원 생활을 했지요.
"서울통상이라고, 지금 서통의 모기업입니다."
―왜 대기업을 택하지 않고….
"그때 우리나라에서 제일 수출 많이 하는 기업은 삼성도, 현대도, 럭키도 아니었습니다. 1등이 동명목재, 2등이 서울통상이었습니다. 가발과 스웨터를 주로 수출했어요. 제가 입사할 때 한 해 수출액이 2700만달러쯤 됐습니다."
―그곳에선 뭘 했나요.
"제 담당이 스웨덴을 비롯한 유럽 쪽에 스웨터를 수출하는 것이었습니다. 보통 한 번에 12만벌쯤 선적했지요. 미국 시장은 더 컸고요."
―아버지께 배운 사업 수완을 발휘했나요.
"바이어 8명이 내한한 적이 있어요. 사장이 신입사원인 제게 접대비로 쓰라며 10만원을 건넸습니다. 제 월급이 3만원 할 땝니다. 믿지 않으면 그렇게 큰돈을 건넬 리 있겠어요? 입사한 지 몇 달 안 돼 스톡홀름 출장 기회를 얻기도 했어요. 선배에게 양보하긴 했지만, 당시 외국 나가는 게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제가 낸 서류는 보지도 않고 결재를 해줄 정도였지요."
―어떻게 했기에 그리 귀여움을 받은 겁니까.
"저는 새벽에 공항에 나가 화물을 전부 찾아왔어요. 그러고도 출근시간 30분 전에 회사에 나오지요. 업무시간 중에는 선배들 일을 돕습니다. 남들이 다 퇴근하는 저녁 7시가 돼서야 제 일을 하는 식이죠. 할 일 다하고 선배들까지 도우니 누가 싫어하겠어요."
―요즘 기업 분위기와는 많이 다릅니다.
"저는 어렸을 적부터 농장에서 이미 사람들을 다뤄봤어요. 서울통상에서도 '내가 사장이다'라는 기분으로 일했습니다. 그래야 신도 나잖아요."
―실수를 한 적은 없나요.
"제 실수는 아니지만 컨테이너 11개에 수출 물량을 전부 실어 놓았을 때 일이 기억납니다. 여인숙에서 며칠을 자고 한 일인데, 당시 메리야스 검사소라는 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합격증을 못 받아 선적을 못했어요. 회사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제가 나서서 바이어에게 텔렉스를 보냈습니다. 텔렉스는 문자로 서로 대화하는 양방향(兩方向) 통신기계입니다. 사정을 설명하고 '다음 배에 싣겠다'고 하니 양해해 주더군요."
■자립
서울통상을 그만둔 성기학은 독일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혈관 속에 박힌 '사업'이라는 유전자가 그를 그냥 놔둘 리 없었다. 서울통상에서 업무상 알고 지내던 스웨덴 바이어가 이런 부탁을 해오는 것이었다.
'한국 에이전트와 일을 하려는데 아무래도 불안하니 도와달라!' 6개월간 일을 돕다 내친김에 회사를 차리기로 했다. 그 에이전트 및 그 친구와의 3자 동업이었다. 세(貰)로 얻은 용산구 이촌동 렉스맨션 두 채에서였다.
―첫 회사는 이름이 뭡니까.
"영창진흥이었는데 6개월 뒤 개명(改名)했지요."
―영원무역이 '포에버(forver)'라는 뜻의 영원(永遠)인 줄만 알았습니다.
"당시 클리프 리처드의 '디 영 원스(The Young Ones)'라는 팝송이 유행했어요. 즉석에서 영원이라고 정했는데 한자가 너무 복잡한 것 같아 '으뜸 원' 자를 따서 '永元'이라고 지은 겁니다. 나중에 영문에서 s도 빼버렸습니다."
―동업했을 때 직함이 뭐였나요.
"파트너 앤 디렉터라는 직함을 가졌지요. 그래 봤자 파트너 3명에 직원 4명 합쳐 7명으로 시작한 회삽니다."
―1984년에 영원무역의 오너가 됐지요.
"사업을 하다 보니 동업자들 간에 티격태격하는 일이 자주 있었어요. 제가 투자한 만큼 현금으로 돌려받고 손을 떼려 했지요. 그 돈으로 회사를 만들 생각이었습니다. 아버지도 '동업은 아무리 좋은 사이라도 힘든 건데…' 하고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어떻게?
"얼마 뒤 동업자 2명이 생각을 바꿨습니다. 자기들이 현금으로 정산받을 테니 저보고 회사를 인수하라더군요."
―인상 쓰고 결별했습니까.
"저보다 9~10살 많은 선배들인데 얼굴을 붉히고 헤어진 건 아닙니다. 두 분 다 좋은 분들입니다. 지금은 은퇴하셨지요."
―초기 사업도 전부 섬유 수출이었나요?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을 했지요. 나이키, 폴로 같은 유명 브랜드의 주문을 받아 생산해 주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 같고는 안 돼요. 당시 우리는 섬유 쿼터가 없었거든요."
―수출 물량에 제한을 두는 게 섬유 쿼터지요?
"쿼터는 실적에 따라 바뀝니다. 어떤 면으로 보면 제한을 두는 것이고 다른 면으로 보면 그만큼 수출이 보장된다는 뜻도 됩니다. 대단한 특혜 같지만 거기 안주하면 독(毒)이 될 수도 있어요. 신제품 개발을 소홀히 할 수 있고 도전 정신도 사라집니다. 저는 후발주자니까 다운웨어나 스키웨어, 이런 걸 다뤘습니다."
―보통 스웨터보다 그게 더 고가(高價) 아닌가요.
"이익은 패딩 점퍼가 훨씬 더 많이 나지요. 큰 기업들은 오리 털(duck down) 다루는 걸 꺼립니다. 오리털 만지는 게 지저분해 보이잖아요. 하지만 남들이 하기 싫은 걸 할 때 기회가 오는 겁니다. 그게 인생이지요."
―어떤 기회가 왔는데요.
"지금 노스페이스 다운 점퍼가 10대 청소년부터 40~50대 중장년층에게 방한용(防寒用)으로 최고 인기입니다. 11월이면 항상 사이즈가 품절되지요. 그 노하우가 바로 30년 전 시작된 겁니다."
―오리도 많이 잡았겠군요.
"아니요, 오리털은 전부 미국에서 수입했지요."
■도약
영원무역의 오너가 된 후 성기학은 아웃도어 시장에 눈을 돌렸다. 1984~85년의 일이다. 국내에 아웃도어라는 용어 자체가 생소했던 시절이다. 그때 선진국에서는 이미 아웃도어 용품의 열풍(熱風)이 불기 시작했다.
'섬유산업=사양(斜陽)산업'으로 여겨지던 때였다. 하지만 성기학은 이 블루오션에 몸을 담그기로 결정했고, 지금의 영원무역은 그때 그 결정으로 탈바꿈했다. 세계시장의 움직임을 간파하는 건 그만큼 중요하다.
―시장의 추이(推移)를 어떻게 압니까.
"바이어라고 다 같은 바이어가 아닙니다. 허섭스레기 같은 바이어가 있는 반면 업계의 지도층으로 구성된 고급 바이어도 있습니다. 고급바이어들은 윤리의식이 높아요. 친해 놓으면 최고 정보가 저절로 들어오지요."
―허섭스레기 같은 바이어는 어떻게 판별하나요?
"하는 수작을 보면 알 수 있지요. 경험이 쌓이면 눈에 보입니다."
―아웃도어 시장에 진입하면서 새 제품들을 많이 내놓았지요.
"다운웨어, 스키웨어도 그렇지만 방수복, 고어텍스, 쿨맥스 같은 제품들도 제가 국내에 제일 먼저 소개했거나 직접 개발했지요. 아웃도어뿐 아니라 모든 시장(市場)이 마찬가지예요. 성숙하기 전의 이익이 가장 큰 법입니다. 너도나도 뛰어들면 이익이 줄어들지요."
―아무래도 영원무역을 이야기하면서 노스페이스를 떼어놓을 수 없지요. 노스페이스가 한때 국산(國産)인 줄 알았습니다.
"노스페이스는 1968년 미국에서 탄생했습니다. 국내에 소개된 건 1997년입니다. 등반가가 오르기 힘든 북반구(北半球)에 있는 산의 북쪽 면을 지칭합니다. 알프스의 아이거, 마터호른, 그랑조라스를 뜻하기도 합니다. 로고 옆에 있는 하프 돔은 정통주의, 제일주의, 혁신주의, 과학기술주의를 뜻합니다."
―1968년 만들어진 회사 제품을 국내에 소개하는 데 왜 30년이 걸렸나요.
"우여곡절이 있었어요. 당시 홍콩에 오딧세이라고 우리 경쟁사가 있었는데 노스페이스 납품을 그 회사가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딧세이가 망한 겁니다. 그 라이선스를 일본의 골드윈이 사들였지요. 제가 일본 골드윈과 합작으로 골드윈코리아를 만들어 비로소 국내에 소개할 수 있게 됐지요."
―일각에선 영원무역이 노스페이스 브랜드를 이용하면서 로열티만 갖다 바친다는 시각도 있습니다만.
"그건 경쟁업체들의 마타도어구요, 우리가 만든 전 세계 노스페이스 물량이 40%입니다. 어마어마하지요. 방글라데시, 중국, 베트남, 엘살바도르 공장에서 생산합니다. 하도 음해가 많아 얼마 전 아예 2022년까지 브랜드 계약을 갱신했습니다. 계약서 내용은 하나도 바뀐 게 없어요."
―어디서 만든 제품의 품질이 가장 좋습니까.
"다 비슷하지만 아무래도 한국에서 만든 게 제일 나을 겁니다."
―어떤 분이 등산용품을 장만하다 보니 100만원이 훌쩍 넘었답니다. 그러자 매장직원이 와 '혹시 히말라야에 가느냐'고 묻더래요. 청계산이라고 하자 직원이 '그럼 이런 것들은 살 필요가 없다'고 했답니다. 많은 걸 시사하는 일화(逸話) 아닌가요.
"하하, 그렇지요. 꼭 비싸다고 제품의 품질이 최고인 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왜 고객들이 최고를 찾을까를 깊이 생각해봐야지요. 그건 취향이거든요.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은 최고로 사고 싶다'는 건 인정해야지요. 예를 들어 같은 백금 반지라도 '까르띠에'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면 가격 차가 3배 이상도 날 수 있겠지요. 선택의 문제입니다."
―그럼 성 회장은 모두 노스페이스 제품만 입나요?
"대장장이 집에 식칼 없다는 말 있지요? 저는 다른 브랜드도 자주 입습니다. 그래야 경쟁 상품의 질을 알 수 있잖아요."
―왜 사람들은 섬유산업을 사양산업이라고 할까요.
"단견(短見)입니다. 섬유산업은 노동비용의 비중이 높습니다. 인건비가 높은 한국에선 견딜 수 없지만 방글라데시 같은 나라에선 정반댑니다. 떠오르는 유망산업이지요. 부가가치가 높고 패션감각이 뛰어난데도 사양산업일까요? 그런 걸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섬유산업은 한물갔다'는 식의 오류를 범하는 거지요."
―전 세계에 고용하고 있는 직원이 얼마나 됩니까.
"5만5000명쯤 될 겁니다. 한국의 직원은 600~700명 정도고요."
■비결
성기학은 사업을 시작한 지 35년 동안 한해도 적자(赤字)를 낸 적이 없다. 다른 기업들이 픽픽 쓰러진 IMF 외환위기 때도 영원무역은 휘파람을 불었다. 경기가 안 좋았다는 지난해도 영원무역은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그는 낮은 부채(負債)와 투기를 금하는 게 비결이라고 했다. '교과서 위주로 예습·복습만 했다'는 대학 수석 합격자들의 허망한 말이 있다. 그렇지만 기본에 충실한 경영이야말로 최고의 위기 대응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진짜 위기가 한 번도 없었습니까.
"몇번 있긴 했지요. 1983년 파트너들끼리 다툼이 잦아졌을 때하고 1988년 서울올림픽 끝난 뒵니다."
―올림픽이 끝나고는 왜?
"사람들의 기대치가 한없이 높아졌잖아요. 잠시 주춤했습니다."
―가장 아찔했던 때는요.
"아무래도 1991년이지요. 그 해 4월에 방글라데시 치타공 공장에 해일(海溢)과 사이클론(인도양의 태풍)이 동시에 닥친 거예요. 바닷물을 막던 제방이 무너졌습니다. 전화를 받았는데 세운 지 넉 달밖에 안된 공장이 모조리 물에 잠겼다는 겁니다. 순간적으로 멍해지더군요. 애써 만들어놓은 옷 30만장을 다 버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나흘 만에 현지에 도착해 보니 공장 전체에 흙더미가 가득했어요. 그때 놀란 건 방글라데시 근로자들의 자세였어요. 공장이 문을 닫거나 철수하면 바로 자기들 생존의 문제가 되잖아요. 쓸고 닦고 기계는 분해해서 재조립하고, 그러면서도 한쪽에서는 생산하고….그렇게 열심히 하다 보니 한 달 반 만에 다 복구가 됐어요. 그 덕분인지 주문 취소율이 3%밖에 안됐습니다."
―사업 자체가 투기인데 왜 투기는 안된다는 겁니까.
"그렇다면 사업에서 충분히 스릴을 느낄 수 있는데 왜 다른 데서 또 스릴을 느껴야 할까요? 저는 도박에 손을 대본 적이 없어요. 주식도 우리 회사 것 말고는 사본 적이 없습니다. 부동산도 사기만 했지 판 적은 없어요."
―그런데 경남 창녕의 성씨 고가(古家) 30채는 왜 복원한 겁니까.
"아, 그건 저희가 살던 집 15채에 6·25 때 불탄 집 15채를 복원한 겁니다. 1997년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고향에 가보고 싶다고 했어요. 저는 고향이 창녕이긴 하지만 서울에서 태어났고 1·4후퇴 때 빼고는 서울에서 자랐습니다. 그런데 가보니 안 되겠더라고요. 그때부터 고가들을 해체한 뒤 재조립했지요. 지방자치단체가 할 일을 제가 한 것뿐입니다. 관광명소도 되고, 아이들 소풍도 오고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까 보니 직원들을 혼내는 것 같은데…, 직원 선발 기준이 있나요.
"아, 혼낸 거 아니에요. 제가 목소리가 좀 큽니다. 직원을 뽑을 때 세 가지를 봅니다. 첫째 담배를 피우지 말 것, 둘째 영어를 잘 해야 할 것, 셋째 정직해야 할 것입니다. 한때 저도 피웠지요. 그런데 담배 피우면 남에게 피해를 많이 주잖아요. 문 부장 같은 애연가(愛煙家)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섬유업에서 오너의 역할은 어떤 걸까요.
"전 섬유업에는 오너십이 강해야 한다고 봅니다. 의사결정을 신속히 해야 할 때가 많지요. 대기업들이 섬유업에서 손을 떼는 건 그런 이유도 있어요. 그런데 우리 회사는 섬유만 만드는 게 아닙니다."
―아! 그렇습니까?
"유럽에서 가장 인기있는 하이킹화(靴)가 '데카트론'이라는 건데 우리가 만듭니다. 연간 280만 켤레에서 300만 켤레 정도 생산하지요. 3~4만원쯤 하는 저가 브랜드인데 품질은 최곱니다. 신발뿐 아니라 백팩, 니트웨어도 만듭니다. 한마디로 섬유 패션 유통을 아우르고 있지요."
―언젠가 Why? 지면에 아웃도어 업체와 유명 등반가의 관계에 관한 기사를 쓴 적이 있습니다.
"우리도 박영석·김자인·신윤선 같은 등반가를 후원합니다. 매출신장을 노리고 한 건 아니고 도와주다 보니 16명이 됐어요. 전 등반하는 데 딱 한 번 가봤어요. 작년에 박영석이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반할 때 카트만두까지 간 적이 있습니다."
―요즘 아웃도어 브랜드가 상당히 많이 늘어났습니다.
"고객들의 선택의 폭이 늘어난 건 고무적이지요. 하지만 꼴뚜기가 뛰는 식이면 곤란합니다. 가치 있는 브랜드가 늘어나야지요."
처음 회사를 차렸을 때 그는 한해 80만달러어치를 수출했다. 그때 꿈이 500만 달러였다고 한다. 목표는 불과 4년 만에 달성됐다. 올해 그의 회사는 6억달러어치를 수출한다. 어마어마한 성장이다.
그는 지금까지 국내와 북한, 몽골, 크로아티아, 아프가니스탄 어린이들에게 점퍼 300만장을 선물했다. 남는 원단을 이용한 것이었다. '노블리스…'라는 말을 꺼내자 그가 막았다. "어휴, 그런 소리 들으려고 하는 거 아닙니다."